|
한글운동 길에서 만난 나와 김동길 교수님 | |
[추모] 우리말 소중히 여긴 지식인, 한글탄압 때마다 적극 나선 고마운 분 | |
|
그때 김동길 교수가 쓴 글을 공병우 박사가 미국에 있을 때에 읽고 공감했다며 내게 그 글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37년 전에 쓴 이 글은 오늘날 증명되고 있다. 세계 곳곳에 한글학교와 세종학당이 생기고 한류바람을 타고 세계 젊은이들이 한글을 배우고 좋아한다. 김동길 교수는 앞을 내다볼 줄 아는 분이었다. 그런데 공 박사는 1990년에 내가 동아일보에 쓴 “초등학교 한자교육 반대”와 한겨레신문에 쓴 “한글날 공휴일 제외 반대”글도 김동길 교수와 다른 많은 분들에게 복사해 우편으로 보냈는데 그때 김동길 교수도 내 글을 보고 나를 알게 되고 나를 믿게 되었다. 당신 생각과 같았고 당신이 하고 싶은 한글운동을 내가 하고 있다며 고마워하셨다. 그러니 나와 김동길 교수가 서로 알게 된 것은 서로 신문에 쓴 글을 통해서였고 공병우 박사가 알게 해주었고, 만나게 해준 것이다.
2. 노재봉 국무총리를 검찰에 고발할 때 용기를 주시다.
1990년 노태우 정부는 한글날을 공휴일에서 뺐다. 이 일은 노태우 정부가 김종필, 김영삼과 손을 잡고 한글을 짓밟으려고 나선 첫 못된 짓이었다. 나는 그걸 막으려고 애썼지만 막지 못했다. 그러나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래서 노재봉 국무총리와 최병렬 노동부장관을 한글전용법과 직무유기로 검찰에 고발해 한글을 우습게 보는 이들을 혼내주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내가 모시고 함께 한글운동을 하던 허웅 한글학회 회장에게 그 뜻을 말하니 “너는 이제 한글운동 선봉장이다. 네가 잘못되면 안 된다.”고 하셔서 공병우 박사께 말씀드리니 마찬가지 반대했다. 한글기계화운동을 할 때에 정부 정책을 비판한다고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통을 받은 일이 있기에 군사정권은 죄를 만들어서 보복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을 그냥 둘 수 없어서 김동길 교수에게 “허웅 회장과 공병우 박사는 반대를 하는데 이번 기회에 한글이 살아야 우리 겨레가 산다는 것을 정치인과 공무원들에게 알려주려고 국무총리를 검찰에 고발하려고 하는 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편지로 내 뜻을 밝혔더니 나라를 위하는 일인데 겁내지 말고 하라고 바로 답장을 주셔서 이들을 검찰에 고발해서 앞으로 한글전용법을 잘 지키겠다는 다짐과 약속을 받고 고발을 취하해준 일이 있다. 그때 나는 김동길 교수를 더 믿고 좋아하게 되었고 고맙게 생각했는데 그 일로 김 교수도 나를 남다른 젊은이로 보았고 더욱 믿게 되었다. 그 편지는 1965년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김윤경 교수와 편지를 주고받고 한글운동하기로 굳게 다짐했을 때처럼 큰 감동을 주었다.
3. 조선일보가 하는 못된 짓을 막는 일에 김동길 교수를 모시다.
내가 김동길 교수를 직접 만난 것은 1994년 한글문화단체모두모임(회장 안호상)에서 조선일보가 그 신문 1면에 “아태시대 국제문자 한자를 배웁시다.”라는 제목으로 “일본처럼 우리도 초등학교에서부터 한자를 가르치고 한자혼용을 해야 한다.”라는 주장을 15회 째나 연재하고 있어 한글단체가 그걸 막으려고 동숭동 학술재단 강당에서 강연회를 할 때였다. 나는 그때 한글학자보다 김동길 교수와 백기완 선생을 모시고 그들 잘못을 혼내주자고 제안 그 두 분 모시는 책임을 맡았다. 그때까지 두 분을 만난 일이 없지만 우리가 하는 강연에 나서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김동길 교수는 국무총리를 검찰에 고발하면서 편지로 마음을 주고받았기 때문이고 백기완 선생도 내가 찾아가 부탁하면 들어줄 것으로 믿었다.
내 예상대로 김동길 교수는 바로 그 강연을 수락했는데 백기완 선생은 한글학회가 자신에게 강연을 부탁하는 것은 뜻밖이라면서 ”나는 정부나 조선일보 같은 자들이 잘못하는 것을 찍어내는 쌍 도끼다. 앞으로 네가 나와 함께 그들과 싸운다면 나서겠다.“라고 말하고 강연 요청을 들어주셨다. 백 선생도 신문에 쓴 내 글을 읽었고 내 이름을 기억했기에 함께 가기로 약속하니 들어준 것이다. 그때 조선일보를 규탄하는 강연은 두 분이 연사로 나오니 수백 명이 모였고 뜨거웠다. 그리고 조선일보는 그 뒤 바로 신문에 연재하는 것을 그만두었고 그 뒤 두 분은 나를 더욱 믿어주었고 나는 한글운동을 하면서 어려울 때마다 두 분과 의논하고 의지하게 되었다. 두 분이 있기에 한자파와 싸움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고 언제나 든든했다.
4.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대표들을 불러 격려금을 주시다.
나는 1998년에 이오덕 선생과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을 만들고 내가 제안해 해마다 한글날에 우리말 지킴이와 헤살꾼을 뽑아 발표하고 이오덕 선생이 중심이 되어 “우리말 우리얼”이라는 회보를 다달이 냈는데 그 회보를 한글학회와 문화부에도 보내면서 김동길 교수께도 보냈다. 그러던 2006년 봄 김동길 교수께서 내게 “우리말살리기모임 공동대표들에게 점심을 대접하고 싶으니 같이 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이오덕 선생은 돌아가신 뒤라 “김경희, 김수업, 김정섭, 이대로” 네 사람이 같이 댁으로 갔더니 집에서 만든 평양냉면과 만두를 차려주시고 은행에서 찾아온 새 돈 100만 원을 격려금으로 주셨다. 그리고 지난번 우리 회보가 왔을 때 당신께서 쓴 글이 실린 월간조선 잡지도 왔지만 그 책보다 우리 회보를 먼저 보았다고 하시며 우리 회보는 끝까지 다 읽는다고 하셨다.
우리모임을 사단법인으로 바꾸고 정부 보조도 받자는 이도 있었지만 이오덕 선생이 그렇게 되면 정부가 잘못하는 일을 바로잡지 못하고, 할 말을 제대로 못한다고 반대하셔서 지금까지 24년 째 회원 회비로만 내고 있다. 그래서 항상 살림이 어려운데 김동길 교수는 우리가 하는 일을 칭찬하고 격려금까지 주시니 참으로 고마웠다. 우리가 한글을 못살게 구는 김종필 총리와 한자단체를 우리말 훼방꾼으로 뽑아서 한자단체는 나를 명예훼손으로 고발한다고 할 때에도 한글학회와 또 다른 이들 그 누구도 나에게 힘내라고 격려한 이들이 없었다. 그런데 김동길 교수는 당신께서 하고 싶은 일을 우리가 해주니 고맙다며 우리 같은 이들이 있어 이 나라가 굴러가고 있다며 힘내라고 칭찬했다.
5. 내가 처음 낸 “우리말 독립운동 발자취”를 받고 기뻐하시다.
2008년 내가 중국 절강월수외대에 가서 한국말을 가르칠 때에 “우리말 독립운동 발자취”라는 책을 냈다. 오래 전부터 내고 싶은 책이었는데 한글운동을 한다고 바빠서 못 쓰다가 2005년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들고 국내에서 내가 할 만큼 했으니 외국에 우리말을 보급하는 일을 하자고 2007년에 중국 월수외대에 한국말을 가르치려고 혼자 가 있으니 시간이 있어 그 책을 쓰고 중국 국경절 연휴 때에 귀국해 출판기념회를 한 뒤에 귀국하려고 비행장에 가면서 내가 낸 책을 가지고 가 인사를 드렸다. 그때 내 책을 받아들고 “내가 쓰고 싶은 한글운동사를 이대로가 냈구나.”시며 고마워하고 기뻐하셨다. 그때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 시간 때문에 인사를 하고 바로 가려고 하니 잠깐 기다리라고 하시더니 당신께서 쓰던 만년필과 지갑을 주셨다.
그때 연세의료원에 근무하는 내 딸 차를 타고 갔는데 김 교수는 내 딸에게도 당신께서 쓰던 만년필과 선물을 주시면서 “아버지는 애국자다. 너도 훌륭한 의사가 되어 잘 모셔라.”라고 하셨다. 그때 중국으로 가는 비행기 시간이 촉박해 주시는 선물을 받아들고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비행기를 타고 나서 주신 지갑이 이상하게 두툼해서 열어보니 새로 나온 돈 100만 원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좋은 글을 많이 쓰고 계속 열심히 활동하라는 뜻으로 내 만년필을 준다.”라고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내가 한평생 한글운동을 하면서 무시만 당했는데 이렇게 나를 알아주고 믿어주고 칭찬을 해주는 분이 있다는 것에 가슴이 뭉클했다.
6. “걱정 마세요. 이대로가 하자는 대로만 하세요.”
김동길 교수는 생일이 한글날 즈음인데 생일마다 가까운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평양식 냉면과 만두를 대접한다. 나도 생신날이면 알려주셔서 가끔 찾아뵈었다. 그러던 2013년 한글학회 김종택 회장을 소개해주려고 함께 찾아갔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이 장세동 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함께 와서 복잡해 인사드릴 틈이 없었다. 그래서 이배용 전 이화여대 총장과 또 다른 분들과 인사를 하는 틈을 비집고 새 한글학회 회장을 소개했다. 한글학회 김종택 회장이 “한글학회 회장이란 중책을 맡게 되어 걱정됩니다. 앞으로 잘 이끌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말하니 김동길 교수가 반갑게 맞으며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이대로가 있지 않아요. 이대로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틀림없습니다.”라고 말씀하시니 주위 사람들이 모두 나를 바라봤다.
남자는 저를 알아주고 믿어주는 사람에게 목숨도 바칠 수 있다고 했다. 김동길 교수는 나를 믿어주고 알아주는 분이다. 나는 김동길 교수의 제자도 아니고 아무런 인연이 없다. 그런데 한글운동에서만은 나를 믿으시고 밀어주셨다. 당신께서 해야 할 일을 내가 하니 고맙다고 하시며 당신께서 도울 일이 있다면 언제고 말하라고 하셨다. 백기완 선생도 “자주 만나진 못해도 1년에 한번이라도 보자.”라고 하셨는데 김동길 교수도 그랬다. 전에 “네가 신세진 사람이나 고마운 사람이 있으면 내 집으로 데리고 오라.”라고 하셨기에 그 뒤 김종택 한글학회 회장과 함께 다시 가서 한자단체와 정부가 한글을 못살게 굴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논한 일이 있다. 그때 나는 김 회장이 고맙다고 말했는데 김종택 회장은 나를 ‘토사구팽’했다.
7. 세종대왕 나신 곳 성역화국민위원회 위원장으로 모시다.
2015년 시사중국어사 엄호열 회장이 도와주어서 세종대왕이 나신 곳을 찾아 국민 교육장 겸 민족자주문화 발전기지로 만들자고 “세종대왕나신곳찾기국민위원회”를 조직하면서 최기호 교수와 함께 찾아가 김동길 교수를 위원장으로 모셨다. 그날도 마침 김동길 교수 생일잔치가 있는 날이어서 손님이 많았다. 어쩔 수 없이 김동건 아나운서와 일본인 지한파 와다 하루키 교수들이 함께 만나고 계신데 무조건 그 방으로 들어가 인사를 하고 세종대왕모시는 모임을 만드는데 위원장을 맡아달라고 말씀드렸더니 함께 있던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하면서 “난 이대로가 하자는 일은 무조건 따릅니다.”라며 내 뜻대로 하라고 하셨다.
그러니 함께 있는 분들이 모두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출범식에 오셔서 인사말을 하시면서도 “이대로가 하는 일은 옳고 바른 일이기에 이대로가 하자는 일은 무조건 따른다.”고 말씀하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이 세상에서 나를 그렇게 믿고 인정하는 분이 있다는 것이 고맙고 행복했다. 그런데 그 때에 사람들이 성씨를 북한처럼 두음법칙을 지키지 않고 “류씨, 리씨”라고 쓰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셨다. 평소 1946년에 김일성 치하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부터 공산주의는 성공할 수 없다고 보았기에 북쪽과 북쪽을 추앙하는 이들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고 내게 들으라고 속마음을 밝힌 것이다. 그 점은 내 생각과 좀 달랐다. 성씨는 두음법칙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모르시고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코로나19가 유행을 해서 찾아뵙지 못하다가 지난해 건강이 좋지 않다고 하셔서 권재일 한글학회 회장과 김슬옹박사가 함께 찾아가 뵈었더니 “네 딸 은별이, 병원 일을 잘 하고 있느냐? 은별이가 보고 싶다.”고 하셔서 다시 함께 찾아뵙겠다고 했는데 딸이 바쁜데다가 요즘 미국 연수를 가서 찾아뵙지 못했다. 어쩌면 내 딸에게 공병우 박사처럼 당신이 돌아가시면 시신을 연세의료원에 기증하기로 했다는 말씀을 하고 공병우 박사처럼 훌륭한 의사가 되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날 찾아뵈었을 때에도 우리들에게 냉면과 만두를 차려주셨는데 김동길 박사는 제대로 안 드시고 우리만 바라보셨다. 아마 건강이 안 좋으셔서 그랬던 거 같다. 부디 하늘나라에서는 편안하시길 빌면서 김동길 박사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죽는 날까지 한글운동을 더 열심히 할 것을 다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