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5월 19일 “서울 디지털 포럼” 기조연설에 나선 美 엘고어 전 부통령의 한마디(아래 참고)가 이슈가 된 적이 있습니다.
독일의 쿠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고려의 금속활자가 일이십년도 아니고 무려 2백여년을 앞서며 독일 쿠텐베르크 금속활자 기술이 고려에서 전수된 것이라는 증언이 나왔는데도....
즉 금속활자 세계 1등은 한국인데 왜 적극적으로 홍보를 하여 정정을 하지 않는지 모를 일입니다. 아래 글을 읽어보시고 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노력을 희망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이런 사실을 보면 우릴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 “재들 나라는 바보들만 사나....세계 최고가 있으면 뭐하나...” 어휴 ~
--------------------------------------------------------------------- 고려의 금속활자는 독일의 쿠텐베르크 금속활자보다 무려 200여년이 앞선다! ---------------------------------------------------------------------
① 美 엘고어 전 부통령 발언내용 : “서울 디지털 포럼 2005. 5.19 기조연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 혁명은 커뮤니케이션 부문에서 인쇄술에 이어 세계에 주는 두 번째 선물이다" "서양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당시 교황 사절단이 한국을 방문한 이후 얻어온 기술이다" "(이러한 사실은) 스위스의 인쇄박물관에서 알게 된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할 때 교황의 사절단과 이야기했는데 그 사절단은 한국을 방문하고 여러가지 인쇄기술 기록을 가져온 구텐베르크의 친구였다"
* 관련기사 www.hani.co.kr ?http:>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35331.html
→ 엘고어가 이사실을 밝힌때가 2005년 5월 19일 인데 이후 반응이 별로 없다. 기가막힌 일 아닌가 ? 전 세계인들이 우리나라 금속활자가 세계최고라고 칭송하는데 정작 당사자인 우리는 먼말인지 모르고 “멍” 때리고 있다는 것이다.
→ 최근 청주시에서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 정도로는 안된다. 정부차원에서 활동해야 한다.
② 쿠텐베르크 금속활자 : 1455년, 1377년 제작된 고려 “직지”보다 78년 늦다.
독일 활판인쇄술의 창시자 요하네스 구텐베르크(Johannes Gutenberg)가 1455년 C. 후에리의 원조로 인쇄공장을 재건한 후 금속활자를 사용한 성경을 출판하는데 이를 쿠텐베르크 성경이라고 한다. 라틴어 역(譯)으로 36행 성경과 42행 성경이 있다.
→ 우리에게 배워가서 만들었는데 무슨 세계최초인가? 한심하다.
③ 고려의 금속활자 : 1200년대부터 존재. 1377년 제작된 “직지”가 쿠텐베르크 활자보다 78년 앞선다.
* 금속활자 : 놋쇠·납·무쇠 등을 녹여 부어 만든 활자. 일명 주자(鑄字)라고도 한다.
------------- * 1232년 이전 : 고려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 (→ 쿠텐 보다 223년 앞섬) -------------
이 책은 발문에 책을 찍게 된 사연을 밝히고 있는데, 몽골의 병화(兵禍)로 국도를 강화도로 옮긴 1232년(고종 19) 이전에 주자본(鑄字本)으로 찍었던 것을 1239년 강화도에서 책을 뒤집어 이것으로 목판(木板)을 새긴 다음 다시 찍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 1234년경 : 고려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 (→ 쿠텐 보다 221년 앞섬) -------------
책은 전하지 않으나, 1234년경 강화도에서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 28부를 찍었다고 한다. 이규보(李奎報)가 저술한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 채록된 “신서상정예문(新序詳定禮文)”의 발문에 “고금상정예문 50권을 주자(鑄字)로 인출(印出)하여 제사(諸司)에 분장(分掌)하게 하였다” 라고 적혀 있는 데서 알려지게 된 것이다.
------------- * l297∼1298년경 : “청량답순종심요법문(淸凉答順宗心要法門)” (→ 쿠텐 보다 157년 앞섬) -------------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남아 있는데, 그 한 면이 금속활자로 찍혀 있다. 이 책은 원나라의 별불화(別不花)가 자금을 대어 찍었기 때문에 이 금속활자의 인쇄술이 원나라로 흘러들어간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원나라의 왕정(王幀)이 쓴 “농서(農書)”에, “1313년경 놋쇠로 활자를 만들었으나, 실용화하지 못해 다시 목활자를 썼다”라는 기록이 이를 증빙한다.
이로 미루어 원나라 때는 서양사람들이 드나들고, 아라비아 사람들이 이를 본받아 카드를 활자로 찍었고, 그 후에 종이의 제조법과 더불어 서양으로 금속활자 인쇄술이 전해졌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 * 1347년경 : 삼장문선(三場文選) (→ 쿠텐 보다 108년 앞섬) - 한문수 선생님 자료제공 -------------
중국 원(元)나라가 주관한 국제 과거시험 준비 수험서였던 ‘삼장문선(三場文選)’에 사용된 활자가 고려시대의 활자라는 것.
1377년(고려 우왕 3년)에 간행된 현존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았던 ‘직지심경(直指心經)’보다 최대 30여 년 앞서 제작된 문서이다.
일찍이 미국의 저명한 인쇄문화 연구가 카터는 고려 말과 조선 초 무렵 ‘한국은 인쇄술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금속활자의 사용을 고도로 발전’시켜 중국에 ‘역수출’까지 했다고 지적하면서, 활자 인쇄가 고려로 부터 유럽에 전해졌을 개연성은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단종 즉위 년이었던 1452년 8월 23일 명륜당에서는 성균관 수재들과 중국 사신들이 경전에 대해 강론하며, 우리 활자로 간행된 ‘삼장문선’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조선일보 보도내용]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으로 공인받은 고려의 직지심경(=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1377년간)보다 30여년 앞선 고려의 금속활자본 '삼장문선'이 발견됐다. 1993년 1월 6일 상암문고가 "고려시대 서적원 간행의 '삼장문선'(원제 신간류편역거삼장대책)이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며 이 책을 공개했다. 출간연대는 1341년에서 1370년 사이로 '직지심경' 보다 짧게는 7년, 길게는 36년 앞서는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번에 확인된 고려 금속활자본의 활자들은 대-중-소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대자 본문에 소자 두줄로 주석을 달아 인쇄할 수 있는 완벽한 체제를 보여 주고 있다. 또한 활자와 체제외에도 내용이 구본은 고려본, 신본은 조선본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삼장문선'은 원나라에서 주관한 국제적인 과거시험(향시와 중서성 회시)의 대책문제를 뽑아 고시관의 비평을 곁들인 명답문집으로, 이 책에는 1314년에서 1335년까지의 출제가 들어있고 초간본은 1341년에 나왔다. 내용에 고려본인 구본은 경의를 표시하는 대두법을 사용, 원황제나 황실이 나오면 문장을 별행하고 있으나 조선본은 이를 무시, 출판국가가 다름을 확연하게 증거하고 있다.
------------- * 1377년 :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 쿠텐 보다 78년 앞섬) -------------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 이 책은 1377년(우왕 3) 충청도 청주(淸州) 밖의 흥덕사(興德寺)에서 주자(鑄字)한 금속활자로 찍은 것임을 발문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고려에는 서적점(書籍店:書籍院)이라는 중앙관서가 있어 주자(鑄字) ·인서(印書) 등을 관장하였는데, 중앙관서가 아닌 한 지방의 사찰에서 이런 금속활자를 만들어 인쇄하였다는 사실은 당시 서적점에서는 이미 금속활자에 의한 인쇄술이 상당히 발달하여, 지방의 사찰에까지 그 기술이 파급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직지는 백운화상이 75세였던 고려 공민왕 21(1372)년에 노안을 무릅쓰고, 선도(禪徒)들에게 선도(禪道)와 선관(禪觀)의 안목을 자각(自覺)케 하고자 함은 물론, 선풍(禪風)을 전등(傳燈)하여 법맥(法脈)을 계승케 하고자 저술한 것으로서, 그 제자 석찬과 달담이 비구니 묘덕의 시주를 받아 청주 흥덕사에서 1377년 7월에 금속활자로 인쇄하였다.
직지는 2001년 9월 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으로 등록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