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이 와도 이시영
가을이 와도
가을이 와도 분명한 사람들은
손 들어야 할 곳에서 분명하게 손을 들고
너무도 분명한 곳을 가리키며 망설임도 없이
분명한 코로 길을 건너가
다시는 돌아보지 않는다
돌아보는 것은 그들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번만 돌아다보라 분명한 자들이여
돌아온 가을은 그렇게 분명하지만은 않다
등 뒤로 빠져나간 어떤 가을은 벌판으로 가서
깨밭의 참새들을 털다가 쌍눈깔의 밭주인에게
뒷다리가 붙잡혀 몰매를 맞는다
가을이 와도 기교주의자들은
더욱 기교적으로 밥을 먹고 기교적인 파란 똥을 눈다
큰 입을 벌려
파란 똥은 이 시대의 최상의 아름다움이라고 떠들다
기교 최상의 잡지사에서 만나
밤이슬에 젖은 목을 잦혀
탄성을 지른다
그러나 기교주의자들이여 바라보아라
돌아온 가을은 그렇게 기교적이지만은 않다
그대들의 기교적인 웃음에 놀라
창 밖으로 뛰쳐나간 어떤 가을은
거리의 술꾼들이 던진 소주병에 머리를 얻어맞고
통금이 지나도 일어서지 못하고 피를 흘린다
만월, 창작과비평사, 1976
고개 이시영
고개
앞산길 첩첩 뒷산길 첩첩
돌아보면 정든 봉 첩첩
아재야 아재야 정갭이 아재야
지게목 떨어진다 한 가락 뽑아라
네 소리 아니고는 못 넘어가겠다
기러기떼 돌아 넘는 천황재 아홉 굽이
내 오늘 너를 묶어 이 고개 넘는다만
언제나 벗어나리,
가도 가도 서러운 머슴살이 우리 신세
청포꽃 되어 너는 어덕 아래 살짝 필래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훨훨 날래
한 주인을 벗어나면 또 다른 주인
한 세월 섬기고 나면 더 검은 세월
못 살아가겠다고 못 참겠다고 너도 울고 낫도 울고 쩌렁쩌렁 울었지만
오늘은 찬 바람에 봉두난발 날리며
말없이 너도 넘고 나도 넘는다
뭇새들 저러이 울어 예
차마 발 떨어지지 않는 느티목 고개,
묶인 너 부여안고 한 번 넘으면 그만인 아, 죽살잇 고개를
바람속으로, 창작과비평사, 1986
그리움 이시영
그리움&
두고 온 것들이 빛나는 때가 있다
빛나는 때를 위해 소금을 뿌리며
우리는 이 저녁을 떠돌고 있는가
사방을 둘러보아도
등불 하나 켜든 이 보이지 않고
등불 뒤에 속삭이며 밤을 지키는
발자국소리 들리지 않는다
잊혀진 목소리가 살아나는 때가 있다
잊혀진 한 목소리 잊혀진 다른 목소리의 끝을 찾아
목 메이게 부르짖다 잦아드는 때가 있다
잦아드는 외마디소리를 찾아 칼날 세우고
우리는 이 새벽길 숨가쁘게 넘고 있는가
하늘 올려보아도
함께 어둠 지새던 별 하나 눈뜨지 않는다
그래도 두고 온 것들은 빛나는가
빛을 뿜으면서 한 번은 되살아나는가
우리가 뿌린 소금들 반짝반짝 별빛이 되어
오던 길 환히 비춰주고 있으니
만월, 창작과비평사, 1976
기러기떼 이시영
기러기떼
기러기들 날아오른다
얼어붙은 찬 하늘 속으로 소리도 없이
싸움의 땅에서
초연이 걷히지 않는 땅에서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네 마리
바람 속에서 오늘 눈 감은 나의 형제들처럼
바람속으로, 창작과비평사, 1986
꽃 이시영
꽃&
호수에 빗방울 듣기니
수련 한 송이 반쯤 입을 열고
물 속을 내려다보다
하늘 향해 갑자기 불 같은 새하얀 고개를 들다
바람 속으로, 창작과비평사, 1986
나무에게 이시영
나무에게
어느 날 내게 바람 불어와
잎새들이 끄떡끄떡 하는구나
내가 네 발 밑에 오줌을 누고 돌아설 때
수많은 정다운 얼굴로 알은체를 하는구나
그러나 오늘은 돌아서자
수많은 오늘 같은 내일의 날이 지난 뒤
내가 불현듯 참다운 네가 되어 돌아오마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나의 노래 이시영
나의 노래&
마음으로 향한 눈을 갖고 싶구나
마음에 대고 듣는 귀,
마음을 열고 고이는 소리를 갖고 싶구나
그러나 마음은 자기에게로 걸어오는 눈을 용서하지 않는다
자기 팔에 돋은 귀를 용서하지 않는다
마음이 마음을 용서하지 않는다
용서받기 위하여 내 눈은 돌에 가 부딪치고
돌아오기 위하여 내 귀는 거리에 뛰었다
사람들이 내 귀를 밟고 서서 오래오래 태연한 척 했다
발바닥 밑에서 소리치는 소리를 밟고 서서
오래오래 모르는 약속들을 했다
돌멩이에 스미는 눈을
스며서 크게 열리는 눈을
파도 위에도 돋는 귀를
돋아서 한 번은 크게 응답하는 귀를
한 바다를 건너는 소리를
건넜다 다시 와
마음을 안고 고이는 소리를 갖고 싶구나
만월, 창작과비평사, 1976
내가 언제 이시영
내가 언제
시인이란, 그가 진정한 시인이라면
우주의 사업에 동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언제 나의 입김으로
더운 꽃 한 송이 피워낸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눈물로
이슬 한 방울 지상에 내린 적 있는가
내가 언제 나의 손길로
광원(曠原)을 거쳐서 내게 달려온 고독한 바람의 잔등을
잠재운 적 있는가 쓰다듬은 적 있는가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내관 이시영
내관(內觀)
나를 죽여
내 안의 나를 심화, 확장하는 일
나를 죽여
내 안의 내 마른 나뭇가지에 동백 두어 송이 후끈하게 피워올리는 일
나를 죽여
싸락눈 때리는 날
내 마음의 빈 대사ㅍ에 푸른 칼날 수천 개를 일렁이게 하는 일
낮은 바람에도 저를 향해 부드럽게 구부러지게 하는 일
이슬 맺힌 노래, 들꽃세상, 1991
내소사 이시영
내소사(來蘇寺)
내소사 가을 저녁 대웅전의 모습은
그것이 곧 두 발굽을 차고
하늘로 아슬한 벼랑으로 날아가 버릴 듯했다
그러나 뒷산 늠름한 적요 능선이
만면에 웃음을 참지 못한 채
그것의 두 어깨를 가만히 눌러
앞바다 줄포 앞바다의 쓰라린 석양 무렵에
어부들이 갈매기처럼 끼룩거리며 부산히
물 밀어오는 소리를 들어라 한다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노래 이시영
노래&
사랑한다는 사랑한다는 그 말 한 마디 전해드리기 위해
이 강에 섰건만
바람 이리 불고 강물 저리 붉어
못 건너가겠네 못 가겠네
잊어버리라 잊어버리라던 그 말 한 마디 돌려드리기 위해
이 산마루에 섰건만
천둥 이리 우짖고 비바람 속 낭 저리 깊어
못 다가가겠네 못 가겠네
낭이라면 아득한 낭에 핀 한 떨기 꽃처럼,
강이라면 숨막히는 바위 속, 거센 물살을 거슬러오르는
은빛 찰나의 물고기처럼
이슬 맺힌 노래, 들꽃 세상, 1991
눈 이시영
눈[眼]&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의 눈빛을 쏘아본다는 것이다
내 눈빛이 네 눈빛을 쏘아
아득한 밤 하늘을 금긋고
불꽃처럼 멀리멀리로 사라져간다는 것이다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
눈 이시영
눈&
눈이 내린다
오늘에서 내일로 이어지는 굳은 언약 위에
그 작은 실핏줄 위에
뛰는 숨결처럼 뽀오얀 눈이 내린다
이제 막 피 흘리며 쓰러진 희망과
가슴 속에 남은 말과
거리에 깊이 패인
노여운 함성을 지우며
바람 속으로, 창작과비평사, 1986
눈이 내린다 이시영
눈이 내린다
아무도 살지 않는 나라에
눈이 내린다.
알지 못할 한 마디 맹세가
시퍼렇게 떨다가 스러지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소리가
그 위에 몸 비비며 스러지고
그 소리를 지키지 못한 소리가
소리 뒤에 쌓인다.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나라에
소리가 내린다.
소리 뒤에 주먹처럼 고요히 내린다.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나라에
누구의 멍든 눈이 눈을 찾는다.
그 눈을 보지 못한 눈이 반짝이고
눈 뒤에서 반짝이던 눈이
자기의 없는 눈을 찾아
캄캄한 곳으로 사라진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나라에
누구의 손이 묶여간다.
그 손을 잡는 손이 떨다가
자기 손을 잃어버린다.
잃어버린 자들의 가슴에 뭉클한
손이 내린다.
만월, 창작과비평사, 1976
늙은 이모전 이시영
늙은 이모전(傳)
강 건넛마을에 수절해 사는 이모는
살결 희기가 백옥 같았다
봄 여름 가을에는 홀로 농사를 짓고
겨울이면 우리집에 와
수의도 짓고 침모도 살았다
눈이 자로 쌓인 어느 날 밤
나는 잠결에 이모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ꡒ이런 좋은 분홍눈 오시는 날
호랑이나 와서 날 덜컥 물어 갔으면!ꡓ
가만히 일어나 보니
이모는 홍조로 밝게 물든 얼굴을
미닫이에 대고 속삭이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이모가 좋았다
뒷울 감나무에는 눈이 휘어지게 내리고
자고 일어나면 강물도 쾅쾅 얼어붙어
이모도 집에 갈 수 없었으면 했다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
두 사람 이시영
두 사람
한 사람은 신이 그에게 하사한 성량(聲量)에다
자기 것을 보태어
이 세상에서 제일 높고 아름다운 목소리를 냈다
날던 새도 그 소리를 듣고는 날개를 접었다
한 사람은 신이 그에게 하사한 언어에다
자기 영혼을 불어넣어
이 세상에서 사람이 지어 바칠 수 있는 가장 풍부한 지상의 노래를 지었다
치던 파도도 그 소리를 듣고는 하늘을 향해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마음에게 이시영
마음에게
신록이여,
죽은 마음에 움트는 강철의 새 잎이여
나는 이제 어떤 이별도 껴안을 수 있다
저렇게 많은 사랑들이, 저렇게 많은 아픔들이
자기와의 투쟁을 통과하여 이제 막 연록 햇빛 속으로 걸어나온 사람들이라니
이슬 맺힌 노래, 들꽃 세상, 1991
마음의 고향 2 이시영
마음의 고향 2
왜 그 곳이 자꾸 안 잊히는지 몰라
가름젱이 사래 긴 우리 밭 그 건너의 논실 이센 밭
가장자리에 키 작은 탱자 울타리가 쳐진.
훗날 나 중학생이 되어
아침마다 콩밭 이슬을 무릎으로 적시며
그 곳을 지나다녔지
수수알이 꽝꽝 여무는 가을이었을까
깨꽃이 하얗게 부서지는 햇빛 밝은 여름날이었을까
아랫냇가 굽이치던 물길이 옆구리를 들이받아
벌건 황토가 드러난 그 곳
허리 굵은 논실댁과 그의 딸 영자 영숙이 순임이가
밭 사이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커다란 웃음들을 웃고
나 그 아래 냇가에 소 고삐를 풀어놓고
어항을 놓고 있었던가 가재를 쫓고 있었던가
나를 부르는 소리 같기도 하고
솨르르 솨르르 무엇이 물살을 헤짓는 소리 같기도 하여
고개를 들면 아, 청청히 푸르던 하늘
갑자기 무섬증이 들어 언덕 위로 달려오르면
들꽃 싸아한 향기 속에 두런두런 논실댁의 목소리와
까르르 까르르 밭 가장자리로 울려퍼지던
영자 영숙이 순임이의 청량한 웃음 소리
나 그 곳에 오래 앉아
푸른 하늘 아래 가을 들이 또랑또랑 익는 냄새며
잔돌에 호미 달그락거리는 소리 들었다
왜 그 곳이 자꾸 안 잊히는지 몰라
소를 몰고 돌아오다가
혹은 객지로 나가다가 들어오다가
무엇이 나를 기다리는 것 같아
나 오래 그 곳에 서 있곤 했다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마음의 고향 이시영
마음의 고향&
키가 훌러덩 크고 웃을 때면 양 볼에 깊이 보조개가 패이는
작은집 형수가 나는 좋았다
시집온 지 며칠도 안 돼 웃냇가 밭에 나왔다가
하교길 수박서리하다 붙들린 우리 패거리 중에서 나를 찾아내
ꡒ데름, 그러문 안 되는 것이라우ꡓ 할 때에도
수줍은 듯 불 밝힌 두 볼에 피어나던 보조개꽃 무늬
아, 웃냇가 웃냇가
방아다리 지나 쑥대풀 우거지고 미루나무숲 바람에 춤추는 곳
사래 긴 밭에 수많은 형수들이 엎드려
하루종일 밭고랑 너머로 남쪽 나라 십자성 부르는 곳
저녁에 소몰이꾼 우리들이 멱감는 냇가로 호미 씻으러 내려와서는
ꡒ데름, 너무 짚은 곳에는 들어가지 마씨요 이ꡓ 할 적에도
왈칵 풍기는 형수의 땀냄새가 나는 좋았다
홀시아버지 밑 형제 많은 집으로 시집와 남정네마저 전쟁터에 보내놓고
새벽논에 물대기 식전밭에 고추따기 아침볕에 보리널기 쏘내기밭에서 소고삐 몰아쥐고 송아지 찾기로 여름 내내 등적삼에 벼이슬 걷힐 날 없으면서도
저녁이면 선선한 모깃불 피워놓고 콩국수 말아
와상 가득 흥겨운 집안 잔치를 벌일 줄도 알았던 형수,
모깃불 매캐하게 사위어가고 하나둘 어린 형제들 잠들어갈 무렵이면
내 손을 꼭 붙들고 말했다
ꡒ데름, 데름은 꼭 우리 집안의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쓰우.ꡓ
ꡒ훌륭한 사람이 워떤 사람인디라우?ꡓ
ꡒ장군 같은 것, 그 뭣이라더라 밥풀 여럿 단 쏘위 같은 것……ꡓ
그러면 마당 한구석에서 다가온 어둠이 빤한 눈으로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잠이 쏟아질 것만 같은 내 눈에
갑자기 별빛 한 무더기가 쏟아져내렸다
환한 밤이었다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만월 이시영
만월(滿月)&
누룩 같은 만월이 토담벽을 파고들면
붉은 얼굴의 할아버지는 칡뿌리를 한 발대
가득 지고 왔다
송기를 벗기는 손톱은 즐겁고
즐거워라 이마에 닿는 할아버지 허리에선
송진이 흐르고
바람처럼 푸르게 내 살 속을 흐른다
저녁 풀무에서 달아오른 별들,
노란 벌이 윙윙거리면
마을 밖 사죽골에 삿갓을 쓰고
숨어사는 어매가
몰매 맞아 죽은 귀신보다 더 무서웠다
삼베치마로 얼굴을 싼 누나가
송기밥을 이고
봉당으로 내려서면
사립문 밖 새끼줄 밖에서는
끝내 잠들지 못한
맨대가리의 장정들이 컹컹 짖었다
부엉이 울음소리가 쭈그리고 앉은
산길에는 썩은 덕석에 내다버린 아이들과 선지피가 자욱했다
어둠 속에 숨 죽인 갈대 덤불을 헤치고
늙은 달이 하나 떠올랐다
만월, 창작과비평사, 1976
모닥불 이시영
모닥불&
영하의 추위
검푸른 하늘을 향해 가지를 툭툭 뻗고 있는 고목을 보면
내 가슴은 이상하게 뜨거워오니
저 강인한 자연 속에 순명을 다하고 있는 것들의 아름다운 침묵이
내 안에서도 무지개처럼 조금씩 조금씩 달아오르기 때문일까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무덤에 관하여 이시영
무덤에 관하여
산기슭 양지녘에 무덤 한 쌍이 새롭다
그러나 저 곳은 아직 네가 갈 곳 아니다
쉼없이 자기 길을 걸어온 사람만이
세월이 그에게 부과해준 온갖 책무를
올곧고 성실히 수행한 사람만이
다가가 잠시 쉴 수 있는 곳
그리고 역사 속에 다시 태어나는 곳
아무나 그곳에 가려고 하지 마라
먼저 너의 길을 가라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물길 이시영
물길&
자 그러면 우리 놓읍시다 집착의 끈을
사랑은 네가 나를, 내가 너를
온 마음으로 타는 불길처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여름 산이 콸콸 더운 숨결을 쏟아
앞내로 바다로 흘려 보내듯이
우리도 우리 자신의 막힌 가슴을 뚫어
서로를 남김없이 놓아주는 것
그러면 우리 가을 시린 들판에서 만날는지도 몰라
거기 풀꽃들이 서로의 찬 이마를 맞부비고 있는 곳
기러기 날아오른 논둑길 따라
갑자기 서늘해진 등을 뒤척이며 맑은 눈길로
이슬 맺힌 노래, 들꽃 세상, 1991
반짝이는 것은 무엇인가 이시영
반짝이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별들과 인간의 꿈은 깊이 상통한다.
밤이 오면 쓰라린 땅을 매맞아 버림받은 사람들이 지키고
그 위의 하늘을 별이 지킨다.
인간의 눈이 되고 싶은 어떤 별들은 지상에 내려와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는 사람들의 상처에 살아 뛰며
자기 피를 주고, 오래 말없는 상처를
자기처럼 껴안고 자기 눈이 껌뻑일 때까지 반짝이다가
새벽이 동터오면 또 불꺼진 영혼들을 찾아
아무도 없는 길로 내뺀다.
만월, 창작과비평사, 1976
벌판으로 이시영
벌판으로
모두들 가고
이제는 더 남김없이 아득한 나라
숨어 사는 친구의 머리맡에 다가서면
마음 편해라
먼 곳에서 원수처럼 돌아와
주먹 같은 뜬눈으로 누워 사는 친구
마음 그 곁에 눕혀놓고 일어서고 싶어라
한 번 더 한 번만 더 망설이고 참았던 나날들
그 두려운 밤길 가까스로 넘어와
단 한 번 빛났던 고운 얼굴들 밟고 서서
가슴 조이며 기다렸던 밤
그 밤이 우리에게 돌려준 것은
벗도, 사자도, 그리운 쇠북도 아닌
찬 칼날을 품은 새벽
모두들 스러지고 뿔뿔이 흩어져
흘린 피마저 자취도 없을 때
배 가르고 고이 누운 친구 곁에
마음 눕혀두고 저 가느다란
울음 끊어질 듯 새어나는
벌판으로 가고 싶구나
가서 고요히 바치고 싶구나
만월, 창작과비평사, 1976
봄 송신 이시영
봄 송신(送信)
잿빛 하늘에 칼바람 매섭게 부딪는 날
대치 3동 아람드리 고목나무는 그 우람한 둥치 끝의 연약한 우듬지로 하여금
사운사운거리며 하늘을 향해 무어라 무어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이 해의 큰 봄눈이
땅과 허공을 통째로 안았다가 풀어준 날
우듬지 있던 자리엔 우듬지 대신
인간의 마음을 닮기도 한 강렬한 새 잎이
하늘을 향해 새록새록 돋았습니다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불빛을 찾아 이시영
불빛을 찾아
아직은 잠들지 못한다
앞서 간 형의 밤길 너무 오래고
한 다리 어둠에 빠져
외다리로 걷고 있을지라도
어디선가 타고 있을 형의 불빛을 찾아
아직은 더 함께 이 벌판에서
캄캄하게 술 마시고 노래 불러야 한다
우리가 함께 누운 벌판, 그대로 벼랑이 될지라도
이 세상의 끝이 되어
형의 발자국 이미 찾을 수 없을지라도
형과 같이 걷지 못했던 스스로의 발자욱들 되밟고
돌아갈 수는 없는 것
뉘우침은 서로의 뜨거운 발밑에 누워
밤의 늦은 고요 등성이에 누워
용서받기 위해 더 크게 노래 불러야 한다
땅 끝까지 스미라고
땅 끝의 새벽까지 스며
새벽 힘찬 발소리 들려오라고
벼랑더러 들으라고 하늘더러 대답하라고
찬 흙에 볼 비비며 노래 불러야 한다
우리들의 숨결에 더운 불빛이 일 때까지
만월, 창작과비평사, 1976
사시에 대하여 이시영
사시(斜視)에 대하여
중국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인대산인(人大山人)이란 분의 그림 중에 강물위로 뻐쭘이 고개 내민 물고기 한 마리가 흰창 가득한 눈으로 세상을 비웃고 있는 것이 있는데 거 참, 기발한 착상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오늘 얼음 풀린 한강 가에 나가 제 몸을 느릿느릿 찬물 속에 담갔다가 푸드득 날개 치며 순간을 비상하는 청둥오리떼를 보고 와서는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엄혹한 세상을 만나도 시인은 자연물에 의탁하여 그것을 왜곡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당면한 어떤 싸움 앞에서도 그의 정신은 무한히 자유롭고 무한대해야 한다는 것. 그래야 그 무심(無心) 속에 생동하는 사물이 푸드득 깃을 치며 자리잡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것 등등.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새 -1- 이시영
새 -1-&
새들은 날아오른다
겨울 추운 북풍 속으로
빠알간 부리를 빛내며
온 몸으로 새들은 날아오른다
핏빛 연기 잠든 마을에 더 이상의
큰 슬픔이 없을 때까지
지상에 붙박힌 그들의 영혼을 차며
저 광막한 하늘 위로
노여움 속으로
바람 속으로, 창작과비평사, 1986
새 -2- 이시영
새 -2-&
아침 산길의 눈밭 위에는 머리가 상한 참새 두 마리가 서로의 날갯죽지에 핏빛 새근대는 부리를 묻은 채 잠들어 있었습니다
이 도시에 새들의 영혼까지도 앗아가 버리는
무서운 계엄군이 진입하던 날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
새벽까지 이시영
새벽까지
말없는 사람들
때로는 말없음을 힘이라 껴안고
모르는 곳으로 고개 돌려 참는 거리
말없이 길을 열어 이 병신 보내는구나
더 멀리 돌아서 당도한 그곳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사랑인가
밑도 끝도 없는 밑을 걸어 올라오는 발
목까지 걸어 올라오는 또 다른 나라
안 보이는 그 뒷사람이 나를 가르치는지
저 넓은 가슴 내가 거역하는지
일어서서 벽을 잡고 다시 굴러도
이 밤은 대답 없고
주먹만 내미는구나
새벽까지 고요히 내미는구나
만월, 창작과비평사, 1976
서시 이시영
서시(序詩)&
어서 오라 그리운 얼굴
산 넘고 물 건너 발 디디러 간 사람아
댓잎만 살랑여도 너 기다리는 얼굴들
봉창 열고 슬픈 눈동자를 태우는데
이 밤이 새기 전에 땅을 울리며 오라
어서 어머님의 긴 이야기를 듣자
만월, 창작과비평사, 1976
수평선 이시영
수평선
밤새도록 파도는 몸부림치면서 일어서면서 신음하면서
아침이 오면
거기 달랑
젊은 섬 하나를 낳는다
뜨거운 은빛 등을 보이며 떠올랐다 난바다에 떨어지는
아침 수평선의 서늘함이여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
숲에 가면 이시영
숲에 가면
숲에 가면 좋은 일이 있을 듯하다
덤불 속에 아직 온기 남은 작은 멧새알 하나,
바위 모서리를 뚫고 샘솟는 뜨거운 석간수(石間水) 한 모금,
숲에 가면 오래 잊은 좋은 일이 있을 듯하다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시 이시영
시(詩)
화살 하나가 공중을 가르고 과녁에 박혀
전신을 떨 듯이
나는 나의 언어가
바람 속을 뚫고 누군가의 가슴에 닿아
마구 떨리면서 깊어졌으면 좋겠다
불씨처럼
아니 온 몸의 사랑의 첫 발성처럼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시인 나귀 이시영
시인 나귀
그의 생은 자기보다 무거운 역사의 짐을 지고 노을진 산비탈길을 올라야 하는 남루한 등짐장수와 같은 것
그러나 그의 시는 저 깊은 생의 밑바닥을 치며 올라오는 고요론 저녁 놋종 소리와
푸른 밀물 같은 것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신록 이시영
신록&
고목나무에 꽃 피었네
지상에선 검은 흙을 뚫고 나온 애벌레 한 마리가 물 묻은 머리를 털고
이제 막 그것을 치어다보네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신새벽 이시영
신새벽
한밤중에 깨어 일어나
내가 갑자기 착한 소가 될 때가 있다
이때가 가장 정다운 때!
넓은 귀를 늘어뜨리고
내가 더 깊숙한 나로 태어날 때!
우주의 저 까마득한 밑바닥에서
쨍그랑 하고 돌멩이 하나 깨어지는 소리 들린다
향기로운 땅 새벽이 가차이 열리는 것은 이때부터
그리운 그리운 파도가 먼 해안선을 초록 띠로 물들이는 것도 이때부터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여름 속에서 이시영
여름 속에서
귀가 트였으면
이 여름에는 두 귀가 트여
곧은 소리 들을 수 있었으면
밤하늘 변방에 뜬
의로운 소리 놓치지 말았으면
소리개 높이 날아
소리란 소리 다 파먹어도
벼랑에 가 우뢰처럼 부서지는 소리떼
한 마디도 놓치지 말았으면
묵은 귀 잘라버리고
햇볕에 잘 울리고
빗속에서 싱싱한
귀가 돋았으면
눈이 트였으면
두 눈 맑게 트여
십리(十里)를 볼 수 있었으면
십리(十里) 앞을 걷다가 참수(斬首)된 사람들
풀밭에 떨어진 번개 같은 눈들 지나치지 말았으면
별 하나이 흘리는 눈물
아득한 땅에서 이는 연기
칼빛 속에서 소리치는 크나큰 손들
덥석 잡을 수 있었으면
썩은 눈 빼어버리고
나뭇잎에 닿으면 고요히 오므리고
쇠를 보면 한 자는 뛰쳐나올
커다란 눈을 가졌으면
만월, 창작과비평사, 1976
예감 이시영
예감
잎새들이 바람에 온몸이 뒤집힐 듯 흔들리는 건
신의 뜨거운 숨결이 거기를 관통하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오늘도 바람 부는 대지(大地)의 한 끝에 서서
나 아닌 나를 뚫고 지나갈 그 어떤 강력한 폭풍을 기다린다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인동 이시영
인동(忍冬)
몸을 구부려
아이를 가슴에 꼭 품어 안고 잠든 어미의 얼굴에서
산짐승들의 강한 겨울을 읽는다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저물녘 이시영
저물녘&
저물녘 먼 하늘에 띠를 두르고 선
남빛 산의 완강한 부드러움이여
가서 그 어깨 뒤로 서고 싶다
이슬 맺힌 노래, 들꽃 세상, 1991
정님이 이시영
정님이
용산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 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 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들에게 업혀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주더니
왜 가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섣달 긴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당잘그당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나올 것만 같더니
한 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만월, 창작과비평사, 1976
조금 후 이시영
조금 후
까우까우
강 건너 저쪽에서 누가 알은 체한다
꺼우꺼우
강 건너 이쪽에서 내가 알은 체한다
까우까우 꺼우꺼우…
까우까우 끄우끄우…
문득, 하늘엔 물빛 깃 치는 소리
그대와 나 사이에 서광 있으라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지평선에서 이시영
지평선에서
오늘 밤도 봄보리밭에 함박눈 닿는다
신의 입김이 있다면 저렇게 따스할 것인가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창 이시영
창(窓)&
사람이 그리운 날, 나는 강변에 나가 새들의 산책 길을 걸었습니다. 강변에는 갈숲이 무더기로 우거져 있어 그들의 즐거운 서식처였습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눈여겨 둔 그 중의 한 보금자리를 향해 가만가만 다가갔습니다. 그러나 내 발길이 닿기도 전에 참새들은 일제히 갈숲을 차고 달아나며 그 바르르 떨리는 작은 눈동자로 나를 쏘아보는 것이었습니다. 갈숲 그늘 자리엔 다행히 그들의 온기가 조금 남아 있어 나는 그 곳에 짐승인 내 어두운 두 발을 깊숙이 묻었습니다.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태양빛 이시영
태양빛
대추나무에 올해도 대추물 들겠다
찌는 듯한 삼복 더위에 빳빳이 고개 내밀고 푸른 하늘과 맞서고 있으니
대추 열매에 올해도 서늘한 태양빛 들겠다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편지 이시영
편지&
낙엽의 계절입니다
부리 긴 새들의 철도 끝났습니다
지난 여름 우리는 너무 오래 싸웠습니다
남녘의 들판은 아우가 흘린 피로 검붉었으며
핵탄두가 겨눈 북녘 하늘은
또 매섭게 푸르렀습니다
형제여 그러나 이 계절의 끝에
더욱 큰 시련의 계절이 닥쳐옵니다
눈보라 칼바람 속에서 남쪽의 어미가 아비를 떠나보내고
얼어붙은 국경의 강을 건너
북의 아들이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기나긴 사상의 전쟁이 끝나고
우리 모두가 죽고
두꺼웠던 얼음이 녹는 강언덕 위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쩌렁쩌렁한 새 봄이 밝아올 것입니다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
한로 이시영
한로(寒露)&
가을은 내 영혼을 가볍게 한다
마음에도 잔물결 일게 한다
땅바닥에 그림자 곧게 떨어뜨리고 달밤 속을 나는
작은 새여, 쏜살 같은 큰기러기여
이 밤 나도 네 초롱초롱한 영혼처럼
지각(地殼)곁을 스치는 얼음장 같은 날개를 갖고 싶다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
형제들을 위하여 이시영
형제들을 위하여
1897년생인 우리 아버지가 이 세상에 와서
뻑적지근하게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식을 열이나 낳았다는 것이다
한 배에서가 아니고 두 배에서지만
그리고 다 살리진 못하고 그 중에 여섯이나
당신 손으로 뒷산 애장터에 묻어야 했지만
오늘밤 아파트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일생 농군 학생부군(學生府君)께 술 한잔 올리니
어려서 죽은 우리 형제들이 천릿길을 달려와 애기두루마기 차림으로
이 방 저 방에 TV 앞에 시집간 누이들 틈서리에 듬성듬성 앉아 있는 것 같으이다
삼식(三植)이 형님 기식(寄植)이 형님 일학년짜리 명식(明植)이 형 해방동이 명자(明子) 누나
나보다 두 살 위 후식(厚植)이 형 이름도 없이 가물거리는 내 아랫동생
초헌 아헌 종헌이 끝나고 다 함께 음복하고 검은 재와 함께 새벽 별 스러질 때까지
내 핏속에 애기들의 여린 숨결 속에 살아
어서 가자고 칭얼대는 어린 동생을 달래가며
밤새도록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으이다
길은 멀다 친구여, 실천문학사, 1988
호명 이시영
호명(呼名)
한 번 불려간 것들은 다시는 오지 않는 것인가
내 등 두드리며 여기 서서 기다려라 하고 간 바람은
산 넘고 물 건너가 다시는 오지 않는다
대수풀에 머문 구름에게 물어도
구름 위에 날개 접은 솔개에게 물어도
바람이 한 번 간 곳 알지 못한다
한 번 불려진 별들은 다시는 빛나지 못하는가
간밤에 불려진 한 별
큰 눈으로 지상을 굽어보며 빛나다가
새벽 하늘가로 스러져서는
다시 빛나지 않는다
한 번 흔들린 풀들은 다시는 멈추지 못하는가
제 선 자리를 확인하기 위해
한 번 고개 돌린 풀들
다시는 고개 돌리지 못하고 서서 흔들리다가
누군가의 찬 낫에
이슬을 흘리며 쓰러진다
한 번 눈 부릅뜬 것들은 다시는 눈뜨지 못하는가
여름 잎사귀에 눈 부릅뜬 햇살 하나
잎사귀를 녹이며 구르다가
돌 위에 떨어져 돌을 태우고
다시 눈뜨지 못한다
한 번 불려진 것들은 다시는 불려질 수 없고
한 번 대답하고 돌아선 것들은
다시는 이전의 것이 될 수 없는가
바람 속으로, 창작과비평사, 1986
후꾸도 이시영
후꾸도
장사나 잘 되는지 몰라
흑석동 종점 주택은행 담을 낀 좌판에는 싯푸른 사과들
어린애를 업고 넋나간 사람처럼 물끄러미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사내
어릴 적 우리 집서 글 배우며 꼴머슴 살던
후꾸도가 아닐는지 몰라
천자문을 더듬거린다고
아버지에게 야단 맞은 날은
내 손목을 가만히 쥐고 쇠죽솥 가로 가
천자보다 좋은 숯불에 참새를 구워 주며
멀뚱멀뚱 착한 눈을 들어
소처럼 손등으로 웃던 소년
못줄을 잘못 잡았다고
보리밭에 송아지를 떼어놓고 왔다고
남의 집 제삿밤에 단자를 갔다고
사랑이 시끄럽게 꾸중을 들은 식전아침에도
말없이 낫을 갈고 풀숲을 헤쳐
꼴망태 위에 가득 이슬 젖은 게들을 걷어와
슬그머니 정지문에 들이밀며 웃던 손
만벌매기가 끝나면
동네 일꾼들이 올린 새들이를 타고 앉아
상머슴 뒤에서 함박 웃던 큰 입
새경을 타면 고무신을 사 신고
읍내 장터로 서커스를 한 판 보러 가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서울서 온 형이
사 년 동안 모아둔 새경을 다 팔아갔다고 하며
그믐날 확독에서 떡을 치는 어깨엔
힘이 빠져 있었다
그날 밤 어머니가 꾸려준 옷보따리를 들고
주춤주춤 뒤돌아보며 보름을 쇠고
꼭 오겠다고 집을 떠난 후꾸도는
정이월이 가고 삼짇날이 가도
장사나 잘 되는지 몰라
천자문은 다 외었는지 몰라
만월, 창작과비평사,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