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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 - 선비의 고장
경상북도 북부권에 있는 시이다. 동쪽으로 경상북도 봉화군, 서쪽으로는 예천군, 남쪽으로는 안동시, 북쪽으로는 마구령을 경계로 강원도 영월군, 죽령과 고치령을 경계로 충청북도 단양군과 인접하고 있는 소·태백권 및 경북북부권 제 2의 교통의 중심도시이다. 풍기인삼과 소수서원, 부석사, 소백산국립공원으로 유명하다.
영주 문화관광 http://tour.yeongju.go.kr/open_content/main_page/
부석사[浮石寺 제1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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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서원[紹修書院 제3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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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사이버문화재탐방 http://www.heritage.go.kr/visit/cyber_2008/index.html
영주8경
부석사. 소백산. 소수서원/선비촌. 무섬마을. 희방폭포. 죽계구곡. 죽령옛길. 소백산풍기온천리조트
금성대군신단[錦城大君神壇](금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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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섬마을(제4경) 물위의 연꽃처럼 피어난 마을
반남박씨와 선성김씨가 함께 세거(世居)해 오늘날까지 두 집안의 집성촌으로 남아 있다
모두 48가구(2004)에 10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데, 가옥 가운데 38동이 전통가옥이고, 16동은 100년이 넘은 조선시대 후기의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이다. 그야말로 마을 전체가 고택과 정자로 이루어져 있고, 안동 하회마을과 지형적으로도 비슷해 천혜의 자연조건을 자랑한다. 조지훈의 처가 마을로 그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무섬마을은 독립 유공자가 5명 배출되는 등 정신세계와 학문의 뿌리도 깊은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섬마을 외나무다리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산정
무섬마을 맛집 무섬골동반
무섬마을 골동반 남은 음식은 해를 넘기지 않는다고 하여 섣달그믐날 저녁에 남은 음식을 모아 비비는 밥. 민간의 풍속에 음력 12월 30일인 섣달그믐에 남은 음식을 모두 모아서 골동반(骨董飯)을 먹는다고 한다. 여기서 골동반은 비빔밥을 가리키는 한자어이다.
배순 정려비 [裵純旌閭碑] 순흥면 배점리 588-2
배순은 천성이 유순하고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학문에 힘써 풍기군수였던 이황(李滉)이 소수서원(紹修書院)에서 유생에게 학문을 강론할 때 그도 배우도록 배려하였다. 이황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삼년상을 지내고 철상(鐵像:사람이나 동물 등의 형상을 쇠를 부어 만든 상)을 만들어 기리는 등 제자의 예를 다하였다. 배순이 죽자 군민들이 정려각을 세우고, 마을 이름을 그의 성(姓)인 ‘배(裵)’를 따서 ‘배점’이라 불렀다.
부석사[浮石寺 제1경] http://www.pusoks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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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화엄종(華嚴宗)의 근본도량(根本道場)이다.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義湘)이 왕명을 받들어 창건하고, 화엄의 대교(大敎)를 펴던 곳이다.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은 부석사의 중심 건물로 극락정토를 상징하는 아미타여래불상을 모시고 있다. 건물 안에는 다른 불전과 달리 불전의 옆면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안동 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과 더불어 오래된 건물로서 고대 사찰건축의 구조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건물이 되고 있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이곳으로 왔을 때 직접 어필한 현판이다.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 때 짓고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고쳐지었으나 공민왕 7년(1358)에 불에 타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은 고려 우왕 2년(1376)에 다시 짓고 광해군 때 새로 단청한 것으로 1916년에 해체·수리 공사를 했다.
하나의 건물에 누각과 문이라는 이중의 기능이 부여 되어 있어 건물 전면에는 ‘안양루’, 뒷면에는 ‘안양문’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양(安養)’이란 극락을 뜻하는 말로, 안양문은 극락에 이르는 입구를 상징하고, 안양문을 지나면 나오는 무량수전은 극락을 상징한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지을 때 돈이 없어서 전국 사찰의 범종을 모두 가져가 당백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 범종을 다시 제작했는데 원래의 위치에 들어갈 수 없어서 지금의 위치에 범종각을 짓고 그 안에 모셨다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앞석등(浮石寺無量壽殿앞石燈)[국보 제17호]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아래로는 3단의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올린 후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얹어 마무리한다. 통일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아름다운 석등으로, 비례의 조화가 아름답고,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니고 있다. 특히, 화사석 4면에 새겨진 보살상 조각의 정교함은 이 석등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부석사 소조여래좌상(浮石寺塑造如來坐像) [국보 제45호]
부석사 조사당(祖師堂) [국보 제19호]
건물 안쪽의 좌우에는 사천왕상·보살상 등 고려 후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다. 이것들은 고려시대 회화 가운데 매우 희귀한 것으로, 고분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채색 그림 중 하나였다. 지금은 보호각을 지어 보관하고 있으며, 원래 벽화가 있던 자리에는 본떠 그린 그림을 놓아 당시 벽화의 모습을 잘 전해주고 있다.
부석사 조사당벽화(浮石寺祖師堂壁畵) [국보 제46호]
조사당 벽면에 있던 원래의 위치 순서대로 열거하면 ①보살상(菩薩像), ②다문천왕상(多聞天王像) ③광목천왕상(廣目天王像), ④증장천왕상(增長天王像), ⑤지국천왕상(持國天王像), ⑥보살상(菩薩像)으로 되어 있다.
이들 벽화는 흙벽 위에 녹색으로 바탕을 칠하고 붉은색, 금색, 녹색, 백색 등으로 짙게 채색하였다.
1916년의 수리공사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으로 미루어 조사당을 세운 연대가 고려 우왕 3년(1377)임이 밝혀졌으며, 벽화를 그린 연대도 같은 시기일 것으로 추측된다. 한국에 남아 있는 벽화로서는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그 의의가 크다.
비로사[毘盧寺] 풍기읍(豊基邑) 삼가리 소백산 비로봉 중턱에 있는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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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뒤 어머니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7일 동안 선정(禪定)에 들었다가 그 소식을 의상에게 전하였다. 진정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한 의상은 그의 어머니를 위하여 소백산 추동으로 가서 초가를 짓고 제자 3,000명을 모아 90일 동안 《화엄경》을 강의하였다.
강의가 끝나자 진정의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나는 벌써 하늘에서 환생하였다”고 말하였다. 이때의 소백산 추동이 비로사로 추정된다. 《비로사사적기》에는 의상이 683년(신문왕 3)에 이 절을 개창하고 비로사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로사 경내에 들어서면, 거북 받침 위에 비신을 세운 비석이 하나 눈에 띈다. 바로 진공대사보법탑비이다. 진공대사는 신라 왕계(王系)의 자손으로 가야산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었다. 937년(태조 20)에 태조에게 나아가 후삼국의 통일을 축하하고 열반하였다. 이에 태조는 진공(眞空)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로사에 보법탑비를 세우기에 이른다
소수서원[紹修書院 제3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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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사이버문화재탐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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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544년 여기에 안축과 안보를, 1633년(인조 11)에는 주세붕을 추배(追配)하였다. 1550년(명종 5)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해 와서 조정에 상주하여 소수서원(紹修書院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紹) 닦게(修) 했다)이라는 사액(賜額)과 《사서오경》 《성리대전》 등의 내사(內賜)를 받게 되어 최초의 사액서원이자 공인된 사학(私學)이 되었다. 서원은 선현과 향현(鄕賢)을 제향(祭享)하는 사우(祠宇)와 청소년을 교육하는 서재(書齋)를 아울러 갖추게 되었다
서원의 건물로는 명종의 친필로 된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편액(扁額)이 걸린 강당(사진), 그 뒤에는 직방재와 일신재, 동북쪽에는 학구재(學求齋), 동쪽에는 지락재(至樂齋)가 있다.
예로부터 학자수라고도 부르는 소나무는 일찍이 ‘세한 후에야 송백이 뒤에 시듦을 안다’라고 한 공자의 말씀과 ‘송백은 세한지목이요 천세지송’이라는 사마천 사기의 구절처럼 인생의 어려움과 시절의 흐름 속에서 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지조를 잃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는 참선비가 되라는 뜻에서다. 일찍이 노군자라고도 불리는 소나무는 유교의 표상인 선비정신과도 결부된다.
제물로는 임금이나 하늘에 드리는 제사에는 반드시 소나 양이 쓰였고, 그 외에는 보통 돼지가 쓰였다. 생단은 정사각형 평면에 정방형으로 흙을 북돋아 잔디를 심었으며 기단외부로 울타리를 둘러 보호하고 있다.
‘경(敬)’은 성리학에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흐트러짐이 없다’는 의미로 마음가짐을 바르게 하는 수양론의 핵심이 되는 선비들의 지침이며 성인이 되어 가는 지름길과 같아 효경과 맹자에서는 공경의 뜻으로, 논어에서는 삼가 근신하는 의미로 풀이했다.
한편 '경(敬)자' 위에 씌어진 ‘백운동(白雲洞)’이란 글씨는 퇴계 이황선생이 새긴 것으로 전해온다. 덧붙여 이 경자바위는 순흥땅의 아픈 역사와 얽힌 전설이 있다. 세조3년(1457) 10월 단종복위 거사 실패로 이 고을 사람들은 정축지변이라는 참화를 당하게 되는데 그때 희생 당한 순흥도호부민들의 시신은 이곳 죽계천에 수장되고 만다.
그 후 밤마다 억울한 넋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므로 당시 풍기군수 주세붕 선생이 원혼을 달래기 위해 ‘경(敬)’자에 붉은 칠을 하고, 위령제를 지낸 후로 울음소리가 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남향으로 배치한 강학단은 서원입구에서 바로 강학당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남쪽 기단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내부 대청의 북면에는 명종의 친필인 '소수서원'이란 편액이 높이 걸려있다. 강학당은 서원 입구 수백 년 세월을 자랑하는 노송군락을 지나 정문 홍전문을 들어서면 마주하는 건물로 유생들이 강의를 듣던 곳이다. 경내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건물로 남북으로 길게 지어졌으며 남측과 북측으로 합각지붕을 설치하였다.
직방재(사진 좌측) 서재에 해당하는 직방재는 ‘깨어 있음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바른 도리로써 행동을 가지런하게 한다’는 말에서 각각 ‘직(直)’과 ‘방(方)’자를 취했다. 학장의 생활공간이다
일신재(사진 우측) 동재에 해당하는 일신재는 ‘일신(日新)’은 ‘(인격도야가) 나날이 새로워져라’라는 뜻으로 대학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유생들이 학문에 정진하는 공간인 학구재와 지락재는 온돌방과 온돌방 사이에 진리의 숫자인 3을 상징하여 둘 다 3칸으로 꾸며졌으며, 건물 입면 역시 배움을 장려하기 위한 의도로 ‘공부(工夫)’의 ‘공(工)’자 형태로 지어졌다. 또한 학구재와 지락재는 스승의 거처인 직방재, 일신재보다 한자 낮게 뒷물림하여 지어졌는데 이는‘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윤리의식이 건축구도로 형상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장서각의 위치는 ‘좌우지선’의 예를 따라 서책은 으뜸자리에 둔다고 하여 스승의 숙소인 직방재의 오른쪽에 자리했다. 이 또한 서쪽을 높게 여기는 우리나라 고유사상 ‘이서위상’의 한 표현으로 선현들의 가르침을 간직한 책의 중요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원의 장서각은 강학공간에 부속되는 주요건물로서 선현들의 문집 등을 판각한 목판을 보관하는 곳이며, 목판을 제작할 재정적인 능력이 있는 규모가 큰 서원은 장판각을 따로 두기도 했다. 대개 장서각의 구조는 습기를 방지하기 위해 바닥은 땅에서 떨어뜨려 마루의 형태를 취하고 환기구나 살창을 설치한다.
소수서원 전사청(典祀廳) 전사청은 문성공묘 뒤쪽에 남향으로 자리하며 제사용 그릇 등을 보관해두던 곳이다. 건물의 규모는 전면3칸 측면1칸이며 2칸은 마루로, 나머지 1칸은 방으로 되어 있다.
그 위치는 문성공묘에 가장 가까이에 있어 춘추향사에 집사들이 제물을 장만하고 사용할 제기를 보관하는데 편리하게 지어졌다.
영정각은 회헌 안향의 영정(국보 111호)과 신재 주세붕의 영정(보물717호), 회암 주희, 문충공 오리 이원익, 문익공 한음 이덕형, 문정공 미수 허목, 영정 5점을 봉안 하던 장소이다. 현재 원본은 소수박물관 수장고로 옮겨 보관하고 대신 복사본을 전시하였다.
일반적으로 고직사는 강학공간 영역 밖 좌측 또는 우측에 위치하는데 소수서원의 경우는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고직사가 위치하고 있다.
아울러 '학맥도', 선현문집', '경서류', '시판' 등을 전시하여 유교문화의 당면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2004년 9월 23일 소수 박물관이 개관되면서 사료 전시실은 박물관으로 이관 되었고 현재는 충효교육관과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다.
충효교육관은 160석의 좌석에 시청각 기기 등이 갖추어져 있어 학술 세미나 및 연수 장소로 이용되고 있으며, 현관에는 서예와 탁본체험을 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한편 류운용이 못을 판 후 이후 1613년(광해5년) 창석 이준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다시 팠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탁청지는 푸른 하늘을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내는 맑은 연못으로 경내의 작은 죽계천이라 할 수 있다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 순흥면 읍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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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흥향교[順興鄕校] 순흥면 청구리
영주 선비촌(제3경) http://www.sunbichon.net/
<영주선비문화축제>
죽계구곡[竹溪九曲 제6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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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옛길(제7경.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서기 158년(신라 아달라왕 5)에 죽령길을 개척하다 죽은 죽죽을 제사지내는 사당이 고갯마루에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죽령사(竹嶺祠)라는 산신사당이 있었다.
대강면 용부원리(龍夫院里) 죽령역에서 풍기읍 희방사역(喜方寺驛)으로 빠지는 중앙선 철도가 길이 4,500m의 죽령터널을 통하여 죽령 산허리를 통과한다. 또 중앙고속도로 단양~풍기 구간이 죽령터널을 통과하여 나 있다. 2007년 12월 17일 명승 제30호로 지정되었다.
죽령 옛길은 문경에서 충주로 이어지는 최초의 고갯길인 하늘재(서기156년)에 이어 서기158년에 두번째로 열린 길로 기록에 의하여 최초 열린 시기가 분명히 기록된 길이다.
희방사[喜方寺]
희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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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방폭포(제5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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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선덕여왕 어느 날 두운조사가 신음하는 호랑이를 발견했다. 그 호랑이는 사람을 먹고 목에 비녀가 걸렸는데, 두운조사가 비녀를 빼주고 호랑이를 살려줬다.
그 후 호랑이는 두운조사의 은혜를 갚고자, 어느 양가집 규수를 물어다 주었는데 그 규수는 바로 경주호장의 무남독녀였다. 경주호장은 딸을 살려준 두운조사의 은혜에 보답하기위해 이 절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절 이름도 은혜를 갚게 되어 기쁘다는 뜻의 희(喜), 두운조사의 참선방이란 것을 상징하는 방(方)을 써서 희방사(喜方寺)라 이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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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밥 1457년 당시만 해도 순흥면은 순흥도호부라고 해서 영남에서 제일 큰 고을이었다. 이곳에 금성대군이 유배를 와서 단종 복위운동을 하다가 발각되면서 많은 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산으로 도망가는 일이 생겼다.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산 위에서 생활하면서 잘 자라는 메밀을 키웠고, 묵밥을 먹으면서 아픈 시간을 견뎌냈다. 아직도 순흥면엔 당시의 사건을 증명하듯 죽은 영혼을 달랜다는 경자바위, 청다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해 그 피가 죽계천을 흘러 안정면 동촌리 마을에서 멈췄다 해서 생긴 피끝마을 등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순흥면 사람들은 두레골에서 소백산 산신인 금성대군을 기리는 제를 지낸다. <순흥전통묵집 순흥면 읍내1리 339번지>
소백산(제2경)
소백산 허리를 감돌아 오르는 아흔아홉 굽이의 죽령(竹嶺)은 영남의 3대 관문중 하나로서, 그 옛날 과거길 선비들의 수많은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주봉인 비로봉(毘盧峰)(1,439m)에는 천연기념물인 주목(朱木)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나라가 어지러울 때 이 고장 선비들이 한양의 궁궐을 향해 임금과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였다는 국망봉(國望峰)(1,421m)과, 소백산 천문대가 있는 연화봉(蓮花峰)(1,394m), 그 옛날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는 도솔봉(1,315m) 등많은 산봉우리들이 연이어져 있으며, 소백산 중턱에는 신라시대 고찰 희방사(喜方寺)와 비로사(毘盧寺)가 있고, 희방사 입구에는 영남 제일의 희방폭포(28m)가 년중 시원한 물줄기로 피서객들을 즐겁게 맞고 있습니다.
특히, 해마다 5월이면 철쭉꽃의 장관과 상수리나무 숲 터널은 소백산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으며, 년중 6개월 정도 백설로 뒤덮혀 있는 비로봉은 『한국의 알프스』로 불리워져 오고 있습니다.
소백산풍기온천 리조트(제8경)
소백산풍기온천 리조트는 유황, 불소, 중탄산 등 우리 몸에 좋은 물질이 온천수에 용해돼 만성관절염, 신경통, 금속중독, 동맥경화, 당뇨병, 피부미용 등에 그 효능이 좋은 온천수로도 그명성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영주 맛집 순흥 전통묵집 경북 영주 '순흥 전통묵집'의 전통 묵사발. 단일 메뉴로 명성을 떨치는 음식점은 왠지 그 집만의 숨겨진 조리법이 가문 대대로 내려올 것만 같다. 한여름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매캐한 연기가 가득한 부엌의 부뚜막에 앉아 묵을 쑤고 있던 정옥분(78) 씨 모자를 보니 이 집의 비법이 더욱 궁금해진다.
오정주(五精酒) 황정과 천문동, 송엽, 백출, 구기자 등 다섯 가지 한약재를 써서 만든 건강주가 오정주다. 다섯 가지 기를 모은 술이라 부르기도 한다. 도자기병이 주도 35도짜리다. '백발을 검게 하고 빠진 이도 다시 나게 한다'는 신비의 술이 바로 영주 오정주(五精酒)다
[천년의 밥상] 제11편 다섯 가지 정기를 받은 술: 오정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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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장도[銀粧刀] 정조의 상징이다. 은장도(銀粧刀)는 은으로 장식한 작은 칼로, 남녀가 몸에 지니는 노리개 또는 호신용 칼이나 과거 조선의 여인들이 순결을 지키지 위해 지니고 다녔던 호신용 칼로 더 알려져 있다. 부녀자들이 노리개로 옷고름에 찬 것은 패도(佩刀), 주머니 속에 지닌 것은 낭도(囊刀)라 한다. 장도를 만드는 기능과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장도장(粧刀匠)이라고 한다.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이다.
죽령터널(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앙고속도로에 위치한 길이 약 4,600m의 터널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긴 도로 터널이다. 국내에서 가장 긴 터널로 이름을 올리게 될 강원 배후령 터널이 2012. 6월 개통된다(8.8㎞)
풍기인삼 영주시 풍기읍은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인삼 재배가 시작된 곳이다. 중종 때 소백산에서 자생하는 산삼 종차를 채취하여 풍기읍 금계동 임실 마을에서 재배한 것이 그 시초라 한다.
풍기인삼은 조선 중종조 신제 주세붕 선생이 산삼에만 의존하던 것을 인위적으로 재배, 생산케 하여 그 수요를 충족하고져 전국에 인삼이 자생하는 토양과 기후가 비슷한 곳을 찾던 중 1541년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풍기의 토양, 기후를 조사한 결과 산삼이 많이 자생할 뿐 아니라 인삼재배로서 가장 적합한 곳임을 발견하고 풍기에서 제일 처음 산삼종자를 채취하여 인삼재배를 시작하였으며 조정에서는 풍기인삼만을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풍기인삼축제>
1일차(소백산 등산) 희방폭포, 희방사 - 연화봉 - 비로봉 - 비로사 - 풍기 삼가동 - 소백산풍기온천 - 숙소(옥녀봉 자연휴양림)
2일차(명승지 관광) : 숙소 - 소수서원, 선비촌, 소수박물관 -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 - 금성단 - 부석사 - 풍기인삼시장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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