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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운동의 즐거움 속에
나는 골프운동을 늦은 나이였지만(2004년 3월)시작한 자체는 매우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하면서 많은 흥미를 가지며 열심히 연습에 임하였다. 그래서 ‘골프운동을 배우며’라는 제목으로 내가 이 운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와 입문과정에서 익혀야 할 제반사항 등과 함께 3년여의 운동과정과 좋은 경험들을 정리하여 은퇴생활 전반기 회고록에 편집하여 놓았다. 그리고 2009년 3월은 골퍼로 입문한지 만 5년이 되어 속편으로 ‘골프운동 5주년을 자축하며’라는 기록을 남겼다. 그 주된 내용은 운동으로 즐긴 참 좋은 기억들, 내 생활 속에 운동의 비중, 이글과 싱글을 함께한 쾌거, 필드에서 스포츠맨쉽을 발휘하려는 자세, 정례 친목라운드행사, 운동 소요 경비, 필드의 추억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5주년을 자축하며 등으로 골프 마니어 대열에서 심취하며 느껴 본 감회를 대체로 소상히 기록으로 남겨 보았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골프는 누굴 이길려고 하는 운동이나 이기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자신의 목표수준?(싱글, 이글, 에이지 슈트)를 도달하려고 최선을 다 하는 운동이다. 그래서 몸과 마음을 스스로 관리하고, 자연과 인생을 배우며 다정한 인간관계에서 우정과 친교의 시간과 기회를 마련해 주는 운동이다. 한편으론 정신수양과 인격배양에 비중을 두고 에티켓과 매너를 존중하는 신사운동이라고 한다.
그리고 골프는 건강, 경제력, 친구, 골프기량 네 가지 기본요소가 갖추어져야 가능하다고 일반적으로 말한다. 노년의 활동으로 운동에 소요되는 만만치 않는 비용과 체력이 운동을 즐길 정도로 건강해야하고, 동반자로 골프친구가 필수적으로 있어야 하고, 최소 보기플레이를 할 수준의 골프기량이 있어야 즐거운 마음으로 평생운동으로 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앞서 건강생활에서 밝힌바와 같이 새벽운동을 통해서 기본체력 유지하면서 연습장도 열심히 다니며 최선을 다해 능력껏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 보면서 동호인들과의 라운드에서 손색이 없을 정도의 기량을 갖추려고 노력을 꾸준히 한다.
골프친구도 입문기 과정부터 운이 좋게도 허심탄회, 다정하게 안내하여 준 南景과 止堂의 우정으로 조금도 불편 없이 흥미진진하게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도내 곳곳의 유명 컨트리클럽도 과분할 정도로 다니며 라운드 할 수 있었음을 정말 감사하며, 그 은덕은 생각할수록 골퍼로써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뿐만 아니라 그 친구들의 인간관계와 친화력이 남 달라 주위의 많은 사람들과도 골프조직이 형성되어 매월 정기적인 라운드도 한다. 동기생들의 1·3골프조직도 있어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어 다른 선후배들에게 본이 되기도 한다.
아마추어 골퍼들이 꼭 이루고 싶은 꿈은 2011년 ‘j Golf’ 방송프로그램의 선호도 조사에 의하면 ‘싱글 스코어’인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한 자릿수 핸디캡을 뜻하는 싱글핸디캡 골퍼가 되고 싶다는 대답이 다수라고 한다. 설문참가자 가운데 60%가 싱글 스코어 기록이고, 홀인원이 27%, 그리고 언더파, 이글 순이었다.
우리나라 골프인구를 약 336만 명(한국골프협회 2011년말 통계: 골프장 400개소, 한 해 동안 골프장 출입한 내장객 수 연인원 2,690만 명으로 골프 시장 규모는 연간 18조원)으로 싱글은 3.7%에 불과하고, 70%이상이 90대 타수 이상의 스코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골퍼들의 소망은 타수를 최소화 하는 것으로 오죽하면 예전엔 필드코스에 싱글, 홀인원, 이글 등을 달성했을 때 기념식수 등 자축행사를 하고 동반자는 기념패를 수여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었다.
나도 운수 좋은 날이 있어 2008년 6월17일 나주C.C에서 싱글, 같은 해 12월 2일 이글을 하여 모임에서 마련해 준 기념패도 받아 보았고, 간소한 자축연도 베풀어 보았다.
그리고 오랜 만에 올해 7월17일 고창 웰 파크 C.C에서 75타로 싱글의 기쁨을 재연해 보았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좋은 스코어가 기록되기를 바라지만 희망사항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기량에 기복이 심한 경우가 있어 이구동성으로 매우 어려운 운동이라고 엄살도 부린다. 특히 멘탈 스포츠라고 할 만큼 전날부터 컨디션을 조정하는 세심한 배려가 필수적으로 이루어져야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하고 있다. 나는 평균타수에 오차범위를 좁히기 위해 연습 때 기본에 충실한 스윙을 하려고 노력하고, 장타보다는 정확한 방향에 보다 많은 연습을 하고, 고질적인 나쁜 습관 교정에도 나름대로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래서 임팩트 직후 팔을 구부리는 자세를 고치지 않으면 거리도 짧아지고 스라이스나 훅이 유발되므로 어드레스 때 상체의 각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양팔을 목표방향을 향해 쭉 뻗어주고(머리와 상체는 공의 뒤쪽에 남도록) 피니쉬 때 체중은 왼발에 실리고, 가슴은 목표방향을 향하도록 하는 연습을 꾸준히 하면서 O.B를 막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런 결과인지 비교적 안정된 스윙이 되면서 드라이버나 우드 사용 시에도 조금씩 자신감이 생길 정도가 되었다.
골프와 운동량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운동효과가 별로 없는 것으로 보이나 필드에서 걷는(약 6km) 자체만으로도 건강에 도움이 되고 대자연속의 풍경에서 얻는 정신건강은 골퍼의 호기심과 긍정적인 사고에 따라 크게 다를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평생을 두고 할 수 있는 운동으로 심한 운동처럼 보이지 않지만 세밀하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 몸이 망가지고 각종 통증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최경주, 양용은, 박세리 등 세계적인 골퍼들도 부상으로 고생을 많이 했다는 것을 보도로 알 수 있다.
일본의 전문의이며 싱글골퍼인 사이토 마사시가 쓴 책 “골프가 내 몸을 망친다”를 일독하였는데 골프는 순기능도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역기능도 많다고 한다. 몸을 망치는 여러 형태를 열거한 후 다양한 의학정보와 자료를 토대로 근육, 관절, 신경, 내장 등 모든 부분이 좋아지면서 뇌기능도 활발해지는 타입은 이른바 몸에 좋은 골프를 하는 사람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 한편으론 골프로 늙는 사람을 구분하면서 척추와 허리가 아프고, 하체가 약해지고, 뇌기능에도 별 반응이 없는 부류는 몸이 나빠지도록 만드는 골퍼라고 한다. 모든 운동이 마찬가지이지만 운동에는 사전에 준비를 철저해야 한다. 평소에 안 쓰던 근육을 갑자기 사용하면 무리가 따르기 때문에 체조, 스트레칭 등으로 몸을 충분히 유연하게 만든 다음 골프스윙으로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이런 점에서 나는 필요조건에 충분하다고 본다.
나는 필드에서 운동을 하면서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려고 의도적으로 이런 생각을 한다 이 나이에 인격이 원만한 동반자들과 풍광이 좋은 자연 속에서 사계절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담금질한다는 것은 너무도 과분한지 모른다는 마음을 가져 보면 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온다. 특히 빛고을 C.C에 갈 때면 더욱 강하게 느끼게 한다. 만일 이 운동을 하지 않았다면 노인타운 시설에 와서 연습장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나 필드에서 라운드 하는 장면을 보면서 부러워하며 후회했을 것이라고 혼자서 생각해 보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아쉬움 없음을 다시 감사하게 된다.
참고로 시사고전강의의 권위자 박재희교수는 ‘골프와 손자병법’ 강의에서 골프와 고전의 공통점은 결국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손자볍법에서 장수들이 갖춰야 할 다섯 가지 자질인 ‘지신인용엄(智信仁勇嚴)은 골퍼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기도하다. 智는원론에 얽매이지않고 현명하게 헤쳐나올 수 있는 냉철한 분석이 필요하고, 信은 동반자들과의 신뢰다. 알까기,타수 속이기는 안된다. 仁은 동반자에게 관대해야 된다. 동반자가 있어야 라운드 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된다. 勇은 핑계 없는 내 탓이라고 말 할 수 있는 용기,
嚴은 규칙과 타수 계산을 정확하게 하면서 ‘자신에게 엄하게, 동반자에게 관대하라’라고 말한다. 박교수는 “한국인들의 몸에는 기본적으로 인문학 유전자가 흐르고 있다. 손자병법을 통해 골프 실력이 아닌 골프의 기본과 본질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면 훨씬 즐거운 라운드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운동을 통해서 T·V 시청도 골프전용 채널도 설치하면서 프로골퍼들의 경기모습과 눈부신 기록들, 골프레슨도 시청하면서 도움을 얻고 있다. 또한 신문스크랩도 스포츠와 골프로 분류하여 ‘고덕호프로의 신나는 골프’ 유명 프로골퍼들의 화제(탱크 최경주의 땀과 눈물, 양용은 인생역전, 우즈와 매킬로이 골퍼세계1위 등극 뉴우스) 세계 최고 권위있는 마스터스 골프대회, 우승 총상금 90억원의 스코트랜드의 브리티시 오픈대회 등 골프에 관한 스크랩을 보관하여 심심풀이로 양념삼아 여가를 즐긴다.
≪附 : 2009년 1.3 골프회 회장을 하면서 월례회 안내장 발송한 흔적들≫
취미와 여가활동
♣ 등산
은퇴생활이 시작되면 누구나 우선 쉽게 즐기는 것이 등산일 것이다.
등산은 건강생활의 기본이며 친구들과 함께 담소하고 소일하기엔 가장 적합한 여가활동이기에 무등산의 평일 오전은 우리세대의 생활공간인양 낯익은 실버들로 붐빈다. 물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산에 오르는 사람도 있지만 분명 등산은 건강·우정·친목을 겸한 은퇴자의 유일한 즐거움이 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고령화 사회의 진면목이 바로 눈앞에 펼쳐진다. 우리 수요산행팀도 은퇴하던 2002년 9월 18일부터 매주 수요일을 등산·만남·친목의 날로 정하였다.
모두가 같은 입장에서 여생을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면서 제2의 인생을 悠悠自適 자연과 더불어 건강도 관리하고, 좋은 음식으로 식도락도 겸해서 볼만한 경치도 두루 살피며 멋스러운 낭만을 즐기고자 제안하였는데 다행히 意氣投合이 잘 되어 처음단계에선 무등산 등산을 시작으로 천관산, 변산반도내륙과 해변등지로 근교의 가 볼만한 곳을 찾아 하루코스를 넉넉히 채우고 다녔다. 그리고 때론 가족동반도 권유하고 알뜰하게 우의도 다지면서 유익하게 시간을 즐기는 모임이 되었다.
우리 모임의 구성원들은 교직에서 단위기관의 CEO을 경험한 품격과 개개인의 원만한 인격을 갖추어졌으니 서로가 배려하고 베푸는 따뜻한 훈정이 넘쳐나길 지나친 생각인지 모르지만 늘 마음에 두고 기대하면서 매주 수요일은 때론 소풍가는 기분으로 정서적 신바람에 젖으며 나서 보기도 하였다. 그래서 좋은 생각, 수준 높은 언어와 유머로 그런대로 격조 있게 정보화 사회에서 앞서가는 실버들처럼 시사정보도 나누고, 다른 동창들의 동정도 살피면서 학창시절로 회귀해 보기도 하면서 때론 70대의 청춘처럼 신나는 모습들도 볼 수 있었다.
10년의 세월 속에 보성 일임산과 초암산, 벌교 부용산, 고흥 팔영산, 담양 금성산성, 장성 축령산, 고창 선운사 등으로 다니고, 계절 따라 완도, 고흥, 강진, 영광, 목포, 여수, 순천 등으로 지방의 향토문화도 답사하고, 노화·보길도, 신지·고금도 신안 증도, 압해도, 소록도로 다도해의 해변의 길손이 되어 노년의 추억도 엮어 보았다. 거제 K.T 휴양소 2박3일은 수요산행팀으로선 매우 알뜰한 가족동반의 여행으로 송헌의 장소 협찬과
통영의 딸·사위의 정성스런 호의로 한려수도의 낭만를 즐기는데 대단한 도움이 되어 체면을 세울 수도 있었다.
그런 수요산행 행사가 근래에는 무등산도 약사암과 세인봉 정도에서 머물게 되었으니 한편으론 섭섭해서 자극도 해보지만 미온적인 반응에 불편한 심기를 표출하여 분위기를 무겁게 하는 요인이 되어 근신할 때가 많아졌다.
從心의 유역에서 서성거리는 우리가 아무리 과욕을 부린다고 해도 불과 몇 년이면 모든 사정이 여의치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후회 없는 노년의 삶을 누리고 싶어 서둘러 보아도 여의치 않아 개인적으로 또는 부분적으로 고려해야 할 때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수요산행이 실시 된지 10년이 다되어 지난 4월 11일 수요일은 500회가 되는 뜻 깊은 날이었다. 그날은 화순 너릿재에서 벚꽃 구경으로 상춘객이 되었다.
개인적으로 은퇴생활의 10년을 의미 있게 장식하고 매듭을 지어보고 싶은 마음으로 등산은 등산답게 무등산도 서석대 정상에 매년 춘·추로 (5,10월) 올라 광주시민의 기상이 발원되는 기분으로 호연지기를 품고 싶어 별개로 실천하고 있고, 작년 가을은 지리산 노고단 정상에서 호남인의 기상을, 또 서울 인왕산 정상에 올라 서울의 고궁과 심장부를 발아래 두고 조선의 500년 역사 속에 한양 도읍지 풍수지리와 정도전과 무악대사의 일화도 상상해 보았고, 남산에서는 외국인 관광객들과 함께 세계속의 서울의 위상이 자랑스러움을 실감나게 조망해 보았다,
그리고 지난 늦가을엔 백두대간의 한줄기인 태백산을 처음으로 찾아 매년 눈꽃축제가 열린다는 당골재에 올라 보았고, 남으론 제주 한라산 기슭만 거닐다가 성산 일출봉에 올라 세계7대 자연경관으로 선정된 축제 분위기를 느껴보았다. 올봄엔 서울 도봉산과 관악산을 오르는 기쁨을 경험하면서 내 나름으론 정말 멋진 10년을 보람 있게 정리해 보려하였다. 옛날엔 이름만 들어도 호기심으로 설렘이 들었던 산들을 이제라도 찾아서 밟아 보는 기회를 가졌으니 퍽 다행으로 생각했다.
앞으로 10년도 이처럼 마음 가는 대로 이름난 명산들은 찾아보고 싶지만 비록 정상에는 오르지 못해도 가까이서 바라볼 정도로 말이다. 체력의 한계에 무력해 질까 두렵다.
♣ 여행
여행에 관한 회고는 지난 5년의 회고록에 “여행으로 더 넓은 세상을 돌아 보며”라는 제목으로 편집하고 소책자를 50권 복사하여 친지들에게 배포하였다.
해외여행으로
2003. 1. 15 ~18 일본 규슈 지방 여행
2003. 3. 8 ~ 14 (베트남 호치민시 한국 총영사관저)
2003. 11.12 ~ 23 지중해 4개국(이집트,터어키,그리스,스페인)
2004. 10.18 ~ 21 일본 홋가이도(북해도) 지방
2005. 5. 17 ~ 18 북유럽 (덴마아크.노르웨이.스웨덴.핀란드) 러시아 5개국
2007. 7. 3 ~ 7 신일본 일주여행
국내여행은 대표적으로 별첨 기록으로 남긴 여행지는
2010 만추에
벗들과 함께 추억 속으로 나들이 2010.11.10~12부산방면
2011 가을수학여행은
서울 도심에서 역사 속으로 · 추억 속으로 11.3~6
2011 겨울 나그네 되어
태백산맥 준령을 넘어 겨울바다로 11.28~30
그밖에 모임과 개별적으로 나들이 한 여행지를 대략 늘어 놓으면
지리산 대원사계곡과 가랑잎학교, 빨치산 남부군 사령부,- 경남사천 비포·서포해변과 백천사 - 진도일주 - 태안반도 - 공주마곡사·성곡사 -
홍천 수목원 - 경주 벚꽃축제·구룡포·감포 - 춘천·소양강·파라호·오대산
월정사·상원사·백담사·낙산사·통일전망대·화진포·동해안 일대 -제주도 일원
장흥회진·완도 금당도 - 신안 비금·도초·우이도 - 서해안 춘장대·대천
지리산 백무동·실상사. 뱀사골 - 강원도 정선·아우라지 - 삼천포·고성 공룡
상족암 - 한산도 .매물도 - 완도 보길도(장학선이용)
앞으로 가 보고 싶은 곳은 찾아 언제든 나설 마음의 준비는 물론 모든 여건도 갖추어져 있으니 동행할 친구만 기다릴 뿐이다.
간편한 복장에 배낭만 메고 지도 들고, 이젠 스마트폰 만으로도 편안하고 즐거운 여행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야말로 노년의 수학여행 기분으로 또는 역사 속으로 추억 속으로 낭만을 찾아 나설 수 있는 기분이 남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노익장의 과시가 아닌가 싶다.
♣ 친구들과의 만남의 기회를 모임 들
▶ 청우회 - 돌벗회 - 삼사회 - 청람회 - 1.3회 - 효동회 - 대성회 -
체우회 - 행복회 - 기우회 - 수요산행 - 띠앗동아리
▶ 1·3 골프회 - 화요 골프회 - 팔팔 골프회 - 상록골프회
▶ 사무실 ( 화, 금) 컴퓨터교육 (화. 목)
인자하고 덕망 높은 白巖 柳漢德친구가 공직퇴임 후 사무실을 개설하여 개인 용무와 독서 등으로 여생을 즐기려고 충장로5가 광주일고 학생기념탑 바로 앞 건물 4층에 마련하였다.
백암은 공직생활에서도 명석한 지력으로 창의적인 기획력과 추진력으로 명성을 얻었고, 청백리로 공직자의 귀감이 되었던 훌륭한 친구가 은퇴한 같은 처지의 친구들에게 만남의 장소로 제공하여 덕담도 나누며 여가를 즐기도록 하였다. 그래서 사무실 명칭도 우정이 넘치는 『벗님들 사랑방』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9명의 친구들은 주2회 (화, 금) 정기적으로 출근하여 바둑과 독서, 컴퓨터 등으로 허물없이 오랜 시간 함께 보내면서 서로의 뜻이 통하는 편안한 친구로 莫逆之交의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참으로 고마운 친구의 배려로 좋은 경험과 배움도 컸었다.
그러나 이제 10년의 세월이 지나고 보니 여러 가지를 고려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사무실 운영에 관한 제반사항을 허심탄회하게 논의를 거듭한 결과, 성실한 새 친구도(砥石,茶軒) 영입하고, 임대료 출자도(각 250만 원씩) 공동으로 부담하여 매월 운영비도 현실화하고, 회칙도 성문화하여 다양한 취미활동을 모두가 합심하여 운영키로 하였다.
우선 분위기를 새롭게 13회 동창의 대표적인 성실성과 헌신적인 봉사로 선후배가 존경하는 지석을 초대회장으로 추대하고 버금가는 호산을총무로 지명하고, 사무실 명칭부터 회원들의 원숙한 기품에 어울리는 고상한 고유명사를 생각하다가 지난 가을에 다녀 온 다산선생의 실학박물관과 實事求是 사상이 머리에 스치기에 다산의 호도 되고 생가 사랑의 당호도 되어 여유당(與猶堂)으로 추천하고 배경을 간단히 설명 한 결과 의견이 일치되어 사무실 명칭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현판도 품격 있게 제작 의뢰하여 걸기로 하고 경비를 희사하고 보니 내 마음이 그리 편하고 흐뭇하였다. 여유당에 대한 사료를 근거로 자세히 밝혀 두는 것이 좋겠다고 제의하여 나름대로 공부하여 요약하여 보았다.
우리 현실정치판의 흑백논리에 상식과 합리가 실종되어 온 국민은 정치에 대한 혐오감으로 혁신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때에 다산의 사상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이다, 금년은 다산의 탄생 250주년이고 뜻있는 해가 되기도 한다.
與猶堂 에 대한 조사한 내용
다산 생가의 여유당(與猶堂) 당호가 도덕경 15장의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에서 따온 것임은 다산의 <여유당기(與猶堂記)>에서 밝혀놓고 있다. 우선 “與”와 “猶”에 대한 해석을 유보하고 이 구절을 번역한 내용은 “與로다!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하고, 猶로다! 사방을 두려워하듯 한다”
“여유당” 당호로 채택한 글자인 만큼 “與”와 “猶”에 대하여 분명 고심했을 것이다. 특히 다산은 “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의 구절을 “머뭇거림이여! 겨울에 시내를 건너듯 하고, 주춤거림이여! 사방 [이웃]을 두려워하듯 한다”로 읽었다. 그러므로 다산이 의도했던 여유당 당호의 뜻은 “머뭇거리고 주춤거림”으로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뜻이다. 다시 되새겨 볼수록 나에겐 ‘신중하고 조심스럽게’(與猶)는 세월의 경륜과 함께 재음미하면서 마음에 담아 두고 싶다. 늘그막에 큰 교훈이 될 것도 같다. 가능하면 다산처럼 학문에는 정진하지 못하지만 끊임없이 읽고, 쓰면서 알아야 할 것들을 많이 배우려는 마음자세만은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여유당의 친구들도 다산의 학문적 경지를 회자하면서 지행일치의 본이 되기를 바란다.
1800년의 봄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알고, 사방을 두려워하고 조심스럽게 살아간 지혜로운 다산의 모습과 학문세계를 더듬어 보고 싶다.
◉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茶山:여유당이라고도 함) 정약용(丁若鏞)의 저서를 한데 모은 문집으로 154권 76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산의 《목민심서》 《경세유표(經世遺表)》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에서 《시율(詩律)》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저술을 총망라한 문집이다.
※ 참고사항
◉ 다산의 삶 - 개혁정치의 큰 뜻을 품고(1783-1800)
다산은 22세 때(1783) 진사시험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다. 이때 당시의 임금인 정조의 눈에 뛰어 인정받게 되는데 그것은 그의 뛰어난 재능과 학문 때문이었다. 다산은 성균관 생활이 끝날 때까지 여러 차례 시험을 통해 정조의 총애를 받았다.
28세때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본격적인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그는 첫 벼슬인 희릉직장을 비롯하여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을 거쳤다. 이즈음 그는 '성설'과 '기중도설'을 지어 수원성을 쌓는데 유형거와 거중기를 만들어서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이로써 많은 경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경기도 암행어사로 나가서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암행어사로서 그는 전 연천 현감 김향직과 전 상양 군수 강명길의 폭정을 고발하여 처벌하도록 하였으며 이를 통해 책임과 관리의 의무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천주교와 만남도 그의 삶에 큰 비난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23세때 천주교를 처음으로 접했다. 이후 그는 한때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심취하기도 하였으나 성균관에서 학업에 정진하느라고 곧 손을 떼었다. 그는 천주교 신앙과 서양과학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기도 하였으니 또한 갖은 시련과 좌절을 맞보기도 하였다.
- 강진 유배지에서(1801-1818)
정조가 서거하고 순조가 즉위하면서 다산의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는다. 소론과 남인 사이의 당쟁이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으로 비화하면서 다산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형을 받게 된다. 이때 다산의 셋째형 정약종은 옥사하고 둘째형 정약전은 신지도로 다산은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 곧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일어나서 서울로 다시 불려와 조사를 받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강진에서의 유배기간은 다산에게는 고통의 세월이었지만 학문적으로는 매우 알찬 결실을 얻은 수확기였다. 5백여권에 달하는 그의 저서 대부분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으니 18년 동안에 걸친 강진 유배기는 저술 작업기간이었다고 할 만하다. 특히 이 시기의 경세학과 더불어 다산사상의 도축을 이루는 경학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는 유배지에서도 제자들을 모아 교육하였으며, 이들 제자들은 또한 다산 저술작업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유배지의 제자들로는 이청 · 황상 · 이강회 · 이기로 · 정수칠 · 윤종문 등을 들 수 있다.
- 말년 고향에 돌아와(1819-1836)
57세 되던 해 가을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온 다산은 저술을 계속하였다. 이때 미완으로 남아있던 목민심서를 완성하였으며 『흠흠신서』, 『아언각비』 등의 저작을 내놓았다. 또한 회갑을 맞이해서는 자찬 묘지명을 지어 자신의 생애를 정리하기도 하였으며, 북한강을 유람하여 여유있는 생활을 보내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신작 · 김매순 · 홍석주 등과 교유하며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는 유배지에서 쇠약해진 심신을 추스리며 자신의 생애와 학문을 정리한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산은 고향으로 돌아온 지 18년 만에 75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자찬묘지명에서 다산은 다음과 같이 자신을 돌아보며 경계했다.
"내가 너의 착함을 기록했으니 여러 장이 되었도다. 너의 감춰진 사실을 죄다 기록했기에 이 이상의 기록이 없으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사서육경을 안다라고 하였으나 그 실천한 바를 생각해보면 어찌 부끄럽지 않으랴. 너야 명예를 널리 퍼뜨리고 싶겠지만 그러나 찬양이야 할게 없다. 몸소 실행하여 증명시켜 주어야만 널리 퍼지고 이름이 나게 된다. 너의 뜻 섞여 어지러운 것을 거두어들이고 너의 분별없이 함부로 날뜀을 그쳐서 부지런히 실천하기에 힘쓴다면 마침내 경사가 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