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차 서울 걷기, 성북동을 다녀온 지가 꽉찬 한달인데 이제야 후기 올립니다.
핑계 거리가 있었지만 이에 대해서는 어치피 3월 초쯤에 대대적으로(?) 알리게 될 테니까 변명은 그때 하겠습니다. ^^
성북동을 코스로 잡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성북동 걷기'라는 단일 테마를 잡아내기가 만만치 않다는 뜻인데요, 성북동은 근현대 문화예술인의 공간이자 대사관저가 상징하는 최고급 부촌이자 북정마을로 대표되는 꼬방동네입니다. 이들을 어찌 하나의 키워드로 묶어낸답니까?
키워드만 없는 것이 아니라 다니는 길도 없습니다. 큰길로 내려왔다가 골목길로 다시 올라가야 합니다. 성북동에는 마을버스가 3대나 다니지만 각국 대사관, 성북동빵집, 삼청각 앞길에는 버스가 서지 않으며 그렇다고 그 길에 인도가 번듯한 것도 아닙니다. 이곳에서는 사람보다 차가 먼저입니다.
그렇지만 없는 것도 만들어내야 하는 산너머살구 카페지기로서,
이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로 퉁쳐서 '문화의 거리'라고 잠정호칭하며 억지로 걷기 코스를 만들어봤습니다.
이렇듯 만만치 않은 '문화의 거리', 성북동을 다녀왔습니다.
12월 16일 토요일 아침 9시 반, 여기에 집결입니다. 지하철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 '한중 평화의 소녀상'이 있습니다. 유명한 나폴레옹과자점 바로 길 건너편입니다.
누가 한국 소녀고 누가 중국 소녀인지 아시겠죠?
여기서 02번 마을버스를 타고 7~8 정거장 지나가면 길상사 바로 앞에 내립니다.
이곳이 길상사가 된 지는 20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천년 고찰이 즐비한 우리나라에서 스무살은 명함도 못 내미는 연혁입니다.
서울 한 복판에 20년 된 새 절이라?
독일이며 핀란드며 대사관저와 최고급 저택이 성곽처럼 에워싼 이 금싸라기 땅 위에 없던 절을 새로 지었다?
우리나라 주요 종교단체가 돈 많은 거야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뭔가 흑막(?)이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ㅎㅎㅎ 흑막까지 들먹이며 거창하게 얘기 꺼냈지만, 사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길상사 스토리가 배경으로 전해집니다. 시인 백석과 김영한의 러브스토리. 이 시에서 나타샤는 김영한이고 나는 백석입니다.
'천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김영한이 남겼다는 대답이 유명합니다. 초고가의 부동산이 절이 된 사연은 이 한마디에 다 담겨있습니다.
길상사에서 어떤 것이 제일 인상적이었냐고 묻는다면 저는 단연 관세음보살상을 꼽겠습니다.
길상사에서 가까운 혜화동성당의 성모마리아상과 비교해보십시오.
느낌이 오지요?
관세음보살과 성모마리아를 1인 2역으로 만들어버린 문제적(?) 작가는 바로 조각가 최종태입니다. 이 분은 가톨릭신자입니다.
그리고 이 분께 작품을 부탁한 사람은 무소유의 법정 스님입니다. 김영한에게 길상화라는 법명을 지어준 바로 그분이지요.
길상사의 젤 안쪽에는 법정 스님이 입적하신 진영각이 있습니다. 툇마루 곁에 아주 소박한 의자가 놓여 있는데 스님께서 자주 앉아 계시던 곳이라네요. 따라서 이것도 무소유입니다.
길상사를 나와 이제 밥 먹으러 갑니다.
그런데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못 지나가고, 점심 먹기 불과 30분 전에 기어이 빵을 드신 분들이 계십니다.
리홀아트갤러리 가는 길에서 삼청각 쪽으로 약간만 벗어나면, 요즘 뜨는 성북동빵집이 있습니다.
…라고 이야기했던 저의 불찰입니다. ㅠㅠ
점심 메뉴는 메밀수제비와 메밀비빔밥입니다.
추워서 허기가 졌는지 모두들 깨끗이 비웠습니다. 30분 전에 빵 드신 분들도 남김없이 드시더군요. ^^
1층은 식당이고 3층은 리홀아트갤러리입니다. 밥 먹은 영수증 보여주면 3,000원 할인해줍니다.
LP 7만장과 진공관 스피커를 갖춘 음악감상 카페입니다.
'지금 그깟 진공관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죽느냐 사느냐! 등업이 되느냐 마느냐!'
사이버 전사는 지금 이 순간 진공 상태입니다.
리홀을 나오면 바로 아래쪽 북정마을 입구에 만해 한용운 공원과 그의 옛집 심우장이 있습니다.
심우장은 만해가 광복을 한 해 앞두고 입적하실 때까지 살던 곳입니다.
조선총독부를 등지느라 북향집을 지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외동딸 한영숙 여사가 거주하다 이사 간 이후, 1999년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만해의 기념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심우장을 나와, 사람 둘이 겨우 다니는 골목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북정마을이 나옵니다.
한양도성 밖 북정마을.
궁중에 진상하는 메주를 쑤느라 사람들이 북적북적대서 북정마을이 됐다는 유래를 전합니다만, 어째 좀 얘기가 허술하지요? ^^
그냥 성곽 북쪽에 있는 동네라 북정마을이 아닐까 싶습니다. 굳이 역사적인 유래를 찾는다면 한성백제 시절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던 북정군(北征軍)이 머물던 곳이라는 설이 오히려 더 그럴 듯해 보입니다.
화목을 때는 난로하며 월동준비하는 연탄까지, 이런 마을이 이제는 서울에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꾸미지 않은 70~80년대 모습은 도시민들에게 이색적인 볼거리를 제공하지만,
졸지에 볼거리가 돼 버린 거주민들은 사생활 침해를 호소합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이화동 벽화마을에서는 주민들 중 몇몇이 나서서 벽화를 지워버리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당장은 사생활 침해가 가장 큰 고통이지만 사실 이곳 주민들이 직면할 더 큰 문제는 삶의 터전에서 결국은 내몰리게 된다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오랜 기간 사람이 살지 않아 퇴락한 가옥입니다.
도시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북정마을 같은 동네는 결국 도심 속의 섬으로 남게 됩니다. 이때쯤이면 거주민들은 하나둘 떠나고 빈집은 그대로 방치되거나 때론 가난한 예술가들의 공방이 됩니다.
환경이 열악한 대신 집값이 싸고 비교적 조용하고 도심에서 가까운 덕에 예술가들에게는 오히려 더 좋은 환경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독특한 카페가 생겨나고 카메라 둘러멘 순례객들이 몰려들고 특이한 음식점이 문을 열고 TV나 잡지에 이색 문화거리로 소개되는 선순환이 이어집니다. 더불어 주거 환경도 개선됩니다. 이대로만 같으면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한편에서 매의 눈으로 때를 기다리던 자본은 이제 슬슬 날개짓을 시작합니다. 찬스가 온 것이지요. 당장은 동네가 더 활성화되지만, 원주민은 하나둘 내몰리기 시작합니다. 임대료를 감당할 수 없어 50년 된 고서점이 오늘부로 문을 닫는다는 등의 뉴스는 대개 이런 배경을 지닙니다. 북촌, 서촌, 심지어 인사동에서까지 이런 소식이 들리더니 며칠 전에는 서울역 근방 만리동이 뉴스에 소개되더군요.
2~3년 후에는 못 볼지 모르니 열심히 만끽하시라고 일러드렸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일정, 이종석 별장입니다.
이종석은 마포나루에서 젓갈장수로 큰 돈을 번 구한말의 대부호입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신분이 낮은 상인의 집에 누마루를 덧대고 화강석 기단을 쌓고 벽돌담을 두르는 것은 조선시대엔 불가능했습니다. 20세기가 되어 일본에 나라를 뺏기며 사대부의 권력은 땅에 떨어지고 이제는 신분이 아닌 재력이 곧 권력이 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종석 별장은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는 작은 상징입니다.
덕수교회에서 인수하여 지금은 교회 수련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팁을 드리겠습니다. 이종석 별장 조금 아래 성북동돼지갈비에서 골목길을 따라 조금만 올라가면 성벽을 손으로 짚을 수 있는 지점까지 가볼 수 있습니다.
오늘 참석자 중 7명은 대학로로 이동하여, 백석과 김영한의 사랑 이야기를 소재로 한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관람했습니다.
2017년 일정은 이렇게 마칩니다. 2018년에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저는 또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첫댓글 몬일을 벌이셨나~~??
3월 대공개! 두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