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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사건은 발안 장날시위 등 수원 화성지역 주민들의 3.1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보복응징으로 일제가 자행한 만행의 결정판이었다. 수원 화성 일대의 시위가 폭동화하면서 격렬하게 진행되자 경기도 경무부에서는 헌병과 보병, 순사로 이루어진 검거반을 이들 지역에 파견하였다. 검거반은 1919년 4월 2-6일, 9-16일 2차에 걸쳐 이들 지역을 돌며 시위의 진원지 역할을 한 마을들을 습격 방화하고, 대대적인 수색을 벌여 시위 주모자들을 검거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제암리사건의 전주곡이라 할 수촌리사건이 일어났다.
수촌리사건은 4월 2일 장안면과 우정읍 주민들이 합세하여 벌인 격렬한 독립 만세 시위가 그 도화선이 됐다. 4월 3일 오전 장안면 수촌리와 석포리 주민들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로 몰려가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리고 우정읍 주곡리 일대의 시위대와 쌍봉산에서 합류하여 집회를 가진 뒤 우정읍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2천여명으로 불어난 군중들은 총을 쏘며 맞서는 일본인 순사를 처단한 뒤 주재소 건물을 방화하였다. 면사무소가 파괴된 것은 물론 주재소가 불에 타고 일본인 순사까지 살해를 당하자, 일본군 검거반은 수촌리를 그 진원지로 파악하고, 그곳의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전교사 백낙열과 감리교 전도사 김교철 등을 체포하기 위해 4월 5일 새벽 3시반경에 수촌리를 급습하였다. 이 과정에서 검거반은 천도교 전교실과 감리교 예배당은 물론 민가에도 불을 질러 마을 전체 42호 가운데 38호가 소실되었다. 검거반은 4월 11일에도 수촌리를 비롯한 장안면, 우정읍내 25개 마을을 포위하고, 204명의 시위 주모자들을 검거하였다. 이렇게 두차례에 걸친 일본군의 검거작전은 이 지역의 격렬한 만세시위에 대한 보복응징의 성격이 짙었으며 4월15일 제암리사건은 바로 그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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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30일 제암리를 비롯한 인근의 주민 천여명은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때 일제 경찰의 발포로 시위군중 3명이 사망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흥분한 시위군중이 일본인 가옥에 돌을 던지고, 일본인 소학교에 불을 지르자 사사카(佐板)를 비롯한 일본인 43명이 30리 밖의 삼괴 지역으로 피신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정미업자 사사카는 그 보복으로 4월 15일 제암리사건 당시 일본군대의 길 안내를 맡기도 하였다. 발안 인근의 마을 주민들은 4월 1일에도 발안장 주변의 산에 봉화를 올리고 시위를 하였다.
3월 30일의 발안장날을 이용한 독립 만세시위는 팔탄면 가재리의 유학자 이정근, 장안면 수촌리의 천도교 지도자 백낙열, 향남읍 제암리의 안정옥(천도교),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등에 의해 계획되었다. 3월 30일 정오 이정근의 '대한독립만세' 선창으로 시작된 장날시위는 삽시간에 8백여명으로 불어난 군중들의 독립만세 물결로 퍼져 나갔다. 군중들이 발안주재소로 몰려가 만세를 부르자 일본 순사들은 위협사격을 가했고, 군중들은 돌을 던지며 맞섰다. 급기야 일본군 진압부대는 주재소로 다가서는 군중들에게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이정근과 그의 제자 김경태가 칼에 맞아 순국하였고, 제암리·고주리사건에서 희생된 홍원식·안종후·안진순·안봉순·김정헌·강태성(제암리 기독교인), 김성렬(고주리 천도교인) 등이 수비대에 붙잡혀 일제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풀려 났다.
이렇게 발안장날 시위는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의 제휴를 기본축으로 하여, 폭력까지 수반하여 격렬하게 진행된 특징을 보이고 있었다. 더불어 제암리 감리교회의 지도자 홍원식(대한제국 군인 출신, 군대해산후 수원 일대에서 의병장으로 활약, 1914년 제암리로 이주하여 서재를 세우고 교육계몽운동 전개), 안종후(제암교회 설립자) 등과 고주리의 천도교 지도자 김성렬 등이 종교의 차이를 떠나 거족적 차원에서 결성한 비밀결사 '구국동지회'가 만세시위의 배후에 있었던 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19년 3월 30일 발안장날 시위 당시 군중들의 주재소 습격사건은 4월 15일 향남읍 제암리와 팔탄면 고주리에서 일제가 자행한 보복학살의 도화선이 되었다. 3월 30일, 4월 5일 발안 장날 시위와 4월 3일의 화수리·수촌리 시위가 벌어진 후 발안지역 치안을 맡기 위해 지원나온 부대는 육군 '보병 79연대' 소속이었다. 중위 아리타(有田俊夫)가 지휘하는 보병 11명이 발안에 도착한 것은 4월 13일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임무는 토벌 작전이 끝난 발안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의 시위 주모자들은 2차에 걸친 검거 작전으로 대부분 체포된 반면 발안 시위를 주도했던 제암리 주모자들은 체포되지 않아 불안 요소로 남아 있음을 안 아리타는 제암리를 토벌하기로 하였다.
아리타는 4월 15일 오후, 부하 11명을 인솔하고 일본인 순사 1명과 제암리에 살다가 나온 순사보 조희창, 그리고 발안에서 정미소를 하고 있던 사사카(佐板)의 안내를 받으며 제암리로 떠났다. 마을에 도착한 후 조희창과 사사카를 내세워 마을의 성인 남자들을 교회로 모이게 한 뒤 사격을 가하고 예배당과 민가에 불을 질러 23인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이웃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6명을 총살하였다. 증언 자료들을 종합하여 사건의 진행과정을 재구성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그러나 시간과 이름 등 세밀한 부분에서 오류가 있을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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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아리타 부대는 발안에 살던 일본인 사사카와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을 내세워 제암리 주민 가운데 성인 남자(15세 이상)들을 교회에 모이게 하였다. ② 미리 명단을 파악한 듯 오지 않은 사람은 찾아가 불러왔다. ③ 아리타 중위가 모인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 묻자 '안'(안종후 권사로 추정)이란 교인 대표가 대답하였다. ④ 아리타 중위가 교회 밖으로 나오자마자 사격 명령을 내렸고 이에 교회당을 포위하고 있던 군인들이 창문을 통해 안으로 사격하였다. ⑤ 사격이 끝난 후 짚더미와 석유를 끼얹고 불을 질렀다. ⑥ 바람이 세게 불어 불이 교회 아래쪽 집들에 옮겨 붙었고 위쪽 집들은 군인들이 다니며 방화하였다. ⑦ 교회에 불이 붙자 '홍'(홍순진으로 추정)과 '면에 다니던 사람', 그리고 '노경태'(노불의 증언에는 '노')가 탈출을 시도하여 '홍'은 도망치다가 사살되었고, '면에 다니던 사람'(안상용으로 추정)은 집으로 피신했다가 발각되어 살해당했고, '노경태'는 산으로 피해 살아 남았다. ⑧ 탈출하다 사살된 것으로 보이는 시체 두세 구가 교회 밖에 있었다. ⑨ 마을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달려 온 '강'(강태성)의 아내(19세)가 군인에게 살해당하였다. ⑩ '홍씨'(홍원식 권사) 부인도 군인들의 총을 맞고 죽었다. ⑪ 군인들이 마을 고주리로 가서 천도교인 여섯 명을 총살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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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 사건이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된 토벌 작전으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일본측 주장대로 "조선에 주둔한지 얼마 안되어 현지 상황에 익숙치 못한 일부 군인들이 일본인들의 희생에 흥분하여 일으킨 '우발적인' 사건"은 아니라는 것이다. 척후병을 미리 보내 제암리 주민들의 퇴각로를 차단한 것이라든가, 순사 보를 통해 제암리 기독교와 천도교 지도자 명단을 미리 파악하고 소집한 점, 고주리에 천도교 지도자들을 파악해 살해한 것 등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암리에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이 사건 이튿날 신속하게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은 언더우드, 테일러 일행이 자동차로 수촌리현장을 확인하러가던 도중 우연히 제암리의 참상을 목격한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스코필드선교사는 4월 18일 단독으로 제암리와 수촌리를 방문한 이래 수차 왕래하며 사후 수습을 돕는 한편, 사건 보고서를 캐나다와 미국의 친지들에게 전달하였으며 "끌수 없는 불꽃"이란 책을 펴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제암리사건은 제암리·고주리사건이라 불러야 합당하다. 향남읍 제암리와 팔탄면 고주리는 비록 면 단위는 달랐지만 경계를 맞대고 이웃해 있는 마을들로서 발안장날 시위를 비롯한 독립만세운동 과정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일본군의 학살만행 또한 같은 시간대에 동일한 선상에서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제암리사건의 참상을 세계에 알린 것이 외국인 선교사들이었고, 그들의 관심이 제암교회에 대한 방화와 기독교인 학살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흔히 제암리 기독교인들의 독립만세운동에 대한 일제의 보복 만행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제암리의 경우만 해도 희생자의 대부분은 기독교와 천도교인이고, 고주리의 경우 천도교 지도자 가족 6인으로 희생자 23명 가운데 11명이 천도교인으로 10명의 기독교인(종교미상 2명) 못지않은 수를 차지하였고, 고주리의 경우는 6명 모두가 천도교인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는 천도교인(17명)이 기독교인보다 더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시말해 제암리·고주리 주민들의 독립만세운동은 기독교인과 천도교인들이 제휴를 기본동력으로 하여 전개되었던 것이다.
일본군의 보복 만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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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갈수록 시위가 격화되자, 일제는 수원·안성지방의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특별검거반을 편성하고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 특별검거반이 편성·파견된 이유로는 첫째, 3월 28일 사강리에서 경찰관 주재소가 파괴되고 노구지(野口) 순사부장이 살해된 일, 두번째, 28일 오후 1시 오산에서 금융조합 및 일본일 가옥이 불타 2만 2천 여원의 손해를 보았고, 29일에는 800여 명의 한인이 주재소·면사무소·우편소·일본인 가옥 들을 파괴하며 오산역을 습격한 일, 세번째, 3월 30일 발안장에서 1천명의 노상 연설 만세시위, 또 일본인 소학교 방화, 4월 1일에는 발안장 주위 산상 80여 개소에서 봉화를 올려 일본인 가족 43명이 피난을 가게 된 일, 네번째, 3월 31일 밤 안성군 양성에서 약 2천명이 모여 경찰관 주재소·우편소 및 면사무소를 파괴·방화하는가 하면 전주(電柱)까지 쓰러뜨렸던 일, 다섯번째, 3월 31일 안성읍내에서 오후 5시에 약1천명이 모여 운동을 해서 군인까지 동원되어 가까스로 진압했던 일, 여섯번째, 4월 3일 약 1천명이 장안·우정읍 사무소를 파괴하고 화수리 주재소를 불태우며 가와바다(川端豊太郞)순사를 살해한 일 등의 과격한 운동이 3월 28일 이후 계속 일어나, 이를 진압하기 위해 경기도 경무부장이 검거반을 편성,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파견된 자가 경기도 경무부 경시(警視)이며 경성헌병대 부관 하세베(長谷部) 대위이다. 그는 4월 2일 헌병·순사 11명을 이끌고 먼저 안성군 양성방면에 출동해서, 원곡면을 지나 양성방면으로 가는 길가에서 주동자들을 검거한 후, 안성에 4명의 부하를 남겨두고 4월4일 귀대하였다. 귀대 후 그는 수원서장으로부터 4월 3일의 화수리 방면의 시위와 4월 5일 장날을 기해서 발안장에 1만 2천여명의 운동원이 모일 것이라는 정보에 따라 4월 4일 오후 6시에 발안장에 도착하여 그 일대를 지키며 화수리 방면의 정황을 알아보는 한편, 6일 오전 1시에 헌병 경찰관 9명 및 보병 5명을 이끌고 수촌리로 가서 6명을 검거하고 수원을 거쳐 서울로 귀대하였다.
이 때 수촌리가 제일 먼저 보복을 당한 이유는 화수리 운동의 주동자 천도교 전교사 백낙열, 감리교 전도사 김교철이 수촌리에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수촌리 동민들은 깃대에다 '조선독립만세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라는 글을 써가지고 나왔을 뿐 아니라 화수리 사건의 주동자 27인가운데 수촌리인들이 14명이나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날 아침 수촌리는 많은 집들이 불탔고 그 가운데 천도교 전교실과 감리교회당도 함께 불탔다. 그리고 왜병의 총검에 많은 사람들이 살상을 당하였다. 4월 15에도 또 한차례 보복을 당하였다. 이때 수촌리에는 4호만 남고 38호가 전소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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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일부터 6일까지의 1차 검거로도 만세시위가 진정이 되지 않자, 4월 9일 쓰무라(律村) 헌병특무조장 아래 하사 이하 6명과 경찰관 4명이 고옥(古屋) 경찰서장 이하 7명과 보병 15명의 협력을 얻어 3개반을 편성하여 오산·화수리 반도 및 사강 반도로 검거를 또 다시 나섰다. 우선 검거반을 4월 9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오산면 소재지에서 검거하고 오후 2시부터 7시 30분까지는 그 부근 부락 8개리에서 검거를 했다. 또 다시 4월 10일 오전 4시에 오산에서 검거를 실시해서 주동자인 감리교회 목사 김광식 이하 63명을 검거하여 수원경찰서로 이송하고, 곧 바로 발안장으로 가서 그날 밤부터 11일 오후 5시까지 화수리를 중심으로 그 부근 우정·장안 양면 내 25개리에서 주동자 이하 204명을 검거하고 증거물을 압수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12일에는 남양으로 가서 13일 오전 3시부터 팔탄면 하저리 부근의 부락 4개리에서 주동자 이하 5명을 검거하였다. 다음날 14일 오전 6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사강리를 중심으로 그 부근 송산면·마도면·서신면의 부락 20개리에서 주동자 이하 175명을 검거하고 증거품 여러점을 압수하였다. 그리고 다시는 참가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1,202명을 방면하였다. 화성지방 검거 및 손해상황은 아래의 표와 같다
검거지방 |
검거로 인한 손해 |
검거인원 |
검거지방 |
검거로 인한 손해 |
검거인원 |
소실 호수 |
사망 |
부상 |
소실 호수 |
사망 |
부상 |
송산면 |
사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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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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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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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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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존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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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리 |
마도면 |
해문리 |
서신면 |
전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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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안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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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175명 |
우정읍 |
조암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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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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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각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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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리 |
팔탄면 |
하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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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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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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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주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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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하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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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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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204명 |
장안면 |
수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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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포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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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정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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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안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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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은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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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곡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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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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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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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2 |
이상 63명 |
계 |
329 |
46 |
22 |
442 | * 소밀(騷密), 弟745호號, 대정(大正) 8년 4월 23일, 조선헌법대사령관 조선총독부 경무총장 고지마(兒嶋摠次郞)의 보고
이렇게 검거반이 활동할 때는 검거만이 아니라 많은 집들이 불탔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화성지방 10개면 63개리에서 329채가 불탔는데, 그들 자신도 화재의 원인은 야간에 있어서의 혼잡과 바람이 강하였기 때문에 실화(失火)한 것도 있을 것이나 검거반의 방화(放火)로 인한 것도 적지 않음을 확인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형편상 이를 인정함은 적당하지 않아 화재를 표면상 전부 실화로 인정하기로 하였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서 불에 탄 집들은 거의 다 방화로 봄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이 제 2차 검거반이 보복 만행을 하는 가운데 특기할 사실은 사찰 1개를 불지른 것이다. 이것은 화수리 앞산 솔밭에 있는 봉래사인데 그 때 주지 박금봉(朴錦峰)은 불길에 놀라 밖으로 나와 불을 끄다가 수비대에게 붙들려 고문 끝에 다리 뼈가 부러져 평생 불구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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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암리
2차 검거반이 4월 9일부터 14일까지 삼괴반도(三槐半島) 및 사강반도를 휩쓸며 검거하고 있을 때, 4월 13일 보병 제79연대 중위 아리타(有田俊夫)가 발안장의 수비를 명령받고 도착하였다. 그들은 4월 15일 오후 2시부터 3시 사이에 40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이자 운동자들을 해산시켰으나. 기독교인들이 또 다시 운동을 하였다. 그동안 3월 하순부터 4월 초순에 이르는 발안의 3·1운동은 그 원인이 제암리의 천도교 및 기독교인에게 있다는 것을 안 아리타(有田)는 또 다시 그러한 운동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부하 11명과 순사·순사보를 이끌고 당일 오후 3시경 제암리로 향했다.
이들은 주일날이 아니므로 특별이 훈시할 말이 있다 속여 40세 이상 된 남자는 모두 교회로 모이라고 하였으나 모이지 않자 15세 이상은 모두 모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교회당으로 모일 때, 정문 앞에서 수비대는 오는 사람마다 키를 재어서 총길이 보다 작은 아이는 돌려보내고 큰 사람은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교회당에 모인 주민에게 훈계를 하는 척 하더니, 갑자기 동민들에게 기독교의 교지(敎旨)를 질문을 하였다. 그 질문에 대해서 안(安)이라는 기독교인이 일어나 성서는 인간 상호간에 친밀하게 지낼 것과, 신을 경건하게 섬기고 받드는 것과, 신은 최후의 심판을 가르치고 있다고 답변하였다. 이에 헌병 중위는 기독교도들의 행위을 그 교리에 어긋났다고 일갈하더니, 교회당 밖으로 걸어나가면서 뭐라고 세번 날카로운 구령을 외쳤고, 그 구령에 맞추어 입구에 섰던 병사들이 교회당 내부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교회당 바닥에 앉아 있던 주민들은 뛰어 오르고 쓰러지는 수라장을 이루었다. 그 가운데 김정헌(金正憲)·안경순(安慶淳)·홍원식(洪元植)·노경태 등은 탈출에 성공했으나 김정헌·안경순·홍원식은 교회당 밖에서 일병에 의해서 타살되었고, 노경태만이 살아서 도망쳤다. 또 사랑하는 남편의 불행한 급보를 듣고 달려온 홍원식의 부인 김씨, 그리고 강태성의 부인 김씨도 일병에 의해 타살되었다. 이 때의 교회당 안팎에서 불타 죽은 사람들의 이름은 다름과 같다.
안정옥(安政玉)·안종린(安鍾麟)·안종악(安鍾樂)·안종환(安鍾煥)·안종후(安鍾厚)·안경순(安慶淳)·안무순(安武淳)·안진순(安珍淳)·안봉순(安鳳淳)·안유순(安有淳)·안종엽(安鍾燁)·안필순(安弼淳)·안명순(安明淳)·안관순(安官淳)·안상용(安相鎔)·조경칠(趙敬七)·홍순진(洪淳晋)·김정헌(金正憲)·김덕용(金德用)·강태성·동 부인 김씨·홍원식·동 부인 김씨 이렇게 23인이 순국하였다. |
고주리
제암리에서 만행을 저지른 일병들은 불과 10분 거리 밖에 안되는 이웃마을 고주리로 갔다. 이 마을은 일찍이 천도교가 들어와 전교실을 두고 고주리를 비롯한 제암리·가재리 등지의 천도교인들을 지도하였다. 방금 제암리 교회당을 불태운 군인들은 이제는 천도교 전교실을 불태우고 천도교 일가를 학살하기 위해 고주리로 갔다. 그들은 전 부락을 완전 포위하고 김흥열(金興烈)·김성열(金聖烈)·김세열(金世烈)·김주업(金周業)·김주남(金周男)·김흥복(金興福) 등 6명을 밧줄로 결박하여 뒷간으로 끌로 올라가서 칼로 차례차례 목을 베고 난도질을 하여 참혹하게 죽였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밖에 나와서 이 광경을 보려고 하면 사정없이 칼로 목을 쳐 죽인다고 위협하면서 못보게 하였다. 왜병들은 6명의 시체를 노적가리까지 끌고 가서 노적가리와 시체를 함께 불살라 버렸다. 이렇게 참혹하게 순국(殉國)한 이들은 한 집안의 조부와 부친 그리고 형제간들이며, 열렬한 천도교신자로서 동리에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그리고 평소 독립운동에 앞장 서 왔으며 또 왜경들의 무리한 요구나 박해에도 절대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하던 애국지사들이 일가로 지목되어 오던 터이라, 왜경들은 그러한 김씨 일가를 학살해 버릴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김씨 일가족의 남자들이 전멸하는 중에서도, 당년 9세인 김덕기는 어린 나이에 조부·부친·삼촌 등 6명이 전부 소살(燒殺)당하는 광경을 보고 '나만 살면 뭘해! 같이 죽여라!'하며 왜병들의 서슬이 퍼런 총칼 속으로 뛰어 들며, '왜 우리 집 어른들을 모두 죽이느냐!'고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이때 무자비한 왜병 1명이 구두발로 걷아차서 울타리 밑 도랑으로 굴러 떨어진 김덕기는 몸을 일으켜 또 다시 덤벼들려 하는 것을 그의 형수되는 분이 김씨 일가의 남자라고 이 소년만이 유일한 생존자인 것을 깨닫고, 이 소년을 끌어 당겨 치마 폭에 감추어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왜병들의 만행에 격분한 동민들은 산상에 봉화를 올리며 조국의 자주독립을 기원하는 한편, 왜병들의 갖은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정면 대항하여 끝까지 싸웠다.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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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내적으로는 1910년 일제의 무단통치를 근본적으로 파탄시켜 식민지 지배정책의 변화를 불가피하게 하였으며 대외적으로는 일제 식민지 지배하 한국민족의 고통과 잔혹한 식민통치의 실상을 폭로하는 한편 한국민족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자주 독립정신을 전세계에 널리 전파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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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1운동을 통하여 한국민족은 민족역량과 독립역량을 비약적으로 확대 · 발전시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상해에 수립하여 1910년 단절된 민족국가의 맥락을 잇고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케 하였고, 만주 · 노령지역에서의 독립군 무장투쟁을 촉발하였다. 또 국내에서는 확대된 민족역량을 바탕으로 3 · 1운동 후 각계 각층의 항일 민족운동을 고양시켜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을 기약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와 같은 3 · 1운동의 중앙사적 의의는 지방사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3 · 1운동 후 항일 민족운동단체의 조직과 활동은 전국적으로 활발하게 진행되어 갔다. 그러한 양상의 일환으로 화성지방에서도 3 · 1운동 직후 구국민단이 조직되어 활동하고, 1920년 후반기에는 수원농고의 학생단체와 신간회인 지회가 결성되어 활동하는 등 민족운동이 지속되었는데, 그것은 모두 화성의 3 · 1운동이 갖는 특성과 무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하여 성숙된 이 지방주민의 민족역량이 표출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화성 지방 3 · 1운동의 특성을 통해 그것이 지닌 지방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우선 이 지방 3 · 1운동의 가장 큰 특성은 만세시위가 처음부터 혁명적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예컨대 식민통치 하부기관인 면사무소와 주재소, 우편소를 파괴 · 방화하고 일본경찰을 처단하며 일본인 상점까지를 파괴하고 있는 사실은 다른 지방에 비해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혁명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또 만세시위를 천도교도와 기독교도가 같이 조직하여 전개하고 있는 사실이 보이는데, 이것은 민족적 동질감과 향토애가 종교적 이질감을 극복하고 있는 증거이며, 무엇보다도 이 지방주민의 인간적 유대가 남달랐음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이 3 · 1운동에서 표출된 화성지방 독립운동이 갖는 혁명적 성격의 전통과 지방민들의 공고한 인간적 유대는 이후 이 지방에서 출현한 항일 민족운동단체의 조직과 활동 기반이 되었음은 의심할 바가 없는 것으로 이 지방 3 · 1운동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의라고 하겠다.
신극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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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역사의 새로운 기운이 감도는 지금 우리 화성시민은 해방 이래 단 한번도 달라지지 않은 일본의 철면피하고도 부당한 자세를 보면서 결연한 마음으로 오늘 제56주년 광복절을 기해 범시민 차원에서 신극일(新克日) 운동을 선언 한다. 우리 화성은 민족의 정기가 하나로 분출(噴出)된 3.1운동의 자랑스런 중심지이자 선조들이 제암리 교회에서 잔악(殘惡)한 일제에 의해 몰살당한 역사적 비극의 장소로서 우리 후손들은 일본에 대해 결코 지울 수 없는 한을 가슴에 품고 살아 왔다. 그러나 그동안 인류평화라는 대국적(大局的) 견지에서 일본의 야만적(野蠻的) 행위에 대해 속으로 울분을 삼킨 채 아픈 역사를 잠시 접어두고 일본이 성숙한 국제시민으로 참회의 새 역사를 일궈가기를 조용히 지켜봐 왔다.
그런 가운데 오늘 화성의 후예들이 분연히 일어나 신극일(新克日)을 선언하는 이유는 그동안 참고 참아왔던 인내가 극에 달해 더 이상 참는 것은 우리 선조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자 일본의 만행(蠻行)이 왜곡(歪曲)되어 미화되는 것을 피해자 후손으로서 도저히 묵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늘의 신극일 선언을 통해 일본이 지난 날 우리 화성과 전국에서 행해 왔던 수많은 만행(蠻行)을 지금이라도 진심으로 참회하는 가운데 우호(友好)와 선린(善隣)의 대상으로 돌아오길 고대하며, 일본국민과 일본정부의 각성을 촉구하는 바이다.
양식(良識)있는 일본의 지성들이여 돌이켜 보라. 그대들 일본은 패망(敗亡) 이전(以前)에는 대동아(大東亞) 공영(共榮)이라는 해괴망측한 논리로 주변국(周邊國)들을 침탈(侵奪)하고 이웃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만행들을 거듭하더니 패망 이래 단 한번도 참회의 자세를 갖지 않은 채 시시각각(時時刻刻) 망발을 늘어놓고 있어 국제사회의 심각한 불신과 고립을 자초(自招)하고 있다.
그대들 일본이 아무리 국제사회에서 경제적 지위를 높인다 하더라도 도덕적 자성을 기초(基礎)로 하지 않는 한 영원히 졸부 이류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지구촌 공동체의 존경을 받는 이웃으로서 어떠한 리더십도 회복(回復)하지 못할 것임을 준엄(峻嚴)히 경고하는 바이다.
조상 대대로 우리 민족의 강토였던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영유(領有)권 주장을 하는 것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거니와 명명백백(明明白白)한 역사적 사실마저 왜곡하여 자신들의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라고 교육하려는 것은 스스로 도덕도 지성도 없는 삼류 민족이라는 것을 세계에 광고하는 우스꽝스러운 일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대들 일본이여 크게 눈뜨고 다시 볼지어다. 그대들과 똑같이 인류를 전쟁의 위협에 몰아넣었던 독일은 진정한 참회(懺悔)와 자성(自省)을 통해 지금 얼마나 존경받는 모범국가로 국제사회에 복귀했으며, 세계 지성들로부터 찬사(讚辭)와 우러름을 받지 않는가.
그대들 일본이 독일과 같이 피해국가에게 경제적 보상을 하고, 진심어린 사과를 하는 것은 그대들이 후안무치(厚顔無恥)하게 대처하고 있는 위안부(慰安婦) 문제에서도 보아왔듯이 이제 거듭된 요구에 지쳐 기대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마저 왜곡해 과거를 미화하고 인류사의 죄과(罪過)를 마치 자랑스러운 조상들의 업적인양 후손들에게 전하는 것은 국가적 양식을 떠나 자식을 가르치는 부모로서도 도저히 행할 수 없는 인륜(人倫)적 범죄임을 일깨워 주고자 한다. 아울러 이웃 국가로서 함께 평화를 말하고, 우호선린(友好善隣)을 주장하려면 우선 기본적 양식(良識)을 회복해 진정한 이웃으로서 책임 있는 자세를 갖출 것을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바이다. 우리들의 진심어린 충고와 기회 마련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이 여전히 무지몽매하여 준엄(峻嚴)한 역사적 경고를 듣지 못할 때 우리도 더 이상 그대들의 양식(良識)있고 인내심 있는 이웃으로 남아 있기는 어렵다는 것을 말해 주고자 한다.
일본의 뜻있는 국민들이여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할 지어다. 연일 일본정부와 소위 우익(右翼)이라는 자들이 억지 주장으로 그대들 일본국민의 자존심과 도덕적 최소 수준을 더욱 낮추면서 국제적인 고립을 불러오는 엉터리 논리들은 그대들은 여전히 눈감고 침묵함 할 것인가. 그대들 전체의 망신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옳지 않은 일은 앞장 서 막는 것이 그래도 양식(良識)있는 사람들의 책무(責務)가 아니겠는가.
아울러 이 땅의 국민들에게도 고하노니 오늘 광복절을 맞아 다시금 일본의 과거 만행을 되새기며 우리 후손들에게 치욕(恥辱)의 역사를 일깨워 줄 것을 권한다 용서와 별개로 우리 후손들이 역사를 망각(忘却)할 때 일본의 침략주의적(侵略主義的) 근성이 재발될 것이며, 과거처럼 총칼은 아닐지라도 경제와 문화라는 새로운 수단으로 국가적 수탈(收奪)과 민족정기의 훼손이 일어날 수 있음을 잊지 말자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오늘 우리 화성시민들이 먼저 선조들의 3.1운동 정신을 이어받아 일본의 만행을 규탄(糾彈)하며 분연히 결의(決意)를 다시는 것을 계기(契機)로 국민 모두가 한 마음으로 진정한 극일(克日)의 대열(隊列)에 동참 할 것을 권고하는 바이다. 요원의 불길처럼 우리 국민들의 동참 속에 일본의 각성(覺醒)과 진정한 우호선린(友好善隣)도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일제의 악랄한 만행과 일본정부의 양식 없는 행동들을 익히 알고 있는 우리들은 단지 정부의 외교적 대응(對應)에만 의존하지 않고 생활 속의 작은 실천으로 일본의 각성을 촉구함으로서 민족자존을 회복하고, 나아가 2002년 월드컵 공동 개최를 계기로 성숙한 한일 우호관계 정립이 이루어지도록 양국 정부에 무언의 압력(壓力)을 가할 것을 제안하면서 적극적인 동참을 기대하는 바이다.
우리의 이러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교과서 왜곡 문제를 조속히 시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의 문화와 제품을 거부함으로써 선열들에 조금이라도 보답하는 한편 그들을 더 이상 우호의 대상으로 될 수 없음을 만천하에 공표하노라.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 화성시민은 오늘 뜻깊은 광복절을 맞아 제암리 순국선열의 자랑스런 후손으로서 선조들의 애국애족 정신을 이어받아 민족정기의 새로운 회복을 위해 결연(決然)한 자세(姿勢)로 생활 속의 극일(克日)을 실천할 것을 다음과 같이 결의하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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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 시정되지 않는 한 일본제품의 불매운동은 물론 보유하고 있는 일제 제품의 폐기와 사용하지 않기 운동을 적극 실천한다. - 우리는 일본의 교과서 왜곡이 시정되지 않는 한 일본문화 추가개방에 반대하며 영화, 음반 등 일본에서 수입된 각종 문화상품을 사지도 보지도 않는다. - 우리는 생활속에 침투되어 있는 일본용어의 잔재들을 몰아내고 후손들에게 일제의 만행과 역사 왜곡을 강도높게 교육시켜 제암리 후손으로서의 긍지를 살린다. - 우리는 정당한 요구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제암리 등 일제의 잔악한 역사적 만행을 체계적으로 홍보해 일본의 국제적 여론 환기를 주도한다. - 우리는 우리의 선언을 국제적인 의지로 결집시키기 위해 전국의 친인척들에게 널리 알리고 친극일운동에 동참시켜 나간다. - 우리는 일본 국민들에게 일본이 우리나라와 주변국에서 저지른 참혹한 만행을 인터넷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알려 일본 국민들 스스로의 각성을 촉구해 나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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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병국 김관식 김명숙 김영환 김용성 류세현 박상림 박영근 박종일 배승천 백성현 신경수 신선희 안용웅 이대용 이승은 이신재 이정남 이호섭 임택명 장두현 장명원 정락 정인자 차진환 천광인 최귀남 최기용 최선덕 최원규 최홍규 홍순범 홍준기
화성의 독립운동가 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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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정근(李正根) 조선 철종 7년 1856~1919 |
팔탄면 가재리 출생의 교육가·독립운동가. 19세 때 결혼한 뒤 향리에서 농업에 힘쓰는 한편 한학에 정진, 28세 때 부터 인근 농촌을 순회하며 한학(漢學)을 교육했다. 33세 때는 구한국정보의 궁내부 주사가 되었다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향리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농촌의 문맹퇴치운동과 독립운동 동지를 규합하려는 뜻에서, 먼저 인접지인 팔탄·향남·봉담·정남·우정·남양 등 7개 면을 선정하여 한문서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했다. 그는 ‘일본이 3년을 못가서 망한다’는 뜻에서 ‘왜왕(倭王)3년’이라는 구호를 공공연히 외치다가 일경으로부터 수차의 고문과 폭행을 당하기도 하였다. 1919년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그는 일본의 음모로 독살된 것이라고 분격했으며, 인근 각지의 동지들로 하여금 밤마다 산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서울을 향해 망곡제(望哭祭)를 드리게 하여 일경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63세가 되던 1919년 3월 20일 그는 서울의 동지에게서 전달받은 독립선언문을 복사, 각지의 지도급 동지 800여명에게 전달하며 독립만세시위를 주동했다. 1919년 3월 30일 발안장날 만세시위를 주도했으며, 남자들은 백립(白笠)이나 갓에 흰 천을 두르게 했는데, 이는 국상에 대한 권위와 함께 독립운동에 호응한다는 뜻이었다. 이 날 7개 면민 1천여명의 군중이 모이자 그는 시위대의 선두에서 발안주재소까지 행진하여 갔다. 이때 대기하고 있던 경찰·헌병들이 그의 배를 칼로 여러 번 무참히 찌르자. 그는 쓰러지면서도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1968년 대통령표창(大統領表彰)이 추서되었고, 발안어귀에는 그의 순절(殉節)을 기리는 창의탑이 세워져 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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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흥렬(金興烈) ?~1919 |
팔탄면 고주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884년경에 동학에 입교하였다. 1894년에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백낙열과 함께 농민군을 모집하여 수원접주 고석주(高錫柱) 휘하에서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 후 고향에서 천도교 전교사로서 고주리·제암리의 천도교인에게 교리를 가르쳤으며, 1910년에는 수원교구의 순회교사가 되었다. 그는 1914년에는 천도교에서 실시한 105일간의 연성수련을 받았으며, 1918년에는 교주 손병희가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자 전답을 처분하여 성금하기도 하였다. 1919년 4월 5일의 발안시위에 동생인 김성열과 함께 동민을 인솔하여 참여하였고, 4월 15일에 이웃 제암리에서 만행을 저질렀던 일경들에게 피체당하여 일가인 김성열(金聖烈)·김세열·김주업(金周業)·김주남(金周男)·김흥복(金興福)등과 함께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들의 공을 기려 1969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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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백낙열(白樂烈) 조선 고종 2년 1865~1936 |
장안면 수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884년경에 동학에 입교하였다. 1884년에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동학농민군을 모집하여 수원접주 고석주(高錫柱) 휘하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1910년에는 천도교 남양교구의 금융원이 되었으며 남양교구강습소를 설치하여 교인들을 교육시키는 등 천도교 포교활동을 하였다. 1919년의 3·1운동때는 김성열·안종후(安鍾厚) 와 함께 이지역 대표로 파고다 공원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4월 3일의 장안·우정읍 만세시위에는 주동자로서 활동하였다. 그는 시위이후 체포를 피하여 약 3년간 충청도 계룡산 등지에서 은거하였으며, 이후 고주리의 천덕산 천덕바위로 옮겨와 신분을 숨긴 채 10여 년 간을 은신하다가 1936년에 사망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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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홍원식(洪元植) 조선 고종 14년 1877~1919 |
향남읍 제암리 태생의 의병장·독립운동가. 대한제국군 서울 사위대(衛隊) 제 1대대 군인으로 서소문 병영에서 근무하던 중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군대해산을 당하자 충남지역을 비롯, 각처로 전전, 왜군과 싸우며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1910년 이후 고향 제암리에 돌아와 기독교 권사가 되어 학교를 세워 신교육운동에 주력하는 한편, 제암리 교회의 책임자 안종후(安鍾厚)와 고주리 천도교 책임자 김성열(金聖烈)등과 함께 항일비밀결사 구국동지회를 조직하여 암약(暗躍) 했다. 그 기미를 눈치 챈 왜헌병 2명이 그를 체포하려 하자 동지들과 함께 일경을 현장에서 모두 타살(打殺)하고 오랫동안 서울로 피신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제암리로 다시 돌아와, 강태성(姜太成)·안정헌(安正憲)·안종후(安鍾厚)·안정린(安正麟) 등과 함께 서울에서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문을 천도교·기독교인들과 청년들에게 배포, 3월 25~27일간 계속 산위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고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3월 30일 발안장날의 대규모 만세시위 때는 1천여명의 군중을 선도했는데, 이때 이정근(李正根) 은 군도(軍刀)에 찔려 순국하고 김덕용은 중상을 입었다. 또 그와 동지 6명은 피체(被逮)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 끝에 석방되었다. 그 뒤 4월 15일, 일본 헌병·경찰 30여명이 제암리에 도착, 기독교인·천도교인을 비롯한 마을 주민을 교회당에 집합시키고 방화와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제암리 대학살사건을 일으겼다. 이 때 홍원식을 비롯한 김정헌·안경준 등 애국지사와 주민들이 학살당했고 급보를 듣고 달려온 홍원식의 처 김씨부인에게 마저 총격을 가해 절명케 하였다. 1968년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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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임면수(林冕洙) 조선 고종 1874~1930 |
독립운동가. 호는 필동(必東)이고 일명 면주(勉洙)라고 한다. 1910년 8월에 일제에 의해 국권을 침탈당한 후,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1912년 총독 사내정살(寺內正殺) 암살모의 사건으로 신민회원들이 대거 피검되는 등 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해 지자 그는 만주의 봉천성(奉天省) 유하계(柳河계) 삼원보(三源堡)로 망명하여 신민회의 중대사업인 독립군기지건설사업에 경기도대표로 참가하였다. 이후 경학사(耕學社)와 부민회(扶民會) 등 독립운동단체에 가입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한 개척사업과 독립군사관 양성을 위한 신흥학교 설립에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는 계속 독립운동을 하던 중 1920년의 청산리전투 이후 극심해진 일제의 만주지역 한민족에 대한 취체망에 노출되어, 1921년 2월에 길림성(吉林省)에서 일제의 영사관(領事館)경찰(警察)에 피체(被逮)당하였다. 그 후 평양(平壤)에 압송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여 반신불수의 몸이 되어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고문 휴유증에 시달리다가 1930년 11월 29일에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독립운동에 기여한 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80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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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김광식(金光植) 조선고종 14년 1877~? |
목사(牧師). 수원군 남양면에서 출생하였으며 23세때인 1900년경에 기독교 목회자를 양성하는 기관을 수학한후 전도사가 되었다. 1907년에 공주 제일교회에 부임하였으며, 교인들의 헌금과 미국 교회의 원조로 교회당을 증축하고, 앨리스(Mrs. Alice H.Sharp)여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사업을 하였다. 이후 홍주의 교회를 거쳐 1910년에 남양교회에 부임하였으며, 1924년에는 오산교회로 옮겨 목회활동을 하였다. 1905년에 설립된 오산교회는 1908년부터 교회내에 남·여 학교를 세워 교육활동을 하는 등 오산지역 구국운동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3·1운동 당시에 김광식은 김세환의 권유로 만세시위에 참여 할 것을 결정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시위운동을 준비하였다. 1919년 3월 28일 오산 장날을 이용해 그가 주도한 만세운동이 진행되었고, 일경의 강제해산으로 부상당했던 사람이 병원에서 사망하자 흥분한 주민들에 의해 일제의 경찰주재소와 면사무소 그리고 일본인 상점이 습격·파괴 되었다. 김광식을 1919년 4월 9일에 일제에 의해 만세시위의 주모자란 명목으로 주민 63명과 함께 피체(被逮)당하였다. 그 후 석방되어 안산·광주·수안·부여 등지에서 목회 활동을 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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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황석기(黃錫琪) 조선 고종 18년 1881~ 1972 |
목사(牧師). 남(南)북청에서 출생하였으며, 1904년에 상경하여 미국의 하와이로 이민하였다. 그 후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미국 본토로 이주하여 일리노이주 노스웨스턴 대학과 개렛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다. 1913년 12월에 귀국하여 목회활동을 시작하였고, 이듬해에는 인천부교회(仁川府敎會;현재의 내리교회)의 전도사가 되었다. 1917년 6월에 인천부교회를 사임하고 상경하여 마포 부근에서 전도사업을 하였으며, 1919년초에 수원군의 남양교회(南陽敎會)로 부임하였다. 그는 감리교파의 교역자로서 김세환과 친분을 갖고 있었으며, 또한 미국유학을 다녀온 관계로 영·미공사관의 관리들과 자주 접촉함으로써 세계정세에도 밝은 편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목회지역이었던 사강·비봉의 여러 교회를 순회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시켜 이 지역이 화성지방 3·1운동의 중심지가 되게 하였다. 3·1운동 당시에 그는 상경하여 파고다공원 집회에 참석하였으며, 시내 각처의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피체(被逮)당하였다. 이로 인해 그해 8월 30일에는 경성 지방법원 예심에서 징역 7개월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출소 이후에 그는 곧 남양교회를 사직하고 충남 청양(1920~1922)·만주 봉천(1922~1923) 등지에서 목회활동을 하다가 1927년에 도미(渡美)하였으며, 오하이오주의 신시내티 성서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1930년에 귀국하여 활발한 목회활동을 하였으며, 말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다가 사망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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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차병한(車炳漢) 조선 고종 22년(1885~1933) |
장안면(長安面) 출신으로 서당의 훈도이며 구장(區長)이었다. 3.1운동이 전국 각지로 확산되자 장안면에서도 만세시위를 하기로 결정하고, 4월 3일에 차희식(車喜植1870~1939)·장제덕(張濟德, 일명 장순명)·장소진(張韶鎭 1889~1967)등과 함께 동리 주민인 이영쇠(李永釗) 등에게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후에 그는 차병혁(車炳爀)과 함께 군중들을 인솔하여 어은리의 면사무소로 가서 면장인 김현묵(金賢墨)에게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는 한편, 면장을 앞세우고 시위를 진행하였다. 면사무소의 시설 일부를 파괴한 후 그는 군중들을 모아 쌍봉산에 올라가 만세시위를 하였으며, 군중이 1천여명으로 증가하자 이들을 인솔.하산하여 우정읍 사무소를 습격.파괴하였으며, 군중들을 지휘하여 화수리주재소를 습격하여 일제순사 川端豊太郞을 처단하였다. 4월 4일부터 9일까지 계속된 일제의 검거활동으로 피체당하였으며, 수원경찰서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끝에 소위 내란죄로 기소되었다. 그후 1920년 12월 9일에 소위 보안법위반 및 소요·살인·방화죄로 경성복심법원에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을 기려 1968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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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이성구(李成九) 조선 고종 32년(1895~1973) |
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수원군 일왕면(日葬面) 동원리(棗園里)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3월 1일 서울을 중심으로 일어난 만세운동이 3월 중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향리에서도 만세시위할 것을 결심하고, 3월 20일에 김경도(金敬道)·공칠보(孔七甫)·이규철(李圭哲)·유진홍(兪鎭弘) 등과 거사일을 오산리(鳥山里) 장날(3월 29일)로 결정하는 등 사전준비를 하였다. 그는 3월 29일 오후 5시경 오산장터에서 군중 3백여명을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하였고, 시위도중 일경에 체포당한 여진홍(서鎭弘)·안낙순(安樂淳)을 위해 주재소를 포위하고 석방을 담판하여 방면케 하는 등 시위를 주도하였다. 또한 만세시위에 동참할 것을 거부한 면장 류진열(劉鎭烈)을 면사무소에서 내쫓고, 우체국의 전화통을 파괴하여 수원으로부터 오는 일본군의 지원을 불가능하게 하였으며, 인근의 일본인 주택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후 일경에 피체되어 그해 11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 8개월 형을 선고받았으며, 같은 해 12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으나 기각되어 복역하였다. 그는 1973년 1월에 사망하였는데, 정부에서는 1977년에 그의 공을 기려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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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정서송(鄭庶松) 광무(光武) 2년(1898~?) |
장안면 사랑리(沙良里) 태생의 독립운동가. 1919년 3.1운동 당시 22세 청년이었던 그는 고종의 인산(因山)을 보기 위해 상경, 만세시위를 목격하고 그 대열에 참가했다가 고향에 돌아왔다. 그는 서울에서 받아 온 독립선언서를 복사해 돌리며 이순보·차병구·차인범 등 장안·우정읍의 청년 24명을 동지로 규합, 거사를 계획했다. 4월 3일, 그들은 군중들과 함께 장안면사무소를 습격하여 서류를 불태운 뒤 이웃 우정읍사무소로 가서 면장을 끌어내어 합세시키는데 성공했다. 이때 2천여명의 군중들이 만세시위에 가담, 그곳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화수리의 우정읍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기세를 올렸다. 한편 가와바다(川端) 순사부장이 발포하여 시위대 중 한 사람이 쓰러지자, 흥분된 군중들은 가와바다(川端)을 돌로 때려 죽이고 이어서 한국인 헌병보조원도 타살(打殺) 하였다. 그리고는 주재소 건물과 기물을 부수고 서류를 태웠으며 남아 있는 건물마저 불태웠다. 그들은 정서송(鄭庶松) 의 제안으로 해가 진 뒤 며칠 동안 계속 봉산(峯山) 에 올라가 횃불을 올리며 독립만세를 불렀다. 며칠 후 일본 경찰과 헌병 수십명이 몰려와 화수리를 비롯한 10여 부락을 방화하고 일대를 수색하여 4월 한달 동안 270여명을 체포했다. 정서송도 이때 피체되어 갖은 고문과 악형을 받은 끝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 사건은 규모와 내용면에서 전국 3·1운동 중에서도 가장 크고 악질적이라 하여, 처음에는 내란죄(內亂罪)로 기소(起訴)되었다가 뒤에 보안법(保安法) 위반, 살인 및 방화죄로 변경, 1920년 12월 9일 경성지방법원(京城地方法院)에서 정도송(鄭?松)에게 12년형을 선고했다. 정서송(鄭庶松)은 그 뒤 미결기간(未決期間) 32개월을 뺀 기간을 서대문, 함흥 등지에서 복역하다가 형기를 마치고 32세에 석방되었다. 1968년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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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김교철(金敎哲) 조선 고종 18년(1881~1956) |
장안면 수촌리 태생의 기독교 목사. 독립운동가. 어릴 떄부터 한학(漢學)에 뛰어났고, 1910년 기독교에 입교하고 이듬해 배재학당(培材學堂)에 들어가 1년 만에 졸업한 뒤 1914년 피어슨 성서학원을 졸업했다. 그 뒤 고향에 장진의숙을 설립하여 인재양성에 힘쓰는 한편 1916년 남양교회 담임전도사로 파송되었는데, 3.1운동이 일어날 때 그는 수촌리에 거주하면서 남양교회를 제외한 수촌교회와 제암교회(堤岩敎會)를 담임했다. 그는 만세시위 거사할 때 제암리 이장이면서 제암교회의 권사인 안종후·홍원식에게 제암리를 맡기고, 자신은 수촌리 교인과 주민들을 지휘하며 우정읍 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 4일, 그는 수촌리 농악대(農樂隊)의 큰 깃발을 앞세우고 우정읍 시위에 참가하고, 여기에서 장안면 시위대와 합세, 우정·장안면 사무소의 습격에 이어 화수리 주재소를 습격하여 왜경 1명을 타살(打殺)하였다. 4월 15일 피체된 그는 3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만기(滿期) 출감(出監)했다. 그 뒤 1922~1940년까지 사강·남양·오산에서 목회(牧會)했고, 1956년 별세하였다. 1968년 대통령표창이 수여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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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문상익(文相翊) 조선 고종 30년(1893~1960) |
송산면 사강리 태생의 독립운동가. 3.1운동 때 鄕里에서 거사할 것을 계획하고 동지를 규합했다. 그는 3월 28일 송산면 장날 1천여명의 군중이 운집한 곳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뒤 만세시위를 이끌며 행진에 들어갔다. 그는 시위대를 선두에서 지휘하며 주재소를 습격, 일경과 충돌하던 중 한 사람이 총상(銃傷) 을 입게 되자 흥분한 군중들은 순사부장(巡査部長) 노구찌(野口)를 살해하고 말았다. 그해 5월 31일, 그는 경성지방법원에서 12년 징역형을 언도받았다. 1977년 건국공로 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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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황창오(黃昌五) 建陽 원년(1896~?) |
현 태안읍 배양리 태생의 독립운동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중 일경 의 수배를 받게 되어, 1920년 5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 해 7월 상해에서 대동단(大同團) 총재(總載) 김가진(金嘉鎭)을 만나 대동단에 참여했다. 그 뒤 군자금 조달의 책임을 맡고 다시 국내에 잠입, 활동하던 중 1921년 연백(延白) 에서 피체되어, 평양(平壤) 형무소(刑務所)에서 복역한 후 1927년 출옥하였다. 1968년 건국공로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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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조문기(趙文紀) 1927~? |
매송면 송라리 출신의 독립운동가. 1942년 일제의 징용에 끌려가 일본 천기공장(川崎工場)에서 3년간 가혹한 노동으로 시달리던 중 공장이 폭격을 당하자 귀국했다. 그는 유만수(柳萬洙)·강윤국(康潤國)·권준(權俊)·우동학(禹東學) 등의 청년을 동지로 규합, 항일독립운동을 모의했다. 그는 1945년 7월 초 서울 부민관(府民館) 에서 친일분자(親日分子) 박춘금이 주도하는 대의당(大儀黨) 주최로 일본·조선·만주·중국 등 어용정권의 대표들이 모여 아세아(亞細亞)민족(民族)궐기대회를 개최한다는 <경성일보>의 보도를 보게 되었다. 조문기(趙文紀)를 비롯한 동지들은 이를 습격하기로 결의하고, 폭탄뇌관을 구입하는 등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7월 24일, 대회장 부민관(府民館)으로 들어가 대회가 한창 진행될 때 사제폭탄을 단상으로 던져, 친일분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장내는 삽시간에 쑥밭이 되고, 장내의 친일분자와 일본 경찰·헌병 등 여럿이 쓰러졌으나 박춘금(朴春琴)은 무사히 도망치고 말았다. 이때 조문기(趙文紀)를 비롯한 강윤국(康潤國)·유만수(柳萬洙)등은 태극기를 펴들며 “조선독립만세!”를 부른 후 “일본은 망한다. 젊은이들이여, 징병(徵兵)을 거부하자!”고 외쳤다. 이들은 곧 피체되어 고문을 당한 끝에 복역 중 1945년 8월 15일 해방된 후 석방되었다. 1982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 | | |
향남읍 제암리 독립운동가 명단
이 름 |
거주지 |
포상훈격 |
포상연도 |
공 적 사 항 |
강태성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김덕용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김정헌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강태성 부인김씨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에서 순국 |
홍원식 부인김씨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에서 순국 |
안경순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안관순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안명순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안무순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안봉순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안상용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안유순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안정옥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안종락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안종린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안종엽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안종후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안진순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안필순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조경칠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홍순진 |
향남읍 제암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홍원식 |
향남읍 제암리 |
국민장 |
1968 |
구국동지회 조직,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제암리교회에서 순국 |
송산면 사강리 독립운동가 명단
이 름 |
거주지 |
포상훈격 |
포상연도 |
공 적 사 항 |
김용준 |
송산면 사강리 |
건국포장 |
1968 |
3 · 1운동 중 송산면 시위참가, 순사부장 처단, 7년 징역 |
문상익 |
송산면 사강리 |
국민장 |
1977 |
3 · 1운동 중 송산면시위 참가, 순사부장 처단, 12년 징역 |
민용운 |
송산면 사강리 |
건국포장 |
1977 |
3 · 1운동 중 송산면시위 참가, 순사부장 처단, 10년 징역 |
박영호 |
송산면 사강리 |
건국포장 |
1977 |
3 · 1운동 중 송산면시위 참가, 순사부장 처단, 7년 징역 |
안순원 |
송산면 사강리 |
대통령 표창 |
1977 |
3 · 1운동 중 송산면 시위참가, 순사부장 처단, 6년 징역 |
왕광연 |
송산면 사강리 |
국민장 |
1977 |
3 · 1운동 중 송산면 시위참가, 순사부장 처단, 12년 징역 |
정군필 |
송산면 사강리 |
건국포장 |
1977 |
3 · 1운동 중 송산면시위 참가, 순사부장 처단, 7년 징역 |
홍관후 |
송산면 사강리 |
건국포장 |
1977 |
3 · 1운동 중 송산면 시위참가, 순사부장 처단 |
홍면선 |
송산면 사강리 |
건국포장 |
1977 |
3 · 1운동 중 송산면 시위참가, 순사부장 처단, 7년 징역 |
홍우선 |
송산면 사강리 |
대통령 표창 |
1977 |
3 · 1운동 중 송산시위 참가, 순사부장 처단, 일경의 고문으로 순국 |
홍중옥 |
송산면 사강리 |
국민장 |
1977 |
3 · 1운동 중 송산면 시위참가, 순사부장 처단, 12년 징역 |
장안면 수촌리 독립운동가 명단
이 름 |
거주지 |
포상훈격 |
포상연도 |
공 적 사 항 |
백낙열 |
장안면 수촌리 |
- |
- |
1919년 3 · 1운동때 김성열, 안종후와 함께 화성지역 대표로 파고다공원 시위 참여후 화성지방의 3 · 1운동주도 |
김교철 |
장안면 수촌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3년 징역 |
김규완 |
장안면 수촌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2년 6개월 징역 |
김명우 |
장안면 수촌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3년징역 |
김명호 |
장안면 수촌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3년징역 |
김응식 |
장안면 수촌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3년 징역 |
김종학 |
장안면 수촌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2년 6개월 징역 |
백순익 |
장안면 수촌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3년 징역 |
이순모 |
장안면 수촌리 |
국민장 |
1968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10년 징역 |
정순영 |
장안면 수촌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5년 징역 |
김응오 |
장안면 수촌리 |
대통령 표창 |
1977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2년 6개월 징역 |
김홍삼 |
장안면 수촌리 |
대통령 표창 |
1977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3년 징역 |
윤영선 |
장안면 수촌리 |
대통령 표창 |
1977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2년 6개월 징역 |
차인범 |
장안면 수촌리 |
건국포장 |
1977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10년 징역, 옥중에서 순국 |
장안면 석포리 독립운동가 명단
이 름 |
거주지 |
포상훈격 |
포상연도 |
공 적 사 항 |
김덕근 |
장안면 석포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3년 징역 |
김덕삼 |
장안면 석포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
차병한 |
장안면 석포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5년 징역 |
차병혁 |
장안면 석포리 |
국민장 |
1962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3년 징역 |
차희식 |
장안면 석포리 |
국민장 |
1968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15년 징역 |
최장섭 |
장안면 석포리 |
대통령 표창 |
1977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무죄 석방 |
팔탄면 고주리 독립운동가 명단
이 름 |
거주지 |
포상훈격 |
포상연도 |
공 적 사 항 |
김성열 |
팔탄면 고주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고주리에서 순국 |
김세열 |
팔탄면 고주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고주리에서 순국 |
김주남 |
팔탄면 고주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고주리에서 순국 |
김주업 |
팔탄면 고주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고주리에서 순국 |
김흥복 |
팔탄면 고주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고주리에서 순국 |
김흥열 |
팔탄면 고주리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발안시위 참가, 고주리에서 순국 |
기타 독립운동가 명단
이 름 |
거주지 |
포상훈격 |
포상연도 |
공 적 사 항 |
정서송 |
장안면 사랑리 |
대통령 표창 국민장 |
1963 1968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12년 징역 |
양순서 |
장안면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일경의 고문으로 순국 |
윤병소 |
남양면 |
대통령 표창 |
1968 |
3 · 1운동 중 시흥군 수암면 운동주도, 10개월 징역 |
장소진 |
우정면 주곡리 |
국민장 |
1968 |
3 · 1운동 중 장안 · 우정면사무소 및 화수리 주재소 습격, 순사 처단, 12년 징역 |
김명제 |
송산면 육일리 |
건국포창 |
1977 |
3 · 1운동 중 송산면 시위참가, 순사부장 처단, 10년 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병으로 7년만에 가출옥하여 3일후에 순국 |
이성구 |
일왕면 조원리 |
대통령 표창 |
1977 |
3 · 1운동 중 오산면사무소 및 주재소 파괴, 1년8개월 징역 |
홍남후 |
송산면 삼존리 |
건국포장 |
1977 |
3 · 1운동 중 송산면 시위참가, 순사부장 처단, 7년 징역 |
홍효선 |
송산면 |
대통령 표창 |
1982 |
3 · 1운동 중 송산면 시위참가, 순사부장 처단, 일경의 고문으로 순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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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고향 우리동내에서 일어났던 3.1 운동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수있도록 글올려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려여~모르고 지나갈뻔했던일들 다시한번 볼수있게 도와주심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