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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즈넉하니 깊어가는 가을, 백담사百潭寺 풍경
대청봉에서 흘러내린 단풍이 동서울터미널에서 버스로 2시간 남짓, 평일이어서 호젓하니 막 가을걷이를 끝내고 총총히 떠나는 가을을 바라보기에 좋았다. 용대리에서 마을 주민이 운영하는 셔틀버스를 타고 가을을 재촉하는 찬 가랑비를 맞으며 백담사 행. 수심교修心橋에서 영시암 쪽 풍경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며 조신하게 다리를 건넌다. 백담사百潭寺. 647년 신라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한계사가 기원으로 여러 차례에 걸친 화재와 이전을 거듭하면서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등으로 불리다가 1455년(세조 1)에 중건하면서 현재 위치에 백담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절을 다시 지을 무렵 주지승의 꿈에 도인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백담사까지 못의 수를 세어보라고 하여 실제로 세어보니 못이 100개에 이르는지라 백담사라 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산깨나 탄다는 사람들은 서둘러 오세암 쪽으로 향하고 나는 똑딱이 카메라를 들고 절 주변을 꼼꼼히 돌아보기로 한다. 제일 먼저 절집 담장 너머로 주렁주렁 붉은 열매를 매단 야광나무가 눈에 든다. 밤에 야광주와 같이 빛을 낸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5월이면 온통 물감을 뒤집어쓴 것처럼 하얀 꽃이 무더기로 핀다. 한 해 농사를 끝내고 오가는 보살님들께 몸 보시 중이시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 탓인가 벌써 겨울이 오려나... 가을의 전령사 코스모스꽃도 널브러진 채로 찬비를 맞고 있고... "기룬 꽃밭'의 야생화들도 그리움을 가슴에 묻은 채 일찌감치 동안거에 들었다. 세월의 무상함을 벌써 알고 계셨던 걸까 초록이 지고 단풍이 타는 만산홍엽의 계절에도 스님은 홀로 선방을 지키고 계시다. 산령각에 들려 호랑이를 탄 하얀 수염의 할아버지께 인사를 여쭙고... 나는 계율에 얽매인 근엄한 곱슬머리 부처님보다 우리 할아버지가 푸근해서 좋다.
경내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만난 한 폭의 수채화, 한참을 기다린 끝에 가을 속을 걸어가는 비구니 스님의 뒷모습을 하나 더 그려 넣었다. 누구의 간절한 기도일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돌탑들이 크고 작은 소원들을 이고 서 있다. 겨우내 차가운 산바람과 계곡물에 씻기고 나면 저들도 알게될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세상만사 마음먹기 달렸다는 것을... 차라리 욕심없는 너의 미소가 좋다
이럴 땐 나옹선사懶翁禪師의 시를 욀까보다
청산은 나를 보고靑山兮要我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靑山兮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蒼空兮要我以無垢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聊無愛而無憎兮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如水如風而終我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靑山兮要我以無語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蒼空兮要我以無垢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聊無怒而無惜兮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如水如風而終我 청산은 나를 보고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 성냄도 벗어놓고 탐욕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라 했거늘 아직 불사르지 못한 그 무엇이 있어 산은 저리도 붉게 타는고... 염치 없게도 내가 물가에 쌓아 놓고 온 두 개의 돌탑, "사는 날까지 부디 건강하고 즐겁게 살다가게 해주기요!" 대청봉에서 흘러내려 백담사를 곱게 물들인 설악의 단풍은 용대리 셔틀버스를 두고 나도 단풍잎을 따라 함께 흘러내리기로 한다. 계곡을 따라 내리는 좁은 산길은 쉴 새 없이 관광객을 실어나르는 버스들로 위험하기도 했지만,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의 풍경을 감상하는 쏠쏠한 재미가 있다. 여름내 무성한 녹음에 가려있던 노박넝쿨이 주홍빛 열매를 한껏 뽐내고 있다. 다람쥐도 저들의 겨울잠을 준비하느라 도토리 주워먹기에 열심이다. 얼치기 사진사를 위해 포즈를 취해주는 폼이 가히 일품이다.
"시몬, 나뭇잎이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문학소년입네 하고 줄줄 외우고 다니던 구르몽의 <낙엽>이란 시도 오래된 기억 속에서 꺼내어 외워보기도 하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미당 서정주 님의 <푸르른 날>이란 시곡도 흥얼거려 보고,
예쁘게 물든 단풍나무 앞에서는 잠시 발길을 멈추고 나의 졸시도 한 편 꺼내어 분위기 있게 읊어보고, 단풍나무 / 차승열
가을엔 사랑하려네 초록빛 꿈이 거두어진 자리 갈색 머리칼을 한 그대가 와서 하얀 억새꽃으로 웃으면 나는 옥죄인 가슴을 물들이며 두려움에 깨어나 우는 단풍나무 이별을 아는 가지에 약속을 하고 눈물을 아는 잎새에 입맞춤하려네 헐벗어 가는 수풀이 좋아 여위어 가는 나무가 좋아 서럽도록 뜨거운 가슴으로 나는 그대 앞에 지려네
노랗게 물든 생강나무도 나처럼 계곡을 따라 산을 내려가는 중이다. 백담사에 가면 못을 보라고 했던가. * 담潭 : 못 담 계곡을 따라 흘러내린 물이 바위를 깎아 못을 만들고, 못마다 파란 하늘을 가득 담아놓았다. 그리고 계절이 깊어갈수록 점점 높아가는 하늘을 닮아간다. 아니 가을에는 하늘이 못을 닮아간다. 계곡 굽이굽이마다 수만 수억 년은 됨직한 기암괴석과 못이 과연 백담사란 이름에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떨어지는 물방울은 바위를 뚫는다' 이 평범한 진리가 검증되기까지 얼마나 오래 흘러내려야 했을까 물은. 바위는 또 얼마나 아팠을까? 하늘이 담긴 깊은 못을 바라보고 있으면 불현듯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러면 나도 속세의 잡다한 때를 말끔히 닦아낼 수 있으려나~ 나도 가을 풍경이 되어... 그런데 넌 누구냐 ! 계곡 한가운데 떡하니 물길을 막고 서있는 너는. 자연의 순리도 거스르며 고집스럽게 살아가는 너는.
여성을 닮은 부드러운 계곡을 따라 내리는 하산길은 흐르는 물소리도 은밀한 사랑의 속삭임인 것 같아 산행에 지친 심신의 피로를 잊게한다.
근데 이놈은 유독 남성을 닮았다. 허허, 그놈 참 대물이로세~^^
지친 발걸음으로 계곡을 따라 내리다 보니 어느새 가을 나무들이 서운한 작별인사를 건네온다. 그래 잘 있어라. 이다음에 또 보자꾸나. 이다음에...
눈물 나게 반가운 "용대리 1KM 앞". 백담사에서 용대리까지 7KM 산길은 준봉을 굽어보는 웅장한 맛은 없지만 고즈넉하니 깊어가는 가을, 단풍과 함께 물과 함께 계곡을 따라 흘러내리며 못에 담긴 아름다운 풍경을 만나는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좋았다. 암튼, 백담사에 가면 못을 볼 일이다.
오늘 산행의 종점 "백담입구터미널" 기다려도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자니 땅거미가 지는 산마을에는 벌써 스산한 겨울 기운이 든다. 온산을 불태우는 저 단풍잎은 생에 못다 한 아쉬움의 몸부림인가!, 아니면 지닌 것 모두 남김없이 불살라 버리려는 비움의 몸짓인가!. 버스에 몸을 싣고 다시 삶의 현주소로 돌아오며 벌써 안부를 묻는다. 안녕, 빛 고운 단풍아, 가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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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 옛날 기억이 새록 새록 나는군요. 단풍나무 시도 멋있고 정겨운 기행 다시 할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고봉을 향해 뒤도 안 돌아보고 무작정 달려 올라가는 나이는 아닌가 봅니다.
여기저기 젊은 날 놓쳐버린 또는 잃어버린 발자국들을 찾아 산을 찾곤 하지요.
정겨움이 있는 산행길, 함께 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