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으로 부터 궤장 하사 받은 사람
나라에 공로가 있는 70세 이상의 원로 대신(大臣)에게 내려주던 안석과 지팡이인 궤장(几杖)
맹사성, 성석린, 허조, 이원익, 황희, 이경석, 김종서, 허목, 김종서,정인지,남공철, 김사목, 민여익, 등 소수의 사람들이 이를 받았다.



1420년 2월 26일 예조에서 계하기를, “나이 늙은 대신에게 궤장(几杖)을 주는 법이 육전(六典)에 실려 있는데, 책임관이 아직 실시하지 아니하오니, 노인을 공경하는 뜻에 어긋납니다. 육전에 따라서 실시하소서.”하니, 세종이 그대로 따랐다. 1421년 1월 16일 임금이 나라에 공로가 있는 70세 이상의 원로 대신(大臣)에게 내려주던 안석과 지팡이인 궤장(几杖)을 84세의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에게 하사하였다. 1월 19일 옥천 부원군(玉川府院君) 유창(劉敞)과 예문관 대제학 류관(柳觀)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2월 12일 옥천 부원군(玉川府院君) 유창(劉敞)이 전(箋)을 올려 궤장(几杖)을 하사 받은 것에 대하여 치사하였다. 3월 23일 평성군 조견을 불러서 궤장(几杖)을 주었다.
1424년 12월 10일 영돈녕(領敦寧) 류정현(柳廷顯)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그 교서(敎書)에 이르기를, “수족과 같은 신하가 세상 사람이 모두 존경할 만한 관작(官爵)과 연령(年齡)과 학덕(學德)이 있는 달존(達尊)의 아름다음이 있으면, 임금의 도리는 공경하는 예의를 더해야 한다. 이 것은 고금의 좋은 법규요, 나 혼자서 하는 사사로운 은혜가 아니다. 경은 타고난 자품이 깨끗하고 마음가짐이 견고하며, 국가의 전례에 익숙하고 의리에 통달하며, 청백하고 검소한 것으로 백성을 다스려 일찍부터 선량한 관리로서 이름이 드러났고, 마음과 뜻이 뭇 사람보다 높고 크게 뛰어나서 재상의 체통을 지녔었다. 사헌부인 백부(柏府)의 장(長)이 되니 기강이 서고, 묘당(廟堂)에 들어오니 국책이 결정되었다. 세종 1년에 수군을 통솔하고 섬 오랑캐 대마도를 숙청하여 사방에 걱정이 없어지니 공은 진실로 큰 것이다. 오랫동안 수상이 되어 더욱 충성하고 부지런하여 여러가지 사무를 정돈하고 바르게 처리하였으니, 참으로 사세의 원로요, 일국의 주석(柱石)이었다. 지난 번에 경이 늙은 것을 이유로 휴양을 청할 때, 나는 의지하고 위임하는 중신인 까닭에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이제 70을 당하여 마음과 뜻이 더욱 장하고 나의 정치를 도와주니, 진실로 가상하게 여기는 바이다. 예전(禮典)을 상고하니 궤장을 준다는 글이 있고, 한(漢)나라 때에도 또한 공광(孔光)을 우례(優禮)한 조서가 있다. 이에 경에게 비둘기를 새긴 지팡이인 구각장(鳩刻杖)과 흑염소가죽으로 장식한 안석(安席)인 오피궤(烏皮几)를 내려서 위로하는 바이다. 아아, 몸을 편케 하고 힘을 부축여 강녕(康寧)을 백년이나 향유하고, 임금을 돕고 백성에게 혜택을 주어 훌륭한 이름을 영구히 전하라.”하였다.
1429년 6월 24일 우의정 맹사성(孟思誠)·여천 부원군(驪川府院君) 민여익(閔汝翼)·찬성 권진(權軫)에게 궤장(几杖)을 내렸다. 1432년 4월 25일 영의정 황희, 중추원 사 이정간(李貞幹)에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436년 1월 15일 판돈녕부사 한창수(韓昌壽)와 숭정대부 참찬 오승(吳陞)과 판중추원사 원상(元庠)에게 안석과 지팡이인 궤장(几杖)을 내려 주었다. 1439년 5월 25일 우의정 허조(許稠)·여산 부원군(礪山府院君) 송거신(宋居信)·판중추원사 조말생 등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444년 5월 28일 우의정 신개(申槪)에게 궤장(几杖)을 내려 주었다. 윤7월 4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명덕(李明德)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445년 6월 1일 우의정 하연(河演)에게 궤장(几杖)을 내리니, 하연이 전(箋)을 올려 사례하였다. 11월 6일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최윤덕(崔閏德)에게 궤장(几杖)을 내려 주니, 최윤덕이 전(箋)을 올려 사례하였다. 1450년 8월 19일 문종이 청평위(淸平尉) 이백강(李伯剛)·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최사의(崔士儀)·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천(李蕆)에게 궤장(几杖)을 주었다. 1453년 6월 23일 단종이 김종서(金宗瑞)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457년 7월 24일 세조가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봉조청(奉朝請) 이징석(李澄石)에게 궤장(几杖)을 내려 주었다. 1466년 11월 15일 세조가 하동군(河東君) 정인지(鄭麟趾)·개성군(開城君) 최유(崔濡)·중추부 동지사(中樞府 同知事) 이변(李邊) 등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472년 4월 9일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대전(大典에 ‘벼슬이 1품에 이르고 나이가 70이상이 된 자로서 국가(國家)의 중경사(重輕事)에 관계되어 치사(致仕)하지 못하는 자는 궤장(几杖)을 하사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봉원 부원군(蓬原府院君) 정창손(鄭昌孫)과 우의정(右議政) 성봉조(成奉祖)는 모두 나이가 70이 넘었으니 궤장을 내리소서.”하니, 성종이 그대로 따랐다. 1484년 3월 15일 상당 부원군(上黨府院君) 한명회(韓明澮)에게 궤장(几杖)을 내려 주었다. 1491년 6월 1일 청송 부원군(靑松府院君) 심회(沈澮)와 광릉 부원군(廣陵府院君) 이극배(李克培)에게 궤장(几杖)를 하사(下賜)하였다. 1496년 윤3월 12일 연종(연산군)이 윤필상·노사신·정문형·손순효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499년 12월 9일 궤장(几杖)을 함종 부원군(咸從府院君) 어세겸(魚世謙)에게 하사하였다.
1506년 12월 19일 중종이 좌찬성 박안성(朴安性)에게 궤장(几杖)을 내렸다. 1508년 1월 2일 좌참찬 이손(李蓀)이 아뢰기를, “신은 본디 재주와 덕행이 없는데도 정부의 중임을 맡기시니, 젊을 때는 어려서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은 이미 늙어서 생각이 쇠하였으니, 어찌 능히 임무를 감내할 수 있겠습니까? 치사(致仕)하기를 원합니다.”하니, 명하여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510년 5월 19일 문성 부원군(文城府院君) 류순(柳洵)이 나이 70에 찼으므로 치사(致仕)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주었다.1514년 1월 6일 교성군(交城君) 노공필(盧公弼)이 노병(老病)으로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522년 2월 18일 호조 판서 고형산(高荊山)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527년 3월 17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장순손(張順孫)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528년 1월 28일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유청(李惟淸)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531년 2월 7일 영의정 정광필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533년 1월 6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홍숙(洪淑)이 나이 70이 되어 치사(致仕)할 것을 청하니, 궤장(几杖)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1539년 1월 2일 정원에 전교하기를 “판중추부사 류보(柳溥)에게 궤장을 주도록 하라.”하였다.
1548년 9월 29일 명종이 영의정 홍언필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562년 10월 19일 영의정(領議政) 상진(尙震)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562년 10월 26일 광평군(光平君) 김명윤(金明胤)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565년 1월 4일 우의정 이명(李蓂)이 치사(致仕)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지 않고 명하여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585년 10월 1일 선조가 영의정 노수신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1668년 11월 27일 현종이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675년 11월 8일 숙종이 허목(許穆)에게 궤장(几杖)을 하사(下賜)하였다. 1741년 7월 23일 영조가 금평위(錦平尉) 박필성(朴弼成)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844년 1월 1일 헌종이 봉조하(奉朝賀) 김이양(金履陽)에게 특별히 궤장(几杖)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1872년 1월 3일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민치구(閔致久)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 1902년 7월 25일 고조 광무제가 영돈녕원사(領敦寧院事) 심순택(沈舜澤),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