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10월 27일~2017년 11월14일
전도의 여왕 정순덕 권사님
정순덕 권사님은 나의 어머니이시다. 어머니는 고향에서 신앙생활을 해오시다가 생애의 끝자락에 아들이 목회하는 교회 성도로 신앙생활을 마무리 하셨다. 우리 교회 출석하신 것은 5년 정도 되었다. 장례도 대대교회 교회장으로 했다. 비록 우리 교회를 위해 봉사한 일은 없지만 아들이 목회하는 교회를 위하여 누구보다 간절하게 기도해 주셨을 것이니 우리 교회 <기억의 전당>에 모신다 해도 탈이 날 일은 아닐 것 같다.
나의 어머니 정순덕 권사님은 6남매를 낳고 키우셨다. 아버지의 역할도 크지만 8할은 어머니의 몫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난한 중에서 자녀를 양육하고 살림을 꾸리시느라 무척 고단한 삶을 사셨다. 어릴 적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가난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모습으로 남아있다. 어머니의 삶의 보따리 속에는 절망, 낙심, 서러움, 상처들로 가득했었다.
한 숨을 내쉴 일들이 모래알처럼 많았지만 그래도 인생을 비관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어찌나 열심히 사셨는지 걱정으로 시간을 보내는 것마저 어머니에게는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어릴 땐 알지 못했지만 백방으로 살아볼 궁리를 멈추지 않았던 같다. 스텐 숟가락 몇 개를 가지고 장사를 시작하여 마을 사람들이 찾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가져다 파셨다. 배운 일도 없는 바느질을 하여 부가가치를 높이는 지혜도 발휘하셨다. 정말 지혜로운 어머니시다.
가난해도 가난한 티를 내지 않았다. 시장 출입을 하시는 어머니 덕분에 깨끗한 옷을 입었고, 보리밥이긴 하지만 오리, 닭, 토끼 등을 길러 영양공급을 해주시므로 그리 배고픈 삶은 아니었다. 자녀들을 가르치려는 마음도 열렬했다. 중고등학교, 대학교에 보내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이만하면 장한 어머니라고 불릴 만하지 않는가? 학교에서 장한 어머니상을 받은 일이 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가끔은 어머니로부터 행복한 추억을 선물로 받아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말수가 적은 분이어서 표현하는 데 매우 서투르고 칭찬에 인색한 분이다. 나는 어린 탓에 표현되지 않는 사랑까지 헤아릴 줄 몰랐다. 나의 기억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따뜻한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직까지 말해본 일 없는 때늦은 나의 투정이다.
그래도 괜찮다. 별처럼 아름다운 추억은 없지만 아무렇지 않다. 물려받은 재산은 없지만 어머니에게서 절약 정신을 배웠고, 최악의 상황에서 최선의 삶을 사는 법을 배웠다. 그런 면에서 어머니는 나의 인생에 최고의 스승이시다.
무엇보다도 어머니 때문에 예수님 믿을 수 있게 되었음이 큰 감사가 된다. 우리 6남매는 예배당에 나갔다. 외갓집의 믿음의 분위기가 우리 집에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형제들이 믿음의 길을 걸을 수 있음이 큰 복이다. 예수님 얻으면 다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어머니도 예수님 만나 믿음으로 살다가 주님의 품에 안기셨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이것만으로 충분하다. “다윗이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이 나의 고백이다. 하나님의 큰 은혜이고 축복이다.
잠시 나의 누나가 어머니의 신앙을 정리해준 글을 옮겨보려고 한다. 첫째, 엄마는 예수님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이분법으로 사람을 구분했다. 예컨대, 누군가 세상적으로 성공하고 사업이 번성하여 부자라 해도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말씀하셨다. 둘째, 걱정은 해서는 안 될 일로 여겼다. 셋째, 정직이 최선의 방책이라는 것을 모토로 사셨다. 넷째,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손가락질 받을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늘 말씀하셨다. 끝으로 굴곡진 삶의 고비들을 넘겨왔던 이야기 끝에는 ‘내가 예수를 믿어서 그렇게 살아낼 수 있었다’고 말씀하곤 했다.
예수님 믿는 일 다음으로 정직과 진실을 중시했던 분임은 6남매 모두가 일치하는 바다.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에게 잘 살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어머니의 정직은 사변적인 수식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해 보였다. 진실한 삶은 많은 이웃들을 감동시켰고, 전도의 열매를 거두게 했다. 고향교회에서 어머니만큼 전도한 사람은 없다. 장사하면서 물건만 파는 게 아니라, 두터운 신뢰를 얻었던 것이 전도의 밑천이었다. 전도할 때 어머니가 즐겨 사용하던 멘트는 ‘예수님을 믿으면 사주팔자도 다 없어진다.’라는 말씀이다. 그다지 세련된 전도 멘트가 아니지만 삶에서 나오는 간증이었기에 듣는 자들에게 큰 감화를 주었다. 전도의 여왕이란 주제가 조금 과하긴 하지만 고향 교회에서만큼은 그렇게 불릴 만한 실적을 쌓은 분이다.
나의 어머니는 곱던 단풍이 떨구던 늦가을 어느 날 저녁 식사를 마친 후 이 세상의 소풍을 마치고 하늘나라로 이사를 했다. 이제 모든 수고를 그치고 주님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계신다. 조금 더 살아계셨더라면 부족한 효도를 해드렸을 것인데 너무 빨리 서둘러 떠나셨다. 아들에게 미안해서였을까? 불효를 못 견뎌서 그랬을까?
그래도 빨리 떠나심을 감사하기로 했다. 와상 중에 잠시 욕창을 겪다가 깨끗이 나은 적이 있다. 욕창으로 몸이 패인 이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그런 모습을 보지 않음도 큰 감사가 되었다. 그리고 천국에 가시기 이틀 전 어머니의 손을 잡고 “키워주시느라 수고하셨고 감사드린다.”고 말씀 드리고 기도했었다. 마치 어머니의 떠남을 예감이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평소 익숙하게 해오던 말이 아닌데 시의 적절하게 그런 말을 하다니.... 그것도 감사가 된다.
이제 나는 어머니의 아들로서의 역할을 마쳤다. 그렇다고 마음까지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어머니를 몸으로 섬겨드릴 때 느끼던 짐보다 잘 섬겨드리지 못한 부담이 더 무겁게 여겨지니 말이다.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의 흔적을 우리 교회 기억의 공간에 남긴다. 어머니의 소중한 삶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