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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운니동33번길
한 상 윤 sang6763@naver.com
사회복무요원 이 경(李競)입니다. 6개월 간의 근무를 마치고 소집해제 될 예정입니다. 다른 친구들의 근무 연한보다 4분지 1밖에 안 되는 혜택은 오직 아버지 덕분입니다. 아버지가 거금을 들였다거나 병무청의 핵심 간부와 줄이 닿았다거나 따위의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누리는 혜택입니다. 혜택이랄 것도 없지만 친구들이 부러워하니까 마치 특혜를 누리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뿐입니다. 여친은 사회복무요원보다 강원도 화천이나 그 외 전방 부대에 배치, 철조망을 지키는 애국충정만을 높이 사더군요. 다른 건 몰라도 이 문제가 논의되는 순간 여친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를 과연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자일까. 하고 의심 내지는 불신하게 되더군요. 그럴싸한 대학을 가지 못하고 장래를 약속 못하는 학과에 적을 두었지만 내 인생 전체를 무시해서는 안 되잖습니까. 이제 내 나이 스물두 살, 말을 하자면 앞날이 창창하고 몸 튼실한 사나이가 밥 세끼 못먹겠습니까?
이 경이라는 청년이 경박하게 보이는 이유가 문화, 역사에 무관심한데 있다는 겁니다. 나의 장래를 깊이 염려하면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습니다. 존경할 수 있는 인물을 찾아보라고 하더군요.
“멀리 갈 것 없어. 우리의 것부터 알아야 해. 니 전공도 살리고 말이지.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구. 너한테는 지금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해.”
여친의 말에 나는 고개를 깊이 꺾고 발치를 내려다보며 걷기 시작했습니다.
“니네 아버지가 베트남전 참전용사 국가유공자이기 때문에 너한테 6개월 복무 특혜를 내려주셨듯이 전주 이 씨 종친회 회장이라는 직함도 대를 이어서 해 먹으려면 너는 지금부터 자세를 바로 잡아야 해.”
적어도 자신의 족보에 대해서만은 누구와 말을 섞어도 막힘이 없어야 할 만큼 해박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고보니 내가 사학과를 선택한 것도 여친의 조언이 작용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다음날부터 나는 우선 나의 근무지가 소재한 종로구 운니동33번길 일대를 중심으로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의미심장한 답사였습니다.
* * *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사랑채, 안채, 별채의 암막새 기와지붕을 타고 추녀 끝에서 낙수가 되었다. 검은 회색으로 씻긴 기와지붕은 별채에서 첫아이를 낳던 날의 한 씨(韓氏)의 안색만큼 건강하고 싱그러웠다. 이 비 그치면 날씨는 한결 서늘해지리라. 지는 햇살이 두터운 비구름에 갇혀 방안은 어둑신한 습기와 한기가 진종일 일렁거렸다.
남편 이 장(李暲)이 죽었다. 한 씨는 궁을 떠나 사저로 돌아왔다. 네 살 바기 아들 정(婷), 세 살 바기 딸,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된 아들 혈(娎). 3남매를 안고 업고 걸렸다. 노비 두엇이 뒤를 따랐지만 그들과 더불어 짐짝으로 취급할 수는 없었다.
시어머니는 큰아들 정이만은 궁 안에서 키워 주마고 잡았지만 한 씨는 아닙니다, 어머니, 하고 도리질을 했다. 어미 맛을 알고 달라붙는 자식을 두고 올 수는 없었다. 유모를 딸려 보내겠다는 것도 거절했다. 시아버지가 왕좌에 앉고 시어머니가 왕비가 된 지 3년, 그간의 흉사가 무얼 뜻하는가. 바람결을 따라 휘몰리는 낙엽이 발길에 채었고 궁궐의 숲길은 음험했다. 시어머니가 내젓던 손길도 잠시, 돌아서는 등자락에서는 찬바람만 일었다.
세 아이를 대충 먹이고 씻겨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긴장과 피로감은 단잠을
쫓아버렸다. 어쩌다가 홀연히 맑아진 뇌리에는 울안의 푸나무에 떨어지는 빗소리만 소란스럽다. 첫아들 정을 낳았을 때의 환희와 경이로움도 남의 얘기다.
친정아버지 한 확(韓確)이 명나라에 다녀 올 때마다 구해다 준 서책을 꺼내 펼친다. 범어를 한문으로 번역한 유교 경서와 불경이다. <대학>과 <내훈>도 있다.
“이 갈대묶음처럼 보이는 것이 글자란 말씀이지요?”
“자. <대학>에 나오는 글귀다. 토를 달아 끊어 읽고 뜻풀이를 해 보자. 대학지도는 재명명
덕하고 재친민하고 재지어지선이니라. 네가 살아남는 길은 네 살 바기 정과 핏덩이 혈 뿐이니라.”
“네, 아버님.”
“여성이라면 필히 부덕을 갖춰야 하느니. 중국어부터 조금씩 익히려므나. 안녕하세요? 가 중국어로는 ‘니하오’ 범어로는 ‘따시뗄렉’. 강대국이니 어쩌겠느냐. 이 애비도 죽을둥살둥 꽁무니 따라다니면서 언어를 익히기는 하지만 환상을 가져서는 안 돼. 풍습이 아주 더러운 나라더구나. 조선 사람은 여성에게서 순결과 정조 더 이상이 없잖더냐.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 정조 말고 없잖느냐. 그 나라는 아니야. 남자들조차도 경험 많은 여자를 숭배해. 그런 지경에 이룩한 불경은 참으로 대단한 업적이지.”
한 씨는 친정아버지의 표정을 일별하고 말머리를 꺼낸다.
“때때로 아버님의 의도를 이해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지난 얘기지만요.”
“무슨 얘기인가.”
“큰고모님 팔아먹은 것도 부족해서 작은고모님까지 팔아먹느냐, 두 누이 팔아먹고 소리 없
이 호의호식하는 자가 누군지 아느냐, 조정 안팎이 들끓어요.”
“저나 나나 부친 일찍 잃은 탓 아니겠느냐.”
한 확은 장남이라는 무거운 짐을 추스르며 목이 멘다. 우울하다. 수시로 내려지는 금혼령
은 기우제보다 다급하다. 12, 3세부터 16, 7세의 숫처녀라야 한다. 명나라에서는 조선이 요
동 땅을 탐낸다고 생각하고 견제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백성을 함경도로 대거 이주시키고
성을 쌓고 육진을 개척하는 속내를 모를 리 없다.
“명나라를 달래도록 하라. 어떤 요구라도 들어 줘라,”
그럴수록 왕 이 도(李祹)의 교지는 엄혹하다.
처녀들은 경회루에서 중궁이 베푸는 후한 전별연을 받고 근정전 뜰에 대기한 교자에 오른
다. 명나라 사신이 교자 출입문에 자물쇠를 채운다. 환관과 화자, 다반을 지을 줄 아는 집찬
비, 수종하는 비나 유모 등 수 십여 명은 말을 탔다. 경복궁 동쪽의 건춘문을 나선다. 부모
와 친척들이 거리를 막고 울부짖으면 구경꾼들도 덩달아 눈시울을 붉힌다.
“아니 이럴 수는 없소. 교자 하나에 두 사람을 태우다니.”
빠른 걸음으로 달려온 한 확이 고함을 쳤다. 관리가 흘긋 뒤돌아본다.
“행렬이 길면 안 좋소. 실제 숫자보다 적어 보여야 하오. 황제의 명이오.”
그는 한 확을 간단히 물리친다. 당신은 누구요? 하더니 한 눈에 알아볼 수있는 주본을 좌
르르 펼친다.
“자, 봅시다. 정헌대부 공조판서 성달생의 딸이니 나이 17세로 신묘년 8월 17일 신시에
출생했고 본관은 경상도 창녕인데 현재는 한성부에 거주하고 있으며…….”
“됐소. 그만 하시오!”
“다반을 지을 줄 아는 집찬비 열 명을 가려 뽑았으며 여아들을 뒤따라 북경으로 가게 했는
데 화명(花名)을 열거하자면…….”
한 확은 뱀처럼 매끄럽고 차가운 관원의 목소리를 뒤에 두고 걸음을 옮긴다.
명나라로 보내는 선물 궤짝은 2백여 개. 궤짝 하나에 여덟 명의 인부가 매달렸다.
세저포9십 필·저포3십 필·단자2십 필·명주3십 필· 석등잔2십 벌·다삼4십 근·채화석 열 장·
말2십 필·만화침석2십 장·호피5 장·유둔·녹비수갑·말·모의·모관·이엄·매 따위다.
답례로 받은 물품을 서로서로 되돌려주며 사례 품목을 늘렸다. 칡덩굴로 묶고 멜빵을 만들
어 각기 하나씩 등짐을 졌다. 관을 운구하듯 궤짝에 매달린 여덟 명의 행보는 제멋대로여서
논두렁길 밭둑길에 꼬꾸라졌다. 그럭저럭 움직이는 행렬은 산모퉁이 셋을 굽어 돌아도 끊기
지 않는다. 장장 5릿길이다.
한양을 떠나 개성·평양·안주·의주·요동·북경에 당도하기까지 2개월, 비감에 젖은 피로한 여
정이다. 찌는 더위를 만나면 가시덤불이나 우거진 풀숲을 헤치고 눅진하게 고인 웅덩이 물
로 목을 축였다. 엄동이면 계곡의 얼음장을 깨뜨리고 솥을 걸어 검불을 긁어다 불을 지핀
다. 녹은 물에 얼굴도 씻고 버선도 빨았다. 여아들은 말이나 가마꾼이 병들어 죽어 걷기 시
작했다. 관원들이 갈 길을 재촉하는 대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른다. 최 씨와 노 씨는 도중
에 병이 났다. 의관을 불러 약을 먹이지만 소용이 없다. 가랑이를 벌리고 어기죽어기죽 걷
다가 주저앉았다. 환관 녀석 몇 몇이 풀숲으로 끌고 들어가 옷을 벗기고 아랫도리를 쑤신
탓이다. 의관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알은 체 하더니 목덜미에 쑥뜸을 떴다.
시월에 한양을 떠나 북경에 당도하면 단풍졌던 산야는 정월 봄 햇살에 물들었고 칠팔월 삼
복지경에 한양을 떠나면 까칫까칫 메마른 초가을 바람에 몸을 말리며 북경에 당도했다. 어
쨌거나 지리한 여정은 더 이상 몸서리쳐진다. 떠난 길은 당도하기를 소망한다. 그들 일행을
맞아준 황제의 집 자금성은 여아들이 앵두만한 입을 벌리고 놀라기에 충분하다. 넉넉한 먹
거리에 정신이 팔린다. 황후와 궁녀, 내시, 시종들만 머무는 곳. 방의 숫자만 9천 여 개. 황
홀하다.
한 확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우리 조선이 다행스러운 것 하나가 있다. 아직은 명나라의 그 율법만은 따르지 않는다.
남의 나라 여자, 남의 나라 공물을 탐내는 일 말이다.”
한 확은 전에 없이 초췌하다. 6년 전 아내 홍 씨를 잃은 곤고함일까. 한 씨는 친정아버지
의 눈길을 잡는다.
“명나라 황제께서 아버님을 손녀사위로 삼고 싶어 하셨다면서요.”
한 확은 글쎄다, 하고 빙긋 웃는다.
“연로하신 어머니가 계신데 불효할 수 없다고 불응하셨다면서요.”
한 확은 이번에는 큰 소리로 웃는다.
명나라에 시퍼렇게 살아있는 첩이며 그 여자가 낳은 다섯 아들·딸들은 어떻게 하실 셈이
세요? 라고 물으려다 그만둔다.
사저로 돌아온 이후, 아침저녁 먼발치로 궁궐을 바라보자면 친정아버지에 대한 의구심이
격해진다. 영락제가 북정(北征) 중 죽었다. 여비들은 순장을 당한다. 비밀이 누설되기 때문
이다. 순장을 치르는 날은 우선 음식을 잘 차려 놓고 마음껏 먹도록 한다. 잔치가 끝나면
환관들이 공녀들을 당으로 데리고 간다. 이때부터 공녀들은 몸부림치면서 곡성을 터뜨린다.
짐승의 울음소리다. 황제의 아들이 친히 울음을 그치도록 위로한다. 그럴수록 곡소리는 절
절해진다. 한 확은 큰누이의 죽음을 목도했다. 나무 의자에 앉았던 열두 명의 공녀들은 혹
시 다른 지시가 내려지려나 싶어 울음을 그치고 기대에 찬 눈으로 한 확을 바라본다. 너도
나도 피차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리는 동안 환관들은 달려들어 공녀들의 두 무릎과 목을
밧줄로 묶는다. 재빠른 동작이다. 잠시 후 작업이 완료됐음을 알리면 마루판자가 열린다. 의
자가 떨어지고 공녀들은 까마득한 우물 속으로 스러진다.
열두 명의 공녀가 각기 고향 부모형제에게 마지막으로 쓴 편지를 품고 한 확은 북경을 떠
난다. 편지에는 그녀들의 잘린 검은 머리카락이 동봉된다. 그것을 전해 주던 날 한 확은 경
회루 연회에는 참석하지 않는다. 그들의 본가에 쌀과 콩, 옷감을 보내는 일로 마감한다. 한
씨는 자신이 혼례식을 치르던 날 친정아버지가 술잔을 기울이면서 열두 살 바기 사위에게
했던 말을 떠올린다.
“미녀를 줄을 이어 대령하겠습니다.”
친정아버지 한 확이 살아남는 방도다.
판중추원사 한 확은 정사에서 강하게 주장했다.
“신이 평안 감사로 있을 때 본도의 떠돌이 유민 수효를 조사한 바 있습니다. 무려 1만 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지난해는 김종서가 조사한 결과 9천 여 명, 도합 1만9천여 명이나 됩니
다. 그 외 누락된 인원이 얼마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남도의 백성들로 하여금 여연과 무창
으로 보내어 국경을 지키도록 이주시켰기 때문입니다. 여연과 무창 두 읍은 너무 먼 곳에
외떨어져 있고 험준한 재[嶺]에 막혀 있습니다. 처음 말 2, 3필을 끌고 갔던 사람들은 말이
파리하고 피곤해서 죽는 꼴을 지켜보아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팔아서 식량을 사기도 합니
다. 결국 군대의 장비까지도 팝니다. 해마다 계속되니 살림살이를 탕진하고 사방으로 흩어
집니다. 백성들이 안심하고 농사를 지을 수도 업무에 종사할 수도 없습니다. 어떤 계책도
불가능합니다. 원컨대 두 읍을 혁파시켜 평안도 백성들을 휴식시켜 주십시오.”
한 확이 지적한 폐해는 오래전부터 이어진 것이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좌승지의 말 몇
마디가 영향력을 끼쳤다.
“옛날에는 날마다 국토를 1백 리씩 넓혔는데 고을을 혁파해 없애자는 논의는 옳지 못합니
다. 선왕께서 종성·회령·경원·부령·경흥과 함께 오래 전에 설립했는데 갑자기 혁파할 수는
없습니다.”
한 확은 좌절하지 않는다. 다시 주청했다.
“평안도 백성들은 피곤이 극도에 달했습니다. 좌도·우도에 도절제사를 설치하여 무재에만
능한 인물을 도절제사로 삼았으니 그들이 지나간 곳에는 쇠잔하고 피폐함만 초래했습니다.
그 두 사람이 동성의 친형제간이기는 하지만 공무를 집행하기에는 피차가 의견이 달라 장애
가 있을 것입니다. 개정하십시오.”
한 확의 세련된 풍채와 조리있는 언변은 대간은 물론 드디어 제5대왕 이 향(李珦)을 설득
시켰다.
“비록 과명(科名)에서 나오지는 않았지만 처결하는 능력과 경국제세의 계략이 뛰어나구나.
결단코 아부하고 편당하는 사심이 없구나.”
상왕 이 도의 애국충정이 빛바래는 순간이다. 좌도·우도 도절제사는 이징석과 아우 이징옥,
그들은 동성 동복의 형제였고 함경도에서 그들만의 새로운 왕국을 꿈꾸고 있었다.
소쩍새가 울었다. 격자무늬 창살에 달빛이 자지러진다. 쥐오줌자리처럼 얼룩진 창호지가
지난 초가을 습기를 마음 놓고 말리더니 툭툭 갈라졌다. 냉기와 바람을 섞어 먹고 탱탱해
진 탓이다. 어둠에도 눈부신 햇살에도 한 씨는 은신할 수가 없다. 이부자리 속에 누웠어도
딱히 잡히는 상념도 없다. 후다닥 일어나 등잔에 불을 붙이지만 일감이 손에 잡히지도 않는
다. 노비에게 내릴 지시사항도 없다. 분명한 것은 할 일이 아무것도 없지만 뇌리에 끈질기
게 넘나드는 그림자는 불안 초조다. 친정아버지 한 확의 도량이며 장대한 풍채, 세련된 언
변 그것이 주던 신뢰와 의미가 추락하면서 겪는 증세다. 돌개바람이 휘젓고 떠난 들녘 저편
에서 헛기침처럼 살아나는 환영은 시할아버지 이 도의 근엄함이다. 그는 스무살 안팎의 적5
남, 적7남을 해마다 하나씩 잃었다. 아내 심 씨마저 자리에 눕자 신병의 고통을 자주 호소
했다. 시도때도 없이 혼절했다. 사물의 형체를 겨우 감지하던 시력은 대신들의 얼굴도 알아
보지 못했다.
“희부옇기만 하구나. 짙은 안개 속을 헤매는 것같아.”
전국 유명 사찰에 환관을 보내 제를 올리라고 지시했다. 고승 8십 여 명, 나이 서른을 넘
겨 노년에 접어든 장남 이 향, 십 대 후반의 이 용, 이 구, 이 증, 열 살 겨우 넘긴 이 담까
지 아내를 동반하고 줄을 이어 들어섰다. 왕 이 도가 주위를 둘러보며 지시했다.
“연비를 행하고 부처님의 자비를 빌어라.”
그들은 팔소매를 걷고 팔뚝에 향불을 지폈다. 연일 계속된 기도와 연비도 허사였다. 심 씨
는 피접 보름 만에 숨을 거두었다. 심 씨의 장례를 치른 지 두어 달 후, 왕 이 도는 훈민정
음을 마무리 짓고 어제를 썼다.
한 씨는 세 아이들에게 낮은 목소리로 초근초근 읽어준다.
“자 들어보렴. 너의 증조부님의 가르치심이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우매한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것
이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쉬 익히어 날마다 쓰는데 편하게 할 뿐이다.’
한 씨는 평정을 찾는다. 자식들이 말 귀를 알아듣거나 말거나 단잠에 빠졌거나 말거나 어
제를 읽어 주는 일은 한 씨의 유일한 즐거움이요, 희망이었다.
왕, 이 도는 집현전 학자들로부터 언문 제작의 부당함을 지적받았다.
“이제 따로 언문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이적과 같아지려는 것입니다. 정신
을 맑게하고 혈액순환을 촉진시키는 신기롭고 향기로운 명약 소합향을 버리고 쇠똥을 굴려
만든 당랑환을 취하는 것과 같습니다. 언문으로 한 때 가능할지는 몰라도 그렇게 임시 방편
을 하는 것 보다는 차라리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문자를 습득하여 길고 오
랜 계책을 세우는 것만 못합니다. 유식한 사람은 이두까지도 야비하게 여겨 이문으로 바꾸
려고 생각했습니다. 하물며 언문은 문자와 조금도 관련되지 않고 오로지 시골의 상말에 불
과합니다”
왕, 이 도는 집현전 학자들을 불러들였다.
“너희들이 이르기를 ‘음을 사용하고 글자를 합한 것이 모두 옛 글에 위배된다.’ 하였는데
설총의 이두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느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뜻이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함
이 아니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하면서 군상이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
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 칠음에 자모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 잡지 아
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삼강행실도를 언문으로 번역하여 반포하면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왕 이 도는 밤잠을 설치고 식음을 전폐했다. 영육을 말리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무
따위는 세자에게 떠맡기고 어떤 누구의 출입도 허용하지 않은 철저히 밀폐된 공간에서 창백
한 낯빛으로 여명을 맞으며 한글 창제를 끝내었다.
그 무렵 한 씨는 친정아버지 한 확의 행보를 대놓고 지탄했다.
“아버님은 명나라 황제에게 공녀·공물 바치는 일을 언제까지 전담하실 셈인가요? 이십여
년 동안 일곱 차례에 걸쳐 처녀, 여종, 집찬비, 가무녀 해서 2백여 명을 끌어다 바치셨어요.
생송장처럼 말이지요.”
“이 아비도 알 수 없구나.”
한 확의 대답은 혈전처럼 목구멍을 뜨겁게 넘어왔다.
궁궐로부터 들려오는 소문은 흉흉했다. 해질녘 붉은 노을을 안고 한 씨는 집을 나섰다. 양
덕방 향교동(현 계동·가회동 또는 종로구·낙원동·운니동 일대) 경혜공주의 집으로 향했다. 시숙부 이
향이 애지중지 하던 외동딸네 집이다. 집을 지을 때 그 주변의 민가 3십여 채를 헐었다.
집을 짓는동안 딸사랑으로 쪽을 못쓰는 어리석은 임금님으로 비웃는 우스갯소리가 생겼다.
딸사랑으로 쪽을 못쓰던 그분도 가고 없다. 경복궁 담장을 지나 골목골목 돌았다.
대문은 화들짝 열려 있었다. 걸음을 늦추고 숨을 골랐다. 비릿하고 퀴퀴한 냄새가 훅 끼얹
혀졌다. 푹푹 찌는 무더위에도 미쳐 부패하지 못한 생피 냄새였다.
“시누이님.”
한 씨는 뜰로 올라서서 기척을 살폈다. 정적과 기운 햇살을 헤집고 문고리 소리가 들려
왔다.
“시누이님, 저에요.”
경혜공주는 대청 한 가운데 그림처럼 섰다.
“별 일 없으신가 걱정이 돼서요.”
“그거야, 올케님이 더 잘 아실 터인데요.”
경혜공주는 말 몇 마디 건네다가 또 그렇게 그림처럼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더 잘 알다니요. 시누이님.”
한 씨는 경혜공주의 작고 허약한 몸을 당겨 안았다.
“방금 상왕 홍위(弘暐)가 끌려갔습니다. 뜰에서 흙 파고 놀던 우리 홍위가 아무 영문도 모
른 채 궁궐로 끌려 들어갔습니다. 저녁밥도 들기 전입니다. 홍위는 궁궐보다 이 누나 처소
를 더 즐겨 찾았거든요.”
경혜공주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따라 황급히 방으로 들어갔다. 서둘러 아기 입에 젖을
물렸다. 한 씨는 포대기 깃을 헤치고 아기의 분홍색 볼을 손끝으로 가만히 만져본다.
“아들인가요, 딸인가요.”
“돌아가 주세요.”
경혜공주는 단호했다. 한 씨는 경혜공주의 노여움이 갈앉기를 기다린다.
“기왕 찾아주셨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홍위가 상왕으로 물러나고 숙부님을 왕좌에 모시는
과정은 대체로 순탄했습니다. 조부님 이 도 어른의 가르침과 자비로움에 영향을 받아 홍위
는 학문에 뜻을 두었습니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권력이라니요. 말도 안 됩니다. 저는 다
섯 살 까지는 어머니 손에서 크다가 외가로 갔으니 홍위와는 다릅니다. 태어난지 사흘만에
어머니를 잃은 홍위와는 다르고 말고요. 저를 키운 외가의 몸종 백씨는 선량했습니다. 핏덩
이 홍위는 양씨 할머니 손에 컸지만 그 분은 뒤늦게 궁궐에 들어와 아무런 발언권이 없습니
다. 홍위는 누구의 품에서 비바람을 피해야 합니까. 조부님 이 도 어른에게 충성을 다 받쳤
고 그분의 유지를 받들어 어린 홍위가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던 분들도 엊그제 숙부님의 칼
에 목이 떨어졌습니다. 홍위는 상왕이기 전에 저의 하나뿐인 혈육입니다. 제발 우리 홍위가
죽는 일은 없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올케에게 실낱같은 기대를 걸어도 되겠습니까? 엊그제
태어난 저의 아들, 이 아기도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아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말입니다.
단지 제가 홍위의 누이라는 이유만으로요. 황표정사, 대신들이 황색으로 표시한 이름 위에
홍위는 낙점이나 하는 일, 물론 문제 있습니다. 이제 끝나지 않았습니까? 살생부 말고 방법
을 달리해 주십시오.”
어둠이 내렸다. 양덕방 향교동 골목은 여전히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한 씨는 뒤늦게 조급
해졌다. 세 아이가 기다리고 있는 사저 영희전을 향하여 부지런히 걸음을 떼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진응사 통사가 한 통의 서찰을 내밀었다.
“한 확 어른께서 북경을 떠나 귀국 도중 졸하셨습니다. 칠가령을 지나 사하역에 당도하
시면서 어느 객사에서요. 애도를 표합니다.”
“아, 네. 방금 무슨 말씀하셨지요!”
한 씨는 온 몸이 얼어붙는 듯 했다. 떨리는 손끝으로 피봉을 열었다.
「이 글이 막내딸에게 전해지기를 기원하면서 거짓없이 기록한다. 그 까닭은 내 딸 앞
에 떳떳하고 싶어서다. 변명이라고 생각해도 안 될 것은 없다. 네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
너의 시할아버지 이 도라는 것도 나는 잘 안다. 그분의 청사에 빛날 업적이 한글 창제라
는 것도 안다. 내가 그 어른과 사돈을 맺은 것을 혹자는 야망의 음흉한 속셈이라고 치부할
터이다. 아무래도 좋다만 어리석은 백성을 가엾이 여기신 자비와 업적만을 앞세운 것이 실
책이었구나. 평안도·함경도를 지키고 더 멀리 압록강 저쪽 요동을 정벌하려는 상왕의 뜻을
계승한 의지도 또한 역사에 남을 충효사상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 어리석은 아비는 그분
의 업적과 충효만을 우러렀을 뿐 여아들, 누이들의 불행을 외면했다는 말이 되는구나. 근
래 명나라에 바치던 공물·공녀 건이 흐지부지 된 것이 이 애비의 뼈아픈 반성도 한 몫 했
음을 인정해 다오. 공물 가짓수를 줄이고 품목을 바꿔 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황제에게
빌고 또 빌었다. 더 이상의 공녀는 용납할 수 없다고 읍소도 통사정도 했다. 황제를 지극
히 흠모한다는 아부 아첨의 말도 서슴치않았다. 종당에 아비는 적취라는 병을 얻었다. 울
화병이지. 명나라 황제께서 명의를 주선해 주면서 기일에 구애받지 말고 완치하도록 하라
권고하셨지만 한 마디로 거절했다. 죽더라도 발 하나는 조선 땅에 들여놓고 죽어야 하겠기
에 길 떠날 채비를 서두른다.」
1456년 9월 사하역 객사에서 어리석은 아비 한 확은 쓰노라
* * *
나의 여친은 오늘도 해가 저물도록 인사동·안국동·운니동 일대의 5백여 년 전 문화와 역사
가 숨쉬는 명소를 찾아다닐 것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을 이끌고 불행
한 우리의 역사와 문화 알리기에 열을 올릴 것입니다. 직업의식이 강한 여자니까요.
첫댓글 귀한 작품 잘 감상했습니다.
작품 말미의 약력 삭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