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늦가을 일요일 오후 농촌에서 읍내로 향하는 마지막 시내버스는 긴 흙먼지를 꼬리에 달고 구불구불한 신작로를 느릿느릿 달리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토요일에 고향 집을 찾았다가 월요일 등교를 위해 일요일 오후 마지막 버스로 읍내로 돌아가는 중고교 남녀 하숙생, 자취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버스 승객은 활동사진 같이 차창 밖을 스쳐 지나가는 늦가을의 풍광을 멀거니 바라보거나 눈을 감고 차량 소음을 귓가로 흘리고 있었다.
추수를 끝낸 늦가을 휑한 벌판엔 군데군데 쌓인 볏짚 가리와 벼 그루터기 그림자가 키재기를 하고 서산 넘어가는 해는 집을 떠나는 여린 학생들의 마음을 쓸쓸하게 한다. 앞산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면 옹기종기 둘러앉은 초가집엔 밥 짓는 연기가 굴뚝에 뿌리를 박고 하늘로 자란다. 집집이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고 물안개는 마을 바닥을 넓게 훑는다.
승객 모두가 상념에 잠겨있을 때 안내양(당시 차장)이 정적을 깨고 김칫국물이 뚝뚝 떨어지는 항아리를 싼 보자기를 치켜들고 소리를 질렀다. ‘이거 누구 꺼요?’ 하면서 차 안을 둘러보았다. 그동안 멀거니 창밖을 보거나 조는 척했던 차 안의 시선들이 일제히 안내양에게 집중되는 순간, 필자는‘아’하는 탄성을 마음속으로 질렀다. 안내양 손에 든 보자기는 어머니가 하숙집 아주머니 갖다 드리라고 담아준 김장 김치 항아리였다. 의자 옆 차 바닥에 세워놓았던 항아리가 차가 좌측으로 급회전하면서 또르르 굴러서 안내양이 서 있는 승강구 홈에 처박힌 것이다.
평소에도 물건을 싼 보자기 들고 다니는 걸 창피해하던 필자는 더구나 여학생들까지 많이 탄 차에서 김칫국물이 뚝뚝 떨어지는 보자기가 내 것이라고 할 용기가 손톱만큼도 없었다. 보자기의 주인이 나라는 것을 누가 지적하지 않기만을 바라면서 시선을 차창 밖으로 돌리며 외면했다. 안내양은 두세 번 확인해도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좌석 옆에 김치 항아리를 세워두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좌석에 앉았다. 밀폐 용기가 없었던 당시라 뚜껑이 있는 작은 옹기는 옆으로 기울이면 내용물이 흘러나올 수 있어 항상 세워두어야 했는데, 옆으로 굴렀으니 국물이 흘러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필자는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집에서 8km 정도 떨어진 읍내에서 하숙하면서 토요일 오후에 고향 집에 갔다가 일요일 오후에 읍내 하숙집으로 가곤 했다. 어머님은 하숙집 아주머니가 자식에게 반찬이라도 잘해주라고 집에서 수확한 잡곡이나 푸성귀 등을 보자기에 싸서 하숙집에 갖다주라고 자주 하셨다. 그럴 땐 보자기 들고 다니기가 창피해서 입이 돼지주둥이처럼 나오곤 했다. 당시 농촌엔 현금이 필요할 때 쌀을 팔아 현금(쌀로 돈을 산다고 한다)을 마련하는데, 읍내 사람들도 돈으로 쌀을 사 먹으니 하숙비를 쌀로 지급했다.
읍내 버스 정류장에 내려 하숙집으로 갈 때는 김치 항아리를 버린 아쉬움보다 김치 냄새나는 보자기가 없는 게 오히려 다행이었다. 하숙집에 도착해서 저녁을 먹고 방에 들어가니 외로움이 몰려들었다. 3대가 한집에서 북적북적하던 시골집에서 가족을 떠나와서 필자 혼자, 그것도 밤에 하숙집 방에 있으니 외로움과 여수에 젖는다. TV는 물론이고 라디오도 없는 하숙방에서 공부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아 그저 멍하니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전기료를 아끼기 위해 주인 방과 하숙방 벽 사이에 뚫은 구멍에 형광등을 달아 양쪽에서 같이 쓰는 구조로 밤늦게까지 공부할 때는 난감할 때도 있다.
저녁이 되면 읍내 단 하나 있는 극장에서 밤마다 확성기로 영화 선전도 하고 유행 중인 대중가요를 들려줬다. 요즘 같으면 소음 공해로 어림도 없는 일이지만, 당시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잠자리에 드니 영화관 스피커에서 유행중인 대중가요가 밤의 정적을 깨고 들려왔다. “맺지 못할 인연일랑 생각을 말자, 마음에 다짐을 받고 또 받아, 한 백번 달랬지만 어쩔 수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