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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소카 왕의 석주와 석주의 머리 부분 |
제 3결집
대륙을 통일한 아쇼카왕은 전쟁의 살생을 참회하며 절과 탑을 많이 세우고 승가에 공양함으로서 출가자가 늘기 시작하여 수도 파탈리푸트라(Pataliputra)의 계원사(鷄園寺)에는 6만 명의 승려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외도들이 승려를 가장하고 승가 내에 스며들어 자연 교단의 화합을 저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를 본 아쇼카는 당시의 고승인 목갈리풋타 티사(Moggaliputra-Tissa)에게 교설의 확정과 승가의 화합을 도모하도록 위촉하였다.
이에 목갈리풋타는 왕명을 받들어 천 명의 승려를 선출하여 스스로 상수(上首)가 되어 결집을 행하였는데, 아쇼카왕 즉위 18년에 시작하여 9개월간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 결집을 화씨성결집(華氏城結集), 또는 일천결집(一千結集)이라고 한다. (그때까지 스승으로부터 제자에게로 약 200년 동안 구전되어 오던 경전은 이 제3회 결집 때에 비로소 부분적으로 문자화 되었다고 본다.)
아쇼카왕(Ashoka, B272~231)의 활동과 시대적 배경
그는 인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와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마우리아 왕조의 시조 찬드라굽타(Chandragupta)왕의 손자요,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이었다. B.C. 326년에 있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침공은 인도대륙 통일을 촉진시키는 영향을 낳았다. 그가 왕위를 계승한 시기는 B.C. 268년경이이다. 마우리아왕조의 아쇼카(Asoka)왕은 영토 확장 사업을 충실히 계승하는 한편, 문화 향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를 위해, 칼링가지역(지금의 오릿사 지방)을 정복하러 갔다가 전쟁 속에서 무참히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게 되면서 무력의 공허함을 깨닫고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그러나 불교를 수용하게 된 것이 중앙집권적인 조직과 군사력에 의한 무력만으로는 광활한 영토와 인도의 여러 이민족을 통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높은 정치 이념 다르마가 필요했다는 의견도 있다. 다분히 정치적인 계산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이때부터 아쇼카는 불법의 홍포에 열정을 보이게 된다. 그는 몸소 국내 각지로 법의 순행을 하고 사람들에게 법을 가르쳤다. 또한 법의 사신 파견으로 외국(시리아, 이집트, 마케도니아등)과 인도 여러 지역 곳곳에 불교를 전파하게 된다. 따라서 스리랑카와 헬레니즘 문화권으로 불교가 확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지역은 포교의 거점이 되는 동시에 후에 부파를 형성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스리랑카는 전설에 의하면 아쇼카 왕자 (혹은 동생이라고도 함.) 마힌다가 전도해 개교되었다고 하는데 그 후 현재까지 매우 번창하고 있으며 상좌부(테라바다) 불교의 중심지가 되고 있다.
.아쇼카왕의 불교 귀의와 법칙들
아쇼까왕은 인도 여러 지방에 석주와 바위에 그의 통치이념을 새겼는데 이를 ‘법칙(法勅)’이라고 한다. 고대 인도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유일하고도 확실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종류로는 마애법칙(磨崖法勅)-소마애법칙(小磨崖法勅)-석주법칙(石柱法勅)-소석주법칙(小石柱法勅)-동원법칙(洞院法勅)등 다섯으로 분류된다.
마애법칙은 국경지방에, 석주법칙은 국내 요충지와 불적지에 위치하고 있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고 가장 확실한 금석문으로 고대인도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이 법칙은 지금까지 약 40개가 발견됐다. 唐代의 현장과 법현도 이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비문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70여 년 전인 1837년이다. 영국학자 제임스 프린셉(James Princep)이 비문 해독에 성공, 그 내용이 알려졌다. 양은 짧지만 귀중한 역사적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붓다의 입멸연대를 추정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 비문 덕택에 아쇼까왕의 즉위 연대를 알 수 있었고 이를 역으로 추정해 부처님의 입멸 연대를 추정할 수 있었다.
오늘날 부처님 입멸을 기점으로 사용하는 불기의 사용이 아쇼까왕 비문 덕분에 가능해진 것이다. 이외 부처님의 탄생지, 부처님이 사용한 언어, 가장 오래된 몇몇 불교 경전들의 명칭, 불교의 전도, 아쇼까왕 당시의 불교교단 등 불교사에서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아쇼카는 자기를 포함한 모든 인간이 지켜야할 ‘法’으로 생각한 것은 불타의 평등사상에 입각한 사상이었다. 즉 모든 생명을 사랑하고 진실을 말하며, 관용과 인내를 발휘하고, 가난한 사람을 돕는 등의 윤리적인 성실성과 자비의 이념이었다. 그래서 그의 법칙에는 ‘사성제’, ‘인과응보’, ‘열반’같은 개념은 없고 보편적인 善인 선행과 보시, 애정, 진실, 청정한 행위 등이 많이 나타나는 데, 이것이 바로 그가 지향하였던 법이기도 했다.
이처럼 아쇼카의 마애법칙의 문맥에서는 한없는 관용이 넘치고 있지만 동시에 인간 개개인에게 도덕적 주체로서의 자각과 회복을 강조하는 호소가 읽혀진다. 바로 이것이 아쇼카가 파악한 법의 원리였다. 참다운 법은 오직 개인의 실천에 의해서만 증명되고 그 실천이 바로 크나큰 법의 실천을 낳는다는 것이다. 아쇼카는 말로만 진리, 법의 실천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한순간 한순간의 선(善), 마음의 청정, 절제야말로 ‘붓다의 법’이라는 생각이었다. 아쇼카는 그가 세운 법칙들이 영원히 세상에 통용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즉위 13년에는 법대관(法大官)을 임명하고 5년마다 전국을 순회하면서 ‘법의 敎誡’를 펴게 했다. ‘마애법칙’은 이런 염원에서 이뤄진 것이었다.
법칙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마애법칙 제 12장: ‘왕은 보시와 갖가지 공양으로 출가와 재가의 모든 종파를 공양함’
-마애법칙 제 7장: ‘모든 종파 사람이 일체처에 머물기를 바람’
-석주법칙 제 7장: 불교와 바라문, 자이나교의 법대관을 임명한 내용
-소마애법칙: 불교신앙 최초에는 비열성적이이었으나 점차 ‘승가와 가까이 한’내용
-마애법척 제 8장: 즉위 10년에 ‘삼보리를 얻음’을 기록
-니갈리사가르 석주법칙: ‘즉위 14년이 지나 코나카마나 불탑을 세우고 공양’
-룸비니석주법칙: 즉위 20년이 지나 방문하여 공양하고 세금 감면한 내용 기록
-산치․ 사르나트․코삼비 법칙: 승가의 분열을 훈계하며 破僧은 흰옷을 입혀 환속
-바이라트 법칙: 왕이 승가에 경례하고 삼보에 공경과 신심을 바친다는 고백, 불타가 설한 법은 善說이지만 정법을 오래 머물도록 하는 데 유용한 7가지 법을 기록
그는 진정으로 “불법을 따르고 사랑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해야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스스로 전륜성왕이 되어 ‘진리의 다스림’으로 세상을 정복하겠다는 것이었다.
인도 내에서의 기록일 뿐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이런 ‘진리의 정복’을 위해 아쇼카 왕은 스리랑카나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는 물론, 멀리 시리아, 그리스, 이집트에까지 포교사를 보냈다고 한다. 불교를 인도인의 종교에서 "보편 종교"로 변화시킨 셈이다.
BC 3세기에 아쇼카 왕이 세운 자인교 사원인 찬드라굽타 바스티 사원은 20m에 달하는 명예의 기둥이 있다. 아쇼카왕이 찬드라굽타 바스티 사원을 세운 이유는,
마우리아를 왕조를 창건한(B.C 320 경)-찬드라굽타(Chandra Gupta)는 아쇼카의 조부이자 자이나교 신봉자였다. 마하비라 사후 약 200년이 지난 뒤, 마가단 황제 챤드라 굽타(BC 321-297)는, 왕위에서 물러난 후 자이나교에 심취하여 자이나교 승려들을 동인도로부터 남인도로 인도하여 마이소레주의 슈라바나 벨골라에 자이나교 사원을 설치하였다. 찬드라굽타 왕은 말년에 자이나교 승려로 출가하여 벨골라 한 사원에 은거하다 단식으로 생을 마감했다. 찬드라 굽타왕의 손자인 아쇼카는 이런 조부나 부모의 영향으로 특정종교(불교)만을 장려하지 않았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불자들이 가장 오해하고 있는점..아쇼카는 불교만을 지향했다? 아쇼카가 세운 불탑(불상)은 전부불교이다? 석주법칙 7장을 참고,)
불교를 신봉하던 아수카(Asoka)(아쇼카) 황제의 손자 삼프라티(Samprati)가 자이나교로 개종함과 동시에 자이나교는 전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지역에까지 전파되었다.
구자라트와 마르와르(Gujarat & Marwar) 공주의 후원에 의해서 자이나교의 중심이 바하르의 성지로부터 구자라트의 새로운 중심지로 옮겨졌다. 자이나교의 경전을 결정짓는 역사적 회의가 AD 514년에 신 본베이주 바브나가르(Bhavnagar) 근교 발라비(Vallabhi)에서 열렸다.
이때부터 13세기까지가 자이나교의 황금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 자이나교는 정치적으로 인도 전역에 걸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서부, 중부, 남부 인도의 모든 왕조 가운데 대부분의 수상이 자이나교 신도라는 사실이 이것을 증명한다.
구자라트에서는 쿠마라팔라 왕 때 자이나교가 국교로 되었다. 온 나라에 동물 살해를 금지하고 자이나 신당을 예술적으로 아름답게 지었다.(구자라트-역사 BC 250년경 AD 4~5세기에는 굽타 제국 영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