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대체로 연애소설을 즐겨 읽는다. 영화나 비디오 테이프, 케이블 텔레비전과 같은 연애소설을 대체할 만한 다양한 볼거리들이 많아졌기 때문 지금은 옛날만큼 연애소설을 많이 읽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렇다하더라도 그것이 연애소설의 유구한 역사의 의미를 반감시키지는 못한다.
누구나 사랑에 빠지면 자신이 타당하고 의미 있는 존재라는 느낌을 갖는다. 불확실하고 파편화된 현실 속에서 자신이 충일한 존재라는 내면의 실감은 일상생활에서 비상한 활력을 불러오고, 행복한 감정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연애는 두 사람 사이의 친밀감과 비밀을 공유하며 키워나가는 사적 관계이지만,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원심력이 영향력 아래에 놓인다. 연애에 개입하는 사회적 규범과 준칙들, 혹은 타자들의 속박, 명령, 금기의 힘이 강화되면 강화될수록 연애는 감미로워지며 그 열정은 더 타오른다. 사랑은 명백하게 외로움의 대안이다. 사람들은 사랑의 행복을 지속시키기 위해서 어떤 희생도 감수하겠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사랑에 빠진 남자와 여자들이 현실을 회피하는 듯한 선택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개의 연애소설들은 연애 당사자들 사이에 가로놓인 장애가 크고 극적이면 극적일수록 독자의 호기심, 자극과 흥분이 커진다는 공식에 충실하다. 사랑의 갖가지 장애적 요소들은 연애소설의 극적 재미를 발화하는 촉매제인 것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갖는 낭만적 심리 상태란 환상이라는 몰약을 마시고 빠진 반이성적 상태이자 아노미 상태다. 미래의 삶의 형태를 결정하게 되는 중요한 실존적 선택의 순간에 이성이 마비되고 판단이 흐려진다면 그것은 끔찍한 일이다. 냉철하게 보자면 사랑에 빠진 순간은 바로 그런 실존의 위기의 순간이기도 하다.
사랑은 그런 것이지요. 진짜 사랑은 여러 번일 수 없습니다.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진짜 사랑이 평생에 걸쳐 단 한번뿐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무리 여러 번 사랑을 겪는다 하더라도 사랑은 단 한번의 유일무이성, 그 절대성 속에서 발견되고 겪어낸다는 뜻입니다.
사랑은 늘 그것을 겪고 난 뒤 기억의 현재진행형 속에서 추체험하는 영혼의 율동, 기억의 몸짓이라는 것이지요. 말하는 사랑은 늘 현재에 있지 않습니다. 현재에 있는 사랑은 말해질 수 없는 것, 느낌과 사유를 챙기지 못할 정도로 너무 순식간에 터져 나오는 오열과 같은 것. 현재진행형의 사랑은 몰입이자 초월이고, 있음과 없음이 태극의 문양처럼 하나로 얽혀 있는 상호적 교호로서의 죽음입니다.
현재라는 중심 속에 있을 때 살아지기는 하되 기억의 작용으로서 사랑은 사유되지는 않습니다. 중심에서 한발 비켜서게 될 때 보이는 것, "아하, 내게도 불같은 사랑이 지나갔구나 !", 라고 알아차려지는 것이지요.
우리 영혼엔 사랑이 지나간 수레바퀴 자국이 뚜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내가 쓴 사랑의 시들은 그 수레바퀴 자국에 괴인 물의 표면에 낀 입동의 살얼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지나간 것들과 지금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것들의 대화, 심미적 회통(會通)의 겹을 보여줍니다.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의 지나간 사랑과 말할 수 없는 것으로서의 지금 일어나고 있는 사랑은 서로를 은폐물로 삼습니다. 과거는 현재 속에 숨고, 현재는 과거 속에 숨음으로써 그 생리와 한계, 그리고 실체는 가려지면서 진상은 파열하듯이 드러납니다.
사랑을 지배하는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사랑이 궁극적으로 유예된 이별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숨가쁜 사랑이라도 시간을 이기는 사랑은 없습니다. 모든 과실에는 까만 씨앗이 박혀있듯이 모든 사랑에는 이별이 숨어 있습니다. 그 씨앗이 있기에 또 다른 사랑이 싹트는 것입니다. 죽은 땅에서 새싹이 돋아나듯이 지나간 사랑은 현재의 사랑을 싹트게 하는 씨앗이지요. 그리고 현재의 사랑은 이미 당신의 몸과 영혼, 삶의 중심을 관통하며 흘러가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의 견문이 아무리 넓더라도 되풀이되는 사랑의 말과 체위는 곧 지겨워지고 화물선처럼 둔탁하게 흐르는 시간은 원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우리를 알 수 없는 먼 이방의 항구로 데려가 버립니다. 우리는 그렇게 헤어지고 나는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서 잊혀진 의미가 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배워야 할 단 하나의 진실이 있다면 그것뿐이지요. 너무 절망스럽습니까 ? 사랑의 가벼움에 현기증을 느끼는 당신을 위해 한마디 위로의 말을 적어두지요.
소풍가기, 강가에서 낮잠자기, 낚시로 잡은 물고기 구워먹기, 새우와 크로와상과 쫀득쫀득한 쌀밥 먹기, 수영하기, 춤추기, 당신이 골라주는 구두와 속옷과 향수 사기, 신문 읽기, 가게 진열장을 한참동안 바라보기, 지하철 타기, 열차 시각 확인하기, 둘이 앉는 자리를 당신이 다 차지하고 있다고 투덜대며 옆으로 떼밀기, 빨래 널기, 파리 오페라 극장에 가기, 베이루트와 비엔나에 가기, 시장 보러 가기, 슈퍼마켓에 가기, 바비큐 해 먹기, 당신이 깜빡 잊고 숯을 안 가져 왔다고 볼멘 소리 하기, 당신과 동시에 양치질하기, 당신 팬티 사주기, 잔디 깎기, 당신 어깨 너머로 신문 읽기, 당신이 땅콩을 너무 많이 먹지 못하게 하기, 루아르 지방과 헌터 밸리의 포도주 저장고 견학하기, 바보처럼 굴기, 재잘거리기, 당신에게 마르타와 티노를 소개하기, 오디 따기, 요리하기, 베트남에 다시 가서 아오자이 입어보기, 정원 가꾸기, 당신이 코를 골며 잘 때 시끄럽다고 투덜대며 쿡쿡 찌르기, 동물원과 벼룩시장에 가기, 파리와 런던과 멜로즈에 가기, 런던의 피커딜리 거리에서 돌아다니기, 당신에게 노래 불러주기, 담배끊기, 당신에게 손톱 깎으라고 요구하기, 그릇 사기, 우스꽝스러운 물건들과 아무 쓸모없는 물건들 사기, 아이스크림먹기, 사람들 바라보기, 체스에서 당신을 이기기, 재즈와 레게음악 듣기, 맘보와 차차차 추기, 심심하다고 투정부리기, 변덕부리기,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있다가 깔깔거리며 웃기, 새끼손락을 까딱거리며 당신을 놀리기, 소들이 보이는 곳에 있는 집 찾으러 다니기, 점잖지 못한 물건들로 쇼핑 카트를 채우기, 천장에 페인트칠하기, 커튼 꿰매기, 재미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몇 시간 동안 식탁에 앉아 있기, 당신의 짤막한 턱수염을 잡고 당신을 꼼짝 못하기 만들기, 당신 머리 깎아주기, 잡초 뽑기, 세차하기, 바다 보기, 싱싱풍덩한 옛날영화 다시 보기, 공연히 당신 이름 불러보기, 당신에게 야한 농담하기, 뜨개질 배워서 당신에게 목도리 떠주기, 그랬다가 보기 흉하다고 다시 풀어버리기, 주인없는 고양이와 개를 거두어 먹이기, 앵무새와 코끼리에게 먹이주기, 자전거를 빌려서 타지 않고 그냥 놓아두기, 해먹에 누워 있기, 할머니가 보시던 비코네 식구들의 이야기 다시 읽으며 쉬잔의 드레스 다시보기, 응당에서 마르가리타 마시기, 게임하면서 속임수 쓰기, 다리미 사용법 배우기, 다리미를 창문 너머로 내던지기, 빗속에서 노래부르기, 관광객들 피해 다니기, 술에 취하기, 당신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고 나서 때로는 거짓말이 약이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기, 당신 말에 귀 기울이기, 당신에게 손 내밀기, 버렸던 다리미 다시 찾아오기, 대중가요의 가사를 음미하기, 자명종 맞춰놓기, 우리 여행 가방 챙기는 거 잊어버리기, 조깅 며칠 하다가 그만두기, 쓰레기통 비우기, 당신이 날 여전히 사라하는지 물어보기, 이웃집 여자랑 수다떨기, 당신에게 바레인에서 보낸 내 어린시절 이야기 들려주기, 내 유모의 반지와 헤나 냄새와 호박으로 된 동글동글한 장신구들에 관해서 이야기 하기, 계란 반숙이나 커피 따위에 적셔 먹을 길고 가느다란 빵 조각 만들기, 잼단지에 붙일 딱지 만들기......
며칠 전 새벽 어느 소설을 읽다가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와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을 길게 적어나가는 대목을 읽으며 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목록에 들어있는 게 한결같이 하찮은 일들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이란 대개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헝가리 출신작가 산드로 마라이의 『유언』 이후 찾아낸 썩 괜찮은 작가 안나 가발다의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안나 가발다는 1970년생이고, 두 딸을 둔 이혼녀랍니다. 소르본 대학을 나와 꽃가게 점원, 영화관좌석 안내원, 의류판매원, 가정교사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 경험을 하면서 글을 썼습니다.
10여군데 출판사로부터 딱지를 맞고 르 딜레당트라는 아주 작은 출판사에서 그이의 첫 작품집 『누가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좋겠다』를 낸 건 1999년의 일입니다. 이 무명신인작가의 첫소설의 초판 발행부수는 불과 8백부였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금세 대중들 사이에 입소문으로 퍼지더니 나중엔 프랑스의 대통령의 영부인이 침대 맡에 놓고 읽는 소설이라는 게 밝혀져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이의 첫 소설집은 무려 7십 만부가 펼리고, 그이는 단숨에 유명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이가 수녀원의 독방에 들어가 두번째 소설을 쓰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큰 출판사들이 거액의 선인세를 제시하며 책 계약을 채근했습니다. 그러나 그이는 그런 유혹들을 물리치고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은 자신의 첫 소설을 내준 출판사에서 자신의 첫번째 장편소설을 펴내며 신의를 지켰습니다.
저는 아직 그이의 첫소설집을 못봤습니다만(몇 달 뒤 신촌의 골목에 숨어있는 헌책방 「숨어있는 책방」에 우연히 들어갔다가 청미래에서 펴낸 이 책을 찾아냈습니다.) 그 첫번째 장편소설 『나는 그녀를 사랑했네』를 읽습니다. 위의 대목은 바로 그 소설에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두 딸의 엄마인데 남편이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집을 떠났습니다. 슬픔에 잠긴 "나"를 위로하기 위해 남편의 아버지가 "나"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시골집에 데려왔습니다. 근엄하고 재미없고 딱딱한 사람으로만 알았던 시아버지와 시골집 벽난로 앞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시아버지가 아내가 아닌 한 젊은 여자와 사랑에 빠졌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줍니다. 생의 회한으로 남게 된 이루지 못한 사랑..... 사막의 건천, 우기 때만 물이 흐르는 강, 와디와 같은 사랑이지요. 그 사랑 이야기 속에 삶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녹아 있습니다. 이를테면 "때로는 에움길로 돌아가고 상황에 적당히 맞춰가며 사는 게 인생이야. 우리 안에는 약간의 비열함이 있어. 그 비열함은 애완동물과 같아. 그것을 쓰다듬어 주면서 기르다 보면 애착을 갖게 돼. 그게 인생이야. 용감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적당히 타협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어. 타협하며 사는 게 한결 덜 피곤하지....."와 같은 대목 ! 위에 인용한 대목은 시아버지가 사랑했던 그 젊은 여자가 자신의 연인이 읽어보도록 호텔 방에서 적은 편지입니다. 문장은 간결하고 이야기는 매우 선명합니다.
이 소설을 읽으며 불가피하게 내 가슴에 불에 데인 자국처럼 남아 있는 지나간 사랑의 흔적을 들여다봤습니다. 맞아, 이게 인생이야 ! 라는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고, 그 사랑의 대상이 내게서 멀어져갔기 때문도 아닙니다. 나는 어느새 사랑을 믿지 않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쓰디쓴 자각 때문이었습니다. 시아버지, 그러니까 한 여자와 불같은 사랑에 빠졌지만 그 여자가 바라는 일상의 삶을 함께 하지 못한 남자. 이 건실한 도덕의 수호자는 기만과 위선의 말들로 여자를 안심시키며 제 가정도 지키고 짜릿한 사랑도 연장하려는 치사한 남자들의 연애행각의 전말을 되풀이합니다. 나는 그의 모습에서 내 그림자를 봅니다. 그는 관계를 끊는 대신에 "변함없이"와 "나중에"라는 말로 약속을 하면서 성관계를 계속 이어갑니다. 그것으로 충분했느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 "물론, 충분하지 않았지. 아니, 어쩌면 충분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내가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니까 말이야. 나중에 생각해 보니까 그렇더라고. 아마 나한테는 그런 상황이 적당했던가 봐. 적당하다는 말..... 참 매력 없지 ? 한쪽에는 든든한 마누라가 있고 다른 쪽에는 짜릿한 전율이 있는 것, 내 깜냥에는 그런 게 딱 맞았을 거야. 매일같이 집에 돌아와 저녁을 먹으면서, 이따금 밖에서 일탈을 경험하는 정도가 말이야..... 느긋한 포만감과 팽팽한 긴장이 어우러진 삶, 그게 편리하고 안락했지...... "
함께 읽으면 좋은 책들
안나 가발다, '어디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다'(용경식 옮김), 청미래, 2000
산드로 마라이, '열정', 김인순 옮김, 솔,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