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으로 보는 ‘엽기 조선’ 8장면
‘조선’ 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아마도 유교, 엄숙, 신분, 양반, 사대주의 뭐 이런 거 아닌가요?
겨우 100여 년 전의 시대이니 현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양태에
다소 ‘팍팍’한 구석이 남아있는 것도 이해할 만 합니다.
그런데 조선 사람이 꼭 그렇게 꽉 짜여진 질서에 갇혀 살았을까요?
혹시 근엄한 역사교육이 주입해놓은 대로 우리는 그저 ‘믿어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요?
최근에 나온 <엽기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역사를 사고하는 우리의 관습을 통쾌하게 깨주는 에피소드들이 등장합니다.
그 중 몇 개를 소개해드리려 합니다.
자 그럼, 엄숙주의를 벗어버리고 조선사를 날 것으로 한 번 들여다보겠습니다.
그림과 함께….
프롤로그. 음흉한 ‘조선’ 양반네
갓 쓰고 도포까지 차려입었습니다. 어딘가 유심히 쳐다보고 있네요.
아마도 뭔가 몰래 훔쳐보는 것 같습니다. 혹시 그 유명한 암행어사?
앗, 그런데, 이 양반 시선 가는 곳이….
아낙네 치마 걷어올려 드러낸 다리가 섹시합니다.
아이 젖을 먹이고 있는 부인의 가슴은 또 어떤가요?
아하, 빨래터군요. 이 양반, 참 음흉하기는…. 근엄한 체통은 어데 버리고… 쯧.
어쭈, 아예 쌍안경까지…. 갈수록 가관입니다.
그나저나 재미는 있는 모양입니다.
까짓것 우리도 한번 살짝 따라가 볼까요?
조선 사람이 실제로는 어떻게 살았는지 그 ‘속살’ 구경 한번 해볼까요?
#01. 가슴이 작은 여자가 좋다!
세자빈이나 중전의 간택은 기본적으로 세 단계를 거치게 됩니다.
최종 결정은 임금이나 대비전, 중궁전에서 하겠지만,
첫 단계인 초간택은 내시의 역할이 막중합니다.
윗선에서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후보’들을 유심히 살펴서 종합 보고서를 만들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들의 ‘여자 보는 눈’이 정말 중요해집니다.
이때 나름대로 간택의 기준이 되는 몇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가슴이 큰지 작은지, 입술을 자주 적시는지, 말할 때 귓불이 빨개지는지,
그리고 목이 가는지, 입술이 붉은지, 눈썹 양미간이 좁은지,
턱이 작거나 긴지 등등 외모를 살피고 나서
밥 먹는 모양이나 눈동자 색깔, 자식복까지 세심하게 관찰합니다.
자, 여기 조선의 미인과 대한민국의 미인을 한번 보세요.
채용신의 <운낭자이십칠세상>과 미스코리아 한경진입니다.
조선과 현대의 미감이 대충 짐작 가시나요?
좀더 자세히 볼까요? 얼굴입니다. ‘둥근 선’ 대 ‘각진 라인’이 두드러지죠?
다음엔 가슴입니다. 포동포동한 아기 얼굴만큼이나 ‘풍만한 부드러움’과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팽창된 긴장감’의 대조!
허리선을 시작으로 내려오는 하체입니다.
조선의 여인은 펑퍼짐한 한복이 감싸 안아서인지 ‘자연스러운 편안함’이 느껴지는 반면,
오늘날의 여성에서는 ‘굴곡진 아슬아슬함’이 숨을 멎게 합니다.
전체적으로 ‘모성적 이미지’ 대 ‘성적 이미지’의 극한 대립이라고나 할까요?
대체로 세자빈을 간택할 때 어떤 여인상이 높은 점수를 받았는지 짐작이 가시죠?
사실 지금 상식으로는 비과학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목이 두꺼우면 처녀가 아니라든가, 입술을 자주 적시면 욕구 불만, 양미간이 좁으면 색녀,
주걱턱은 착한 심성이라고 했고요,
결정적으로 가슴이 큰 여자는 ‘무식하다’란 말까지 나왔을 정도입니다.
참, 밥을 물에 말아먹는 처녀가 일순위로 뽑혔다고 합니다.
쌀 한 톨이라도 아껴서 물을 말아 깨끗이 그릇을 비우는 것이 국모의 자질이라는데,
나름대로 일리는 있죠?
#02. 백성이여 ‘백의민족’임을 포기하라?!
다시 빨래터입니다. 점잖은 양반네가 훔쳐보던 곳이죠.
김홍도의 <빨래하는 여인들>입니다.
지금이야 ‘드럼 통’에 집어넣으면 알아서 해주는 것이 빨래라지만,
최근까지만 해도 평평한 바윗돌 위에 빨래를 얹어놓고 몽둥이로 두들겨 패고,
주무르고, 짜는 식의 ‘빨래의 기술’이 도도히 전수되어 왔더랬습니다.
어쩌면 고된 시집살이의 한이 담긴 동작들이 승화된 것은 아닐는지요.
우리 민족이 흰 옷을 즐겨 입어서 더 힘들었을 겁니다.
때도 잘 타니 자주 빨아야 하고, 또 잘 지지도 않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조선의 권력층에서는 흰옷을 ‘척결’하기 위해 부단히도 애썼다는 사실!
고려 말 공민왕은 흰옷만 고집하던 백성과 관료들에게
청색으로 옷을 해 입으라는 청천벽력 같은 명을 하달합니다.
음양오행설을 기초로 머리에 쓰는 갓은 검은색으로,
몸에 두르는 옷은 청색으로 해야 한다는 논리였죠.
이런 상황은 고종의 단발령이 내려질 때까지 줄기차게 이어집니다.
태조는 노란색이 중국 황제의 색깔이라며 입지 못하게 했고
이어 흰색과 회색도 규제했습니다.
태종이 대신들의 복장은 무조건 색깔 있는 옷이어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면,
그 아들 세종은 궁궐에서 아예 흰색을 없애버렸습니다.
명종은 더 나가 전격적인 흰색 금지 조치를 내리기도 했죠.
그런데도 백성이 꿈쩍도 하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바로 경제성이죠. 옛날에 염료가 얼마나 비쌌는지는 아시죠?
#03. 세종의 소 도축 금지령과 ‘설렁탕 창제’의 아이러니
우리에게 소는 얼마나 친숙한 가축입니까. 예부터 가족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면 소를 도축하지 못하게 했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
농우가 부족해지면 벼농사를 짓기가 힘들어지고,
그러면 결국 국가 세수 확보에 비상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태종은 금살도감을 설치하고 ‘쇠고기와의 전쟁’을 선포했지요.
아예 소 잡는 백정을 도성 90리 안으로 못 들어오게 했습니다.
세종은 도성 안으로 들어온 백정을 잡아서 멀리 해안가로 쫓아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별로 효과는 없었습니다.
당연하죠. 쇠고기는 백성이 아니라 사회 지도층이 즐겼으니까요.
일반 서민이야 어디 감당할 수 있었겠어요?
아이러니는 소 금살령을 내린 세종 자신이
쇠고기가 들어간 설렁탕을 ‘창제’했다는 사실입니다.
해마다 경칩 절기 후 해일 축시에 선농단에서 제사를 지내며 풍년을 기원했는데,
왕과 문무백관이 직접 소를 끌며 경작하는 모습을 연출합니다.
세종이 제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 비를 맞았다 합니다.
몸은 춥고 배는 고프고… 어쩌겠습니까, 잡아야지요.
제에 썼던 소를 잡아 고기와 뼈를 넣고 멀겋게 끓여 먹었다는데,
이게 오늘날 설렁탕의 원조라네요.
아래는 선농제를 지냈던 선농단입니다. 제기동역 1번 출구로 나와,
오른쪽으로 난 골목을 따라 100여 미터 들어가면 있습니다.
#04. 아버지와 아들이 한 상에서 밥을 먹은 죄?!!
<전원일기> 보신 적 있으시죠? 회장님 댁 식사하던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회장님과 할머님이 한 상, 아들끼리 한 상, 며느리끼리 한상.
그냥 그러려니 하고 보아 넘길 수도 있지만,
이렇게 제각각 상을 차지하고 먹는 이유가 뭘까요?
예부터 우리 조상들은 아버지와 아들이 한 상에서 밥을 먹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아들이 아버지를 때려 죽였어도,
그게 같은 상에서 밥 먹다 그랬으면 정상을 참작해주기까지 했답니다.
당시 부모를 살해한 죄를 반역죄와 동일하게 취급해서 사형에 처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부자 겸상의 위험을 얼마나 심각하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아들과 아버지란 존재는 만나면 티격태격하는 사이라나요.
그래서 전생에 원수지간이 현세에 부자지간으로 만난다는 말도 나왔습니다.
따라서 부자지간은 최대한 마주치치 않는 게 좋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밥상에서는.
실제로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났나 봅니다.
1428년에는 진주에서 김회라는 사람이 아버지를 살해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를 계기로 세종이 효행을 널리 알려 백성을 교화하고자 <삼강행실도>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와 중국에서 충신과 효자, 열녀를 대표하는 모범 사례를 각각 35명씩 뽑아서
그림과 함께 실어놓은 것이지요. 위 그림은 그 중 ‘효자도’ 편입니다.
#05. 조선은 골초들의 천국이었다?!!
조선시대 장터로 한번 나가볼까요? 앗, 그,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저 아이들은, 이제 겨우 10대로밖에 안 보이는데,
태연하게 말 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습니다.
이 녀석들 표정 좀 보세요. 담배 맛 제대로 아는 모양입니다.
아니, 그런데 이 선비는 혹시 빨래터를 훔쳐보던 그 양반 아닐까요?
애들 담배 피는 걸 보면서도 태연자약합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어떻게 동방예의지국 조선에서 어린 것들이, 그것도 어른 앞에서 담배질이랍니까?!
김홍도의 풍속화 <장터길>이 증언하고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고… 난감합니다.
실제로 조선은 ‘골초국가’였다고 합니다.
19세기 순조 임금이 조선 백성의 흡연 행태를 보며
“아이들이 젖만 떼고 나면 곧바로 담뱃대를 문다”고
개탄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06. 조선과 일본의 밥그릇 크기 전격 비교: 7홉 vs. 2홉!!
한창 식사중이네요. 열심히 농사일을 하다가 새참을 먹는가 봅니다.
맛 나 보입니다. 그래서인가요? 좀 많이 먹는다 싶습니다.
이 분 한 번 보세요. 밥그릇인지 국그릇인지 자기 얼굴보다 더 큽니다.
배도 볼록 나왔네요. 많이 자시긴 했나 봅니다.
이 양반도 밥그릇이 양푼 수준이긴 마찬가지입니다.
한 ‘주걱’ 입으로 들어가는 거 보세요.
하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네 시골에서도 이렇게 먹긴 했었죠.
뭐니 뭐니 해도 조선 사람은 ‘밥심’으로 살지 않습니까?
조선 사람의 밥그릇 크기는 동북아 3국 중 최고였다고 합니다.
중국에 다녀온 홍대용은 “그쪽 밥그릇이 꼭 찻잔만 하더이다”라고 했고,
김세렴은 일본에 다녀와서
“왜인들은 한 끼에 쌀밥 두어 줌밖에 먹지 않더이다”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왜군이 먹는 밥 양이 아군의 3분의 1도 안 된다는
정찰병의 보고를 받고 기절초풍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그거 먹고 어떻게 싸우냐 이거죠.
실제로 우리가 한 끼에 쌀 7홉(420cc)을 먹을 때 그들은 2홉(120cc)을 먹었다니,
놀랄 만도 합니다.
#07. 과거만이 살 길이다, ‘돌격, 앞으로!’
뭔가 흥겨운 모임이 있나 봅니다.
파라솔까지 펼쳐놓고 옹기종기 모여 잡담을 나누는 것이,
마치 토론회나 샌님들 야유회라도 열리는 모양이죠?
그런데, 웬걸요, 여기가 그 ‘거룩한’ 과거시험장이랍니다.
이 집은 3인 1조로 시험을 치나 보죠?
여기도 3인 1조네요. 아예 앉아 있지도 않습니다.
이 분들은 시험 안 치고 뭔 잡담인가요?
누구 말대로 입으로 시험 치나?
헤헤, 절대 안보여 주겠다 이거죠? 혼자 등 돌리고 열심입니다.
어딜 가나 꼭 이런 사람 있기는 합니다만, 글쎄요.
자고로 신분 간 소통 통로가 다양할수록 건강한 사회이겠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모든 길은 과거’로 통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엄숙해야 할 시험장이 시장판이 되어버렸지요.
원래 과장 안은 잡인의 출입이 엄금되었는데,
조선 중기 넘어가면서 막걸리 장사가 들어와 술을 팔 정도로 문란해졌습니다.
문제가 게시된 현제판에 가까운 자리를 선점하려는 쟁접(爭接)을 시작으로,
책을 들고 들어와 시험 보는 협서(狹書),
답지를 먼저 제출하려는 조정(早呈)까지…
과장을 소란스럽게 한 여러 풍경들이 펼쳐졌습니다.
#08.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한 민초들의 처절한 몸부림
자고로 억울하면 신문고를 울려라! 다 아는 상식이죠?
그런데 그게 간단치 않은 것이 그 억울함의 조건이 상당히 까다로웠습니다.
역모사건 고발, 살인, 친자 확인, 정실인지 첩인지 구분하는 것,
양민인지 천민인지 구분하는 것으로 제한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것도 소속 고을에서 먼저 민원을 내고 그 처리 결과를 기다려서
처리가 안 될 때 상급 행정 단위로 탄원을 내고 기다리고… 하는 수순을 밟아야 하니
일반 백성이 신문고 울리기란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그래서 새롭게 정착된 여론 전달 방법이 바로 격쟁입니다.
북이나 꽹가리 등을 쳐서 임금의 주의를 환기시킨 다음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법이죠.
아래 그림을 보세요.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한 민초들의 처절한 몸부림을 묘사한 <취중송사>입니다.
김홍도 그림이죠. 무슨 일인지 몰라도 상황이 꽤나 코믹해 보입니다.
먼저 이 두 촌부는 상당히 의가 상했나 봅니다.
원님 행찻길을 가로막고 있는 주제에 싸움은 여전합니다.
이 넓죽 엎드린 양반은 형리입니다. 송사 내용을 받아적고 있는 거죠.
직업정신 하나는 투철해 보입니다.
원님은 듣는 둥 마는 둥 천하태평입니다.
나들이 나갔다가 한잔 걸치기라도 한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