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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후손들 원문보기 글쓴이: 기라성2
창공의 역사로 보는 친일과 항일
- ‘식민지 하늘에 비행기 날다’
2007/01/23
창공에 스러져간 우리의 젊은 용사들
독립군 조선항공대의 훈련기(독립신문 1920년 4월호).
한반도의 하늘을 최초로 비행한 자는 불행하게도 일본인이었다. 1913년 8월 29일 일본 해군의 기술 장교인 나라히라가 우리 민족의 국치일에 맞춰 용산 일본군 사령부 연병장에서 비행시범을 보였다. 일본의 기계문명을 과시하는 공개적인 시위행사였다. 이즈음 일본은 이미 만주대륙을 향한 포석으로 울산, 대구, 서울, 평양, 신의주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있었다. 들을 빼앗긴 민족이 하늘마저도 일본에게 빼앗겼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비행기로 세계일주를 하는 서구의 비행사들이 한반도를 거쳐 갔다. 그 중 1917년 봄, 미국인 조종사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은 조선 청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곡예비행은 당시 20만 서울 인구 중에서 4분의 1인 5만 명이 여의도에 운집할 정도로 엄청난 이벤트였다. 이 멋진 곡예비행을 목격한 젊은이들이 후일 한국의 첫 비행사가 되어 조국 하늘의 영광을 꿈꾼다.
그러나 식민지 청년들에게 비행기는 낭만적인 꿈일 수만은 없었다. 날개를 향한 꿈의 상징이던 비행기가 이내 전쟁무기로 발전했듯이, 나라를 잃은 청년들은 일찍부터 비행기를 독립투쟁의 무기로 인식했다. 그리하여 수많은 청년들이 비행사의 꿈을 안고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소련, 미국으로 비행술을 배우러 갔다.
이제 대륙의 하늘을 새벽별처럼 수놓았던 젊은 그들의 꿈과 기개, 이역만리에서 유성처럼 스러져간 비행용사들의 숨겨진 이야기에 잠시 귀 기울여보자.
독립운동에 투신하다 외국에서 병사한 노백린 장군과
해방 후 공군참모총장에 오른 김정렬(오른쪽).
조국의 하늘을 욕되게 한 - 김정렬
1993년의 일이다. 공군사관학교에서는 한 인물의 동상 건립을 놓고 작은 논란이 일었다. 요지는 1949년 초대 공군사관학교장과 초대 공군 참모총장 등을 지내며 공군창설 주역 7명 중 한명으로 공군 군번 1번(50001번)인 김정렬(1917-1992)의 동상 건립을 몇몇 공사생도들이 반대하여 결국 무산시킨 사건이 있었다.
왜 그들은 김정렬의 동상을 반대했을까.
김정렬은 1917년 서울에서 대대로 무관을 배출한 명문 집안 출신이다. 그의 큰아버지 김기원과 아버지 김준원은 구한말 대한제국 군인으로 일제 강점 무렵에 각각 일본 육사 15기와 26기로 일본과 인연을 맺는다. 대대로 조선에 충성하던 무관 집안은 시대의 변화에 항거하지 않고 순순히 새로운 ‘영주’인 천황의 군인으로 태어난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김정렬이 일본 육사로 진학하게 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37년 육군예과사관학교에 입학, 1940년 54기로 육군항공사관학교(오늘의 일본 공군사관학교로 항공병과의 중요성이 커지자 1937년 육군사관학교에서 분리) 전투기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후인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초기에 항공 중위로 필리핀 공략작전에 참가했다. 1943년에는 일본 아케노 육군비행갑종학교를 졸업해 동기생들 중 첫 전투기 비행중대장이 되었다.
태평양전쟁에 투입된 일본공군 전투기.
1944년 9월 최신예 <비연>의 전대장이 되어 수마트라, 자바 등지에서 활동하며 일제의 동남아 침략의 최선봉대 구실을 했다. (이 당시 그가 전대장으로 있던 ‘비연’ 전대는 ‘날으는 기러기’라는 뜻으로 박경원이 탔던 ‘청연’ 즉 ‘푸른 기러기’와 무척 유사한 느낌을 준다)
김정렬은 버마전선에서 해방을 맞았으며 캄보디아와 베트남을 거쳐 1946년 5월 15일 민간인 신분으로 귀국하였다.
태평양전쟁에 패전한 일본군들이 남지나에서 연합군에 항복하고있다.
태평양 전쟁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버마전선이다.
이제 다시 시선을 해방 후의 김정렬에게로 돌려보자. 이승만 시절인 1957년 중장으로 예편해 곧바로 국방장관을 하다 4ㆍ19로 잠시 물러난 뒤 박정희가 들어서자 1963년 민주공화당 초대 당의장, 주미대사, 1966년 한국반공연맹이사장,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1969~84년 국토통일원 고문, 1971~74년 삼성물산 사장, 1973년 대한상공회의 부회장, 1975년 정우개발 회장 등을 지냈다.
다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5공 헌법 제정에 관여한데 이어 1980~91년 국정자문회의 위원과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역임했다. 끝으로 1987년 6ㆍ29 직후 국무총리로 등장해 지금도 부정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대통령 선거를 관리하였다.
이정도 경력이면 최고의 관운을 났다는 친일 법조인 민복기에 비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오히려 민복기가 관가에만 국한되었다면 김정렬은 군, 정치 심지어 경제계까지 진출했으니 더욱 대단해 보인다. 이쯤 되면 왜 1993년에 공사 생도들이 그의 동상 건립을 반대했는지 이해가 된다.
국무총리 당시에 외빈을 접견하는 사진 (1987년).
외국인은 월드비젼 총재 톰 휴스턴 부부.
이처럼 김정렬이 천황의 군인이 되어 하늘을 휘저으며 무고한 동남아 민중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을 때 그와는 정반대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날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젊은이들이 있었다. 우리 공군 역사에서 가장 먼저 언급되어야 할 인물이 바로 계원 노백린(1875-1925) 장군이다.
일제의 강제 병합이 노골화되기 이전의 조선인의 일본 육사 입학은 그야말로 조선의 입장에서는 선진 문물을 익히고 돌아와 조국에 충성할 것을 기대하고 내보냈던 것으로 일제 강점 이후 일본 육사 졸업과는 분리해서 이해해야 한다.
태극마크를 단 ‘조선비행단’을 양성했던 - 노백린
계원 노백린(1876∼1926)은 정통파 군인인 동시에 대한제국 정부의 관리를 지내면서 50평생을 구국투쟁으로 일관했던 지조와 열정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황해도 송화군에서 출생하여 한학을 공부하다가 우리 정부의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 건너가 게이오의숙 등에서 신학문을 접하던 중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898년 육사를 졸업한 그는 일본 군대에서 6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받고 임관하였다. 그는 여기서 독립운동가로 명망을 떨친 이갑, 유동렬 등을 만나게 되어 평생 애국 동지로 더불어 애국운동에 투신하였다.
일본에서 귀국한 노백린은 육군 정령(正領)에 임명되어 한국무관학교의 교육국장·교장을 역임하였다. 1907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신민회(新民會)에서 활약하다가 군대가 해산 당하자 고향으로 내려가 광산(鑛山)·피혁상(皮革商) 등을 경영하기도 했다.
대한제국 무관학교장 노백린 정령이 대한제국 무관들과 찍은 사진이다.
국권피탈 이후 1916년 후반기 해외로 망명한 노백린 장군은 1919년 하와이에서 독립군 양성을 위해 미국 본토로 건너갔다. 그는 미국 워싱턴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만나 앞으로의 독립운동 방향에 대해 협의하고, 이어 대한인 국민회 곽림대의 제안에 따라 1920년 2월 20일 윌로우스에서 농장 부호 김종림을 만나 호국독립군단과 한인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독립군단은 윌로우스에 있던 300여 명의 한인을 공군으로 편성하고 교장인 노백린의 지휘아래 매일 일정한 시간의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낮에 일하고 밤에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이에 관심을 갖고 있던 대한인 국민회 중앙총회에서 매달 600달러씩의 군단 경비가 지출되었고 가옥, 가구와 천막 등 일체의 설비에 관한 경비는 벼농사를 대규모로 경영하는 김종림의 협조로 조달되었다. 이렇게 해서 3월 출범한 군단의 장병은 낯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계원으로부터 군사훈련을 받았다.
캘리포니아 윌로우스의 한인 비행장에서 훈련중인 조종사들.
한편 독립군단에서는 한인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한 비행학교를 설치하였는데, 계원 노백린은 이 학교의 목적은 앞으로 전개될 일본과의 독립투쟁에서 필요하게 될 비행사를 양성하려는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당시 일본의 경우 육해군은 모두 강했으나 공군 병력은 전무했으므로 정예요원으로 공군을 양성한다면 장래 전개될 독립투쟁에서 공중전을 통해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윌로우스 비행장에서 훈련받는 생도의 투지에 불타는 모습.
아쉽게도 이사진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즉 김종림과의 만남은 계원의 공군 양성을 활성화시킨 획기적인 계기가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설치된 비행학교는 교장 계원의 사관양성과 김종림의 2만불 기부, 그리고 40에이커 규모의 연병장을 설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교육국에서 임대한 퀸스디스트릭트 퀸트학교 건물에서 학생들은 10불의 월사금을 내고 교련, 전술, 전략, 비행술, 비행기 수리와 관리, 무선전신학, 영어 등을 배웠다.
그해 5월에는 연습용 비행기 3대를 구입하였는데 대당 2천달러씩이었다. 새로 구입된 비행기에는 선명한 태극마크를 넣고 빛나게 K.A.C(한국항공클럽)을 그려 넣었다. 우리나라 비행기가 된 기체에 태극기를 선명하게 그려넣을 때의 그 벅찬 마음은 이루 표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윌로우스 비행장의 훈련기, 태극마크가 선명한 기체에는 KAC라는 기호가 보인다.
그리고 6월 22일 김종림이 구입한 비행기가 학교에 도착하여 도착하여 비행술 실습이 시작되었으며, 이틀 뒤인 24일에도 레드우드시로부터 비행기가 도착하였다. 이처럼 노백린의 노력으로 활용할 비행기가 5대로 늘어나게 되었으며, 비행기에는 완벽하게 무선통신 장비도 갖추어 그 당시의 사정으로는 상당히 발전된 최첨단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후 1920년 7월 7일에는 제1회 졸업식이 거행되었는데 졸업생은 우병옥, 오임하, 이용선, 이초 등으로 이들은 졸업과 동시에 모두 이 비행학교의 교관으로 특채되었다. 이 비행학교는 미주지역 한인들과 임정, 그리고 미국 사회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노백린이 시카고를 출발할 때 청년들이 따라 왔으며, 1920년 2월 중순에도 시카고에서 전도사, 실업가, 학생 등이 계원을 만나기 의해 샤크라멘토에 도착하였다. 이처럼 한인사회에서 비행학교에 대한 관심과 기부가 고조되었으며, 이 비행학교는 영화로도 촬영되어 미국 전역에 방영됨으로써 미국인까지도 이 학교에 지원할 정도였다.
윌로스 비행학교 최초의 비행사들(가운데 노백린 군무총장).
우리의 호국 독립공군을 선진국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최대 목표로 삼았던 비행학교의 교장 계원은 독립군단과 비행기학교의 활동상황을 임정에 알렸다. 이에 비행학교에 고무된 임정에서는 기량이 우수한 청년을 선발하여 미국에 보내 비행기 학교와 비행전술을 학습케 하고 이들로 하여금 비행대를 편성하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노백린은 비행학교에서 비행술을 교수하다가 7월 임정으로 가기 위해 군단을 떠났다. 노백린이 떠난 후 비행학교는 김종림과 한인들의 경제파탄으로 어려움을 겪게되지만 그 후에도 계속되어 1922년에는 41명의 학생을, 1923년 11명의 학생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때는 이들 중 미공군에 자원 참전한 용사도 있었다.
계원의 독립사상은 임정이 수립된 1919년 이후 상해 객사에서 위중한 질병으로 서거 순국한 1926년에 이르러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병환이 위중한 중에도 단합과 단결을 강조하였는데 그의 독립사상은 곧 합동(合同)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1920년 1월 미국에 있으면서 임정 군무총장으로 러시아와 중국 일대에 있는 동포들에게 동포들이 통일, 단합, 분기해야 독립국가의 달성을 속결할 수 있다고 애끓는 독립구국사상과 실천의지를 호소하였다. 특히 계원의 독립사상이 정립되고 일반에게 알려지게 된 것은 군무부포고 제1호의 내용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한국공군의 선구자로 기억될 ‘독립군의 날개’ 노백린 장군.
총용한 대한의 남녀여! 혈전의 時, 광복의 秋가 來하였도다. 너도 나아가고 나도 나아갈지라. 정의를 위하여 민족을 위하여 철과 혈로써 조국을 살릴 때가 이때가 아닌가. 혼있고 피있는 대한의 남녀여. 선조를 위하여 후손을 위하여 무도한 왜적에게 학살을 당하는 너의 부모, 형제, 자매를 위하여 최후의 희생을 제공할 때가 이때가 아닌가.
…반만년 역사의 권위에 의해 2천만 민족의 위용을 합하여 20세기 금일 시대적 요구에 응하여 인도를 부르며 나아갈 때에 무엇이 두려우며 무엇을 근심할까. 네 앞에 독립이요, 내 앞에 자유뿐이로다!
대한민국은 노백린 장군에게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조국광복을 꿈꾸며 창공에 스러져간 선구자들
떳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안창남이 중고 부속으로 직접 제작하여 타고 다닌 비행기 '금강호'
조국의 독립을 위해 대륙의 하늘을 날았던 비행사들이 단지 중국이나 소련 비행학교 출신들만은 아니었다. 윌로스 비행학교 출신인 김자중은 중국으로 와서 활동하다가 1922년에 추락 사망했다. 신용인 비행사가 1920년대 말 여의도에 세운 조선비행학교 출신 이한설도 중국으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다. 일본의 비행학교를 나와 중국으로 망명하여 활동한 비행사들도 많았다. 안창남, 김치한 권태용 민성기 정우섭 전상국과 마적단의 전설을 가진 서왈보 비행사, 한국 최초의 여성비행사 등…… 여기서 그들 몇몇의 차취를 따라가보자.
일본은행의 현금수송차량을 탈취한 – 안창남
안창남은 1901년에 태어나 1920년 일본 오쿠리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1921년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처음 실시한 비행면허시험에서 수석 합격한다. 그는 일본의 여러 비행대회에 나가 우승함으로써 무시험으로 1등비행사 자격을 취득한다. 1922년 12월 안창남은 중고 부속을 조립하여 자신이 직접 만든 복엽기 금강호를 타고 서울에서 비행시범대회를 열어서 민족의 영웅이 된다.
안창남(동그라미)이 동아일보 초청으로
고국 영공 기념비행을 위해 1922년 12월 귀국, 경부선 특급열차 편으로
서울에 도착해 기차에서 내리고 있는 것을 보도한 당시의 동아일보 기사.
안창남은 고국방문 비행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학교 교수로 활동하면서도 늘 민족적 울분과 항일의식을 품고 있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의 여파로 일어난 조선인 대학살에서 죽을 뻔한 위기를 넘긴 그는 일본을 벗어날 결심을 하게 되고, 1924년 연말 비밀리에 중국으로 망명하는 데 성공한다.
최초로 조국의 하늘을 날았던 안창남.
1925년 남방혁명군 곽송령 휘하의 육군 중장으로 임명되어 전투에 참전하고 전과를 세우는 등 중국혁명을 통한 민족해방을 도모했다. 또한 북평에서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했으며, 1926년에는 여운형의 소개로 산서성의 군벌 염석산 군대에 참가하여 항공중장과 산서비행학교 교장으로 재임한다.
1928년 10월 안창남은 산서비행학교 교장이자 항공중장이라는 유리한 직책을 이용하여 중국 산서성 태원을 근거로 최양옥 신덕영 김정련 등과 함께 대한독립공명단(大韓獨立共鳴團)을 조직한다. 그리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한독립공명단 조직 내에 한국인 비행사관학교 설립을 추진한다.
(1929년, 일본은행 현금수송차량 탈취사건)
대한독립공명단 현금 탈취 및 검거장면(조선일보 1929년4월21일)과
대한독립공명단 사건 재판기사(조선일보1929년12월13일).
이듬해인 1929년 비행학교 설립과 비행기 구입, 그리고 군자금 확보를 위해 최양옥과 김정련 등에게 600여원을 제공하면서 이들을 국내로 잠입시켜 일본은행의 현금수송차량을 탈취하는 거사를 벌인다. 최양옥 김정련 등이 경기도 마석에서 피체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지만, 당시 이 사건은 그 대담성으로 신문 지상을 도배할 만큼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안창남은 1930년 4월 2일 오후 4시에 태원 산서비행학교 앞에서 뜻하지 않은 비행기 추락사고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쳤다. 태원 상공을 비행 도중 홍진으로 시계가 불량해지자 비행장으로 귀환하다가 산에 충돌해 사망했다.
마적단 출신 비행사 - 서왈보
중국에서 활동한 비행사들 중에서 우리민족 최초의 비행사라고도 일컬어지는 서왈보에 대해서는 많은 '전설'들이 전해져온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안창호 선생이 미산에 도착하여 3000달러의 자금을
제공하기로 했던 이종호 이종만 형제가 행방을 감춘 사건이 발생하자 독립군은
당장의 생존이 위기에 처했는데 서왈보는 마적단을 꾸려 군자금을 마련하고자 했다.
서왈보는 188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나 평양 대성학교에서 수학하다 1910년 한일병합 직전에 신채호, 유동열 등 신민회 인사들과 중국으로 망명한다. 만주와 내몽고 등지에서 반일 마적단 활동을 하기도 했던 서왈보가 처음 비행사가 될 결심을 한 것은 독립운동 군자금 모금을 위해 국내에 잠입했던 1913년 여름이었다. 국치일에 맞춘 일본 해군 출신의 나라히라의 시범비행을 목격했던 것이다. 만주지역을 내달릴 마차와 말을 사기 위해 군자금을 모금 중이던 그는 눈이 번쩍 뜨였다. 마차가 아니라 비행기다!
서왈보는 며칠 휴가를 내어 베이징의 남원항공훈련소로 달려갔다. 훈련생 모집이 언제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 사이 간판이 ‘남원항공학교’로 바뀌어 있었다. 남원항공훈련소는 1기 훈련생을 배출하고는 거의 휴교 상태에 빠져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데다가 위안스카이가 급사한 뒤로는 중앙정부의 어느 누구도 이 훈련소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거의 폐교나 다름없던 이 학교가 항공학교로 명칭을 바꾸고 교육기간도 1년으로 늘려 다시 문을 연 것은 1919년 3월 초였다.
서왈보가 몰았던 이태리제 언살도 비행기.
1926년 6월 28일 추락했다. (홍석찬 그림)
서왈보가 달려갔을 때 학교에서는 마침 제2기생을 모집하고 있었다. 제2기 항공학생 시험을 치는 날, 서왈보에게는 학과시험이 면제되었다. 중국군의 현역 육군 소령이었기 때문이다. 남원항공학교 제2기생으로는 모두 83명이 뽑혔다. 이때 서왈보의 나이 34세였다. 동급생들은 모두 20대였다. 그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망친 조선 놈'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쏟았다.
조국에서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난 것은 그가 한창 비행술을 익히고 있을 즈음이었다. 일본의 잔인한 탄압소식에 분개한 그는 '내 언제고 동경으로 날아가서 너희 놈들 머리위에 폭탄을 퍼부어 오늘의 한을 풀리라'고 결심했다.
1919년 5월 30일 남원항공학교를 졸업한 서왈보는 임정의 안창호를 만나 비행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또한 조종사 자격으로 의열단에 가입하고, 1923년에는 신의단을 조직하는 등 활발한 독립운동을 벌였다. 1924년 풍옥상 항공대 대대장으로 소절(蘇浙)전투에 20여 차례 출격하여 무공을 세웠으며, 남원항공학교의 교관으로 재직했다.
그는 최용덕을 보정항공학교에 추천하여 비행사가 되도록 도와주었고, 풍옥상 항공대에 들어온 여류비행사 권기옥과 나이를 초월한 동지애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 독립군에 이런 비행기 한 대만 있었어도 내가 폭탄을 싣고 서울로 날아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박살내 버리는 건데." 그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서왈보 추모기사 (동아일보1926년7월6일). ⓒ 정혜주
그러나 1926년 6월 28일 서왈보는 내몽고 접경 공가장의 비행장에서 새로 수입된 이태리제 언살도 비행기를 시승해보다가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소식은 국내에도 큰 충격을 주어서 동아일보는 두 차례에 걸쳐서 추모기사를 내보냈고, 원산과 평양, 간도 용정 등지에서 추모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1920년 윌로우스 전투비행학교의 한인 최초의 비행사들과 한국 공군의 선구자 노백린 장군을 기억하시나요.
한국공군의 선구자 노백린 장군(위), 1920년 4월 27일자의 독립신문에 게재된 최초의 한인 조종사들의 사진 (아래)
박경원과 권기옥 - 삶의 내용이 확연히 달랐다
영화 ‘청연’의 모델 박경원. 최초로 한국 하늘을 난 안창남.
최초의 여성비행사 권기옥(왼쪽부터).
일제강점기, 한국은 강토뿐 아니라 하늘도 빼앗겼다. 한국의 하늘을 난 최초의 비행사는 13년 서울 용산 일본군사령부 연병장에서 비행 시범을 보인 일본 해군의 기술장교 나라히라. 그가 직접 만든 나라히라4호가 창공을 날 때 동갑내기인 박경원과 권기옥은 13세였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박경원이 민간인으로서 한국 최초의 여성파일러트로 내세운다면 권기옥은 독립투사로서 군인 신분(중국)을 가진 최초의 여성파일러트라고 말 할 수 있다.
박경원 - 일본이 세운 만주국 기리는 친선비행
박경원의 삶은 하나로 재단하기 어렵다. 그는-그가 살았던-당대의 진보적 신여성이다. 물론 친일 행적이 따라붙지만…. 본명은 박원통. 남자아이를 바라던 부모가 마음이 상해서 지은 이름이란다.
영국의 여류 비행사 빅터 블루스 환영행사 사진에서 복원한 박경원.
ⓒ 김동연 / Oh my News
박경원은
1901년 6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나 어릴 적 꿈이었던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 1921년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갔다. 갖은 고생을 거듭하다 1928년 마침내 고등비행사 자격을 땄지만 1933년, 고국 하늘을 비행하기 위해 올라탄 ‘청연(靑燕 푸른 제비)’호와 함께 추락함으로써 33년이라는 짧지만 불꽃 같은 생을 마감했다.
고이즈미 마타지로(현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할아버지)와의 좋지 않은 소문은 뒤로하더라도(그는 고이즈미 당시 체신장관과 함께 내선일체의 상징인 고려신사의 방명록에 이름을 남겼다),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日滿親善 皇軍慰問 日滿連絡飛行)’이라는 만주국을 기리는 청연호의 마지막 비행은 박경원의 친일행적의 꼬리표가 되어버렸다.
1926년경, 동경에서의 박경원(자료; 加納實紀代).
영화 ‘청연’도 박경원의 마지막 비행이 일만친선비행이었다는 걸 숨기지 않고 영상화했다. 혹자는 박경원의 친일이 식민지 하에서 비행기를 타기 위한 피치 못할 행위였다고 옹호하기도 한다.
그녀의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조차도 고국방문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했던 수동적인 친일행위였다고 항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안창남을 비롯한 그녀와 동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비행사들은 삶 자체로 그런 항변이 한낱 궤변에 불과함을 증거하고 있다.
1933년 8월 7일, ‘일만 친선비행’을 위해 ‘청연’에 오른 박경원.
이륙하기 직전의 모습으로 오른 손에 일장기가 쥐어져 있다.
박경원이 마지막 비행을 했던 1933년은 아직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전, 일본의 대륙침략의 초반부로서 민간인 비행사들이 군대와 깊은 관련을 맺는 것은 강요나 의무가 아니라 개인적인 선택의 문제였다. 일본에 있는 민간인 비행사들이 전쟁물자 수송이나 군인수송에 차출되는 것은 1940년대, 거의 종전에 임박해서이다.
당시 상황을 고려해보면 1925~1933년까지의 박경원의 친일행위는 자신의 적극적인 선택이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특히 내선일체와 만주국 승인을 기념하는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에 스스로 자원했다는 것은 유일무이하고 독보적 친일행위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하코네 산중에 추락한 청연호에서 박경원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산중에 추락한 박경원의 비행기.
권기옥의 꿈 – “조선총독부를 폭격하라”
권기옥! 그녀는 누구인가? 식민지와 봉건 관습이라는 이중의 족쇄가 채워져 있던 시절, 그녀는 어떻게 비행사가 되고 조국의 해방을 위해 날아오를 수 있었던가?
독립투사였던 비행사 '권기옥'
1901년 평양에서 태어난 권기옥은 1917년 5월 미국인 비행사 아트 스미스의 곡예비행을 보고 날개의 꿈을 키운다. 평양 숭의여학교 재학시절 3.1운동 참여와 비밀활동으로 멸치배를 타고 상해로 망명한다. 상해에 도착한 권기옥은 비행술을 배우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한다. 두 군데 항공학교에서 여자라고 입학을 거절당하자, 그녀는 임시정부의 추천서를 품고 직접 멀고먼 운남으로 향한다.
1923년 12월 하순 운남에 도착한 권기옥은 성장인 당계요를 찾아가서 직접 담판을 지어서 입학을 허가받는다. 조선의 독립운동에 호의적인 군벌인 당계요 성장은 비행사가 되겠다고 이국만리를 찾아온 조선 소녀의 용기에 탄복하여 전격적으로 입학을 허가해준 것이다. 마침내 1925년 2월 28일 권기옥은 운남항공학교를 졸업하여 자랑스러운 윙 배지를 달게 된다.
운남항공학교, 훈련기와 유시천 교장의 모습.
1925년 5월 다시 상해로 돌아온 권기옥은 임정의 어른들을 찾아가서 조선 총독부를 폭파하겠으니 비행기를 사달라고 호기롭게 말하지만, 임정에는 비행기를 살 돈이 없었다. 1926년 봄 권기옥은 선배 독립운동가의 소개로 개혁성향 군벌 풍옥상의 항공대에 들어가기 위해 북경으로 간다. 당시 풍옥상의 항공대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라고 일컬어지기도 하는 서왈보가 남원항공학교 교장 겸 동로군 항공대 대장으로 있었다. 1926년 4월 기옥은 동로군 항공대의 부비행원으로 임명된다.
1928년 북벌전쟁에서 승리한 국민혁명군이 손정방 군벌의 항공기를 접수하여 공군 창설을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들은 기옥은 상해로 가서 중국 공군 비행원으로 임명받는다. 여기서 권기옥은 당시 손정방 공군의 비행사로 있다가 국민혁명군에 합류한 최용덕 비행사를 만난다.
1928년 손정방 공군 비행기를 접수하러 갈 때의 모습.
권기옥은 남장을 하고 중절모를 썼다.(동그라미 속)
1931년 만주를 기습 점령한 일본은 1932년 상해를 공격한다. 상해전쟁이 터지자 권기옥은 비행기를 몰고나가서 일본군에 기총소사를 퍼붓는다. 기옥은 중국과 일본의 전쟁이 확대되어 전면전이 되고 중국이 승리하면 조선도 해방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 하지만 나약한 장개석 중국 정부가 만주를 일본에게 넘겨주는 대가로 정전협정을 맺자 권기옥은 통탄한다.
1935년은 비행사로서 권기옥이 꿈에 한껏 부풀던 해였다. 당시 항공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송미령 부인이 권기옥에게 선전비행을 제안했던 것이다. 당시 중국 청년들이 비행기가 무서워서 공군에 자원하지 않자 고심 끝에 여류비행사의 선전비행을계획하게 되었던 것이다. 선전비행은 상해에서 북경까지 날아가는 화북선, 화남선, 그리고 동남아시아를 경유하여 일본까지 날아가는 남양선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다.
상해에서 선전비행의 연습과 실무가 착착 진행되었다. 기옥은 남양선 비행의 마지막 순간을 일본 폭격으로 장식하겠는 뜻을 세우고 목숨을 걸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선전비행 출발 당일 북경에서 대학생 시위가 확산되면서 정국이 불안해지자 선전비행이 무산되고 말았다.
1935년 중국 선전비행을 준비하던 무렵의 권기옥(왼쪽에서 두번째).
가운데 이탈리아인 교관과 중국 최초의 여자 비행사 이월화와 함께).
1937년 여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권기옥은 육군참모학교의 교수직을 맡고 영어와 일본어, 일본군 식별법과 성격 등을 강의한다. 1939년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와서 정착하자 권기옥은 임정인사들과 빈번하게 교류한다. 1943년 2월 23일에는 좌우로 분열되어 있던 부인들을 설득하여 대한애국부인회를 재건하고 선전부장을 맡는다.
1943년 여름부터 권기옥은 중국군에서 비행사로 활동하던 동지들과 함께 한국비행대 편성과 작전계획을 구상한다. 이 계획은 2년 후인 1945년 3월 임정 군무부가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한국광복군 건군 및 작전 계획> 중 '한국광복군 비행대의 편성과 작전'으로 결실을 맺었다.
1945년 봄 권기옥은 희망에 들떠 있었다. 이제야말로 비행기를 타고 조선총독부를 폭격하리라던 19살 이후 20년간 품어온 꿈이 눈앞에 다가온 것으로 보였다. 조국 진공의 꿈이 실현되는 것을 눈앞에 두고 권기옥은 힘차게 날개짓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 본토 수복을 꿈꾸던’ 비행사 한국전쟁 당시 전방을 시찰하는 지청천 장군과 비행사 권기옥.
해방 후 권기옥은 조국으로 돌아와 최용덕, 이영무 등과 함께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산파가 된다. 최용덕 장군이 공군창설의 아버지라면, 국회 국방위 전문위원으로서 공군창설을 도왔던 권기옥은 ‘공군의 아주머니’로 불렸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권기옥은 국방위 전문위원으로서 최전방 격전지를 돌아다니며 국방위원의 임무를 수행했다.
박경원과 권기옥 – 누가 최초의 여성비행사 인가?
'최초'보다 중요한 것은 삶의 내용이다
남자의 그늘에 가려 있었던 봉건시대, 더구나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의 여성이 하늘을 날았으리라고 상상하기는 쉽지 않았다. 영화 <청연>이 개봉되자 평소에 관심도 두지 않았던 우리나라 여류비행사의 '최초' 문제에 깊은 관심이 일고 있다.
영화 '청연'
일제시대 하늘을 날았던 우리나라의 여성은 세 명이었다. 식민지시대 암울했던
민중들에게는 영웅과 구경거리가 필요했다. 당시 유행가 중에 "떴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아라 엄복동 자전거"가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날개를 펼치고 하늘을 날고 싶었던 여성들이 있었다. 박경원, 권기옥, 이정희. 그들은 모두 마음속에 날개의 꿈을 품었던 진취적인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그들의 미래를 철저하게 갈라놓았다. 나이는 박경원이 제일 많았고 권기옥, 이정희가 뒤를 잇는다.
권기옥은 3ㆍ1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중국으로 망명, 상해 임시정부의 추천으로 1924년 초 중국 운남항공학교 1기생으로 들어간다. 1925년 2월 28일 항공학교를 졸업하자,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쏟아붓겠다는 일념으로 상해로 돌아온다. 그러나 임시정부에는 비행기를 살 돈이 없었다. 고민 끝에 원로 독립운동가의 추천으로 중국 군대의 항공대에 들어가서 비행기 조종사로 10년 넘게 활동한다.
1925년 2월 28일 운남항공학교 졸업장.
1911년 신해혁명을 원년으로 민국 14년이다.
한편 박경원이 일본에 가서 자동차운전학교를 다니고
다시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3등 비행사 자격증을 딴 것은 1927년 1월 28일이었다. 따라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난 것으로 치면 권기옥이 박경원보다 2년 정도 앞선 것이 된다.
이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다만 박경원 측에 '최초'의 리본을 달아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펴고 있다. 즉 민간인과 군인 신분을 나누고, '비행사'라는 자격증에 큰 의미를 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비행사 자격증이란 무엇인가?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1921년부터 시행한 민간인 비행사 자격시험에서 주는 자격증을 말한다. 즉 '비행사'라는 명칭은 일본으로 유학 가서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시행하는 시험제도를 통과한 사람만이 갖게 되는 것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2년이나 먼저 날았지만 일본 제국비행협회가 인정하는 자격증이 없는 권기옥은 비행사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1970년 여성지에 소개된 권기옥의 삶.
사실 누가 '최초'인가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최초' '최고'를 중시하는
것은 물질만능 시대의 속도주의, 성과주의의 산물일 수 있다. '최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삶의 내용이다.
그러나 박경원과 권기옥은 다르다. 박경원은 일본이 인정한 최초의 조선인 여자 비행사일 뿐이다. 일장기를 흔들며 '일만친선 황군위문 일만연락비행'을 위해 날아오른 박경원,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하늘을 날았던 권기옥, 둘 중 누가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비행사인가?
공군본부에 걸려있는 최용덕 장군의 초상.(제 2대 공군참모총장)
공군사는 48년 미군으로부터 정식으로 간부 교육을 받아 육군 내에 항공부대를 처음 조직한 7명의 멤버를 ‘공군 창설 간부 7인’이라는 이름으로 기록하고 있다. 김정렬(초대 및 3대 공군참모총장), 최용덕(2대 공군참모총장), 장덕창(4대 참모총장), 이근석(6·25전쟁 중 전사), 박범집(6·25전쟁 중 전사), 김영환(통위부 정보 및 작전국장), 이영무(초대 항공사령관)가 그들이다.
7인의 창설 간부 중 ‘중국에서 본토 수복을 꿈꾸던 인물들’에 속하는 사람은 2명이다. 최용덕과 이영무. 이영무는 권기옥과 함께 운남비행학교를 다녔다(권기옥과 이영무는 25년에 졸업했다). 국민혁명군에 입대한 권기옥과 마찬가지로 그는 중국 군대를 선택했다. 광복 후엔 조선경비대 보병학교와 경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통위부(지금의 국방부) 산하 항공부대를 창설할 때 산파 노릇을 했다.
이영무는 그러나 6·25전쟁 중 행적이 묘연하다. 신동아 1월호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5월 한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고 국가정보원의 조사를 받고 있는 전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이모 씨가 “나는 남한 초대 항공사령관의 아들”이라고 밝혔다고 한다. 초대 항공사령관이 바로 이영무다(신동아 1월호, ‘망명한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의 기구한 가족사’ 기사 참조). 이영무는 월북하거나 납북됐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영무를 공군의 뿌리로 보기는 어렵다.
결국 최용덕 1명이 남는다. 최용덕은 중국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비행술을 배우고 전투기 조종사가 됐다. 20년대엔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에서 일하기도 했다. 중국군에서 활동하던 그는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 및 참모장을 지냈다. 최용덕과 이영무를 제외한 창설 멤버 중엔 일본계가 많다. 김정렬은 일본 육군 항공사관학교를 졸업했다. 박범집은 일본 육사 52기 출신으로 포병으로 근무하다가 일본 육군 항공정비학교를 마치면서 비행기와 인연을 맺었다.
따라서 대한민국 공군의 뿌리는 ‘중국에서 본토 수복을 꿈꾸던’ 최용덕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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