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여자의 누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남자는 여자의 상체를 일으켜 세워 껴안았다. 여자는 그제야 눈을 뜨며 몽롱한 시선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제, 제가 어떻게 된 거죠?”
여자는 부끄러움으로 붉게 물든 얼굴로 더듬더듬 남자를 향해 말했다. 여자는 방금 자신의 몸에서 일어났던 일을 어느 정도 깨달은 것이리라.
“발작이 있었어요.”
“아아.......”
여자는 눈을 감으며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이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여자는 너무 부끄러웠다. 성행위 도중 발작을 일으키다니....... 이런 일은 여태껏 없었던 것이다.
“오빠?”
“네.”
“심했겠죠?”
“아니.......”
남자는 민망하다는 듯 입가에 그늘을 드리우며 말했다.
“오빠?”
“네.”
“오빠 왜 가지 않았어? 왜 그냥 가지 않았어?”
“차마 그럴 수가 없죠. 너무 미안해하지 말아요. 그건 그렇고 몸은 어떤가요? 좀 괜찮은 가요?”
“네, 괜찮아요. 어서 가세요. 정말 추한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하네요.”
“네.”
이윽고 남자가 방을 나가자 여자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12월 말, 지독히도 추운 밤의 사창가였다.
<1>
엄영순은 막막했다. 혼자의 몸이지만 그 몸 하나 어디 의탁할 곳이 없었다.
이 식당 저 식당 옮겨 다니면서 모은 돈은 꽤 있었지만, 막막했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이 바로 <그곳>이었다.
<그곳>.......
그곳을 이탈한 지도 벌써 2년이 훨씬 넘었다.
영순이 그곳- 대한바울교에 몸담은 것은 3여 년 전. 이유는 없었다. 그냥 세상이 싫고 인간들이 싫었던 것이다.
그 종교단체를 알게 된 건 뭐 특별히 사연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길을 걷다가 우연히 <대한바울교>라는 입간판이 있어서 호기심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이다.
그때 신도 수는 여섯 명.
교주는 경제적으로 결코 궁핍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교회건물이 바로 교주의 것이었다. 그 건물은 비록 변두리라고는 해도 지상 3층, 지하 1층의 평수만 해도 시가 10억원은 훨씬 넘는 건물이었다.
지하에는 노래방, 1층에는 치킨가게와 자전거 수리점, 2층은 식당, 3층은 사무실이 입주해 있었다. 입교 당시 영순은 식당일을 하고 있었다.
그 어떤 곳도, 이 세상의 그 어떤 곳도 영순을 환영해 주는 곳은 없었다. 하지만 바울교는 달랐다. 그녀를 두 손을 들어 반갑게 맞아 주었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사랑과 평화를 내세우며 가식적인 웃음으로 일시적인, 마치 의무적인 친절을 베푸는 타종교와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달랐다.
대한바울교........
그들이 믿는 것은 악마였다. 악마숭배단체. 그리고 그들의 교리는 극히 과격했다.
물론 역설적인 것이지만, 그들은 실제로 피와 폭력을 교리의 기본이념으로 내세웠다. 영순에게 그들의 그러한 교리는 물론 적이 꺼림칙했으나, 그 솔직한 표현이 세상을 오직 증오라는 감정 하나만으로 바라보고 있던 그녀에게는 한편 신선한 자극이 되었다.
또한 그녀에게는 벌써 예전부터 자살에 대한 욕망이 있었는데 그것은 결국 반항심리였다.
자살....... 아직 시도한 적은 없었지만, 그것은 어찌 보면 동경의 대상이었다.
물론 그녀가 세상을 그렇게 배타적으로 바라본 이유를 들자면 소상하게 열거할 수도 있었다.
불우한 성장과정, 그리고 간질병 바로 그것이었다.
영순은 경상도 통영에서 한 가난한 어부의 딸로 태어났다. 지극히 궁핍한 가정인지라 그녀는 돈 때문에 고등학교에도 진학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열일곱 살이 되던 해, 그녀의 아버지는 병사했고, 어머니는 가출했다. 형제도 없었고, 의지할 친척도 없었다.
그녀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마을에 머물며, 이웃사람들의 도움으로 그저 끼니만 해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던 것이다.
그녀는 열여덟 살에 서울로 올라왔고, 그 첫날 밤을 노숙자들이 우글대는 곳에서 지냈다. 하지만 열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였지만, 남자노숙자들조차 그녀에게 이성으로서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녀의 외모가 여성으로서의 매력을 찾지 못할 만큼 추악했던 것이다.
키 백오십 센티미터. 그 작은 키에 몸무게가 육십오 킬로 그람을 육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암퇘지나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또 하나 치명적인 결함이 바로 간질병이었다. 그녀는 아주 심한 간질병자였던 것이다. 매달 보건소에서 약을 타와 복용하고 있었지만, 약을 복용해도 통상 한 달에 한 두세 번은 발작을 일으켰다.
그녀는 곧 사창가로 흘러갔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택한 인생의 종착역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사창가 중에서도 마이너리그에서 밖에 얼굴을 내밀 수 없었다.
보통 사창가는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로 구분되어 있다. 메이저리그는 말 그대로 젊고, 어느 정도의 외모를 갖춘 창녀들이 버젓이 얼굴을 드러내 놓고 활동하는 곳이고, 마이너리그는 아줌마들이 호객행위를 해서 손님을 끌어들여 아가씨를 넣어주는 곳이었다.
영순은 그 사창가 마이너리그에서 2년 가까이 생활했고, 그곳에서 나와 식당일로 업종을 전환한 것이다. 그러던 중 대한바울교를 알게 됐고, 그녀는 깊이 빠져들었다.
그녀의 영혼은 더럽혀질 대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녀는 죄사함을 받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바울교의 교주인 고영탁에게 자신의 과거를 숨김없이 털어놓았었다. 하지만 영탁은 그런 그녀를 결코 멸시하지 않았다. 영탁의 가치관에 의하면 사람의 영혼은 본래부터 악하고, 더러운 것이었다. 그리고 인간은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신은 인간을 만들 때 선천적으로 악하게 만들었으니, 더욱 악해져서 한 치의 순수한 감정조차 남지 않았을 때, 인간은 비로소 인간다워진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영탁은 그 다음 말을 강조했다. 우리는 진정한 휴머니스트들이다. 이 모든 교리는 역설적인 것이다, 라고 말했다. 즉 위악적이라는 것이다. 물론 좀 모순 되는 것 같아도 영순으로서는 얼추 이해되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영순은 바울교에 가입하고 1년 만에 무단이탈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그것은 그녀의 짖궂음이었다. 신을 믿건 악마를 믿건 그건 사람의 자유다, 라는 주체성에서 비롯된 행위였다.
하지만 바울교는 진정한 악마숭배교단이다. 그것은 배신자는 엄단한다는 교리였다. 하지만 영순은 탈퇴를 한 것은 아니었다. 공식적인 선언을 한 게 아닌 무단이탈행위였을 뿐인 것이다.
그녀는 교회의 아무런 허가도 없이 먼 곳으로 이사를 갔으며, 어떤 자취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2년이 흐른 후 다시 입교했던 것이다.
<2>
그녀는 그 2년 동안 세상에 대한 증오감만 늘었을 뿐이다. 계속 식당일을 했지만, 모든 것이 허무했다.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곤 집에 와서 식사를 하고 그저 TV를 시청하는 것이었다. 하루하루가 메마른 저승길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그녀의 나이는 이제 스물세 살이었다. 그야말로 여자로서는 황금기인 셈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청춘은 또 다른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 또래의 여자들처럼 예쁜 것을 산다던지, 남자친구와 같이 데이트를 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꿈속에서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세상에 대한 원망은 더해만 갔다.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질시와 시기는 그녀를 더 확고한 사타니즘 숭배자로 거듭 태어나게 만들었다.
“교주님, 그때는 정말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만약에 저를 다시금 신자로서 인정해 주신다면, 교회를 위해 어떠한 희생도 감수하겠습니다.”
영순이 교주인 고영탁에게 재입교하면서 한 말이었다. 교주는 그 뜻을 받아들였지만 조건을 달았다.
그것은 어찌 보면 아주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그때 교회는 어떤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교주는 그 사건을 그녀에게 상세하게 설명했다.
처음 교주로부터 그 지령을 하달 받은 영순은 얼굴이 백지장이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범죄, 그것도 흉악범죄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영순 자매, 네가 정말로 우리 교회에 헌신하려는 마음을 가졌다면, 목숨을 걸고 이 명령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만약 이 사실을 경찰에 알리면 물론 우리 교회는 끝장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명심해라. 만약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면 우리는 어떻게 서든지 너에게 피의 보복을 할 것이다. 알아듣겠나?”
그 사건은 보름 전에 발생한 것으로 교회가 신도 한 명을 살해한 것이다.
그 신도는 교회를 탈퇴한 후 어느 신문사에 교단의 위험성을 규탄하는 내용의 글을 투서한 것이다. 하지만 투서를 접수한 신문사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지 않았다.
악마를 숭배하는 교단 자체에 대해 냉소적이었는데, 그것은 그 교단이 하나의 쇼맨십행위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악마를 숭배한다고 해도 그것이 표면화되지 않는 이상, 어떤 제재를 가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다고 투서의 내용으로 보자면 범죄성이 내재되어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바울교는 행동주의를 기본교리로 삼는 과격단체였으니.......
교회는 그 신도를 살해했던 것이다. 탈퇴할 것도 교칙을 위반한 배신행위인데, 그것도 모자라 교회를 비방하고 모독했다는 것이 그 응징의 배경이었다.
사건 발생 나흘 후 그 신도의 가족들은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고, 그 실종사건 배경에 바울교가 개입됐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경찰은 곧 교회에 대한 수사를 본격화했지만, 증거를 잡아내진 못했다.
바울교는 현재 신도수가 여덟 명이었는데 이들이 하나같이 독실한 악마숭배자들이었던 것이다.
신도들을 상대로 철저한 수사가 이루어졌지만, 모두 이구동성으로 <모른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던 것이다.
결국 현재 바울교는 혼돈상태였다.
그런데 그 살해된 신도가 살해되기 며칠 전에 투서를 했던 신문사의 한 사회부 기자가 오히려 경찰보다 더 집요하게 사건에 매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자가 사건에 대해 그토록 집요하게 달라붙는 데에는 바울교단이 모르는 사정이 있었다.
그것은 그 신도- 박광섭이 살해되기 바로 며칠 전에 그 사회부 기자는 찾아가서 몇 가지 대화를 주고받았던 것이다.
그 밀고담은 결국 투서의 내용과 크게 다른 것은 없었지만, 어쨌든 기자로서는 투서만 받아 보았을 때와, 직접 당사자에게 사정을 청취했을 때와는 현실적으로 와 닿는 느낌이 달랐다.
박광섭은 기자에게
“난 이제 그만 교회에서 탈퇴하고 싶어요. 하지만 만약 내가 탈퇴하면 교회는 날 가만 놔두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하소연했던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박광섭은 실종된 것이다. 기자는 이제껏 경찰에게도 그 회담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기자는 그 교회의 범죄행위를 한 번 직접 파헤쳐 보자는 사명으로, 그리고 그것이 살해된 박광섭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3>
엄영순은 그때를 잊지 못한다. 세상과 인간에 대해 그렇듯 비관과 혐오로 들끓는 마음 한 구석에, 그 어두운 마음 한 켠에 언제까지나 꺼지지 않을 것 같은 한 개의 숭엄한 촛불이라고나 할까?
그 남자- 이름도, 성도, 나이도 모르지만 그 남자에 대한 기억은 그녀의 가슴 한 켠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빛이었다.
사창가 마이너리그 시절. 그 성행위 도중 간질병을 일으켰을 때, 그 남자는 그 자리에서 그녀를 안아주며 보살펴 주었던 것이다.
수치심. 벌거벗은 몸으로 성교를 하다가 간질발작을 일으켰던 그때. 그 남자는 그녀가 깨어날 때까지 지켜봐 주었던 것이다.
23년 동안 살아오면서 오직 그 기억만이 인간에 대한 일말의 사랑을 느끼게 해 주었다.
그 남자....... 꼭 한 번, 단 한 번만이라도 그 남자를 다시 볼 수 없을까?
그녀는 항상 그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그 남자와 그런 관계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영순은 교주의 지령을 따랐다.
그 기자- 최훈의 자택에 잠입해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탐색,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성북동 한 단독주택.
최훈의 자택인 그 가옥은 흔히 있는 주택가에 위치해 있었다. 이미 교회는 최훈을 주시하고 있었다. 훈의 집에서 방 하나를 전세로 내 놓고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았고, 그 집에 영순을 잠입시키려 한 것이다.
영순은 처음 훈을 만났을 때, 놀라움에 한동안 심장이 두근거려 말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 남자- 바로 그 남자였던 것이다. 벌써 4년이 지났지만, 그 남자는 분명히 그때의 그 남자였던 것이다.
그때와는 많이 변했지만, 약간 마른 얼굴에 수염자국이 난 뾰죽한 턱은 그대로였다.
훈은 서른세 살로 영순보다 정확히 열 살이 더 많았다. 그에게는 부인과 두 자식이 있었다.
부인은 서른한 살로 정말 여성다운 성품에 교양미가 넘쳐흐르는 여자였다. 자식은 아들과 딸, 그야말로 겉보기만으로도 행복한 가정이었다.
전세금 4천만 원. 물론 모두 교회에서 지원했다.
“안녕하세요. 보다시피 방이 무척 좁습니다. 하지만 혼자 생활하시기에는 큰 불편은 없을 겁니다.”
훈이 처음 영순이 방을 보러 왔을 때 말했다.
훈은 그녀를 전혀 못 알아 보았다. 하긴 그 어두운 방 안에서, 불과 몇 십 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의 기억만으로는 별달리 특색이 없는 못생긴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했던 것이다.
“뭐, 불편한 거 있으면 지체없이 말씀해 주세요.”
영순이 이사오던 날, 훈 부부는 앞으로 생활하는데 알아두어야 할 것들을 상냥하게 설명해 주었다.
영순은 적이 당황했다. 교주가 그녀를 훈의 집에 잠입시킨 것은 훈에 대한 최악의 조치도 불사하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훈이 계속 박광섭 사건을 파헤치려고 하면 교회는 훈의 행동을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영순은 이러한 현실에 직면하여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일생일대 가장 드라마틱한 인간미를 느끼게 해 준 사람, 그리고 그녀는 그 사람을 말살하기 위한 사전 정보수집원이라는 특명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 책무를 벗어던질 수는 없었다. 한 번 무단이탈하고 다시 가입하게 된 교회. 그것은 결코 장난이 아니었다. 세상을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지게 인식했던 그녀에게 교회는 나름대로 아늑한 보금자리였던 것이다. 교주 고영탁은 진심으로 신도들을 보살펴 주었다. 행동주의를 기본교리로 삼고는 있어도 변절행위나 그 밖에 모독행위 같은 짓만 하지 않으면 교주는 진심으로 신도들에게 온정을 베풀었던 것이다.
영순만해도 그 보기에도 추악한 몰골로 보는 사람마다 첫 대면에 천대와 멸시의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지만, 교주는 항상 그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해 주었다.
<4>
최훈은 이제까지 모은 자료를 다시 상세하게 검토해 보았다.
오늘 고영탁을 교회 안에서 만나 보았었다. 그리고 훈은 자신의 생각이 올바르다는 것을 거듭 확인했다. 영탁은 박광섭 실종사건에 대해 시종일관 모르겠다라고 교회관계설을 전면 부인했지만, 훈은 그의 면면에서 범죄사실을 냄새 맡을 수 있었다.
박광섭이 실종된 시간은 오후 8시 경이다. 광섭의 가족은 광섭이 집을 나설 때 분명히 교회에 간다라고 했다고 증언했던 것이다.
영탁도 광섭이 교회에 왔었다는 것은 인정했다. 하지만 오후 8시 경에 와서 한 30분 동안 있다가 교회를 나섰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영탁의 진술이 거짓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있었다.
광섭은 올해 스물일곱 살로 조그만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가족으로는 부모와 세 살 아래의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이 여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광섭이 외출할 당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오빠, 오늘은 양념통닭이 어때?’
여동생의 이 애교 섞인 부탁을 듣고 광섭은 분명히
‘알았어. 오늘은 양념통닭.’
이렇게 웃으며 말했고, 여동생은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는 것이다.
교회를 탈퇴한 광섭이었지만, 그날은 탈퇴문제를 확실히 매듭지으려고 교회에 찾아갔던 것이다. 그 전에 광섭은 통상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교회에 나갔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마다 교회건물에 있는 치킨집에서 치킨을 한 마리 사와서 가족들과 나눠 먹었던 것이다.
집부근에도 몇 군데 치킨집이 있었지만, 광섭은 항상 그 치킨집에서만 치킨을 샀다.
그런데 영탁은 분명히 광섭이 8시 경에 교회에 와서 한 30분 정도 있다가 떠났다고 했다. 영탁의 말이 사실이라면 광섭은 치킨집에서 치킨을 샀어야 했다. 왜냐하면 광섭이 교회를 나섰다면 바로 같은 건물에 있는 치킨집에서 치킨을 샀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치킨집 사람은 결코 광섭이 그날 치킨을 사가지 않았다고 증언했던 것이다.
결국 광섭은 그날 교회에 들어선 후 행적이 끊긴 셈이었던 것이다. 영탁의 ‘광섭이 교회에서 나간 후 변을 당했을 것’이라는 주장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치킨집은 바로 교회 건물 1층에 있다. 영탁의 말이 사실이라면 광섭은 교회에서 밖으로 나오자마자 치킨집에 들를 겨를도 없이 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훈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자료만으로는 영탁의 숨통을 조일 수는 없었다. 다른 결정적인 증거를 잡아야만 했다.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를 펼쳤지만, 바울교의 회원들은 신앙심을 바탕으로 굳게 뭉쳐 그 어떠한 공략에도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경찰은 박광섭이 살해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아 다각적인 수사활동을 벌였으나, 이렇다 할 단서를 잡지 못했다.
광섭이 살해됐다면 그 사체의 행방을 찾는 것이 수사의 급선무였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낸다는 것이 난제였던 것이다.
박광섭 실종 당시에 영탁을 비롯한 신도들의 알리바이는 영탁과 신도 네 명이 교회에서 내내 집회를 가졌다며 알리바이를 내세웠으며, 나머지 신도 네 명은 집에 머물러 있었다거나, 외출을 했다거나 하며 알리바이를 주장했다.
경찰은 의당 집회를 가졌다는 것이 거짓말이며, 결국 그 시간에 영탁과 신도들은 광섭을 살해한 뒤 사체를 처리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훈은 경찰과는 별도로 사건을 파헤쳤는데 그것은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죽은 박광섭에 대한 책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과, 사건기자로서 사건을 해결하여 수훈을 세우고 싶다는 열망 같은 것이었다.
물론 경찰신분도 아닌 기자로서 사건을 추적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사건을 파헤쳐 보자라는 목표를 세우고 시간이 나는 대로 조사를 해 보았지만, 별다른 성과를 올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무렵 훈은 어떤 상황을 통해 바울교의 범죄의 꼬리를 잡을 수 있었는데, 그것은 박광섭이 실종된 지 25일이 지난 시점에서였다.
<5>
훈은 그날 어떤 사건에 대한 취재를 마치고 오후 늦게 바울교를 찾아갔다. 바울교는 훈의 자택인 성북동과는 제법 멀리 떨어진 공덕동이다.
고영탁은 잠시 외출해 있었고, 신도 세 명-40대와 30대 여자, 그리고 30대 남자-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신도들이 기도를 마친 후 훈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려고 했다. 하지만 신도들은 훈의 방문을 노골적으로 꺼려하며, 그들끼리 응접실에서 다과를 들며 대화를 나누었다.
교회의 실내는 40평 정도의 크기로 집회장을 사이로 응접실이 있을 뿐이며, 응접실에는 책상 위에 컴퓨터와 각종 서적들이 놓여 있었다.
훈은 신도들과 대화를 나누려고 응접실 의자에 앉아 말을 걸어 보았다. 하지만 신도들은
“우린 당신과 얘기할 게 없습니다. 이제 곧 교주님이 오실 테니 교주님과 얘기를 나누던지 하세요.”
라며 훈과의 면담을 거절했다.
훈은 어쩔 수 없이 의자에 앉아 멀건히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교주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훈은 아주 우연히 중대한 정보를 입수한 것이다.
신도들은 다과를 들며 즐겁게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 중 4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아줌마가 고양이를 하나 품에 안고 있었는데, 어떤 맥락이었는지 몰라도 그들의 화제가 고양이에 관한 것으로 흘러갔다.
훈은 취재수첩을 들척이며 무심코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정신이 확 깨는 것을 느꼈다.
“우리 두리 배고픈가보다. 그러고 보니 밥 먹을 시간이 지났구나. 두리야. 조금 있다가 집에 가서 맛있는 생선요리 해줄게.”
그 말을 듣고 30대 남자가 말했다.
“두리, 살이 많이 빠진 것 같아.”
“응. 요즘 끼니를 좀 걸렀더니 그런 것 같아.”
“뭘 끼니를 걸러. 누나 자기 끼니는 걸러도 두리 끼니는 챙겨주면서.”
“아냐. 저번 때 제천에 갔을 때도 그렇고 최근에 자주 끼니 주는 걸 잊어먹는 다니까.”
이렇게 말하던 고양이 주인과 나머지 두 명의 신도의 대화가 끊겼다.
순간 취재수첩을 들여다보며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훈이 의아해하며 그
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그러자 세 사람 모두 훈을 바라보다가 낭패의 빛을 보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 중 야무져 보이는 30대 여자가 재빨리 끊어진 대화의 실을 연결하고자 허둥지둥 말했다.
“야, 근데, 이 홍차 참 맛있다. 언니 이거 어디서 샀어?”
“으...음... 그거.......”
순간 훈은 그 자리에서 이거 무언가 있구나, 하고 반추해 보았다. 대화는 고양이 주인여자가 제천에 갔을 때 고양이에게 끼니를 걸렀다는 데서 끊어졌던 것이다.
제천. 바로 그거다. 훈은 생각했다.
<저번에 제천에 갔을 때>.......
그 <저번>이란 바로 그날이 아닐까? 그리고 제천에 간 것은......?
훈은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훈은 짐짓 눈치를 못챘다는 표정으로 취재수첩을 읽은 것에 열중해 있는 척했다.
그로부터 30여분 뒤에 교주가 와서 훈은 그와 잠깐 얘기를 나누었거니와 별다른 새로운 소득은 없었다.
훈은 교회를 나오며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렇다. 그들은 박광섭의 시신을 제천 어딘가에 유기한 것이다. 물론 확실한 건 아니지만, 훈은 당장 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훈이 교회에서 떠나자 세 명의 신도들은 곧 방금 전의 고양이 주인여자의 망언과 그에 따른 훈의 뜻있는 반응을 곧 소상히 영탁에게 고했다.
“뭐라구? 이런 바보 같으니.......”
“아,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건 아니잖아요?”
“아냐, 그때 그 사람 눈빛 분명히 눈치 챈 듯한 눈빛이었어.”
“맞아.”
교주와 세 신도는 초조한 심정으로 교회 응접실에서 얘기를 나누었다. 훈이 돌아가고 난 후 세 신도는 바로 교주에게 고양이 주인의 경솔한 언동을 거론했으며, 교주는 큰 낭패의 빛을 보였던 것이다.
“음, 이거 어떻게 보면 그 자식에 대한 처리문제를 추진하는데 있어 계기를 만들어 줬다고 할 수 있어. 눈엣 가시같은 그 놈. 이제 더 눈여겨 볼 필요도 없어. 한시 바삐 처치해 버리는 거야.”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음, 내가 생각해 놓은 게 있어. 거사일은 바로 내일이야!”
<6>
영순은 영탁의 얘기를 전해 듣고 심한 혼란감에 휩싸였다.
영탁으로부터 바로 내일 훈을 제거할 것이라는 연락을 들은 그녀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녀는 훈이 집에 잠입한 후 줄곧 훈의 행동을 관찰해 영탁에게 보고하고 있었다.
애초 교회가 그녀를 훈의 집에 침투시킨 목적이 훈을 제거하려는 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지만, 실제로 교회가 그러한 이행단계의 뜻을 표명하자, 그녀는 심한 당혹과 갈등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영순은 자신이 진정한 악마숭배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놓은 이유가 물론 사회의 말단계층이라는 소외감과 가진 자에 대한 적개심에 따른 단순한 반항심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좀더 철학적인 면에서 볼 때 선과 악, 생과 사에 대한 탐구심과 회의감을 해소하고 싶은 열망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줄곧 생각해 왔던 자살에 대한 열망과도 통한다고 할 수 있었다.
자살......
문득 영순은 생각했다. 그것은 그녀의 뇌리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어느 순간 심각한 상태가 되었다.
아아!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녀는 자살이라는, 어찌 보면 인생에 있어 가장 중대한 문제를 놓고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행동주의 교리의 신봉자로서 투철한 사명감과 신앙심을 자랑으로 삼아온 지난 날들.
증오와 적개심만으로 중무장된 그녀의 마음에 성스럽다고까지 할 만한 진한 인간미를 선사해 준 사람.
영순은 갈등했다. 교회의 방침에 따르느냐, 아니면 은혜를 갚느냐.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녀는 며칠 전의 일이 떠올랐다.
며칠 전, 저녁나절에 집마당에서 빨래를 하다가 그만 간질발작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때 마침 훈의 부인이 마당에서 볼일을 보고 있다가 그녀를 보살펴 주었고, 이윽고 훈이 방에서 나와 그녀를 그녀의 방으로 옮겨 간호해 주었던 것이다. 그녀가 발작에서 깨어나자 훈부부내외는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물론 그 상황에서 일반사람들이라면 당연히 해 주었을 만한 조치였지만, 영순은 그 순간 또다시 사창가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벌써 두 번이나 훈에게 신세를 진 것이다.
영순은 괴로웠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그러던 중 바로 그 생각이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 자살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녀의 마음에 난데없는 자살충동이 솟구쳤을까? 그것은 그녀의 짖궂은 심리에서 떠오른 발상이었다.
그것은 시험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그녀의 마지막 가는 길에 과연 훈은 어떤 선택을 할까?
그리고 훈의 그 선택에 따라 그녀의 선택 또한 결정되는 것이다.
<7>
바울교의 훈에 대한 범죄의 시나리오가 잡혀졌다. 모두 교주인 영탁이 구상한 것으로 결국 훈을 유인해서 처치하자는 것이었다.
고양이 주인 여자- 육영희로부터 훈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온 것은 오후 1시 20분 무렵. 공교롭게도 훈은 점심식사를 마치고 어저께 그 육영희를 비롯한 세 명의 신도들간의 대화를 듣고 생긴 의혹을 풀기 위해 영탁이나 신도 중에 제천이 출생지인 인물을 알아보려던 참이었다. 하지만 막상 생각하니 그 일이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호적을 조사해 봐야만 하는데, 영탁을 포함한 신도 여덟 명의 호적을 다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훈은 먼저 영탁의 출생지부터 알아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곧 회사를 나설 참이었다.
“여보세요.”
“네, 여보세요.”
“네, 저 실은 바울교의 신잔데요. 아시겠지만 육영희라고 해요. 어저께 교회에 오셨을 때 보셨겠지만 우리 두리, 아니 고양이 주인이에요.”
“아아, 네 알고 있습니다.”
훈은 뜻밖의 전화에 온몸이 굳어지는 것을 애써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네, 다른 게 아니라 실은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요.”
“네, 말씀하십시오.”
“실은 제가 얼마 전에 제천에 있는 생가에 갈 일이 있었거든요. 아버지가 편찮으신 관계로요.”
“네, 말씀하십시오.”
훈은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말했다.
“네, 근데 제천에 갈 때, 제 친한 친구에게 제가 애지중지하는 우리 고양이를 맡겼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고양이를 학대한 것 같아서요.”
“아, 무슨 말씀인지......?”
“다른 게 아니라 고양이가 발을 절룩거리더라구요. 바로 친구에게 맡긴 날부터요. 그래서 동물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는데 고양이 다리에 금이 갔다는 거예요.”
“아, 네......”
“그런데 그 친구는 결코 고양이를 학대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분명히 제가 친구에게 고양이를 맡긴 날 후부터 발을 절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그런데 이 경우 어떻게 해야 보상을 받을 수 있죠?”
“아, 그 문제는 제 직업과는 관련이 없습니다. 그런 문제라면 동물보호협회나 변호사를 찾아가 보시죠.”
“네, 저는 기자님이시라 좀 아실 것 같아서요.”
“동물보호협회에 문의해 보십시오. 그런데 그 일 때문에 저에게 전화를 거신 겁니까?”
“네, 죄송해요.”
“아닙니다. 도움이 못 되어 드려 죄송하네요.”
“네, 그럼 안녕히 계세요. 실례 많았습니다.”
전화통화를 마치고 훈은 얼떨떨했다. 도무지 뚱딴지같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훈에게 의혹이 생겼다.
이것은 혹시 그 고양이 주인 여자의 어떤 술수가 아닐까? 그렇다. 고양이 여주인은 <아버지가 편찮으신 관계로>라는 말을 강조했다.
제천의 아버지댁.... 그렇다. 그녀는 어제의 실수를 만회하려고 술수를 부린 것이다. 그것은 어제 그녀가 다른 신도들과의 대화에서 내뱉었던 <제천에 갔을 때>란 말이 걸려서 그 말을 다시 주워 담기 위해 직접 나에게 전화를 걸어 <아버지가 편찮으신 관계로 제천에 갔다>라고 말하며 나의 의심을 돌리려고 한 것이 아닐까?
훈이 생각하기에 그녀는 지적능력이 좀 떨어져 보였다. 심하게 말하면 모자라 보였다.
(음........ 그렇다면....... 그렇다면......?“
훈은 한참 생각하다가 핸드폰의 전화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것은 이쪽에서 역이용하자는 생각에서 취한 행동이었다. 신호음이 가고 곧 육영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최훈기잡니다.”
“아, 네.”
“다른 게 아니라 좀 전에 그 얘기 말씀인데요.”
“네.”
“제가 좀 조언을 해 드릴 게 있어서요.”
“아, 그러세요.”
여인의 음성이 들떠 있었다.
“네, 그러니까 그 자초지종을 다시 한 번 들려주시죠.”
훈은 이 여인으로부터 무언가 더 필요한 증거를 잡아야겠다는 심정에서 적극적으로 덤벼든 것이다. 하지만 훈의 이와 같은 책략은 지극히 어리석은 것이었으니.......
“그게 그러니까. 아 저 혹시 지금 이 쪽으로 오실 수 있어요? 아무래도 전화상으로는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서요. 그리고 또 선생님을 직접 대면하고 싶어서요.”
“아, 그런가요. 그래 지금 어디시죠? 제가 곧 그리로 가죠.”
“네 여기 제기동 XX공원이에요. 이리로 나오실 수 있나요?”
“네, 지금 가겠습니다. 기다리세요.”
훈은 전화통화를 마치고 나자 곧바로 회사를 나섰다.
오후 1시 30분. 제기동까지는 승용차로 차량정체를 감안하면 시간상 50여분은 족히 걸린다.
그 무렵, 육영희는 훈과 통화를 마치고 곧 영탁과 남자 신도 두 명에게 통화내용을 보고했다.
“후후, 결국 두뇌싸움의 결과는 우리의 승리로군.”
영탁이 말했다.
“그 기자놈 날 바보로 알았나봐. 심히 유감인데, 킬킬.”
영희가 쾌재의 웃음을 내비치며 말했다.
“어쨌든 놈은 이제 우리 손아귀 안에 들어 온 셈이야. 후후, 그 자식 잔꾀놀음에서 결국 우리한테 진 거야. 자아, 이제 준비하지. 이제 4,50분만 있으면 놈은 이 XX공원으로 올 테고 영희가 수면제를 탄 음료수를 건네 마시게 한 후 승합차 안으로 데리고 오면 살해해서 광섭이를 매장했던 그곳에 파묻는 거라구.”
남자 신도 한 명이 말했다.
“허허, 어쨌든 교주님이 머리싸움에서 이기셨군요. 그 기자놈이 우리의 덫에 보기 좋게 걸렸다는 게 통쾌합니다.”
“영희 자매가 고양이 얘기를 꺼내면 놈이 대번에 영희 자매가 그때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속셈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리고 놈은 그걸 이용해서 이쪽의 비밀을 캐내 볼 생각일 테고 말야. 뭐 일은 간단하지, 하하.”
12월의 매서운 한파가 공원 안에 정적을 더해주는 날이었다.
<8>
영순은 강릉의 한 호텔에서 유서를 다 쓰고 자살을 하려고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오후 1시 30분.
이제 결행만이 남은 것이다. 그리고 그 전에 마지막으로 할 일이 남은 것이다.
최훈과의 통화. 마지막 순간을 그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한다는 것이 그녀에게 한편으로 행복감을 안겨 주었다.
나는 이제 자살을 하려고 합니다. 지금 시각은 오후 1실 10분 전. 나는 이곳 강릉의 호텔에서 나의 일생을 마감할 것입니다. 이 유서를 처음 발견할 사람은 누굴까요? 경찰? 아니면 최선생님이겠죠?
나는 예전부터 자살을 동경해 왔습니다. 스물세 살이란 짧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려하니 세상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감이 동시에 느껴지는군요. 하지만 뭐 미련은 없습니다. 정말 하류인생으로 점철된 삶.
나는 정말 장난꾸러기인가 봅니다. 천상 인생이란 연극에 광대역을 맡은 장난꾸러기인가 봅니다. 자살이라는 지극히 엄숙하나 행위를 눈앞에 두고 그 후에 일어날 상황을 시험한다는 것이.......
나는 정말 못난이였습니다. 추악한 외모에, 불우한 가정환경, 거기다 간질병 증세까지.......
나는 진정한 악마숭배자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굳건히 내 마음 속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상황에서 살인죄를 묵과할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결국 나는 지금 이 글에서 우리 바울교의 죄상을 고발한 격이 되었습니다만.
이 글을 최선생님이 먼저 읽거나, 경찰이 먼저 읽거나, 그 어느 상황에서라도 그걸로써 바울교는 붕괴될 것입니다.
광섭형제를 살해한 것은 우리 교단입니다. 교회에서 수면제를 먹인 뒤 목졸라 살해하고 시체는 우리 신도 중 하나인 영희자매의 고향 제천 야산에 숨겼답니다. 그리고 교주님은 이를 파헤치려는 최선생님의 집에 나를 잠입시켰습니다. 나는 사창가에 몸담고 있을 때 처음 최선생님을 손님으로 맞았었는데, 그 분에게서 진한 인간미를 느꼈었답니다.
성행위 도중 간질병 발작을 일으킨 나를 옆에서 지켜주시고 내가 깨어날 때까지 보살펴 준 그 사건....... 아아, 지금도 그 생각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하지만 나는 교회의 명령을 어기고 싶은 마음 또한 없습니다. 나는 진정한 악마숭배자다, 이렇게 스스로 투철한 신념을 가졌다고 늘상 마음 속으로 생각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나는 선택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물론 이것도 선택은 틀림없겠지만, 나는 한 가지 시험을 하면서 내 생애를 마치려고 합니다.
지금이 1시 20분.
나는 이 글을 쓰고 난 후 최선생님께 전화를 걸 참입니다. 최선생님은 회사에서 막 출발을 하기 직전이겠죠? 바로 영희자매가 1시 30분에 최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최선생님을 불러낼 테니까요. 최선생님을 이대로 놔두면 결과는 불보듯 뻔하죠. 최선생님은 결국 교회의 음모에 희생될 테니까요.
나는 최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반실신상태에 처한 다급한 목소리로 ‘선생님, 여, 여기 강릉에 있는 XX호텔인데요. 지금 제, 제가 간질발작을 일으켜, 위, 위급한 상태거든요. 마침, 떠,떠오르는 사람이 서, 선생님이군요. 제, 제발 지금 여, 여기로 오실 수 없어요? 아아, 선생님’ 이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으려구요. 이 경우 최선생님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최선생님으로서는 교회비리를 해결하느냐, 마느냐 하는 긴박한 상황입니다. 만약 사건을 해결하면 물론 이단종교의 죄상을 사회에 폭로, 척결했다는 큰 명예를 거머쥘 수 있습니다.
자아, 최선생님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요? 프라이드일까요, 휴머니즘일까요? 나는 그저 그 결과를 저승에서나 확인하렵니다. 나는 어떤 결과로든 만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선생님이 명예를 택한다면, 한평생 바쳐온 악마숭배에 대한 나의 믿음이 실현될 것이고, 그 반대라면- 나는 세상은 결코 추악하지만은 않다, 세상은 아름답다라는 마지막 희망을 안고 죽게 될 테니까요.
나의 주검을 처음 발견하는 사람은 누굴까요? 호텔종업원일까요, 최선생님일까요? 이제 곧 저승에서 확인할 수 있겠죠. 그럼 이만.
남자는 여자의 누운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남자는 여자의 상체를 일으켜 세워 껴안았다. 여자는 영원히 눈을 뜨지 않았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