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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의 삶 51 (도미니카, 아이티 탐방기) 목회 칼럼
2013/06/12 10:43
http://blog.naver.com/baikkey/30169772923
오래간만에 나들이를 했다. 가게를 한 후에 6년 전에 Denver에 가고 그동안 꼼짝 못하고 가게를 지켰는데 이번에 CRC한인 목회자 모임인 북미주 개혁 교회 한인 교회 협의회 정기총회가 도미티카에 있어서 예린이와 함께 참석했다.
6일 아침 뉴욕의 J.F Kennedy 공항에서 11시 29분 비행기 JET BLUE를 타고 떠났다.
J.F. Kennedy공항에서 비행기를 티는 것은 처음이다. 미국에 올 때도 New Jersey의 Newark 공항으로 오고 모든 비행기는 필라델피아 공항을 이용했는데 애들과 아내가 한국에 갈 때 케니디 공항에 데려다 주고 데리고 오는 것을 제외하고 내가 이 공항을 이룡하는 것은 처음이다.
이번에 Dominican Republic에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있고 목요일에는 Haiti로 건너가 고아원을 방문하고 아이티에서 뉴욕으로 온다.
미국과 캐나다를 제외하고는 다른 나라에 가는 것은 처음이다. 기대가 크다.
가게 때문에 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아내가 가도록 권했다. 마침 애들이 지난 주에 방학을 해서 집에 왔기 때문에 아들이 아내의 라이드가 가능하여 갈 수 있었다.
예린이는 여러 나라에 다니는 것을 좋아 하기 때문에 내가 갈 것이냐고 묻자 서슴없이 간다고 해서 같이 가기로 했다.
오래간만에 비행기를 타니까 설레이기도 했지만 곧 지겹기 시작했다. 예린이가 창 가에 앉았는데 아빠가 오래 간만에 비행기를 타니까 밖을 구경하라고 나와 자리를 바꾸었다. 그런데 바다 위를 가니까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3시간 48분동안 가는데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도 지겨웠다.
이 짧은 거리도 지겨운데 한국까지 가려면 얼마나 더 지겹고 힘들까? 예린이 외할머니에게 미국 오라고 자주 권하는데 연로하신 분이 미국 오는데 얼마나 힘들까? 비행기의 속도가 지금보다2배는 더 빨라야 지겨움이 덜 할 것 같다.
비행기 여행이 자동차 여행보다도 더 지겨운 것 같다. 이런 지겨운 여행을 비행기를 자주 타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힘들고 지겨울까? 어느 분이 비행기를 처럼 탈 때는 모든 것이 신기했는데 너무 많이 타니까 “또 타?”했다는데 이해가 된다.
우리가 탄 비행기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도미니카 사람들이다. 동양인은 물론 백인들도 없었다. 150명이 딸 수 있는 좌석이 만석은 아니었지만 제법 꽉 찼다.
밖을 쳐다보니 푸른 하늘과 구름만이 보인다. 하늘도 하늘색에서 파란색으로 여러가지 변화된 색깔이 나타난다. 비행기가 구름을 만나면 흔들렸다. 구름이 없는 곳에서 흔들리는 것은 아마 기류 때문일거다.
짧은 시간이지만 어지럽고 머리가 아프고 힘들었다.
드디어 육지가 보이고 하늘에서 바라본 도미니카는 너무 가난한 티가 났다. 산에 나무도 많지 않고 도로에 아스팔트가 깔려 있는 것 같지 않았다. 도미니카 산하를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니 처음 오는 곳이라 신기하고 좋았지만 머리가 아프고 너무 힘들었다. 비행기 여행이 너무 싫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비행기를 그리 많이 타지 않았다. 군대에서 무장간첩을 잡으로 임진강 상류에서 헬리콥타를 타고 GOP로 투입되면서 탄 것이 처음이고 그 다음에는 신혼 여행때 제주도를 가면서 처음 탔다. 그 때는 하늘 위에 떠있는 구름이 너무 신기해서 마치 솜사탕 같이 푹실한 구름 위에 뛰어 내리고 싶은 충동이 느꼈다. 그리고 다음에 효성 교회에 있을 때 제주도 갈 때 한 번 가고 미국 올 때와 서울에 청빙 설교를 하러 갈 때 그리고 미국에서는LA에, 그리고 휴스턴, 미시간 그랜드 래피드, 다녀 온 것이 전부이다. 그 때는 비행기를 많이 타지 않았기 때문에 비행기 타는 것이 신기하고 좋았지만 오늘 비행기를 타니 너무 힘들고 지겨웠다. 이제는 비행기에 대한 환상도 신기한 것도 없었다. 비행기 타는 것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도미니카의수도인 산티 도밍고 공항에 도착했는데 날씨가 무덥고 더웠다.공항은 한국의 지방 공항보다도못했다. 도미니카에서 제일 큰 공항이 한국의 지방 정거장 같았다. 입국비로 외국인은 10불씩 받았다.
여기 선교사의 교회에서 차량이 마중 나왔는데 차가 현대차인 스타 렉스였다. 호텔로 가는 길을 보니 한국의 시골 동네 같았다. 도미티카의 첫인상을 갖게 하는 공항에서 들어가는 길이 한국의 지방 도시만도 못했고 길에는 쓰레기가 많고 더러웠다. 길에는 큰 장총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Be live hamaca호텔에 도착했다. 리조트다. 이국적인 맛이 드는 호델이다. 바닷가와 인접해 있고 호텔이 넓고 멋은 있었다. 그러나 최고급 호탤이라고 하는데 별로 였다. 호탤 안에는 모기가 많아서 잠깐 들어 갔는데 벌써 예린이와 내가 모기에 물렸다.
호텔 주위는 높은 담이 쳐 있고 안에는 경비가 수십명이다.호텔은 메인 건물이 있고 빌라 같은 건물이 여러 채가 있는데 마치 미국의 아파트 촌과 같은 느낌을 같는다. 외부인이 들어 오지 못하게 막은 것 같다. 호텔 주위는 매우 위험하다고 하다. 그래서 호텔이 외부와 단절된 느낌이 든다. 영화에서 보면 중남미 마약을 하는 캥 집단의 두목들이 사는 집들이 멋있고 낭만적이면서도 무슨 요새 같은 것 같은 느낌을 가졌는데 여기가 바로 그렇다.
저녁을 먹는 식당은 멋있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있다. 부페이다. 한끼가 20불이라고 하는데 미국에서 우리가 가는 중국식당의 음식보다 못했다.미국식에 맞추어 음식이 만들어진 것 같다. 식사비를 비롯하여3박 4일 호텔비가 일인당400불이라고 한다.
도미니카가 후진국이라는 인상이 강하게 느끼는 것은 저녁에 호텔 전체의 전기가 네번이나 나갔다. 우리가 회의를 하는 곳에서 3번이나 나가서 그쪽 건물만 불이 나갔는지 알았는데 회의가 다 끝나고 빙으로 오는데 전기가 다 나갔다.호텔 전체뿐만 아니라 동네 전테가 다 나간 것 같다. 전기는 오래지 않아 곧 들어 왔다. 60년대 한국을 연상케 한다.
저녁에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한 한국인 선교사인 최광규 선교사님이 여기 선교 활동을 보고 하였다. 최선교사님의 활동을 보면서 내가 부끄러웠다. 영혼을 구원하며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웠다.많은 결실들을 맺는 것을 보면 목사인 나는 지난30여년동안 이루어 놓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나의 목회에도 결실이 나타나야 하는데 지난 이민 목회 14년동안 남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냥 허송한 세월 같고 하나님 앞에 한 달란트 받은 종처럼 무익한 종이고 책망 받는 종이 될까봐 두렵다. 그러나 언젠가 하나님앞의 인정 받으며 결실을 맺는 날들이 올 것을 기대 한다.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짧은 시간이지만 어지럽고 머리가 아프고 힘들어서 그런지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저녁에 선교보고를 받는데 몸이 견디기 힘들었다. 11시가 넘어 숙소로 들어왔는데 너무 피곤했다. 여러번 잠에서 깨어났지만 그래도 비교적 잠을 잘 잤다.아침에 일어나니 기분이 상쾌하고 몸의 컨디션이 쾌 괜찮았다.
아침부터 비가 오기 시작했다. 비가 주록주록 많이 왔다. 지금이 우기라고 하는데 비는 오래오지 않고 곧 끝났다. 아침을 먹으면서 최선교사님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도미니카와 아이티가 같은 섬에 있지만 동쪽인 도미니카는 축복의 땅이고 서쪽인 아니티는 저주의 땅이라고 한다. 아이티는 세계 최빈국이다.예린이가 서반구에서 아이티가 제일 가난한 나라라고 하던데, 아이티는 나무도 없고 힘든 나라라고 한다.우리가 볼 때는 도미티카도 별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도미니카 국민들은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아침 8시에 경건회를 시작으로 회의가 시작되었다.이번의 의장은 변창국 목사다. 개회를 시작하는 기도를 나를 시켜 내가 했다. 각 지역 교회의 보고에 이어 서기보고, 회계보고, 각 위원회 보고를 했다.
회의를 진행하는 동안에 여러번 전기가 나갔다. 금방 들어 왔지만 여기 전기 사정이 별로 좋지 않다. 한국이나 미국 같으면 난리가 났을텐데.
그동안 우리 교단의 한인 교회를 위해 수고하신 박동건 목사님이 은퇴하시게 되어 인사를 했다. 지난 15년동안 한인 교회를 위해 많이 수고하셨다.이번 회의를 하는동안 아주 조용했다.정치색이 없었다.원래 CRC의 특징이 정치색이 없었는데 지난번 덴버 회의 때 참석했을 때 조금 시끄러웠다.중북부쪽의 교회들이 박동건 목사님의 사역에 제동을 걸면서 다른 디렉트를 세우기 원해 조금 시끄러웠는데 이번에는 발언하는 사람들도 없고 아주 조용했다. 임원선거도 별 잡음없이 잘 선출되고 회의도 부드럽게 잘 되었다.
점심을 먹고 호텔과 붙은 해변에 나갔다.카르비안 해안에서 수영을 해 봐야 하니까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였다. 사진으로만 본 애머랄트 물속에서 수영을 하였다.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물을 따뜻했다.뉴저지 해변은 여름에 가도 처음에는 차겁다가 적응이 되면 따뜻한데 여기는 처음부터 따뜻했다. 물도 깨끗하고 깊지 않고 경사도 아주 완만해서 수영하기가 너무나 좋았다 . 의자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니 이것이 바로 휴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나는 여기 저기 구경 다니는 것을 좋아 하지만 은영이는 한 곳에서 쉬면서 즐기는 것을 좋아 하는데 은영이가 이곳에 왔으면 너무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해변에 의자와 그늘이 있어서 목사님들과 저녁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텔안은 무슨 요새와 같았다. 영화에서 마약으로 돈을 많이 번 중남미 갱단의 두목 집들 같았다. 하나의 거대한 정원의 집처럼 아름다운데 사방으로 높은 담과 위에 철조망을 쳐 놓아서 외부 사람이 접근하지 못하고 안에서 외부와 단절된 별천지 세계가 펼쳐쳤다. 아름다운 정원처럼 야자수 나무와 여러개의 풀장,야외 레스토랑처럼 꾸며진 레스토랑이 많았다.안에서는 음료수도 무엇이든지 공짜로 마음대로 먹게 되었다. 경비를 쓰는 사람들이 수십명이 되고 일하는 사람이 수백명이 될 것 같았다. 인건비가 싸기는 하겠지만 거대한 호텔이다. 손목에 호텔표시된 사람만이 호텔안으로 출입할 수 있고 이 표시된 사람은 호텔안에서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호텔이 6층정도의 큰 메인 빌딩이 있고 3층짜리 빌라같은 건물이 25동정도 되었다.우리 방은1820호다..18동 2층이다. 안은 별로다. 한국의 장급보다 못한 것 같다. TV도 고장되고 헤어 드라이기도 작동되지 않고 엉망인 것이 많다. 이 근처에서는 이 호텔이 제일 좋은 호텔이라고 하는데.
수요일 아침에 야외에서 예배를 드리고 관광차로 동굴 구경을 갔다. 가면서 보니까 모든 호텔과 작은 모톌까지도 담과 철장을 쳐 놓았다. 우리가 호텔에 있을 때 호텔과 외부의 경계에 도미니카 사람들이 몇 명이 서 있었다. 아마 호텔에 온 사람들에게 호객행위를 하는 것 같았다. 목사님 부부가 호텔밖을 구경하러 나가니 사람들이 주위 많이 몰려와 자기들이 안내를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호텔박은 위험하다고 한다. 동굴에 갔을 때 예린이가 안내하는 도미키카 남자와 이야기를 했는데 도미니카 사람들은 다 총을 가지고 있고 물건을 사고 총을 드리대고 돈을 안 낸다고 한다.예린이는 스페인어를 조금 할 줄 알아 여기 사람들과 해스패니어로 이야기를 한다.
동굴은 미국의 동굴과는 색다른 맛이 있었다.미국의 동굴은 오목조목하고 복잡한데 여기 동굴은 단조롭고 시원한 느낌을 가졌다. 동굴 구경을 마치고 호텔에서 체크 아웃을 하고 Old Santa Doming로 관광을 나섰다. 콜롬부스가 이 곳에 와서 그의 아들이 살았던 집과 아메리카 최초의 교회당, 최초의 대학 등을 구경했다. 가는 곳마다 쥬얼리를 사라는 사람들이 넘쳤다. 아이들은 자기 신발이 다 떨어졌다고 돈을 달라고 좇아 다녔다. 관광을 마치고 시내 중심부에 가까운 해변가의 크라운 호텔에 들어 갔다. 이 호텔은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500주년을 기념으로 지었다고 하는데 지난 번 호텔보더 깨끗하고 좋았다. 미국 호텔과 비슷했다.지난번 호텔은 인터넷도 안 되고 인터넷을 하려면 한시간당 10불을 내야 했는데 이 호텔은 로비와 방에서 인터넷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내 컴퓨터로는 연결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호텔에 물이 한병에 6불을 하고 있다.지난 번 호텔은 좋지은 않았지만 모든 음료수가 공짜였는데 여기는 돈을 받고 있다.
저녁은 한국 식당에서 먹었다. 도미니카에 한국 교민이 400명이라고 하는데 한국 식당이 있었다.그런데 음식이 많이 나오고 맛있었다.특히 된장 찌게가 맛있었다. 저녁을 먹고 최광규선교사님이 목회하시는 교회로 예배를 드리려 갔다. 300명 정도가 모여 찬양하며 뜨겁게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설교 후에 각부서가 나와서 발표회를 했다.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60,70년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성탄절만 되면 각부서별로 발표를 하고 가난한 시절에 교회에 모여 예배 드리는던 모습,정말 이들이 신앙이 들어 가면 한국처럼 기독교가 부흥하고 놀랍게 역사를 할 수 있다. 한국도 이런 모습 가운데 많은 어린이와 학생들이 예수를 믿고 헌신하여 목사가 되었다. 최선교사님이 하시는 일들이 엄청난 일들이다. 한국에 온 선교사의 결실로 한국에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의 결실을 맺은 것처럼 도미티카에도 똑같은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저녁에 오는데 멀미가 났다. 운전만 하다가 오래간만에 버스를 타니 멀미가 심해서 힘들었다. 그러나 사실은 내 몸이 그만큼 해졌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방에 들어오니 방에서 인터넷이 되어 한국 뉴스를 간단하게 보고 집을 카메라로 살펴보고 예찬이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식사를 하고 8시에 아이티로 출발하는데 나와 에린이가 제일 늦게 나왔다.다들 버스에 타서 기다 리고 있었다.시내를 지나 아이티로 가는데 길이 거의 더럽고 집들이 한국의 옛날의 시골집보다 못하였다. 국경에서 2시간 거리에 왔는데 휴계소 비슷한 곳에 왔는데 화장실이 거의 다 고장났고 물도 안내려 가고 군인들이F16총을 가지고 지키고 있었다. 길을 가는 길에 나아서 앉져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옛날 한국 시골의 사람들이 한일 없이 집앞에 나와서 앉아 있는 것과 같았다.
가는 길이 나빳다 아스팔트 길인데 가끔 길이 유실되어 물 위를 지나가기도 했다.국경에 와서 도미니카를 출국하는 곳에 왔다. 이민 사무소가 컨테이너로 되어 있고 너무 엉성했다. 하얀 흙에 물이 있어서 신발이 다 더러워졌다.
도미니카를 출국하는 심사를 하는데 여권에 도장만 찍어 주고 그냥 통과됐다. 도미니카 이민국에 신고를 하고 아이티에 들어가는데 중간 지대가 있었다. 오늘이 장날이라 양쪽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많이 왔다. 음료수 몇개 놓고 파는 사람, 바지와 옷들 몇개 놓고 파는 사람,옛날의 우리나라 장날보다 못한 상태의,위생도 없어 보이고 무질서한 상태의 장사하는 사람들로 가득찼다.여기서 아이티 국경까지 그리 먼거리가 아닌데 차가 꼼짝하지 않고 있었다. 입국하는데 거의 한시간이 걸렸다. 아이티에서 입국을 위한 서류는 이미 차안에서 다 썻는데 출국하는 제출하는 몇 자를 않 적어서 적으려고 하는데 옆에 았는 흑인이 자기가 적는다고 예린이 것을 빼앗아 적었다. 그리고 입국 도장을 찍고 차로 오는데 예린이를 쫓아 오면서 뭐라고 그랬다.나는 직감적으로 돈을 달라는 것을 알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안 주고 차 가까이 와서1불을 꺼내 주었다. 아이티 시내로 들어서는 도로는 비포장 도로였다. 마치 군에서 산악에 있는 군도로 같았다. 도미니카 길도 마찬가지 였지만 여기는 더했다. 길이 쓰레기 투성이였다. 산에는 나무도 없고 산에 깊이 흙을 파서 산이 깍였다. 트럭에 몇 사람이 삽으로 흙을 실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꼭갱이로 혼자서 산의 땅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시내로 들어서 고아원으로 가는 길에 사람들이 무척 많은데 집마다 옛날의 우리나라처럼 높은 담에 담 위에 깨뜨린 병조각을 막아 놓고 철조망을 해 놓았다. 고아원으로 가는 길에 차가 못들어가 몇 사람만 같다 오고 우리는 아이티 선교사님댁에 가서 준비한 식사를 하고 여기에 나와서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우리교단CRC 관계자들의 사역내용을 들었다. 이번에 와서 느끼는 것은 우리 교단의 선교 사역이 대단했다. 이렇게 순수하게 복음을 열정적으로 전하기 위해 헌신하는 수고,이런 수고로 한국에 복음이 들어오고 그 복음이 결실을 맺어 이제는 세계 여러 곳에 복음을 수출하고 받은 것을 그대로 전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우리 교단의 세계선교와 구제는 효율적이다. 다른 기관은 인건비와 자체 유지비로 많이 쓰는데 우리 구제 기관은 단지 12%만 쓴다고 한다.미국의 어느 단체에서 북한의 여성을 위한 헌금을 해서 만불을 모았는데 자체 경비로 쓰고 단지800불을 북한에 전하는데 그것도 뉴욕에 있는 유엔 북한주재 대사관에 전달했다고 한다.교인들이 헌신하며 드린 헌금들이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효율적으로 사용되지 못하는 것이 현재의 실정인데 우리 교단의 사역은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저녁식사는 여기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 교회에서 한국 음식으로 준비하셔서 맛있게 먹었다. 숙소는 선교센터에서 잤다. 선교 선터이기 때문에 호텔같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괜찮았다. 침대가 모자라서 매트리스를 깔고 잤다. 모기가 많아서 모기향을 피고 잤는데 모기를 많이 물리지 않았다.아침도 선교사님 교회에서 마련한 식사를 먹고 고아원을 방문하였다.그리고 빈민촌인mud cookie지역을 갔다. 아이티는 무질서하고 혼란 자체다. 그리고 전체가 쓰레기 더미 같았다.우리의 6.25이후보다 더 비참하고 가난했다. 길도 엉망이고 하수도도 전혀 되어있지 않고 돼지가 하수도에서 먹이를 찾고 염소와 사슴도 쓰레기 더미를 뒤지고 심지어는 소까지 뼈가 앙상하게 보일만큼 말랐다. Mud cookie지역을 가니 더러운 물로 진흙을 빗어 그것을 쿠기라는 간식으로 먹는것을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가난의 극치이다. 그들이 사는 집안에 들어가니 집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동물들이 사는 우리와 같았다. Mud cookie 만드는 곳에 붙어서 학교가 있었다. 학교안에는 10명 남짓한10살정도의 아이들이 중간의 칸막이로 친 두교실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학교 전체라고 해바야 우리 집 거실 정도의 크기였다.20세 중반의 남자 선생님이 열정을 가지고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었다. 한 교실에는 서,너명의 애들이 자습을 하고 있고 여자 선생님 같은 분이 책상에 앉져 있었다.
큰 버스로 이동할 수 없어서 선교사님네 차와 트럭의 짐칸에 남자들이 다 타고 구경하였다. 선교사님은 봉제공장도 운영하고 있었다. 천오백명을 고용하여 그들과 그들의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있다고 한다. 한달 월급이150불인데 이것만 가지만 한 가족이 한달을 산다고 한다.이곳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행복한 사람이었다.선교센타는 공단지역 안에 있었다. 아침에 공단지역으로 몰려오는 거대한 사람들이 마치 어렸을때 제물포 역에서 선인 제단으로 몰려오던 학생들과 같이 떼를 이룬 인산인해였다. 차를 타고 가니 조그만 왜곤같은 차은 소형트럭을 버스로 개조하여10여명씩 태우고 가는 차들이 많았다.교통질서도 차의 질서도 하나도 없고 차와 사람이 어울려 같이 가는데 엉망이었다.차 트럭 짐컨 앞부분에 타고 가면서 사진을 찍으니 사람들이 뭐라고 했다.손가락으로 미국인이 쓰는 욕도 했다.사진을 찍지 말라는 것 같았다.도미니카도 그렇지만 여기도 오토바이가 많았다.한국과 미국의 승용차처럼 여기서는 오토바이가 하나의 자가용인 동시에 생활을 버는 수단 같기도 했다. Mud cookie 가는 길에 발전소가 있었는데 한국에서 지어 준 것이라고 했다.도미니카 전기의70%를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전기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텐트촌이 많았다. 지진후에 텐트촌이 있어서 정부에서 500불을 주고 이사하라고 했는데 그 오백불을 받아 다 쓰고 다른 곳에 가서 또 텐트촌을 치고 산다고 했다.텐트촌이라고 하기 보다는 거지촌이었다.
Mud cookie지역을 구경하고 버스로 대통령궁을 구경갔다. 이번 지진 때 대통령궁이 무너지고 대통령이 도미니카로 피신했다는 뉴스가 전에 나왔었다. 이제는 무너진 곳을 거의 다 치웠다.그 곳만 좀 깨끗하고 괜찮은 것 같았다. 대통령궁에 가는 길과 거기서 공항으로 가는 길은 한국의 중앙 시장과 같은 곳이었다.특별히 모든 종류의 상품을 다 팔았다. 옷부터, 신발, 땔감, 채소류, 철근 등 종류대로 엄청나게 큰 시장이었다. 옷들은 미국에서 헌옷들을 도네이션하고 팔다 남은 옷들을 기증하면 그것을 파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시장이기 보다는 거대한 거지 집단의 모임 같았다. 서울의 동대문이나 남대문 시장에 가면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보다도 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차와 사람이 엉켜서 버스가 앞으로 잘 진행하지 못했다.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있고 오줌을 우리가 버스 안에서 보는대도 차에 대고 누고 거지와 혼돈과 무질서가 혼합하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동물들의 집단 같았다. 그래도 수천명의 아니 수만명의 사람들이 장사를 하고 있고 그것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쓰레기 더미가 가는 곳마다 산을 이루었다. 그 아래는 악취나는 하수도에 돼지가 먹이를 찾고 수영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이런 가난하고 비참한 곳은 보지 못했다. 아이티는 나에게 하나의 충격이었다. 뉴스에서 보던 아프리카나 가난한 국가들보다 실상이 더 했다.예린이가 아이티가 서반구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고 말한다. 아이티는 세개 4대 빈곤국의 하나라고 한다. 50년 전만해도 아이티가 도미니카보다 더 잘 살았다고 한다.그런데 이 나라가 이렇게 되었다.지도자를 잘 못 만나기도 했지만 국민성이 이것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아침에 아이티 목사님이 우리가 식사를 할 때 인사를 했다.도미니카 선교사님이 이 목사님을 도미니카에서 가르쳤는데 이 목사님이 내년에 대통령 후보에 후보로 출마하려고 한다고 한다. 기독교 후보를 내서 기독교 정신으로 나라를 개조하려고 한다고 한다. 자기가 출마를 계획하고 있는데 기독교 후보를 단일화하고 만약에 여러명이 나오면 자기는 사퇴하려고 한다고 한다. 가난한 한국이 이제 부자가 된 것처럼 가난한 아이티를 한국처럼 만들려고 한다고 한다.
지진후에 아이티에 보내온 원조비가 아이티 국가를 세번 재건할 돈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돈이 위에서 다 떼먹고 국민들에게 가지 않았다고 한다.
오후 1시50분에 비행기가 출발하기 때문에 11시 정도에 Port-au-Prince공황에 도착했다. 공항은 도미니카 공항보다도 더 작고 못했다.한국의 지방 공항보다도 작고 시설도 나빳다. 활주로도 하나 뿐이었다. 게이트도 하나다.여기서 가방 안을 다 뒤져서 조사를 했다. 한번 통과한 후에 비행기를 타기 전에 또 다시 뒤져서 조사를 했다. 뉴욕보다도 더 철저하게 조사를 했다.
비행기 위에서 바라본 카프리안 바다가 파란 색과 애매랄드 색깔을 띠고 있었다.그 경계가 뚜렷했다.멋 있었다.옆은 navy 색깔과 bright blue의 색깔을 띠고 있었다. 애매랄드 색깔을 띤 바다는 섬에서 가까운 바다다. 아마도 낮은 곳인 곳 같다.사진에서만 보던 카리비안 해의 바다다. 짙은 파란색과 애드몰드색이 구분되는 바다가 하얗 파도같은 색깔을 띠고 있었다. 이것도 신기했다. 육지에서 약 1kM 정도는 애드몰드 색깔을 띠고 있고 그 다음은 파란색이다.
비행기 여행은 힘들었다.뉴욕까지 3시간 약간 넘게 걸겼지만 지겨웠다. 전에는 재미있고 신나고 더 타고 싶던 비행기가 이제는 벌써 힘들다. 비행기 여행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더 힘들까?내가 장모님에게 미국 오시라고 항상 말하는데 비행기 타고 오는 것이 힘들다고 미국 안 오시겠다고 하시는데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이제는 미국 오시라고 조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비행기 여행을 힘들어 하는 것은 그만큼 내 몸이 나빠졌다는 것 같다. 혈압과 전체적인 영향으로 어지럼증을 느끼는 것은 내 몸의 상태가 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대서양 바다 위를 날아가 비행기가 버지니아 뉴저지로 다가 오면서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비행기가 시속800km에 육박해서 달리고 고도는 10km였다. 뉴욕에 가까이 오면서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니 귀가 멍멍 하더니 귀사 뚫리면서 왼쪽 귀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그 통증에 꼭꼭 찌르는 것 같이 아프더니 왼쪽 귀부터 턱까지 왼쪽 얼굴 전체가 아팠다. 샤워를 자주 해서 귀에 물이 들어가서 그런지 귀가 좀 이상하다는 느낌을 그전부터 받았는데 그 영향인지 모르지만 고통 스러웠다.그 통증이 비행기에서 내리고 1시간 정도 지속되다가 괜찮았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뉴욕은 정돈되고 깨끗하고 멋있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 본 공동묘지조차 정돈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도미니카와 아이티와는 정 반대였다. 내가 세계 최고의 문명국이며 부자 나라에 사는 것이 느껴진다.
입국 수속을 마치고 parking된 차를 찾아 정목사님과 함께 집으로 왔다. 내가 떠나 있으니 아내가 힘들었다. 가게에서 내가 하는 일이 별로 없이 빈둥거리는 것 같아도 은영이의 손발이 되어 작은 일들을 다 해 주니까 은영이가 마음껏 장사를 할 수 있는데 그 일을 못하니까 은영이가 불편하고 힘들었다. 가게에서 내 몫이 종업원 한 사람이상의 몫이다.
[출처] 필라델피아의 삶 51 (도미니카, 아이티 탐방기)|작성자 엘림 청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