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우리집안 선조들은 노비(奴婢)들을 다수 소유하였는데 최근 살펴본 삼화재 옛문적중 찰방공의 호적단자등에 그 기록이 남아있다. 남자 종을 "노(奴)"라 하고 여자 종을 "비(婢)"라고 한다. 모든 인간의 존엄과 보편적 인권이 중시되지 아니하였던 조선시대 계급사회에서 노비제도는 지배층을 위한 신분제도의 하나였던것이다.
예로부터 채무자,범죄자는 노비가 되었고 대대로 세습되었기 때문에 그 신분을 벗어날수가 없었으며 노비는 문서로서 매매,상속,양도할수 있었다. 노비는 노비끼리만 혼인할수 있었고 부모중 어느 한쪽이 노비면 소생은 당연히 노비가 되었는데 이것은 지배층의 노비 수요를 충당할수있는 풍습이였다.노비는 주인의 농사일,땔감조달,수공품제작,가사노동일 등을 했고 주인과 함께 살거나(率居) 별도로 독립된 가옥과 약간의 재산도 가지는(外居) 경우도 있었다. 노비일지라도 함부로 살상치 못하도록 엄하게 다스렸는데 지금의 관념으로 보면 이는 인권보호 측면보다는 노동력 감소를 막기위한 대책이였다.
조선시대의 노비는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관노비(공노비)와 사노비로 나뉘어졌다. 공노비는 중앙관청,지방관청,내수사,궁방등에 소속된 노비로서 신역(身役)을 제공하거나 물품(身貢)을 바쳤다. 자여도를 관장하던 찰방공인 경우 역리(驛吏) 944인 이외에 奴 78인,婢 37인등을 거느렸다고 기록에 남아있다. 사노비인 경우는 직접적으로 주인에게 구속 통제를 받았던 까닭에 사람이라기 보다는 물건이나 가축과 같은 재물이였다.
조선후기 들어서 도망(逃亡) 노비들이 많이 생겨난것은 자신들의 노동력만 팔아도 충분히 생계를 유지할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이들은 섬,광산,목장,변경지역에 숨어서 노동에 종사하거나 장사등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나아가 신분을 감추었으며 경제적으로 뛰어난 경우에는 양반의 후예로 모칭(冒稱,거짓으로 꾸며 말함)하기도 했다. 남명(조식)선생의 유두류록에 보면 남명일행이 지리산 유산을 떠날제 동네에서 도망친 종들을 좇다가 구사(丘史,조선시대 공신에게 하사하던 공노비)들을 시켜 남녀종 8명을 잡아 묶어서 데리고 왔다는 설명이 있다. 조선시대 관청에서는 도망간 노비를 찿아내는 추노(推奴),추쇄(推刷)조직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도망노비가 급증했으며 이것이 조선의 노비제도를 붕괴시킨 주원인이 되었고,1894년 갑오경장으로 마침내 노비제도는 폐지됨으로서 이 땅의 신분제 자체가 없어지게 된것이다.
참고: 글항아리社 "조선평전"(신병주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