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 서평
‘말해질 수 없는 것’에 관한 철학정신의 회통會通 - 맹난자의 《한 줄로 읽는 고전 하늘의 피리 소리》
허만욱(남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33
1. ‘말해질 수 없는 것’ 보여주기
디지털시대의 우선적 가치는 현상적 사태들을 가장 확실하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속도이고, 정보화와 지식화의 급속한 보급과 확산은 사회전반에 걸쳐 전면적이고도 광범위한 변화를 가져왔다. 사회가 공유하고 있던 공통적 가치와 믿음, 문제해결에 필요한 해법 등이 예전과 달라진 것이며, 이는 결과적으로 이전의 사회구조와 삶의 양식, 그리고 사유방식의 변화를 추동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변화에 부응하는 개인 삶의 양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물질이 정신을 지배하고 이기주의가 팽배하면서 인간 삶의 가치판단과 신념체계가 근본적으로 흔들리고 있다. 올바른 가치관과 바람직한 삶의 태도에 대한 질문이 필요해지고, 지금껏 살아온 삶의 방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요구되는 것이다. 바로 맹난자의 수필집 《하늘의 피리 소리》는 이러한 질문과 성찰에 관해 삶의 틀을 세우는 철학적 사유의 선취選取다.
맹난자의 이 책은, ‘삶은 어떻게 달라지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사회적 경쟁구조가 충돌의 위험을 수반하고 있고, 오늘날 우리가 존재론적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 “다름 아닌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불러들인 과보”라고 진단하는 작가는 이런 상황의 타개를 위해선 변화가 필요하며, 그 변화는 삶이 달라지는 데서 출발한다고 간주한다.
“한 시대의 병病은 사람의 ‘양식 변화’로 치료된다”고 말한 이가 있다.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다. 그는 사람의 ‘사유’가 삶의 양식 변화를 일으킨다며 삶을 변화시켜야 진짜 철학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생각이 바뀌어야 삶이 달라진다.(〈책을 펴내며〉에서)
작가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해 주는 전거典據는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의 논설이다. “한 시대의 병病은 사람의 ‘양식 변화’로 치료된다”는 작가의 인용대로, 그는 삶에서 발견하는 문제의 해결책은 문제 있는 것을 사라지게 만드는 삶의 방식이라고 한다. 즉 삶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자신의 삶이 삶의 형태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삶을 바꾸어야 하며, 일단 삶이 그 형태에 맞게 되면 문제가 있는 것은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삶의 문제는 엄밀하게 ‘말해질 수 없는 것’에 해당한다. 삶의 의미는 가치의 문제와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윤리적인 것이 과학적인 것이 아니듯, 삶의 의미에 관한 문제들 또한 과학적 문제들이 아니다. 다시 말해 지금까지 철학이 난해한 문제를 다루었던 게 아니라 언어사용의 잘못으로 그 문제들이 난해해졌고, 철학이 매달려도 해명할 수 없는 문제는 어려워서가 아니라 원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은 그저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의미와 무의미의 경계를 정하려는 시도는 바로 의미의 경계 너머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왜 침묵해야 하는가〉)만 하는 것이다. 즉 언어와 의미의 영역은 과학언어나 사실언어에 한정되는 것처럼, 가치나 윤리에 관계된 언어는 비사실적이고 비의미적인 것이기 때문에 과학적 방법을 통해서는 대답되어질 수 없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 삶의 문제들에 대한 성찰을 숙고하게 하는 《하늘의 피리 소리》는 이러한 성찰의 활동을 구체화하는 작가의 ‘안구眼句’로써 보다 더 높은(the higher) 가치영역에 속하는 삶의 문제, 곧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시도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하늘의 피리 소리》에는 ‘한 줄로 읽는 고전’이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고전古典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과 자연을 탐구하는 가운데 인간 삶의 근원적인 가치추구와 그 내면에 있는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정보의 보고이자, 인간영위를 충실하게 향상시키고자 하는 지성과 교양이 동반된 인류의 문화적·과학적·정신적 유산이다.
“나는 나면서부터 도를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옛것을 좋아하여 이를 재빨리 알아내기에 힘쓴 사람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라는 공자의 ‘호고好古’라는 말씀을 나는 숭상한다. 어찌 고古가 없이 금今이 있으랴?(〈온고지신〉에서)
고전이 고전일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여전히 우리의 삶과 공동체를 설명할 수 있고 이해시킬 수 있는 보편적 가치와 지혜를 담은 어떤 ‘상징적 형식(Symbolic form)’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에 대한 파악은 문화에 대한 총체적 접근을 용이하게 하며, 그 보편성은 ‘지금, 여기’로 수신되면서 현재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데, 이는 작가가 말하는 “고古가 없이 금今이 있”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아가 작가는 “호고好古”라는 말을 숭상한다. 호고란 단순히 옛것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공자가 자신의 인격수양은 물론 저술작업과 당대 제도의 개선에 이르는 모든 것을 옛것에 근거하여 이를 더욱 발전시키고 새로운 지식체계로 정립하고자 했던 학구적學究的 이념을 응집하는 말이다. 《하늘의 피리 소리》에서 작가의 호고 대상은 삼현三玄의 서書를 비롯하여 사서삼경四書三經과 제자백가의 경전, 그리고 동서양의 철학과 문학, 사상 등을 모두 망라한다. 엄청난 독서량과 공부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이렇듯 다각적 시점에서 정신의 전체상을 사유하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고전 독해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적 맥락의 획득이다. ‘지금, 여기’에서 재해석되고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부여받지 못한다면, 고전들은 그냥 ‘옛날’ 책일 뿐이다. 일반적으로 현대성 담론은 성찰적, 비판적, 그리고 대안적 논의를 포함한다. 작가는 《하늘의 피리 소리》에서 고전의 내용을 형상화 방식으로 분석하고 추려내어 이미지 중심의 단장斷章형태 글쓰기로 재구성한다. 고전 텍스트가 지닌 언술형식의 대항목들이, 단장형태라는 아포리즘(aphorism)적 글쓰기에 의해 200자 원고지 5매 남짓한 분량의 또 다른 텍스트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아포리즘은 우선 짧다. 그래서 빨리, 또 어떤 의미에서는 쉽게 읽히고 이러한 속도감은 성찰의 흐름에 대한 추진력을 증가시킨다. 뿐만 아니라 비밀스러운 모티프들을 드러내는 것은 아포리즘이 유일하다고까지 한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말대로, 그 압축성과 간결성으로 인한 강렬한 직관성은 ‘말해질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장난으로 어머니를 등에 업었네. 너무나 가벼워, 세 발자국, 그만 걸음 멈춘다”라고 썼다. 일본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 (1886~1912)의 하이쿠다. 아들을 세 걸음에서 멈추게 하는 각성.(〈여자의 뼈는 검고 가벼우니라〉에서)
현재 순간의 지시성과 간결한 형식을 지향하는 작가의 단장 사용법은, 기의(signifié)를 증발시키거나 사라지게 하여 기표(signifiant)만 남기는 것이야말로 언어의 충일성을 알리는 기호라고 하며 하이쿠[俳句]의 미학적 특징에 주목하고자 했던 바르트(Roland Barthes)의 생각과 상통하는 교점이 있다. 요컨대 찰나적이고 감각적인 글쓰기란 진리와 형식의 순간적인 포착과 결합으로서, 사고의 일반화와 고착을 경계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이는 “각성”과 같이 섬광처럼 이루어지는 정신작용과도 무관하지 않으며, 존재의 본질성을 드러내는 요소들의 포착을 위해 긴장을 늦추지 않는 작가 자신의 자기 검속檢束이다.
2. 동서 정신철학의 해석학적 개안開眼과 회통會通
《하늘의 피리 소리》는 역대 지성들의 방대한 경서經書와 문학 속에서, 작가의 엄선으로 정전화 과정을 거친 총 157개의 아포리즘이 주제에 따라 열 개의 장으로 나뉘어 구성되었다. 그리고 그 각각의 장에는 도道, 주역周易, 자연, 죽음, 문학, 어떻게 살 것인가, 생명/실존/자유, 학문/수기修己, 마음, 불교 등의 세목이 달려있는데, 문헌적 출발점이자 미학적 의미 규명의 단초가 될 소제목만 보더라도 작가는 크게 인간과 자연에 관한 본원적 인식과 심층적 이해를 지향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하며, 결론적으로 이러한 인식과 이해는 도가의 도, 주역의 음양, 유가의 예, 불교의 법을 아우르는 작가의 자유자재한 통철通徹에 의해 반성과 성찰의 서사를 확장하면서 의식과 정신의 진화라는 주제를 단일한 효과로 수렴하는 데 성공한다.
이 책의 첫 단장 〈도道를 형통하여 액을 뚫다〉는 존재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사고의 폭을 확장하고 이러한 완성을 지향하며 《하늘의 피리 소리》가 펼쳐나갈 지적 여정의 대장정을 알리는 동시에, 작가가 분명하고도 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도道의 연원을 찾아 들어가는 이유가 밝혀진다.
즉 무無의 본체와 유有의 현상을 같이 보아야 진정한 도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노자의 유有와 무無, 불교의 공空과 색色, 그리고 주역의 음과 양의 이치를 알지 않으면 안 되었다.(〈도道를 형통하여 액을 뚫다〉에서)
작가는 자신의 개인사적인 쓰라림과 곤비함을 사상적 대응으로 극복하기 위해 《채근담》의 마지막 구절 ‘형오도亨吾道’를 붙잡고 일생을 도道의 천착에 몰두한다. 도는 동양사상의 관점에서 가장 많은 함의를 가진 개념이며, 특히 도가道家사상의 가장 높은 범주다. 노자는 “하늘과 땅은 이름할 수 없는 데서 생겨난 것이다. 만물의 시작에는 오직 도道가 있을 뿐”(〈무명無名이 천지의 근원이다〉)이니,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으니 만물은 음陰을 짊어지고 양陽을 안아서 빈 기운[冲氣]으로 조화를 이룬다”(〈도道는 하나를 낳는다〉)고 하였고, “도와 덕이 존귀한 이유는 늘 변함이 없어서 저절로 그러할 따름이기 때문”(〈도道와 덕德〉)이요, “하늘의 도道는 이利하되 해치지 않으며, 성인의 도는 하되 다투지 않는다”(〈하늘의 도, 성인의 도〉)고 하였다. 이렇듯 도는 우주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근거이자 최고원리로 도가의 대표개념이기도 하지만, 여타의 동양사상에서도 도는 인간을 둘러싼 세계의 존재양상에 대한 총체적 인식의 기초로서 유비적 대응을 통한 자연과 인간의 상호관련성을 확인하는 유효한 개념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므로 궁극적 관심이었던 도를 알기 위해서는 “노자의 유有와 무無, 불교의 공空과 색色, 그리고 주역의 음과 양의 이치를 알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이는 작가로 하여금 다수의 내외문헌을 통한 사상적 섭렵을 견인하는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자연自然이란 글자 그대로 ‘스스로 그러함’의 자연이다. 스스로 그러함이란 무엇인가. 한번 양陽이 되었다가 한번 음陰이 되는 그 운행의 자체 조직성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음양변화의 작용에 의해 헤아릴 수 없이 나타나는 이 ‘음양의 불측不測’을 일러 신神이라고 한다. 때문에 변화의 도를 알면 그 신神이 하시고자 하는 바를 알게 되며, 삶과 죽음의 이치까지도 알 수 있게 된다고 한 것이다.(〈변화의 주재자가 신神이다〉에서)
《주역》 〈계사전〉에 전하는 공자의 ‘지변화지도자知變化之道者 기지신지소위호其知神之所爲乎’를 설명하는 말이다. 〈계사전〉은 공자의 소술所述로 공자 역학易學의 진수를 보여주는 한편, ‘역易’을 수용한 유가儒家의 관점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주역 책의 가죽끈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의 고사”(〈우환의식〉)가 유래될 만큼 만년에 공자는 주역에 심취해있었으며, 그것을 더 깊이 깨달을 기회가 모자라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그런데 공자 자신이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하지 않았다고 하였거니와, 그렇다면 여기서 언급되는 신의 의미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작가는 “한번 양陽이 되었다가 한번 음陰이 되는” 것을 도道라고 명제화한 주역의 음양 관념을 통해 이러한 “음양의 불측不測”을 깨닫는 자가 곧 공자가 말하는 신이라고 보는 것이다. 주역은 음양의 변화를 통해서 만물이 생겨나고 변화한다고 하며, 이 변화의 원리를 설명하는 두 가지 큰 개념이 대대對待와 변역變易이다. 주역사상의 기저에는 음양과 같이 모든 사물이 서로 대립되는 두 개 힘이 작용한다고 사유하는데, 대대란 이를 규정하는 관념으로서, 이 두 개가 서로 대립 혹은 분리된 ‘상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하나의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로 음양의 자기구현인 ‘일음일양’이야말로 대대 관계에 의해 서로 대립하는 대립물들이 상호 전화轉化하는 변역의 과정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변역의 관점에서는 세계 자체가 변화이므로, 그 밖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죽음은 세계 밖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인 전체 세계 내의 문제에 속한다. 작가가 “삶과 죽음의 이치까지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삶과 죽음을 통전적通全的으로 이해하는 일이다.
《아함경》의 말씀이다. 업業과 과보는 있지만 왜 그것을 짓는 자는 없는가?
짓는 자는 실체성이 없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아가 어떻게 윤회하는가? 상속이론에 의하면 우리들이 ‘존재’ 또는 ‘아我’라고 부르는 것은 간단間斷없이 순간순간 발생하고 소멸하는 요소들의 연속을 가리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마치 영화의 영사映寫와 같다. 〈윤회는 없지만 새로운 생존은 있다〉에서
작가에게 있어 특히 불교적 생사관은 세계에 대한 인식을 쇄신하고, 인간의 존재 문제를 삶의 가치 염원으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의식적 경지가 반영된 중요한 정신적 기질이었다. 불교는 무자성적 연기관을 바탕으로 생사를 동일개념, 곧 생사일여生死一如로 파악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죽음이란 우주적 순리에 부합하는 것이므로 관조적이고 초탈하게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공空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생멸변화를 거듭하나 생멸변화의 주체, 즉 작자作者는 없는 것이다. 그 “짓는 자는 실체성이 없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업業과 과보”, 즉 생멸은 있으나 짓는 자는 없으며, 실實이 아니면서 생기고 사라지며, 있지 않으면 생겨나고 있으면 사라지지만 생길 때는 오는 곳이 없고 사라질 때는 가는 곳이 없는 것이 이 세계다. 그래서 “우리들이 ‘존재’ 또는 ‘아我’라고 부르는 것은 간단間斷없이 순간순간 발생하고 소멸하는 요소들의 연속”일 따름이며, 업을 형성하고 그 업에 따라 윤회를 거듭하게 되므로 중생이 끊이지 않고 상속相續되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여기 순간만이 절대적 실재로서 ‘참’이며, 영원은 피안이 아닌, 변화하는 현장의 주체로서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무엇보다 중요해진 관심은 우리가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본각本覺으로서의 마음이다.
‘소리’는 분별을 일삼는 우리의 언설言說일 테고 ‘바람’은 포착하기 힘든 우리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 아닐까. 그것(바람)이 울리지 않으면 ‘구멍’은 본디 무심無心이다. 마음의 작용은 현상이요, 구멍은 희언자연, 본질이다. 마음이 멎으면 세상도 따라서 고요하다. 그러므로 하늘의 피리소리天籟는 나로부터 연유한 것임을 짐작이나마 해본다.(〈하늘의 피리 소리〉에서)
〈하늘의 피리 소리〉는 《장자》 제2편 〈제물론〉의 첫 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스승인 남곽자기南郭子綦가 제자 안성자유顔成子游에게 사람의 피리 소리[人籟]는 들어봤는지, 땅의 피리 소리[地籟]는 들어봤는지, 하늘의 피리 소리[天籟]는 들어봤는지를 묻는다. 사람의 피리 소리는 대나무 악기에서, 땅의 피리 소리는 대지가 뿜어내는 숨결인 바람이 일면서 온갖 사물의 구멍에서 나는 소리다.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깎고 숨을 불어넣어 대나무 피리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고, 땅은 제 구멍의 모양에 따라 각기 다른 소리가 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의 감각적 경험에는 한계가 있다. 옳고 그름, 이것과 저것, 있음과 없음을 분별하는 데에 그치는 자에게 하늘의 피리 소리는 귀 기울여도 들리지 않고 닿을 수도 없는 저 멀리의 것이 된다. 하늘의 피리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나와 너, 내아內我와 외물外物의 구분이 사라진 마음의 경지가 되어야 한다. 이에 따라 작가는 “‘바람’은 포착하기 힘든 우리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며 “‘구멍’은 본디 무심無心”이므로, 옳음과 이것과 있음 등으로 우리 마음이 경계 지었던 분별의 함몰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하늘의 피리 소리가 들려올 것이라고 침량斟量한다. 결국 “하늘의 피리소리天籟는 나로부터 연유”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은 바心造諸如來”(〈모든 것은 마음이 지은 바〉)이며, “마음은 본래 생겨나지 않았으나 대상을 따라서 있게 된”(〈마음은 오직 현상일 뿐이다〉) 것일 뿐이다. 존재나 삶의 참됨 혹은 온전함은 마음과 내면에 이미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가려져있어 마음과 인지 능력의 전의적轉義的 향상을 통해 그 지평에 눈을 뜨고 체득함으로써 품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동귀이수도同歸而殊塗’의 ‘동귀同歸’란 천하의 만물이 모두 진리로 돌아감을 뜻한다. 진리는 정점에서 만난다. 만물이 마침내 돌아가는 곳은 하나이며, 하나로 시작해도 시작한 그 하나가 없고, 하나로 마쳐도 마친 그 하나가 없는 원시반종原始反終인 것이다.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에서
‘동귀이수도同歸而殊塗’는 《주역》 〈계사하전〉의 “천하가 돌아가는 곳은 같으나 그 길이 다르며, 이르는 것은 하나지만 백 가지 생각이니”라고 이르는 공자의 말에서 언급된다. 이때 “‘동귀同歸’란 천하의 만물이 모두 진리로 돌아감을” 의미한다. 표현은 다르지만 불이不二, 만법귀일萬法歸一, 귀일심원歸一心源, 환귀일심還歸一心, 그리고 태극太極, 원시반종原始反終등과 동궤의 질료적 자기장을 형성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만물이 마침내 돌아가는 곳은 하나이며, 하나로 시작해도 시작한 그 하나가 없고, 하나로 마쳐도 마친 그 하나가 없는” 그 ‘하나’는 본체本體로서 만물의 근본이 된다. 이제 작가는 ‘하나’에 도달하는 사물 내부의 대립하는 측면이 어떻게 통일되고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전면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진리는 정점에서 만난다”라는 작가의 정의가 그 직접적 증거다.
도법자연道法自然, 인간은 자연을 따른다. ‘도를 배운다는 생각이 문득 미迷함이 되나니’ 나, 이제 그것마저 내려놓는다. 〈방한암 스님의 편지〉에서
이 말은 수필집 《하늘의 피리 소리》를 끝맺는 작가의 결사結辭다. 도道를 간절히 궁구窮究하여 부단히 사유의 층위와 변폭을 확장해온 작가의 여정이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그동안 작가의 문학과 학문과 수기修己는 모두 도를 철저히 깨닫는 데 있었다. 〈도道를 형통하여 액을 뚫다〉를 시작으로 〈방한암 스님의 편지〉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이를 대변한다. 그런데 이 과정의 맨 마지막에 놓이는 도달점에서 작가는 “도를 배운다는 생각이 문득 미迷함이 되나니”라고 깨닫는다. 곧 도는 배울 수도, 발견할 수도 없는 것을 깨치는 순간이다. 도의 영역 속에서 인간이 필요로 하는 인식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직관적이고 총체적인 체득으로서의 인식이다. 작가는 노장철학의 무위자연을 전폭적으로 수용한다. “도법자연道法自然”, 즉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는 말은 ‘함[爲]이 없이[無] 있는 그대로’를 보려는 것이다.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등의 문제는 인간이 피해갈 수 없는 일들이지만, 그것도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 일일 수 있다. 또한 그것은 그 일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기도 하다. 모든 것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이고, 그것은 또한 영원한 일이기도 하다. 인위人爲가 가해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 사물을 바라보는 눈이야말로 최고의 선인 것이다. 이렇게 작가의 도에 대한 궁구의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도를 자신의 삶으로 실체화할 수 있었던 하나의 조건이 된 셈이다. 그래서 “나, 이제 그것마저 내려놓는다”라는 언표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사물의 심원과 감응하면서 회통會通하는 자리에 있는 작가의 아려雅麗한 품격이 된다.
도가, 주역, 유가, 불교를 비롯하여 동서양의 사상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여 ‘하나’에 이르는 종합은 결코 각각 세워져서 격절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각각을 포함하고 융화한 극점에서 이루어지는 회통이다. 회통이 서로 어긋나는 뜻이나 주장을 해석하여 조화롭게 함을 뜻한다는 사전적 의미에서 볼 때, 작가가 보여주는 회통은 융회관통融會貫通의 의미에 가깝다. 작가는 책에서 회통을 직접적으로 정의하거나 거론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작가에게 있어 회통이라는 말은, 달리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선험적이고 선재적인 당위적 언사에 해당하는 것이었을지 모른다. 일반적으로 사상이나 철학을 비교할 때 다름을 주장하기 쉽고 유사성을 발견하기도 어렵지 않으나, 근본이 같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는 매우 정미하고 난해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존재하는 것으로 스스로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작가는 해석학적 개안開眼을 통해 이들의 영역 안에서 자재하게 회통하고 있었다.
3. ‘생명력 회복’을 위한 인문학적 통찰
작가는 수필집 《하늘의 피리 소리》를 펴내는 말에서 그 글제를 ‘생명력의 회복을 위하여’라고 올렸다. 자연에 대한 관심과 함께 부각된 생명이라는 화두는 자연생태계와 인간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등장했기 때문에, 자연을 파악하고 지배하는 데서 출발한 근대과학문명에 대한 비판과 맞물리지 않을 수 없다. 즉 근대기를 거쳐 생태계의 파괴가 결국 인간에게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실감한 인류는 새로운 세계관을 찾고 있다. 예를 들면 자연과 생명이 과학적 분석의 대상을 넘어선 것임을 말하기 위한 유기체적 생명관이 그것이다.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지 않고 하나의 큰 생명체로 파악함으로써 사람은 자연의 주인이 아니라 대자연의 생명현상 속에 포함되며, 자연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쇼(George Bernard Shaw)는 우주의 생명체 속에는 창조를 준비하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보고 이를 ‘생명력’이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생의 보다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거대한 힘인 동시에, 우주 속에서 창조적 진화를 추진해 나가는 힘이다. 이러한 흐름에는, ‘인간다움’의 여러 속성들에 대한 탐구로서의 인문학이 기여할 부분이 많아진다. 그러나 근대과학에 압도되어 인문정신을 잃어버리고 인간존재의 의식내면탐구로 후퇴한 근대인문학으로는 오늘날의 과제를 감당할 수 없다. 오히려 근대적 인간중심주의를 극복하는 데는 ‘사람됨’, ‘인간다움’을 최고의 학문적 가치로 삼았던 전통 인문학의 성과가 더 소중한 자산이 된다. 이 전통에 의하면 인간의 ‘사람됨’은 세계 구성의 일원으로서 그 ‘인간다움’을 인간 본연의 사회성으로 온전히 체현하는 것이며, 이러한 인문정신의 구심점은 타자를 대상화하지 않는 공공성公共性에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 박사나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유희》에서 크네이트 명인이 보여준 이들의 완성된 삶도 남을 위한 이타행의 실천이었다. 인문학이 추구하는 귀결도 역시 같은 지점이라고 생각된다.(〈우리는 왜 더 많은 날들이 있기를 바라는가?〉에서)
바로 작가가 말하는 “이타행의 실천”이 곧 공공성의 인문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보살대중이 한결같이 모든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우고 그 서원을 실천하는 이타행利他行은, 광범위한 타인들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과제의 적극적 수행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자원의 축적은 전체로서의 생태적 삶에 공헌하고, 그래서 우리에게 바람직하다. 자연은 물론, 타인의 삶도 소중히 여기는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곧 생명력을 회복하는 일이고, 자기를 실현하는 실천이라는 점에서 작가는 “인문학이 추구하는 귀결도 역시 같은 지점”으로 합치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보편적 행복’에 대한 성찰은 인문학의 주된 영역인 것이다. 즉 작가가 상정하는 인문정신의 본령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본성과 조건을 성찰하고 삶의 의미를 해석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실존 개념과 깊은 관련을 맺게 되는데, 실존이란 인간만의 고유한 존재방식이다. 이때 모든 인간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면서 상황에 대처하게 마련이지만, 그 상황에 대응하는 자신만의 정서적 반응과 심리적 기질 등에는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 개인적 삶에 있어 ‘철학함’을 얼마나 잘 하는가 또는 아닌가에 따라 개인의 삶은 크게 달라진다. 이에 작가 맹난자는 《하늘의 피리 소리》와 같은 철학수필을 통해 ‘철학함’의 태도를 제시하는 것이다. 철학은 인간의 지금까지의 모든 경험과 사유와 신념, 그리고 상상해낼 수 있는 앞으로의 또 이것들에 대한 총체적이면서도 세밀한 체계화를 도모하는 산물로서, 이러한 철학적 사유에 의해 우리는 사유하는 방법을 배우고, 가장 정돈된 세계와 인간상에 가까워지며, 보다 더 바람직한 삶을 재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렇다면 ‘철학함’은 일종의 ‘뒤돌아보기’이면서 ‘내다보기’인 것이다. 인간의 문제는 ‘지금 여기’의 해결을 넘어 ‘저기’ 차원의 해소를 성취할 때 비로소 궁극의 답에 이르게 될 것이다. ‘지금 여기’는 흘러가고 있는 순간이고, 과거와 미래를 잇는 접점이다. 그리고 그 접점에 바로 《하늘의 피리 소리》가 있다.
허만욱 문학평론가, 주요 논저 《시각과 상상의 즐거움, 영화의 이해와 탐색》, 《다매체 시대 문학의 이해와 확장》, 〈변해명 수필의 미적 특성 연구〉, 〈채만식 수필과 근대의 도시 읽기〉, 〈수필문학의 이론과 비평, 학술연구의 진단과 방향〉, 〈맹난자 수필의 죽음의식 연구〉 외 다수. 현재 남서울대학교 교수, 우리문학회 회장, (사)한국동화구연지도사협회 이사 mookhur@ns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