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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희문 둘레길 걷기
◇ 광희문(光熙門) : 중구 광희동 2가 105번지
- 조선초에 한양도성의 남소문 역할을 한 시구문
광희문은 소의문(昭義門), 혜화문(惠化門), 창의문(彰義門)과 함께 한양도성 4소문 중의 하나이다. 그 중 소의문과 혜화문은 일제 때 헐려 없어졌으나 최근에 혜화문은 서울시에서 복원하여 그 모습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광희문(일명 屍口門, 水口門)은 4대문, 4소문 중에서 소의문(서소문)과 더불어 서울시민들이 새상을 떠나면 상여(喪輿)에 싣고 운구(運柩)할 수 있는 ‘저승 문’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금령(禁令) 때문에 서울시민들이 신당동·왕십리·금호동 방면에 묘지를 잡게 되면 광희문을 거쳐서 운구하였으므로 시신을 내보내는 문이라 하여 ‘시구문’으로 칭하였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서울에 가거든 시구문의 돌가루를 긁어 오라’는 말이 있었다고 전해 온다.. 이는 수백년 동안 수많은 죽음을 지켜 본 광희문이므로 ‘시구문 돌가루’가 주술적(呪術的)인 만병통치약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광희문은 조선초 1396년(태조 5년)에 한양도성을 쌓을 때 남소문(南小門) 역할로 축조되었지만 속칭 시구문 또는 수구문(水口門)이라고 칭하지, 남소문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조선 초에 도성에서 한강나루(한남동)를 통하여 남쪽으로 가려면 광희문을 통하면은 거리가 멀어 불편하므로 도성에서 곧 바로 나갈 수 있는 문을 새로 설치하자는 건의에 따라 현재 타워호텔이 세워진 부근인 버티고개에 남소문을 새로 건립하였다.
그러나 이 문은 설치된 지 12년 만인 1469년(예종 1)에 지경연사 임원준(知經筵事 任元濬) 등이 수레 등이 다닐 수 없으므로 실용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한편, 음양가(陰陽家)들이 서울의 남동쪽을 개방하면 화가 미친다고 주장하자 예종이 그 건의를 받아들여 남소문을 폐쇄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에 풍수사상이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한 예이다.
서울의 남동쪽을 개방하면 화가 미친다는 주장의 근거는 남소문을 건축한 직후에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가 세상을 떠났고, 또 하나는 남소문을 열어 놓으면 도성 안의 여자들의 음행(淫行)이 많아진다는 주장에 따라 이 문을 폐쇄하게된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 후에도 이 문을 개통하자는 의견이 명종과 숙종 때에 여러 차례 제기되어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풍수사상에 의한 반대에 부딪혀 개통을 보지 못하고 말았으므로 조선말까지 남소문의 역할은 광희문이 담당하게 되었다.
남소문은 비록 폐쇄되기는 하였으나 조선말까지 존속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언제 훼손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일제 때에 이르러서는 남소문의 주초(柱礎)마저 없어졌다.
조선후기 병자호란으로 청나라 군대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몽진(蒙塵)에 나선 인조 임금이 조선의 국왕으로는 처음으로 광희문을 빠져나갔다는 일화도 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광희문 밖은 시신이 즐비했고, 조선말의 1886년(병인년)에는 도성 안에 콜레라가 크게 돌아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는데 광희문 밖은 내다버린 시체와 죽기 직전의 환자들로 아수라장이었다고 전한다.
또한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해산이 강행되자 이에 항거하던 120여 명의 군인들이 희생되었다. 전사한 이들 시신을 광희문 밖에 쌓아 놓자 가족들이 몰려와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조선 말 1899년(광무 3)에 전차가 개통되고 도로 개설로 한양도성이 철거되기 시작하면서 광희문과 동대문까지의 성곽이 모두 헐려 옛 모습을 잃게 된 데다가, 일제 때인 1915년 경 광희문 문루(門樓)가 무너져 내려 홍예(紅霓)만 초라하게 남아 있었다.
이로부터 60여년이 지나 서울시에서 1974년 12월부터 이듬해 11월까지 광희문의 홍예를 남쪽으로 약 15m 이전하여 복원하는 한편, 문루(門樓)를 올림으로써 옛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 광희문 성지(聖地) 순교 현양관(殉敎顯揚館) : 중구 퇴계로 350(신당동 228-16)
- 순교한 성인과 복자(福者)의 신앙행적을 추모하는 천주교 성지 유적지
광희문 성지(聖地) 순교 현양관(殉敎顯揚館)은 1784년 한국천주교회 창설 후 순교한 성인과 복자(福者)의 신앙행적을 추모하고자 이들의 시신이 버려졌던 광희문 근처에 조성된 천주교 성지 유적지이다.
이 현양관은 조선시대 천주교 박해 당시 포도청(捕盜廳)이나 의금부(義禁府) 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처형되거나 옥사한 신자들의 시신이 버려진 곳을 기념하기 위한 장소이다.
광희문은 도성 안의 시신이 나가던 문이어서 이 문을 통해 많은 천주교 순교자의 주검이 나가고 묻혔기 때문에 천주교의 역사적 순교지가 되었다.
천주교는 조선에 도입될 때부터 100여 년에 걸쳐 10여 회의 크고 작은 박해가 끊이지 않았다. 그 가운데 1839년(헌종 5)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최경환(崔京煥), 1846년(헌종 12) 병오박해 (丙午迫害) 때 포도청에서 교수형을 당한 우술임(禹述任), 김임이((金任伊), 이간난((李干蘭), 정철염(鄭鐵艶) 등과 1867년(고종 4) 포도청에서 순교한 복자(福者) 송베네딕토, 복자 송베드로, 복녀 이안나의 시신들이 광희문 밖 성벽 밑에 묻혔다.
또한 1866년(고종 3), 1868년(고종 5) 등의 천주교 박해 때에도 도성 안에서 순교한 적지 않은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들이 이곳에 버려졌다. 가족들이 시신을 찾아가지 않은 순교자들은 이 근처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천주교회는 지금 광희문 성지의 여러 순교자 성인들이나 무명 순교자들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와 ‘광희문성지 순교현양관(殉敎顯揚館)’을 건립하였다. 이곳에서는 목요일~일요일까지 오후 3시에 순교자들의 행적을 되새기는 미사를 드리고 있다.
◇ 시구문 시장 터 : 용산구 후암로 4길 70 (영락보린원 자리)
- 광희문 밖으로 나섰을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지역에 형성된 노상 시장
광희문을 나서면 동쪽으로 비스듬한 경사길이 보이는데, 그곳은 1960년대까지 번성하던 시구문 시장이 있던 곳이다. 당시의 시구문 시장의 가게라곤 현재 떡집 하나만 남았다. 제대로 된 시장이라기보다 길을 따라 좌판이 줄을 이은 일종의 난장(亂場)이었다.
시장이 있던 이 경사로가 신당동이 시작되는 곳인데, 원래 한양도성을 나온 시신을 여기저기 묻던 묘지가 이곳에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도시로 몰려온 사람들은 결국 죽은 자들의 땅을 차지했다
1966년에 임명된 군인 출신의 김현옥 서울시장은 이런 난잡함을 봐줄 수 없다고 하여 군사작전에 버금가는 철거를 통해 시구문 시장과 인근의 사창가들을 정리하였다.
신당동에서 25년 이상 살고 있는 주민은 회상하기를 “예전에는 술집이 그렇게 많았다. 또 여자들 옷을 파는 가게도 많았는데, 이제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 대신 골목골목 봉제공장들이 늘고, 중국인과 베트남인 노동자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개미, 장미, 해당화, 잊지마, 미인, 물망초 등 애잔한 간판들이 줄지어 있던 술집 골목엔 겨우 한 둘만이 남아 향수를 그리워하는 늙은 취객을 기다릴 뿐이다.
일제 때 신당동 남쪽에서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택지정리와 문화주택 건설이 진행되는 동안, 북쪽에서는 토막민들의 삶과 더불어 이곳을 오가는 영세 상인들의 삶이 누적되고 있었다.
이 당시 영세 상인들의 상업 활동은 퇴계로변 노상에서 시작되었다. 이곳은 송파·왕십리·뚝섬 등 서울의 동남쪽에서 도성의 성문에 들어서기 전에 가장 마지막에 당도하는 지역이었고, 반대로 도성 안에서 청계천 혹은 을지로를 따라 도성 밖으로 나섰을 때 가장 먼저 만나는 지역이기도 했다.
이곳은 공동묘지가 지척인데다가 토막촌 옆의 습한 저지대는 생산성이 없었지만, 대신 도심과 외곽이 만나는 결절 지역이었기에 상업 활동의 잠재력을 늘 갖고 있었다.
◇ 아리랑 고개 : 중구 다산로 33길(광희동 2가)
- 광희문 밖의 신당동쪽에 위치한 고개이름
성북구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가려면 ‘아리랑고개’를 넘어야 하지만, 광희문 밖 천주교 순교 현양관 뒤편의 신당동으로 가는 고갯길로 오르면 바로 ‘아리랑 고개’이다. 조선시대에 이 고개를 상여에 실린 시신이 ‘한번 넘어가면 다시 돌아올 수가 없다’고 하여 ‘아리랑 고개’라고 불렀다.
현재 이 고개에는 「조선시대에 광희문을 나온 시신을 실은 상여가 이 일대 꼬불꼬불한 언덕을 넘어 신당동 화장터나 왕십리, 금호동 공동묘지로 갔다.」라는 내용의 안내 문구가 언덕 마루 한 편인 게시판에 부착되어 있다.
이 고개에 올라보면 지난날에 눈 앞으로 꽃상여가 지나는 장면을 떠올리게 된다
◇ 광희문교회 : 중구 신당동 304-253
- 미국 남감리교(南監理敎) 선교부에서 서울에 가장 먼저 세운 교회당.
1895년(고종 32)에 입국한 미국의 남감리교회 선교사 리드(Reid, C.F.)는 조선 선교처 관리자로 임명되어 1897년 6월 21일 일요일에 남송현(南松峴, 현 소공동) 사택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보았는데, 이 때 윤치호(尹致昊, 1865~1945)가 설교를 했는데 이것이 광희문교회의 창립이다.
교세가 점차 늘어나자 1904년 10월에 띄골(현 오장동)로 이전하여 교회명을 일명 ‘수구문교회’라고 불렀다. 이어 1916년 광희동에 대지 1,320㎡를 구입해서 2층 양옥의 교회를 건축하고, 1924년 이후부터 ‘광희문교회’로 불렀다.
교회건물이 준공되자 청소년교육을 통해 선교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광희문여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 뒤에 배명중고등학교(培明中高等學校)로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44년 일제에 비행기 기금 헌납으로 광희문교회가 매각 처분되어 예배당을 잃었으나 해방과 더불어 교회부흥운동 및 교회찾기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1954년에 적산가옥(敵産家屋)을 매각하여 현부지에 1,963㎡를 구입하고, 1956년 신당동에 660㎡ 규모의 교회건물을 신축하여 1995년까지 사용하다가 1996년에 지금의 교회를 다시 신축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경기도 광주·충북 음성·경북 성주 등지에 교회 개척을 지원하고, 해외선교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 대장간 거리 : 중구 다산로 39길 일대
- 한때 160여 개에 이르는 대장간이 고갯길에서 성업한 데에서 유래된 명칭
대장간 거리는 중구 다산로 39길 일대를 일컫는 말로, 한때 160여 개에 이르는 대장간이 고갯길 좌우 언저리에 늘어서서 성업한 데에서 그 명칭이 유래한다. 일명 풀무재, 풀무질고개, 대장고개 등으로도 불렸던 곳이다. 지금은 이곳에 대장간 3곳 만이 남아 있다.
지금의 ‘동대문 디자인플라자(DDP)’자리는 옛 훈련도감(訓鍊都監) 소속의 군영지였다가 개항기에는 신식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이 훈련장으로 사용하였다. 당시 군사들이 사용할 무기를 대장장이들이 만들었으므로, 대장간 거리가 형성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1907년 정미7조약으로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되자 이곳의 무기 제작 주문은 줄어들게 되었다.
이후 이곳 대장간의 무기 수요를 대체한 것은 농기구나 작두[斫刀] 같은 신물(神物)의 제작이었다. 농기구는 농민들이 농사에 필요했고, 작두 등은 시구문(屍口門) 밖 일대에 몰려 있던 신당, 즉 무당들이 필요로 했던 신물이었다.
약 20년 전만 하더라도 이 부근에 10여개 이상의 대장간이 있어서 그나마 명맥을 유지했었지만 작업이 너무 고되어 대장간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대장간은 하나둘씩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 명인골목(개미골목 / 신당골) : 중구 다산로 39길
- 장인(匠人)과 명인(名人)들이 모여 활동하던 터전에서 유래된 골목 이름
명인골목은 매우 좁고 허름하나 정겹고 아기자기한 맛이 넘치는 골목이다. 이 골목은 부근의 대장간이 있는 것처럼 예로부터 장인(匠人)과 명인(名人)들이 모여 활동하던 터전이어서 명인(名人)골목이라는 이름이 유래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이 골목을 개미골목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 마을에 사는 주민들이 마치 개미처럼 부지런하게 열심히 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약 200m 길이의 골목을 지나는 동안 곳곳에서 눈길과 관심을 끄는 볼거리들을 마주할 수 있다.
◇ 동활인서(東活人署) 터 : 중구 신당동 236번지, 304번지(남녀오거리 마트)
- 조선시대에 빈민환자, 주로 전염병 환자를 치료한 공공의료기관
성북구 돈암장 자리에는 오늘날의 보건소와 같은 조선시대에 질병에 걸린 빈민환자, 주로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설치한 의료기관인 동활인서(東活人署)가 있었다. 또한 마포구 아현동에는 서활인서가 있었다.
동활인서는 18세기에 그린 「도성대지도」에 보면 조선 초에 동소문 밖에 위치한 것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조선 말 순조 때 저술한 한경지략(1830년)에는 동활인서는 쇠퇴해서 폐지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정호의 「수선전도(首善全圖)」(1830년)에는 동활인서가 현재 중구 신당동에 위치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으므로 조선 후기 정조 때 동소문 밖에서 중구 신당동 236번지, 304번지 일대로 이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활인서는 고려 때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의 후신으로 조선 초 태조 때는 대비원(大悲院)이라고 하다가 태종 때 활인원(活人院)으로 고치고, 1466년(세조 12)에 활인서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후 활인서는 임진왜란 때 폐지되었다가 1662년(광해군 4)에 다시 설치되었고,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하지만 활인서의 사업은 혜민서와 통합되어 이어졌고, 다시 제중원, 대한적십자병원에 계승되었다.
활인서(活人署)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의원 외에 무당을 배치시켰다. 당시에 무당은 전염병을 일으키는 역귀(疫鬼)를 퇴치한다고 믿었으므로 이들에게 세금과 부역을 면제하여 주었으며, 활인서는 기근이 심할 때 역(驛)·원(院) 등과 함께 구호사업도 병행하는 사회복지기관이자 공공의료기관의 역할을 하였다.
1646년(인조 24)에는 전염병이 만연하여 활인서에 수용된 환자가 699명에 이르렀다는 기록도 있으므로 시설이 부족할 때는 활인서 주변에 막사를 만들어 치료한 것이 확실하다. 이 곳에는 땀을 내고 찜질하고 목욕하는 시설도 갖추고 있었으므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의료시설을 갖춘 공공의료기관으로 추측된다.
활인서는 환자의 집이 가난하여 치료비를 내지 못하면 국고(國庫)에서 미곡을 활인서에 공급해 주었다. 하루에 주는 쌀은 1되(升)이며, 매년 환자의 수를 기록하여 감사에 보고해서 회계를 밝히게 하였다.
◇ 옛 무당천(巫堂川) : 중구 다산로 33길 10-18 (신당동) * 떡볶이촌
- 남산에서부터 내려오는 하천으로 대부분 복개됨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 지금처럼 골목을 이루게 된 건 1970년대 후반부터다. 1970년대를 지나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 신당동 떡볶이 골목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1980년대에 새롭게 등장한 건 떡볶이집마다 있었던 'DJ박스'다. 사연과 함께 음악을 틀어주던 이른바 '멋쟁이 DJ오빠'가 신당동 떡볶이 골목의 상징이었다.
사실 떡볶이 골목의 역사는 70년대를 훨씬 더 지나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떡볶이 골목에 ‘마복림 할머니집’이 있는데, 이 할머니 말에 따르면 1953년부터 떡볶이를 팔기 시작했다고 한다.
전일 떡볶이 골목 인근에 동화극장이 있었는데 그 앞에서 떡볶이와 옥수수, 감자 등을 팔았다. 처음에는 그냥 고추장만 넣어 떡볶이를 만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신당동 떡볶이는 수십년 세월이 흐르면서 심심풀이 간식이 아닌 한 끼 식사로 충분한 하나의 요리로 자리잡게 되었다.
신당동 떡볶이촌에 이르면 복개천이 나온다. 이 개천은 남산에서부터 내려오는 하천으로 ‘무당천’이라고 불렀는데 현재 복개되어 도로가 되었다.
신당동 이름은 조선시대에 무당들의 신당(神堂)이 많았기 때문에 불려졌다. 지난날의 무당은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존재였다. 그래서 유족들은 먼길을 떠나는 망인에게 기도, 또는 노잣돈이라도 주고 싶은 마음을 지녔고, 망인이 한을 품었다면 이를 풀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무당을 찾았다.
그래서인지 이곳에는 아직 신점(神占)을 보는 깃발 달린 집과 점을 치는 집들의 간판을 쉽게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