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 읽는 기쁨] <101> 제3편 제5장 자성일 불공 ①
만다라회 기획, 박희택 집필
「실행론」 제3편 수행편의 제5장은 ‘자성일 불공’에 관한 회당대종사의 자증교설이다. 제4장 ‘불공’의 제11절 ‘기간 불공정진’에서 ‘자성일 불공’을 일차 법문하신 바 있는데(제95회 참조), 제5장에서는 5개 절에 걸쳐 자성일 불공에 관하여 독립적으로 충실히 자증교설하여 주신다. 제1절 ‘자성일 불공’, 제2절 ‘자성 밝히는 날’, 제3절 ‘자성일과 육재일’, 제4절 ‘자성일의 진호국가불사’, 제5절 ‘수요 불공’ 순으로 전개하셨다.
제1절 ‘자성일 불공’은 「진각교전」에도 편장되어 있는 「실행론」의 주요 법구로서, ‘불교의 생활화·생활의 불교화’를 하는 중심기제(中心機制, core mechanism)가 되는 자성일(일요일)마다 심인당에 회합(會合)하여 불공을 올리는 것을 가~다항에 걸쳐 법설하고 계신다. 불공을 자성일마다 대중동참으로 올리는 것은 한국불교의 혁명적 변화로서, 그 의의를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할 것이다. 제1절은 이 점에 관한 법설이다. 가항부터 독송하여 본다. 항제(項題)를 달자면 ‘비로자나불일로서의 일요 자성날’이 되겠다.
“법신불은 태양 같고 화신불은 만월 같다. 밀교 본신(本身) 양(陽)이므로 일요 자성날을 한다. 그러므로 일요일은 비로자나불일(毘盧遮那佛日)이라(실행론 3-5-1-가).”
법신불은 대일여래(大日如來)로 표현되니 태양에 비유된다. 이에 반해 화신불은 월인여래(月印如來)로 표현되니 만월에 비유된다. 월인여래는 문학적 표현이나, 만월이 일천강에 비치듯, 화신불로 만중생 앞에 나투시어 개개인의 마음속에 지혜의 등불을 밝히신다. 그러나 만월은 어디까지나 태양빛을 받아 빛나는 것이기에, 만월과 같은 화신불은 진리의 본체는 아니다. 진리의 본체는 태양과 같은 법신불이다. 신라 하대에 신라인들이 법신 비로자나불상을 전국에 두루 조성한 까닭은 바로 이 점에 연유한다.
법신불을 교주로 하는 밀교는 양의 불교이며, 양의 날인 일요일에 전문적(專門的)으로 또 전일적(專一的)으로 자신의 성품[自性]의 밝음[陽]을 찾는 수행을 한다. 그러므로 일요일은 자성일(自性日)이며 법신불일(法身佛日)이며 비로자나불일이다. 대종사께서는 이렇게 간명하면서도 참으로 극명하게 밀교의 노선을 밝혀 주셨다. 이어서 나항을 독송해 나간다. 항제(項題)를 달자면 ‘자성일 심공의 공덕’이 되겠다.
“자성일 하루 심공(心工)하는 데 엿새 동안 수익은 칠일간 모두 일한 것보다 더 많아지고 또 안락하게 살게 되며, 자성일 하루 일을 한 그 칠일 동안 수익은 하루 심공한 저 육일보다 적어지고 엿새 동안 고통 가운데 살게 되느니라. 지혜 없는 사람은 법계에서 시대변천에 따라 인간사회에 공일(空日)을 두게 된 이치를 알지 못하고, 남다른 위생(衛生)과 또 알뜰하게 버는 데도 불구하고 곤란 재앙과 우환 질병 속에 살게 되느니라(실행론 3-5-1-나).”
두 문장으로 되어 있고, 해설자는 각 문장을 각 하나의 반점(쉼표)을 표시하여 병렬관계를 드러내어 본다. 두 문장은 각각의 반점 전후로 병렬관계를 이루고 있다. 말하자면 첫째 문장은 자성일 심공을 할 때의 공덕과 하지 않았을 때의 고통을 병렬로 대비하고 있다. 둘째 문장은 지혜 없는 사람이 자성일을 두게 된 이치를 알지 못함과 알지 못함에서 오는 병폐를 병렬로 연결하고 있다.
대종사의 이 자증교설은 오직 체험으로만 증득할 수 있는데, 굳이 논리적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중도이법(中道理法)의 체득(體得)이라 할 것이다. 몸의 존재인 인간은 ‘기질(氣質, temperament)’을 가지고 있기에 맹목적 방향성을 취하기 마련이며, 이는 중도이법에서 멀어지게 한다. 맹목적 방향성은 ‘현실’ 위주로 치달려 ‘진리’를 외면하는 유위적 경향성이다. 유위적 경향성의 취약함을 자성일 심공으로 무위적 중도성으로 전환함을 말씀한 것이다. 단순하게 표현하면 ‘비일(比一)’ 곧 ‘온전한 하나(全一性, Einheit)와 친연(親緣)함’에 해당하며, 사회과학적으로는 ‘약한 것을 편들어줌’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중도합일(中道合一)의 한 방법론이다. 「주역」 제8괘 수지비괘(水地比卦)와도 통한다.
“엿새 동안 고통 가운데 살게 되느니라”에서 ‘엿새’는 ‘칠일’이 되어야 논리적으로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법문에서 말씀한 ‘수익’은 꼭 물질적·경제적 수익만을 지칭하지 않는다고 하겠다. 정신적·영성적 행복을 포함한 불교의 이락(利樂, 이익과 안락)을 뜻한다. 이어서 다항을 독송해 나간다. 항제(項題)를 달자면 ‘성품날인 자성일을 지킬지라’가 되겠다.
“뜰에 심은 저 나무가 매일 자라나지만, 항상 보는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것과 같이, 우리 심공 과정에도 매일 성품 좋아지나, 항상 보는 사람들은 좋아진 줄 모르지만, 오륙칠 년 지나보면 좋은 성품 보일지라. 이 이치를 미리 알고 가족간에 서로 도와, 꾸준하게 교를 믿고 성품날을 지킬지라(실행론 3-5-1-다).”
해설자는 「실행론」 내지 「진각교전」에서 이 법구를 사랑한다. 기질을 초극하고 성품이 좋아지는 것을 항상 보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꾸준하게 심인불교를 믿고 성품날(자성일)을 지키면 분명 좋아진다는 희망의 말씀이다. ‘꾸준함’의 경계는 오륙칠 년이다. 대종사께서 ‘오륙칠 년’이라 하신 것을 법수(法數)로 받아들일 일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 이치를 ‘미리 알기’와 ‘가족 간에 서로 돕기’의 두 가지가 요청된다. 이 비유의 법구에도 이처럼 깊은 뜻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첫댓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