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3.11:30 한문과 해역의 문장을 다시 나열하다.
2015.12.13. 13:46 금몽암중수기 기문을 지은 년도표기를 잘못하여 바로잡다. (1843년 을 1792년으로 정정하다)
2019.08.15.10:22 각주용어설명을 추가하다.
禁夢菴重修記 홍양호(洪良浩) 1792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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耳溪集卷十四
記
禁夢菴重修記 / 홍양호(洪良浩) 1792년
關東之寧越。卽我莊陵遜位之地也。粤昔端廟在禁中。發夢於此地。占基而建寺。命曰禁夢寺。在魯陵之左。遂爲願堂。萬曆壬辰。燬於兵。庚戌郡守金侯澤龍。募僧改構。更名曰魯陵菴。崇禎壬寅。童土尹公宰是郡。捐俸鳩財。付霽雲大師名應岑者。重建而易其額曰旨德。盖避陵號而取地名也。肅宗戊寅。端廟復位。墓陞爲陵。拓寺基成大刹。名曰報德寺。而禁夢菴遂廢。英廟乙丑。參奉羅侯蔘。慨然曰。禁夢。卽端廟感夢而肇建者也。豈可廢而不傳。乃出私財。募諸緣。還構菴於舊址。於是乎魯陵之故事無闕。而先王之遺跡不泯。羅侯之志若功。可傳於後世矣。自今此邦之人。望松栢之欝蓊。瞻衣冠之出遊。草綠花明。月冷雲愁。鵑聲上下。與鐘梵相應。其有不悽然而傷。汪然而涕者乎。余嘗撰子䂓樓兒郞之詞。一唱一噫。殆不忍讀。今於夢菴之記。重爲之於邑也。菴凡三十一楹。與報德寺。同修於壬子正月。訖事於八月。發願者僧漢溟。董役者載禪。請記於余者。知添云。
禁夢菴重修記 금몽암중수기/ 홍양호(洪良浩) 1792년
關東之寧越。관동지영월。관동의 영월은
卽我莊陵遜位之地也。즉아장릉손위지지야。바로 단종께서 왕위를 양보하신 곳이다.
粤昔端廟在禁中。 월석단묘재금중。아! 옛날 단종께서 대궐에 계실 때,
發夢於此地。 발몽어차지。꿈속에서 이곳을 보신 적이 있다.
占基而建寺。 점기이건사。이에 터를 정하여 암자를 창건하고는
命曰禁夢寺。 명왈금몽사。“금몽사(禁夢寺)”이라 명명했다.
在魯陵之左。 재노릉지좌。암자는 노릉 동쪽에 있었는데
遂爲願堂。 수위원당。 마침내 노릉의 원당(願堂)이 되었다.
萬曆壬辰。 만력임진。만력 임진년(1592, 선조25)에
燬於兵。 훼어병。병화로 소실되고,
庚戌郡守金侯澤龍。경술군수김후택룡。경술년(1610, 광해2)에 군수(郡守) 김택룡(金侯澤龍)이
募僧改構。모승개구。승려를 모아 개축한 뒤,
更名曰魯陵菴。경명왈노릉암。 ‘노릉암(魯陵菴)’ 으로 이름을 바꿨다.
崇禎壬寅。숭정임인。숭정 임인년(1662, 현종3)에
童土尹公宰是郡。동토윤공재시군。동토(童土) 윤공(尹公)이 이 고을에 수령으로 부임하더니,
捐俸鳩財。연봉구재。녹봉을 출연하고 재물을 모아,
付霽雲大師名應岑者。부제운대사명응잠자。
법명이 ‘응잠(應岑)’인 ‘제운대사(霽雲大師)’에게 맡겨 중건하였다.
重建而易其額曰旨德。중건이역기액왈지덕。그리고 그 편액을 바꾸어 ‘지덕(旨德)’이라 했는데,
盖避陵號而取地名也。개피릉호이취지명야。
대개 능호(陵號)를 피휘(避諱*盖避 개피)하여 이곳 지명을 취한 것이다.
肅宗戊寅。숙종무인。숙종 무인년(1698, 숙종24)에
端廟復位。단묘복위。 단종께서 복위되면서
墓陞爲陵。묘승위릉。묘에서 능으로 승격되자,
拓寺基成大刹。척사기성대찰。절터를 확장하여 커다란 사찰을 완성한 뒤,
名曰報德寺。명왈보덕사。 ‘보덕사(報德寺)’라 명명했고
而禁夢菴遂廢。이금몽암수폐。‘금몽암(禁夢菴)’은 마침내 폐사가 되었다.
英廟乙丑。영묘을축。영조 을축년(1745, 영조21)에
參奉羅侯蔘。참봉나후삼。참봉 ‘나삼(羅侯蔘)’이
慨然曰。개연왈。개연히 탄식하며
禁夢。금몽。“금몽암은
卽端廟感夢而肇建者也。즉단묘감몽이조건자야。바로 단종께서 꿈속에서 현몽하여 창건한 곳이거늘,
豈可廢而不傳。기가폐이불전。 어찌 폐사로 남긴 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말하고는,
乃出私財。내출사재。사재를 출연하고
募諸緣。모제연。조력자를 모아,
還構菴於舊址。환구암어구지。옛터에 암자를 도로 지었다.
於是乎魯陵之故事無闕。어시호노릉지고사무궐。이에 노릉의 고사가 누락되지 않고
而先王之遺跡不泯。이선왕지유적불민。선왕의 유적이 인멸되지 않게 되었으니,
羅侯之志若功。라후지지약공。나삼의 뜻과 공적은
可傳於後世矣。가전어후세의。후대에 전할 만하다.
自今此邦之人。자금차방지인。이제부터 이 나라 사람들은
望松栢之欝蓊。망송백지울옹。소나무와 잣나무로 울창한 숲과
瞻衣冠之出遊。첨의관지출유。‘의관(衣冠)이 출유(出遊)하는 모습’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草綠花明。초록화명。초록 풀과 밝은 꽃,
月冷雲愁。월냉운수。서늘한 달빛과 수심에 찬 구름,
鵑聲上下。견성상하。오르내리는 두견새 울음소리,
與鐘梵相應。여종범상응。그리고 호응하는 범종소리,
其有不悽然而傷。기유불처연이상。이것을 보고 듣는 사람 가운데
汪然而涕者乎。왕연이체자호。슬퍼하며 눈물을 쏟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余嘗撰子䂓樓兒郞之詞。여상찬자규루아랑지사。나는 일찍이 ‘자규루 상량문’을 지은 적이 있는데,
一唱一噫。일창일희。한번 노래할 때마다 한번 탄식하게 되니,
殆不忍讀。태불인독。 차마 읽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今於夢菴之記。금어몽암지기。지금 ‘금몽암 중수기’ 를 짓노라니
重爲之於邑也。중위지오읍야。거듭 예전처럼 번뇌에 휩싸였다.
菴凡三十一楹。암범삼십일영。암자는 도합 31개의 기둥으로 지어졌는데,
與報德寺。여보덕사。보덕사와 함께
同修於壬子正月。동수어임자정월。임자년(1792, 정조16) 정월에 보수를 시작하여
訖事於八月。흘사어팔월。8월에 공역을 마쳤다.
發願者僧漢溟。발원자승한명。발원한 자는 승려 ‘한명(漢溟)’이고,
董役者載禪。동역자재선。공역을 감독한 자는 ‘재선(載禪)’이며,
請記於余者。청기어여자。내게 기문을 청한 자는
知添云。지첨운。‘지첨(知添)’이다.
금몽암중수기> 홍양호 1792년/ 역주 장릉지속편 176~178쪽
관동의 영월은 바로 단종께서 왕위를 양보하신 곳이다.
아! 옛날 단종께서 대궐에 계실 때, 꿈속에서 이곳을 보신 적이 있다.
이에 터를 정하여 암자를 창건하고는 “금몽사(禁夢寺)”이라 명명했다.
암자는 노릉 동쪽에 있었는데 마침내 노릉의 원당(願堂)이 되었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25)에 병화로 소실되고, 경술년(1610, 광해2)에 군수(郡守) 김택룡(金侯澤龍)이 승려를 모아 개축한 뒤, ‘노릉암(魯陵菴)’ 으로 이름을 바꿨다.
숭정 임인년(1662, 현종3) 동토(童土) 윤공(尹公)이 이 고을에 수령으로 부임하더니, 녹봉을 출연하고 재물을 모아, 법명이 ‘응잠(應岑)’인 ‘제운대사(霽雲大師)’에게 맡겨 중건하였다.
그리고 그 편액을 바꾸어 ‘지덕(旨德)’이라 했는데, 대개 능호(陵號)를 피휘(避諱*盖避 개피)하여 이곳 지명을 취한 것이다.
숙종 무인년(1698, 숙종24) 단종께서 복위되면서 묘에서 능으로 승격되자, 절터를 확장하여 커다란 사찰을 완성한 뒤, ‘보덕사(報德寺)’라 명명했고 ‘금몽암(禁夢菴)’은 마침내 폐사가 되었다.
영조 을축년(1745, 영조21)에 참봉 ‘나삼(羅侯蔘)’이 개연히 탄식하며 “금몽암은 바로 단종께서 꿈속에서 현몽하여 창건한 곳이거늘, 어찌 폐사로 남긴 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말하고는, 사재를 출연하고 조력자를 모아, 옛터에 암자를 도로 지었다.
이에 노릉의 고사가 누락되지 않고 선왕의 유적이 인멸되지 않게 되었으니, 나삼의 뜻과 공적은 후대에 전할 만하다.
이제부터 이 나라 사람들은 소나무와 잣나무로 울창한 숲과 ‘의관(衣冠)이 출유(出遊)하는 모습’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초록 풀과 밝은 꽃, 서늘한 달빛과 수심에 찬 구름, 오르내리는 두견새 울음소리, 그리고 두견새 울음과 호응하는 범종소리, 이것을 보고 듣는 사람 가운데 슬퍼하며 눈물을 쏟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자규루 상량문’을 지은 적이 있는데, 한번 노래할 때마다 한번 탄식하게 되니, 차마 읽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지금 ‘금몽암 중수기’ 를 짓노라니 거듭 예전처럼 번뇌에 휩싸였다.
암자는 도합 31개의 기둥으로 지어졌는데, 보덕사와 함께 임자년(1792, 정조16) 정월에 보수를 시작하여 8월에 공역을 마쳤다.
발원한 자는 승려 ‘한명(漢溟)’이고, 공역을 감독한 자는 ‘재선(載禪)’이며, 내게 기문을 청한 자는 ‘지첨(知添)’이다.
[각주 용어설명]
1) 이계집 권14에 동일한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1792년(정조16) 홍양호는 이 기문을 짓고 나서 손자인 홍경모(洪敬謨, 1774~1851)에게 글씨를 쓰게 하였다.
1826년(순조20)에 쓴 홍경모의<改偈禁夢菴記文後識 개게금몽암기문후지>에 “소자는 옛날에 명을 받들어 이 문장을 쓴 뒤, 지첨(知添)에게 주어 돌려보냈지요. 31년이 지난 을유년(1825년 순조25)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장릉을 봉심하며 이 암자에 들렀습니다. 지첨은 이미 죽고 기문만이 덩그러니 벽에 걸려 있었는데 연기와 그을음에 더렵혀져 거의 판독할 수 없는 지경이었지요.” 가 보인다.
2) 童土尹公(동토윤공) : 윤순거(尹舜擧, 1596~1668)를 지칭하는데 동토(童土)는 그의 호다.
3) 피휘(避諱) : 군주나 자신의 조상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 관습이다.
때에 따라서는 글자뿐 아니라 음이 비슷한 글자를 모두 피하기도 했다.
이 관습은 고대 중국에서 비롯하여 한국, 일본 등 주변의 한자문화권에 전파되었고 오랫동안 행해졌다.
휘(諱)는 원래 군주의 이름을 일컫는 말이다.
이런 관습이 생겨난 것은 사람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이 예에 어긋난다고 여겼던 한자문화권의 인식 때문으로, 자나 호와 같이 별명을 붙여 부르던 풍습(실명경피속)이나 부모나 조상의 이름을 언급할 때 “홍길동”이라 하지 않고 “홍 길자 동자”라고 조심하여 부르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盖避 : 盖(덮을 개, 어찌 합), 避 (피할 피)
4) 羅蔘(나삼 羅侯蔘) : 『승정원일기』에 의하면 羅侯蔘(나삼)은 1742년(영조18)3월3일 장릉 참봉에 제수되고, 이듬해 8월9일 동몽교관(童蒙敎官 : 조선 시대에, 어린이를 교육하기 위하여 각 군현에 둔 벼슬)에 임명되었다.
5) 瞻衣冠之出遊。첨의관지출유。‘의관(衣冠)이 출유(出遊)하는 모습’ : 한 나라 효혜황제 때, 숙손통의 요청으로 위수 북쪽에 고제의 원묘(종묘 외에 별도로 세운 사당)를 세운 뒤 한 달에 한 번씩 종묘에서 고제의 의관을 꺼내어 법가에 싣고서 그리로 옮기게 하였다.
1699년 大提學 徐宗泰(대제학 서종태)가 찬술한 <莊陵丁字閣上梁文(장릉 정자각 상량문)>에서, 「月游無覩於玉衣 월유무도어옥의。월유(月游)는 옥의(玉衣)를 볼 수 없었고,」 라는 문장이 있다. 이는 한고조(漢高祖)의 능침(陵寢)에 보관된 한 고조의 의관을 꺼내어 바람을 쐰 일에서 비롯된 것으로, 선왕의 의관을 매달 한 번씩 거풍하는 것을 월유(月遊)라고 한다. 《漢書 卷43 叔孫通傳》.
《일성록(日省錄)》정조 20년 병진(1796) 9월 10일(임자) 에 보면, 「관각(館閣)의 여러 신하는 화성(華城)의 궁각(宮閣)과 누정(樓亭) 여러 곳의 상량문(上樑文)을 나누어 지으라.」는 명에 의하여 이조 판서 홍양호(洪良浩)가 지어 올린 『득중정 상량문(得中亭上樑文)』에 “달마다 거풍(擧風)하는 의관(衣冠)을 뵈었네.” 라는 문장이 있다.
6) 자규루 상량문 : 1791년(정조15) 예문제학 홍양호는 강원도관찰사 윤사국의 촉탁과 정조의 전교를 받들고 <자규루 상량문>을 찬술하였다.
7) 번뇌에 휩싸였다 (於邑) : 오읍(於邑)은 근심하고 번뇌한다는 뜻으로 오읍(於悒)이라고도 한다.
8) 지첨(知添)이라는 인물은 누구인가? 내력찾기 : 1797년에는 경옥(璟玉)·석린(碩麟)·해운(海雲)·유화(有和)·승수(勝修) 등이 법당과 누각을 중수하고 단청하였는데, 이때 운부암 조실(祖室) 지첨(知添)이 불사를 지휘하였다[네이버 지식백과] 은해사 [銀海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