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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천하 건륭 原典
둥예줜 지음 송하진 옮김
머리말
흑과 백의 조화
중국의 고대 문화는 음양설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무극無極이 곧 태극太極이다. 태극이 동動하여 양陽을 낳으며, 동의 상태가 다하면 정靜하여지고, 정하여지면 곧 음陰을 낳는다. 정의 상태가 다하면 다시 동하게 된다. '동'과 '정'이 뿌리가 되어 양과 음으로 나뉘고, 이 둘은 서로 맞서게 된다. 양이 변하고 음이 합하여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를 낳고, 이 다섯 기운五氣이 차례로 퍼지며 4계절이 돌아가고 바뀌게 된다.
음양설은 음양의 교감으로 화생만물化生萬物하고 만물생생萬物生生하며 끝없이 변화한다고 본다. 천지에 생겨나는 모든 만물에 음과 양이 존재한다. 해는 양이고 달은 음이며, 생生은 양이고 사死는 음이다. 또한 남자는 양이고 여자는 음이며, 백白은 양이고 흑黑은 음이다.
건륭제는 어려서부터 유가사상의 영향을 받아, 음양설의 참뜻을 받아들였다. 그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제天帝가 태양을 위에 올려놓고 한 해의 농사를 주관했으며, 달은 아래에 내려놓고 때때로 나와 태양을 보좌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천지가 번갈아 가며 평안했고, 음양이 함께 어울리며 만물이 생겨났다. 왕자王者는 재성 財成 과 보상輔相('돕다', '보태다'의 뜻)의 도를 다하고 조용히 하늘의 조화를 따르며 천지의 기가 절제하여 발양되도록 보존하고, 음양이 조화를 이루게 함이 마땅하다.
건륭제는 또한 "성인의 도는 하늘과 뜻을 같이 한다."라고도 말했다.
예로부터 의술의 기본은 음양으로 심신을 다스리는 일이고, 무술은 음양을 힘의 바탕으로 변화시키며, 화가는 음양으로 사물의 모습을 표현해 왔다. 이와 같은 이치로 나라를 통치하고 관리를 다스리며 군사를 부리고 백성을 길들이며 사람을 지배하는 것과 같은 모든 일에 있어서 알지 못하고 이르지 못하며 통하지 못하는 일이 없었다.
'흑'은 음이고 '백'은 양을 뜻한다. 건륭제는 정치적 책략으로서의 흑과 백을 절묘하게 활용한 인물이었다. 그는 '흑백의 도道'를 써야 할 시기와 방식, 그 대상이나 정도는 물론 그 방법을 썼을 때의 결과까지도 명확히 알고 있었다. 진정 지모智謀가 뛰어나고 수단은 끝이 없었으며 그 변화 또한 측량할 수 없었다.
흑백의 본질은 흑과 백이 서로 어울리는 데 있다. 희어야 할 것은 희고, 검어야 할 것은 검어야 한다. 백이 덜하거나 흑이 덜해서도 안 되며 흑과 백이 합덕合德해야만 사람과 사물이 모두 안정될 수 있다. 오로지 백만 있다면 곧 메마르고 가벼우며 무르고 실속이 없다. 또 오로지 흑만 있다면 곧 어둡고 통하지 않으며 부패하고 꽉 막힐 뿐이다.
어떤 일이든 정도가 지나치면 곧 그 기운이 다하여 반드시 변하게 된다. 성함이 극에 달하면 쇠하는 법이다. 이와 같은 흑과 백의 오묘한 원리가 건륭제의 지혜를 이해하는 기본이 된다.
낭만적 색채와 매력을 지닌 건륭제의 재위 기간은 60년에 이른다. 거기에 태상황에 올라 섭정을 펼친 3년까지 더하면 이렇게 오랜 기간 집권한 경우는 역사적으로 찾아볼 수 없다. 문덕文德으로 다스리고 무위武威로써 공을 세운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나라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물자는 풍족하고 백성은 풍요로워 천하가 무사태평했으며 강희제로부터 건륭제에 이르는 강건성세康乾盛世는 바로 그의 통치를 통해 최고조에 달했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그가 흑백의 도를 자유자재로 운용한 덕분에 이루어졌다.
건륭제는 정치를 바로 세우기 위해 관대함[寬]을 백으로, 엄격함[猛]을 흑으로 보았다. 그는 정치를 바로 세우고 나라를 다스리는 데 항상 관맹을 함께 내세우면서, 이 둘을 다르면서도 서로 보완하는 일체로 여겼다. '관맹상제寬猛相濟'는 건륭제가 강희, 옹정 시기에 걸친 정치의 성패와 건륭제 자신이 직접 경험한 바를 종합하여 얻어 낸, 그만의 뚜렷하고 독특한 '흑백의 도'라 할 수 있다.
관맹상제는 건륭제가 정치적 책략을 수립하는 데 비교적 많은 선택의 여지를 제공했다. 때로는 백을 택해 너그럽고 관대한 정치를 펼쳐 일일이 간섭하지 않고 방임함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자연스럽게 해소했다. 그런가 하면 때로는 흑을 택해 엄하게 다스려, 강력하고 신속하게 처벌함으로써 잘못된 일들이 생기는 것을 사전에 막았다.
관대함으로 엄격함을 다스리고 엄격함으로 관대함을 다스리는 것, 이 둘의 조화가 곧 정치다.
이 말은 건륭제가 천하를 다스리는 도구로 삼은 불변의 절대 진리, 불이법문不二法門이었다.
관리를 다스림[治吏]에 있어서는 발탁[擢]을 백으로, 폄출[貶]을 흑으로 삼았다. 중국 고대 제왕들이 사용해 온 치리술治吏術은 매우 다양했다. 그러나 그 본질은 모두 상과 벌의 두 가지 도구로 귀결되었다. 이를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건륭제는 상벌 간에 반드시 균형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점점 더 분명하게 깨달았다. 지나치게 큰 상은 사람을 쉽게 착각에 빠트려 느슨하게 만들며 한없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지나친 벌을 내리는 것 또한 쉽사리 잔혹한 학정으로 치닫게 만들어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질서를 크게 어지럽힐 뿐이다. 건륭제는 관리를 대함에 있어 관작을 내리는가 하면 형을 내려 옥에 가두기도 하고, 상으로 녹을 주는가 하면 벌로 가산을 몰수하기도 했으며, 믿고 아끼다가도 냉정하게 내치기도 했다. 상벌을 엄격히 구분하여 흑백의 조화를 이루고 부드러움과 강함을 함께 베풀었다.
백성을 길들이는 데는 은혜[恩]를 백으로, 위엄[威]을 흑으로 삼았다. 건륭제는 일찍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군주와 백성과의 관계는 마치 배와 물의 관계와도 같다. 배가 물을 떠나서는 그 공을 이룰 수 없듯 군주는 백성을 떠나 나라를 다스릴 수 없다.
여기서 강조하고자 한 주체는 물이 아니라 배다. 배가 물에 뜨고 뒤집어지는 흔한 이야기가 아니라, 군주란 정세에 따라 나라를 올바르게 이끌어 나가고 은혜와 위엄으로 백성을 길들여야 한다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군주가 한편으로 세상을 다스리고자 한다면, 곧 다른 한편으로는 민생을 두텁게 하고 백성의 수고를 덜어 주어야 하며 병사들에게 혜택을 주고 백성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배에 올라 물을 제어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군주의 위엄을 알게 하고, 심지어 관리와 백성들에 대한 혹정도 아끼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를 부리는 데는 긴장[張]을 백으로, 느슨함[弛]을 흑으로 삼았다. 건륭조는 군사적으로 가장 성했던 시기로 정벌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건륭제 말년에는 그 중 가장 유명한 전쟁이 열 번에 걸쳐 일어났는데, 이를 두고 이른바 '십전무공十全武功'이라 한다. 열 번의 전쟁은 제각각 싸움터도 상대도 달랐으며, 그 공적과 과실에 대한 평가도 일치하지 않았다. 전략도 전혀 달라서 적군을 긴장시켰다가도 느슨히 하기도 했으며, 싸우는 대신 이이제이以夷制夷의 방법을 써서 적군을 분열시키기도 했다. 또한 잘될 때 멈추어 과욕을 부리지 않았고 이루기 어려운 공로는 도모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결국 용병의 도는 장과 이를 함께 쓰는 데 있었다. 건륭제가 군사를 부릴 때는 '장'과 '이' 두 가지 방법 외에 다른 것을 쓰지 않았다. '장'도 때로는 '이'가 되고 '이'도 때로는 '장'이 되어 서로를 드러냄으로써 흑과 백이 서로 이어지게 했다.
신하를 부림에 있어서는 충성을 백으로, 간사함을 흑으로 삼았다. 모든 황제들의 곁에는 언제나 두 종류의 측근들이 있었다. 황제를 기쁘게 했던 화신和 과 같은 이들과 황제가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을 주었던 유용劉墉과 같은 이들이다. 황제는 그들 각자의 쓰임을 잘 알고 있었다. 유용이 자신을 늘 어려움에 빠뜨릴 때도 황제가 매번 내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없으면 나라도 없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화신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역시 물리치지 않았는데, 화신과 같은 이들이 없으면 생활이 너무나 메말라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흑이 없으면 백도 없고, 화신이 없으면 유용도 존재의 의미를 잃는 것이다. 건륭제는 각각의 색을 지닌 신하들로 하여금 같은 테두리 안에서 서로 경쟁하게 만들어 각자 그 쓰임에 맞게 이용했다.
건륭제의 지혜는 흑과 백, 백과 흑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서로를 제약하는 것으로, 그는 그 운용의 묘를 완벽하게 체득하고 있었다.
『건륭 原典 평천하平天下』에서는 독자들이 건륭제의 '흑백의 도'에 대해 전면적이고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건륭제의 지혜를 다각도로 분석해 놓았다.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자신을 계발할 때마다 이 책이 많은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제一부| 흑백입정 黑白立政
관대함과 엄격함, 이 둘의 조화가 곧 정치다
寬以濟猛, 猛以濟寬, 政是以和
1.행동하기 전에 입지를 확보하라行動之前先站穩脚根
2.다른 사람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라從別人的影子里走出來
3.작은 것도 살펴야 대업을 이룰 수 있다體査入微成大事
관맹상제 寬猛相濟 는 건륭제가 강희ㆍ옹정 시기에 걸친 시정施政의 성과와 건륭제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을 총괄하여 얻어낸, 그만의 뚜렷한 특색이 있는 '흑백의 도道'라 할 수 있다. 관맹상제는 주로 하여 관대한 정치를 펼쳤는데, 이때는 간섭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맡겨 둠으로써 사회의 갈등을 해소했다. 또 때로는 흑을 주로 삼아 엄하게 다스려, 강력하고 신속한 처벌로써 그릇된 일드이 생기는 것을 제때에 막을 수 있었다.
제1장 관맹술 寬猛術 1
행동하기 전에 입지를 확보하라
行動之前先站穩脚根
어떤 일을 하든 그 전에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일이다. 이는 성공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전제조건이다. 건륭제는 천자에 오른 날부터 모든 방법을 생각해내 절대 황권皇權을 공고히 함으로써 어는 누구도 자신이 권력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지략을 갖추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뛰어난 지략이다
最好的心計是無心計
청 고종이었던 건륭乾隆의 성은 애신각라愛新覺羅, 이름은 홍력弘歷으로 1711년에 태어났다. 그는 강희제의 손자면서 옹정제의 아들이다.
홍력은 소년 시절, 조부였던 강희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조부의 사랑은 당시 그에게 큰 힘이 되었을 뿐 아니라 평생토록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강희 61년 4월, 황제가 변방으로 순행을 나갈 때 황손인 홍력이 그를 수행했다. 홍력이 여섯 살 때 아버지 옹친왕雍親王을 따라 피서산장 避暑山莊 에 간 적이 있었지만 손자가 워낙 많았으므로 조부는 당시 그런 손자가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 순행에서 홍력은 여름부터 가을까지 다섯 달이 넘는 시간 동안 거의 매일을 자애로운 조부와 함께 보냈다. 산장의 36경을 감상하거나 목란위장木蘭圍場(승덕에 위치한 청조 황실의 사냥터)을 누비면서 곳곳에 조부와 손자가 함께 한 흔적들을 남겼다.
산장 남쪽 끝에는 언덕과 호수를 끼고 있는 궁전이 있었다.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호숫가에 닿을 수 있었고, 창을 열고 바라보면 눈 아래로 호수 빛과 산색이 가득 담겨져 왔다. 궁전의 남쪽으로는 수백 그루의 무성한 고송이 있어서 바람이 가볍게 불어올 때면 솔잎이 떨리는 소리에 사방이 더욱 맑고 고요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강희제는 친히 이 궁을 만학송풍萬壑松風이라 이름 짓고 그 곳에서 일상적인 정사를 돌보았다.
그때 홍력은 만학송풍 옆의 감시재鑑始齋에 머무르면서 강희제가 상소들을 읽고 지시할 때면 그 옆에서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고, 신하들을 접견할 때는 사람들의 안색과 분위기를 살폈다. 식사할 때도 강희제는 사랑하는 손자에게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을 덜어 주는 일을 잊지 않았으며, 함께 낚시를 하고 돌아올 때도 강희제는 늘 홍력이 사자원獅子園에 있는 부친 옹친왕에게 물고기 몇 마리를 올리게 했다.
한번은 홍력이 서재에 들어가 책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자신을 부르는 강희제의 목소리가 들려서 창문을 열어 보니 청벽정晴碧亭 가에 정박해 있는 황제의 배가 보였다. 급히 서재에서 뛰어나와 가파른 산길을 따라 호숫가로 한달음에 달려가니 강희제 역시 다급히 맞으며 숨을 급히 몰아쉬는 홍력을 끌어안고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렇게 뛰어 오느냐,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하고 말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손자의 천성으로부터 우러나온 효심에 매우 감동하여 강희제의 마음은 뜨거워졌다.
만학송풍의 북쪽에는 여기저기에 크고 작은 10여 개의 호수가 있는데, 매년 여름이 되면 연꽃이 만발하여 푸른 물결 위로 홍백이 서로 어우러지는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연꽃을 감상하는 데 가장 좋은 곳은 호숫가에 있는 관련소觀蓮所였다. 한번은 홍력이 강희제를 모시고 그곳에 갔을 때 창밖의 연꽃을 보며 강희제가 홍력에게 "애련설愛蓮說을 외울 줄 아느냐?" 하고 물었다. 홍력은 속으로 매우 기뻤다. 아홉 살 때부터 공부에 두각을 보였던 그는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 한 번 읽은 책은 잊어버리지 않았으므로 반나절이면 그날 공부한 내용을 막힘없이 외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강희제가 애련설을 외워 보라고 했을 때 홍력은 외우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그에 대한 설명까지 해냈고, 강희제는 이를 흥미롭게 들으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8월 초는 천고마비의 계절로 사냥하기에 매우 좋은 때다. 강희제는 산장을 떠나 사냥에 나서면서 열두 살의 홍력을 특별히 훈련시켜 잘 길들여진 작은 말을 타고 군장을 갖추어 그의 곁에서 수행하게 했다. 사냥을 하던 중 포위한 곰 한 마리를 강희제가 화승총으로 명중시키자 곰은 소리를 내며 땅에 쓰러졌다. 그러나 병사들은 황제의 명령 없이는 감히 앞으로 나설 수 없었다. 한참이 지나도록 곰이 꿈쩍도 하지 않자 강희제는 곧 옆에 있던 시위에게 홍력을 앞으로 내보내 활을 쏘도록 했다.
이는 사랑하는 손자가 처음 사냥에 나가 짐승을 잡았다는 명예를 얻게 해 주기 위한 것이었으나 홍력이 막 몸을 돌려 말에 올랐을 때 상처 입은 곰이 갑자기 일어나 달려든 것은 전혀 뜻밖의 일이었다. 강희제는 그것을 보고 재빨리 손을 써서 즉시 곰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 이 일이 있은 후 강희제는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두려워져 홍력을 돌보던 화비和妃에게 "이 아이의 목숨은 귀하다! 이 아이의 목숨은 아주 귀해! 만일 곰이 달려들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말했다.
비록 강희제가 홍력을 총애했기 때문에 옹정제에게 황위를 넘긴 것이라는 주장을 증명할 자료는 없지만, 조부와 손자간의 각별한 정은 홍력이 황실과 조정에서 특별한 지위를 갖게 했다. 남들보다 총명했던 홍력은 옹정제의 보위 계승 문제에서 매우 현명한 태도를 보였다. 옹정제가 황제로 오른 뒤, 그는 사회적으로 아버지의 정통성을 의심하는 분위기를 두고 강희제가 자신을 총애했던 것을 근거로 삼아 반박하며 말했다.
황조皇祖의 손자는 백여 명이 된다. 그 중 총명하고 재능이 뛰어나며 학문이 깊은 데다 나이도 나보다 많아 조정의 일을 맡아 보는 이들도 많았지만, 나는 나이가 어리고 우둔함에도 도리어 은혜와 총애를 입었거늘, 어찌 황조께서 내 부황父皇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셨겠는가?
당시 강희제가 홍력을 총애한 사실은 영향이 매우 컸다. 옹정제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이들도 홍력에게는 각별한 태도로 더욱 후대할 수밖에 없었다. 옹정제가 즉위한 후 많은 신하들은 홍력이 지닌 어린 시절의 특별한 경력 때문에 당연히 그가 후대를 이을 계승자라고 여겼다. 더군다나 옹정제가 홍시弘時를 사사賜死한 후 홍력은 옹정제의 장자가 되었으므로, 중국 봉건시대에 적자 혹은 장자를 황태자로 책봉하던 전통 관념에서 보면 홍력이 당연히 황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더욱 중요한 것은 홍력이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조부의 사랑을 받았으며 이것이 그에게 무척 중요한 정치적 바탕이 되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옹정제는 두 아들 홍력과 홍주弘晝 가운데 홍력만을 강희제에게 추천하였을 뿐 홍주에게는 그러한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이로 보아 건륭제는 양대 황제 모두에게서 총애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홍력은 순조롭게 13세 때 옹정제에 의해 황태자로 밀립密立되었고 그 후로도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켰는데, 이는 청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홍력이 일을 처리할 때 늘 신중했던 것과 매우 관계가 깊다. 그는 강희제에게서 상을 받을 때마다 아버지에게 달려가 드리고는 그것을 소중히 보관하도록 청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홍력을 심계心計 있는 사람답다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옹정제 스스로도 홍력을 황위 계승자로 선택한 것이 강희제와도 관계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으므로 유조遺詔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사자皇四子인 보친왕寶親王 홍력은 천성이 인자하고 효심과 우애가 깊으므로 성조聖祖(강희제의 묘호) 이신 선친께서 손자들 중에 가장 아끼시어 궁궐 안에서 자랐으니, 그 은혜는 보통을 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옹정 원년에 비밀리에 홍력을 태자로 세웠다. 비록 옹정제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을 시행하여 그 이름을 공표하지는 않았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다음 황제 자리는 홍력이 차지할 것을 알고 있었다. 옹정제의 동생인 과의친왕果毅親王 윤례允禮도 홍력이 강희, 옹정제의 가르침을 받들어 그것을 제왕의 자질로 삼았다고 스스럼없이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썼다.
홍력이 어려서 성조이신 인황제仁皇帝(강희제의 시호)를 모심에 성조의 특별한 사랑을 입어 조석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문안시선問安視膳(안부를 묻고 반찬의 맛을 살핀다는 뜻으로, 어른을 잘 받들고 모신다는 것)을 드리는 것이 지극히 정성스러웠으며 황제의 옛 모습과 다른 바가 없었다. 늘 옹정제의 모습을 보고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깊이 감화를 받고 행동으로 그 모습이 배어 나왔으니, 이는 모방이 아니라 자연히 습관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성경현전 聖經賢傳 이 사람들을 근면하고 절제하게 하는 것도 그 도리는 다른 데 있지 않고 부자 군신 사이의 대륜大倫에 있을 따름이며, 성품이 선을 좋아하는 것은 그 근원이 도덕인의道德仁義에 있다. 이는 성조에게서 본받고 황제로부터 배운 것이며, 사우師友들과 논하고 시서詩書를 연구하여 얻은 것이다. 밤낮으로 부지런하고 날로 덕을 쌓아 문장으로 잘 드러내고 이치를 깨우쳤으니 도리에도 크게 맞는 것이었다.
이 말은 홍력이 어떻게 해서 배우기를 좋아하고 지혜롭게 되었는지, 또 강희, 옹정제의 풍격을 어떻게 이어받았는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가 대업을 이룰 수 있는 인물이었음을 말해 준다. 건륭제의 동생인 홍주 역시 형에 대해 "나의 형님은 부황과 조석으로 함께 지내며 침식을 같이 했다. 조부의 사랑을 받아 궁궐에서 자라면서도 늘 신중하고 공손하였으니 조부께서 보시기에 좋지 않은 것이 없었고, 부황께서 들으시기에 기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하며 탄복해 마지않았다.
옹정 8년, 아직 평범한 황자였던 홍력이『낙선당전집樂善堂全集』을 완성하자, 조정의 왕공 귀족인 과의친왕 윤례와 장친왕莊親王 윤록允祿, 삭평군왕朔平君王 복팽福彭, 대학사大學士 악이태鄂爾泰와 장정옥張廷玉 등이 잇달아 서문을 지었고, 글 속에는 칭송하는 말들이 넘쳐 났다. 비록 홍력을 아직 황태자라 칭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그를 이미 태자로 보고 있던 것이다.
옹정제가 재위하는 동안 그의 말과 행동은 이미 알게 모르게 홍력을 중용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옹정 원년(1723) 초, 봄갈이가 시작되기 전 황제가 처음으로 천단天壇 대향전大饗殿에 나가 풍년을 기원하는 기곡제祈穀祭를 장중하게 거행했다. 이 날은 정월 11일로 상신일上辛日이라고 했다. 옹정제는 궁에 돌아온 뒤 홍력을 양심전養心殿으로 불러들여 고기를 먹였다. 홍력은 먹어 보고 맛이 아주 좋다고 생각했으나 그것이 무슨 고기인지는 알지 못했다. 세심한 홍력은 의문이 들었다. '부황께서는 어찌 셋째 형 홍시나 다섯째인 아우 홍주는 함께 불러서 먹이지 않으실까?'
홍력의 의심에 일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옹정제는 매사에 심사숙고하여 어떤 일이든 몇 번이나 헤아리고 따져보았으므로 작은 일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모두 깊은 뜻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다. 옹정제가 즉위 후 첫 교사郊祀(제천의식)에서 하늘에 풍년을 기원하고 난 뒤, 이어 상제上帝에게 장차 넷째 황자가 제위를 계승할 것이라 고했던 것이다. 제사를 마친 뒤 옹정제는 상제에게 바쳤던 소를 궁궐로 가지고 와서 오로지 홍력 한 사람에게만 주어 천천히 맛을 음미하게 했다. 홍력은 그야말로 조부와 부친 양 대에 의해 유능한 황위 계승자로 선택받은 것이었다. 훗날 돌이켜 그날 황제의 깊은 뜻을 이미 깨달았던 것을 이야기하면서 홍력은 이렇게 회상했다.
옹정 원년 정월에 선친께서 나를 양심전으로 부르셔서 고기를 먹여 주셨는데 친왕 親王 들과는 함께 하지 않았다. 그것을 먹어보니 맛이 일품이었으나, 어떤 고기인지를 가릴 수 없었다. 선친께서 명확히 알려주지는 않으셨으나 공경하는 마음으로 받아 깊이 새겨 두었다. 즉위하고 나서 그날의 일을 돌이켜 보면 선친께서는 분명히 그날 첫 천제를 지내실 때 이미 훗날 황위 계승자를 하늘에 알리는 뜻을 품고 계셨다. 그리하여 나에게 내리신 중임重任이 벌써 그때 정해졌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일을 가슴 속에 묻어 두고 마음으로만 이해할 뿐 드러낼 수는 없었다. 옹정제는 홍력 혼자에게만 고기를 먹인 것으로 암시를 한 후 어떻게 홍력을 정식으로 황태자로 책봉할지를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이 일에 있어 은감 殷鑑 이 멀리 있지 않았다. 강희제가 황태자를 책립한 데는 세 가지 실수가 있었는데, 하나는 태자가 불초했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태자가 책립된 뒤에 다시 폐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옹정제에게 있어서도 가장 안타까웠던 일로서, 강희제가 후사의 이름을 친서로 남겨 후계자에 대한 확실한 증명을 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슨 방법으로 홍력을 확실하게 황태자로 세우면서도 다른 황자들과 조정의 왕공대신들이 알 수 없게 한단 말인가? 이는 옹정제에게 풀기 어려운 골칫거리였다. 8, 9개월 동안 고심한 끝에 옹정제는 마침내 이 난제의 해결책을 찾았다. 비밀리에 황태자를 책봉함으로써 중국 정치사에서 전무한 방법을 만들어낸 것이다.
옹정 원년 8월 17일, 황제는 총리사무 왕대신과 만한滿漢의 문무대신 그리고 구경九卿을 건청궁 사난각四暖閣으로 불러 미리 준비한 '황사자 홍력을 황태자로 책봉한다.'라고 쓴 어지를 비단상자에 넣고 밀봉한 뒤 제왕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유지諭旨를 선포했다.
성조께서 짐에게 나라의 대사를 맡기시어 종묘사직의 주인이 된 몸으로 앞날의 계획을 아니 세울 수 없다. 그리하여 오늘 짐이 특별히 이것을 직접 써서 상자 안에 밀봉해 넣어 이를 건청궁에 있는 세조世祖 장황제 章皇帝 께서 어서御書하신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둘 것이다. 이에 후사가 이미 정해져 염려할 바가 없어졌으니 제왕대신들은 모두 마땅히 여길지어다.
그러고 나서 대신들을 물리고는 전위傳位 밀지가 담긴 비단 상자를 정대광명 편액 뒤에 숨겨 두었다. 모든 의식은 이것으로 끝이 났다.
밀건법은 글자 그대로 태자를 책봉했지만 태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는 것을 뜻한다. 황제가 갑자기 변고를 당할 경우 쉽게 어지가 뒤바뀔 수 있기 때문에 태자를 미리 정해야 했다. 그러나 반드시 기밀이 지켜져서 제왕대신들이 태자가 누구인지 몰라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태자 또한 태자로 정해진 인물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게 했다. 옹정제는 이렇게 해야만 강희 만년에 빚어졌던 모든 실수들을 피할 수 있으며 넷째 아들인 홍력을 가장 잘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옹정제는 다시 홍력에게 명하여 자신을 대신해 황조인 강희제의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당시 건륭은 겨우 열 셋이었다. 그는 훗날 말했다.
"나에게 대신 제사를 지내라 명하신 데는 실로 깊은 뜻이 있었다."
옹정제는 홍력에게 태자로서 해야 할 일뿐 아니라 종종 고의적으로 다른 형제들은 한 적이 없는 일들을 시켜 단련시킴으로써 훗날 치세를 위한 기반을 다지게 했다. 일반적으로 일단 황태자로 책봉되면 다시 친왕이 될 수는 없었다. 홍력은 13세에 밀립되었으나 옹정제는 그를 화석和碩 보친왕에 봉했는데, 거기에는 '친왕으로 봉한 것은 정사를 익히고 견문을 넓히기 위함이다.' 하는 뜻이 있었다. 이 말은 곧 옹정제가 홍력으로 하여금 정사에 더 많이 참여해서 능력을 키우도록 하기 위해 보친왕으로 봉했음을 뜻한다. 또한 홍력이 일찍부터 매우 뛰어난 능력을 드러내어 그것을 이미 옹정제에 의해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옹정제가 한 말을 들어보면 이러한 사실이 증명된다고 할 수 있다.
"황사자는 그동안 선제의 총애를 받아왔다. 나이가 벌써 스물이 넘은 데다 학식이 날로 늘어가니 짐은 심히 기쁘도다."
홍력과 함께 친왕으로 봉해진 동생 홍주는 공친왕恭親王으로 명해졌다. 홍력은 친왕으로 봉해진 후 참가해야 할 각종 의식들이 크게 늘어났다. 그리고 정치 군사 활동에도 참여하면서 조정 대신들의 각종 업무도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당시 건륭이 이미 진정으로 주목받고 있었으며, 대업을 위한 이러한 훈련들이 뛰어난 효과를 거두었음을 충분히 설명해 준다.
물론 홍력은 진작부터 부친의 심사를 꿰고 있었으나 한 번도 교만해지거나 함부로 행동하지 않았다. 강희제의 둘째 아들은 두뇌가 명석했음은 물론 문무에 모두 능하여 강희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지만, 황태자의 지위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서 제 멋대로 행동해 사람들을 괴롭히고 폭력과 음란을 일삼았을 뿐 아니라, 전횡하여 많은 무리를 규합했고 심지어 황제의 모든 행동을 몰래 살피기도 했다. 그래서 강희제는 끝내 황태자를 폐하고 말았다. 이 일과 연관지어 볼 때 홍력은 매우 훌륭히 처신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옹정제가 엄격하게 가르친 탓도 있었지만 홍력은 속셈이 없는 듯 보이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깊이 궁리하여, 어떤 일은 반드시 해야 하고 어떤 일은 해서는 안 되는지를 따져보면서 스스로 자신을 통제했던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홍력의 인생도 그의 둘째 백부처럼 결말지어졌을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볼 때 건륭제가 총애를 얻고 황제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조부와 부친이 그를 아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가지고 있던 뛰어난 지략과 빛나는 재능 그리고 높은 학식이 진정으로 그를 황위에 앉힌 밑천이었다.
내놓아야만 얻을 수 있다
付出才會有收穫
홍력은 황제가 되고 나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무척 그리워했다.「회구희작懷舊戱作」이라는 짧은 시 한편을 지은 적이 있었는데 여기에는 그의 그리움의 정서가 진하게 배어 있다.
어려서는 자못 소년심少年心이 많아
비호처럼 말을 타고 아름다운 시를 읊었다
지금은 근심으로 마음의 여유를 잃어
장대한 포부는 사라져 찾아보기 힘들다
건륭제가 황태자로 지냈던 13년간은 누가 뭐라고 해도 그가 살아오면서 가장 구속받지 않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절이었다. 건륭제는 증조부 순치제나 조부 강희제처럼 어린 나이에 즉위하지 않아 천진난만한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또 45세에 황제가 되었던 아버지 옹정제와 같이 젊은 시절 내내 황위를 도모하고 기회를 노리느라 꽃다운 젊은 세월을 다 보내고 나서 옥좌에 앉은 것도 아니었다. 건륭제는 13세에 바로 황태자로 정해졌으므로 그 때문에 정력을 쓸데없이 낭비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강희제 만년에 황자들이 정치에 휘말려들었던 것을 거울삼아 홍력이 너무 일찍부터 외부세계와 접촉하는 것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옹정제는 홍력의 태자 지위를 지키는 데 고심하는 한편, 그의 교육에도 관심을 기울여 그가 등극하기 전에 제왕으로서의 훌륭한 자질을 갖추게 했다.
역사상 현명했던 제왕들 가운데 훌륭한 스승을 거치지 않은 이가 없었다. 황제黃帝는 일찍이 대전大顚으로부터 배움을 구하였고 요堯는 엄수嚴壽로부터, 순舜은 무성소務成昭로부터, 우禹는 서왕모西王母에게서 배웠으며 문왕文王은 자기子期에게 배웠고 무왕武王은 괵숙 叔에게 배운 바 있다. 이 군왕들의 명성이 사적에 올라 널리 전해진 것은 모두 이와 같은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홍력 역시 그러했다. 그에게도 좋은 스승이 몇 사람 있었는데, 그들이 바로 홍력을 깨우치고 교육시켜 성군의 길로 이끈 명사名師들이었다.
홍력은 여섯 살부터 책을 읽었는데, 처음에는 정식 스승이 없다가 9살이 되자 옹정제가 복민福敏을 청해 아들의 첫 스승으로 삼았다. 복민은 한림원翰林院 서길사庶吉士로 강희 36년에 진사가 되었으며 주리학朱理學을 숭상했다. 사람됨이 방정하고 정직했으며 관용을 적절히 베풀 줄도 알았다. 또 기질이 엄숙하고 성품이 곧아 누구도 침범하지 못할 위엄이 있었으며 늘 솔직하게 마음을 열어 두어 술수를 꾀하지 않았다.
복민은 공부하는 데 있어 홍력에게 매우 엄격하게 하면서도 교육 방법이 훌륭해서 홍력은 그를 매우 존중했다. 건륭제는「회구시懷舊詩ㆍ용한복선생龍翰福先生」이라는 시에서도 복민을 그리워하며, 현명한 스승으로부터 사람의 됨됨이를 배우고 학문의 기초를 세우게 되었음을 고마워하는 마음을 나타내고 있다.
강희, 옹정 시절 복민은 관운이 별로 없어 관직에 여러 차례 오르기도 하고 물러나기도 했다. 그래서였는지 건륭제는 황위에 오르자마자 곧 복민을 대영대학사代英大學士에 봉하고 동시에 태보太保(황제를 보좌하는 직분)로 임명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승께서 벼슬에 계실 때 공적을 드러낸 바는 없으나 성품이 올곧고 신중하셨을 뿐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깨우쳐주시며 깊이 있는 가르침을 주셨다. 내가 처음으로 바깥에서 스승을 모셔 기초를 세움에 실로 얻은 바가 컸다. 그래서 늘 추념追念해 마지않는 것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건륭제는 평생 자신을 깨우쳐 준 복민의 은혜를 가슴속에 깊이 간직하고 살았다.
홍력이 좀더 나이가 들자 옹정제는 정식으로 건청궁 근처에 상서방上書房을 세우고, 황자를 엄격하게 교육시키는 제도를 제정했다. 또 조정의 석학과 대유大儒들을 건륭의 스승으로 모셨다.
자고로 황자의 스승을 선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주나라 성왕成王이 어렸을 때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태부太傅와 태보太保로 임명되었는데, 성왕의 주위에 모두 이러한 현인들이 있었으므로 성왕은 날마다 그들을 보고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훌륭한 교육을 접할 수 있었고 마침내 성군이 되었다. 진이세秦二世의 스승은 조고趙高였는데, 조고는 그에게 가혹한 형벌이나 엄한 법률 등을 주로 가르쳤다. 그리하여 진이세가 황위를 계승한 뒤에는 공신들을 죽이는가 하면 심지어 종친까지도 참살하는 등 잔혹한 폭정이 이어졌고, 진나라는 얼마 안 가 멸망하고 말았다.
그래서 옹정제는 매우 신중하게 황자들의 스승을 선별했는데 그가 청한 스승 중에는 만주어에 정통한 서원몽徐元夢과 황제로부터의 신임이 가장 두터웠던 대학사 장정옥, 수리水利에 밝았던 혜증균 曾筠, 저명한 이학자理學者였던 주식朱軾과 채세원蔡世遠 등이 있었다.
주식의 자는 약첨若瞻이고 호는 가정可亭이었으므로 건륭은 그를 '가정 선생'이라 불렀다. 강서 고안高安 사람이었으며 강희제 33년에 진사가 되었다. 그는 관직에 머무르면서 줄곧 청렴하고 명망이 높았으며 학식도 뛰어났고 경학에 대한 조예도 깊었다. 주식은 건륭제의 일생에 있어 영향이 가장 컸던 인물이다. 만약 복민이 홍력에게 경사經史(경서經書와 사기史記)와 제자諸子(제자백가諸子百家)를 배불리 먹게 했다면, 주식은 그것을 천천히 씹고 소화시키도록 도와 수천 년 이어져온 고대문화의 정수 특히 유가의 정치사상과 도덕규범을 흡수시켜, 젊은 황자 즉 미래의 황제에게서 뗄 수 없는 한 부분이 되도록 만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홍력은 가정 선생의 감칠맛 나고 지칠 줄 모르는 경지經旨 강의와 진지한 가르침을 받을 때마다 늘 마음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
비록 입문의 예를 올리지는 않았지만 상서방에 있던 스승 중에 홍력이 평생 그리워했던 또 다른 사부로 채세원이 있었다. 채세원의 자는 문지聞之이고 복건福建 장포 浦인으로 강희 48년에 진사가 되었다. 옹정 원년에 황제가 셋째 홍시의 스승을 고르면서 이 유명한 유학자도 함께 불러 넷째 아들의 공부를 담당하게 했다. 채세원은 일찍이 이광지李光地를 도와『성리정의性理精義』를 편찬했으며, 그는 송대 유가를 따르던 이학자로 고문古文에 능해 홍력 형제에게 전문적으로 고문을 가르쳤다. 홍력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선생이 복건성 어투가 짙은 말씨로 말하는 모습이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사람됨에 있어 한평생 썩지 않는 세 가지가 있으니 그것이 곧 입덕立德과 입공立功, 입언立言이라 했습니다. 입언이 비록 입덕과 입공의 뒤에 놓인다 하나 이 또한 어찌 쉽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마천司馬遷과 한유韓愈는 입언으로써 영원히 썩지 않으니 그들은 문도文道를 얻었다고 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문을 배우는 데는 창려 昌黎 를 본보기로 삼아야 하며, 또한 리理가 족해야 재도載道(문장에 도道를 실음) 할 수 있고 기氣가 성해야 달사達詞(사리에 달통한 말이나 글) 할 수 있습니다.
홍력은 가르침을 깊이 새겨 평생을 두고 이를 작문의 법칙으로 삼았다.
그 밖에 다른 이들도 옹정 연간에 상서방에 들어 황자들의 공부를 도왔다. 옹정 7년에는 고성천顧成天이, 옹정 8년에는 장정석蔣廷錫과 호후胡煦가, 옹정 9년에는 소기邵基가, 또 옹정 10년에는 악이태鄂爾泰가, 12년에는 양시정梁詩正이 있었고, 그 밖에 또 유통훈劉統勛, 임계원任啓遠, 대한戴瀚 등이 있었다.
건륭제는 훗날 그해 상서방에 있었던 옛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선친께서 재주가 뛰어나고 현명한 이들을 명하시어 서방으로 보내셨다. 악이태와 장정석을 각신閣臣으로 삼고 채정과 진법을 경구卿九에 들이셨으며 호후, 고성천, 유통훈, 양시정, 임계동, 소기, 대한이 잇달아 들어왔다. 당시 이들로부터 학업도 이루었으나 스승이라 이르면서도 실은 벗과 같았다.
마치 시 같기도 하고 문장 같기도 한 이 단락의 말에서, 건륭제는 이들이 비록 스승이었지만 사실상 좋은 벗이나 다름이 없어 그의 진정한 스승은 복민과 채세원 그리고 주식 세 사람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는 스스로 복민에게서 배운 것을 '학문의 바탕'으로, 채세원에게서 배운 것을 '학문의 쓰임'으로 그리고 주식에게서 배운 것을 '학문의 실체'로 칭했다.
황자가 스승을 모실 때는 엄격하게 예절을 갖추어야 했다. 황자는 반드시 문 밖으로 나가 스승을 맞이해야 했고, 스승에게 먼저 절을 하고 난 후에 스승이 답배를 했으며, 대문을 지날 때마다 스승을 먼저 지나가도록 해야 했다. 또 스승이 먼저 앉아야 비로소 황자가 앉을 수 있었다. 스승께 서신을 쓸 때는 앞머리에 '황공'이라는 두 글자를 쓰고 마지막에는 '황공재배'라고 써야 했다.
옹정제는 무근전懋勤殿에서 황자들이 정식으로 입문의 예를 올릴 때 스승과 황자가 서로 장읍長揖(두 손을 맞잡아 쥐고 하는 큰 절)을 하도록 하고 그밖에 의식에 필요한 준비물 등 세세한 것까지 유지를 내렸다.
이날 황자들이 입문할 때 참석한 스승은 주식과 서원몽, 장정옥, 혜증균 4명으로 모든 것은 옹정제가 내린 유지에 따라 진행되었다. 건륭제는 일찍이 이날 일을 시로 설명하고 있다.
선제께서 조정 신하들을 택하시어 우리 형제들에게 학문을 전수시키셨다. 네 분은 모두 노유老儒들로 서徐, 주朱, 장張, 혜 였다. 무근전에 자리를 마련하여 스승들께 존경의 예를 행하라 이르셨다.
그리고 이 시에 주를 달아 설명하기를, "조정에는 관례가 있어 황자가 처음 학문을 하게 되어 스승을 만나면 서로 장읍을 하였다. 선제께서는 이 네 사람을 우리 형제의 스승으로 택하시어 무근전에서 입문의 예를 행하여 존경심을 표하게 하셨다."라고 했다.
그때 왕공대신들은 황자들을 알현할 때 모두 무릎을 꿇었지만, 상서방의 사부들은 포권지례 抱券之禮 로 무릎 꿇는 것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스승에게 특수한 존경을 표하여 예우하도록 했다.
건륭제는 황자였을 때 이 명사들의 지도 아래 경사자집 經史子集 을 숙독하여 치국의 이치를 깨달았다. 만주족 황제였던 건륭제가 한족의 우수한 문화와 전통에 매우 정통했던 것은 그가 어려서부터 스승들의 교육을 받아 중국의 유가경전을 숙독했던 것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홍력은 천부적인 재능도 뛰어났지만 힘써 배우고 부지런하기까지 했으므로 스승들은 입을 모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주식은 그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역易』,『춘추春秋』, 대씨戴氏의『예禮』와 송대 유가 성리학자의 책들을 상세히 연구했을 뿐 아니라,『통감강목通鑑綱目』,『사史』,『한漢』과 팔가八家의 문장을 모두 통독함으로써 그 목적을 완전히 이루었고, 심오한 모든 내용을 탐구했다." 하고 말했다. 또한 홍주도 "형님은 문침시선問寢視膳을 하는 사이 잠시 생긴 틈에도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바로 글로 남겼다. 날마다 문장을 한 편씩 썼으며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서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옛사람의 도를 좇았다." 하고 말했다. 복팽의 평가는 더욱 높았다.
황사자는 문안시선을 하고 남는 시간이면 온 마음을 공부에 집중했다. 고금古今을 연구하고 사물을 세밀하게 탐구했으며 하나의 단어라도 모든 뜻을 깊이 분석하여 좁쌀만큼도 틀림이 없었다. 문장을 지을 때마다 한 번 붓을 들면 중간에 끊임이 없어 천 마디가 한번에 이루어졌으며, 문사文思 또한 끝없이 샘솟고 고서古書를 광범위하게 인용했다.
그러나 홍력 자신만은 스스로가 다른 이들보다 뛰어나다고 여기지 않았으며 부지런히 학문에 힘쓰는 것은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독서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표출되어 나온 것이라 생각했다. 사부의 가르침과 자신의 이해를 거치면서 홍력은 유가의 가치를 표준화된 윤리 도덕 체제로 삼으려는 초보적 구성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공자를 가슴속에 새겨 두었으며 송대 유가를 숭상했고 시문 중에도 ' 내성외왕 內聖外王 '의 가르침을 드러냈다. 당시 홍력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사상의 영향으로 유가의 인정仁政과 덕치德治가 옳은 길임을 굳게 믿고 있었으며, '군왕은 힘이 아닌 덕으로 천하를 다스려야 한다.'라고 여겼다. 군신관계에 있어서도 그는 자신을 오히려 낮추고 신하의 간언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관대하면 곧 많은 사람을 얻는다는, '관즉득중寬則得衆'이란 공자의 격언에 더욱 감복했다.
홍력은 즉위하기 전부터 관인寬仁에 마음이 기울었지만 그렇다고 극단으로 몰린 것은 아니었다. 즉위 직후 정사를 처음 보기 시작할 즈음에는 관대함을 하나의 책략으로 써서 옹정제 때의 엄한 정치가 남긴 여러 후유증을 바로잡고자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정치적 경험이 쌓이자 그의 정책은 관대함에서 엄격함으로 돌아섰지만 항상 과분하지 않도록 그 한계를 조절했다. 건륭조 정치의 특색은 관대함과 엄격함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서도 엄격함이 주를 이루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황자로 있을 때 깨달았던 제왕의 흑백지술黑白之術이 지닌 심오함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건륭제는 자신을 '서생書生'이라 자처하고 학자의 기질 즉 '서기書氣'를 높이 찬양했다.
서기라는 두 글자는 몹시 귀중한 것이다. 진정으로 책을 읽고 학문을 깊이 다지면 서기가 생기고, 더욱 그 의義를 모으고 충만히 하면 곧 호연지기가 생긴다. 사람에게 서기가 없으면 저속하게 되고 시정아치와 같아져 사대부의 반열에 들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옛 것에 얽매여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책만 붙잡고 사는 책벌레도 아니었다. 그는 학자의 기질을 지니되 책벌레의 기질은 없었던 서생이었다.
건륭 12년, 건륭제는『금사金史』를 읽던 중 그 안의「국어해國語解」에 잘못된 글자가 많음을 발견했다. 음은 비슷하나 글자의 뜻이 맞지 않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문장은 구절이 비슷하여 맞는 것 같지만 틀린 경우도 있었고 또한 어느 여진女眞인의 성씨가 한족의 성씨로 번역되기도 했다. 건륭제는 당시 한어漢語와 여진어의 음역音譯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이러한 현상이 빚어진 것이라 여겼다. 그는 금나라의 근원은 만주이므로 모든 관제와 인명을 만주어에 따라 정확히 바꾸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건륭제는 바로 신하들에게 당시의 발음과 뜻을 알 수 있도록 상세히 고치고 오류를 바로잡도록 명령했다. 새로 수정한『금사』「국어해」가 판각되면서 금사 연구를 하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건륭제는『금사』와『원사元史』,『요사遼史』같은 역사책들을 읽으면서 이 가운데 인명이나 지명뿐 아니라 일부 사실史實을 기술하는 데 무수한 잘못이 있었음을 발견했다. 건륭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같은 잘못은 문인들의 무지와 편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의로 만주의 선인들을 폄하하는가 하면, 여러 순수한 역사적 사실을 두고 붓끝을 잡고 마음먹은 대로 써서 승국勝國을 비난하니 천추만세千秋万世의 역사는 모두 믿을 만한 것이 못 된다.
이 같은 사실은 건륭제가 책만 보고 머리는 쓰지 못하는 사람이 아님을 말해 준다. 비록 역사를 고쳐 만주인들의 명예를 지키고자 한 데 큰 의미가 있었지만, 건륭제 같이 매일 온갖 정사를 처리하는 황제가 역사책을 읽으면서 문제를 발견하고 바로잡는 것은 매우 어렵고도 드문 일이었다.
만년의 건륭제는「어제라마설御制喇 說」이라는 글을 한 편 썼는데, 거기에서 다음과 같이 '라마'의 유래를 고증해 냈다.
라마喇 라는 글자는 한어漢語로 된 책에는 보이지 않으나 원, 명의 역사서 가운데 간혹 자마刺馬로 오기한 경우가 있다. 자세히 뜻을 생각하면 서역西域의 말 중에 '상上'이라는 뜻을 곧 '라喇'라고 말하고 '무無'를 '마 '라고 말하니 라마는 '무상無上'의 뜻이 된다. 이는 한어에서 승려를 '상인上人'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 말은 지금에 와서도 여전히 라마에 대한 가장 권위 있는 한문 주석으로 평가받는다.
건륭제는 이미 있는 문자와 역사를 다시 따져보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이를 귀찮아하지 않고 고증과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한 번은 그가 북송의 서예가 미불 의 묵적墨迹에서 '근유勤有'라고 찍힌 두 글자를 발견하고는 이것이 언제부터 나온 말인지를 찾아보고자 했다. 건륭제는 궁궐 안에 보관되어 있던 송판宋版『천가주두시千家注杜詩』를 뒤져 보다가 거기서 '황경임자여씨간우근유당皇慶壬子余氏刊于勤有堂'이라고 씌어진 문구를 발견했다. 그것을 발견하자마자 '황경'이 곧 원元 인종仁宗의 연호임이 떠올라, 이 책은 분명 송판이 아니라 원판일 것이라 확신하고는 이전 사람들이 '송판 천가주두시'라고 부르던 것을 바로잡았다.
건륭제는 이 작업을 그만두지 않고 송판『고열여전古列女傳』을 찾아 책 뒤에 '여씨정암간우근유당余氏靖庵刊于勤有堂'이라고 씌어진 글자를 보고는 곧 송대에 이미 근유당서방勤有堂書坊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다시 송나라 사람 악가岳珂의 문장에서 여인중余仁仲의 집안에서 판각한 책을 정품精品으로 여겨 찬양한 것을 보고, 남송 시기에 이미 여씨 집안이 책을 판각하는 데 매우 유명했을 것이라 단정을 지었으나 북송 시기에 근유당에서 판각하였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건륭제는 직접 복건성에 본적을 둔 관리를 찾아가 만나 보기도 했지만 새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뒤이어 다시 복건 순무에게 명해 건녕부建寧府로 가서 여씨의 자손을 방문해 보도록 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서적 출간을 업으로 삼고 있는지, 또 건녕 여씨가 송대 이래로 책을 출간한 원류源流는 어디서부터인지, 근유당과는 어느 때부터 연관지어졌는지, 오늘날까지도 존재하는지, 아니면 참고할 만한 유적은 이미 없어지고 다만 그 이름과 그 집안만 남은 것인지, 송대에 일찍이 종이를 만들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은 없는지 등을 조사하게 했다. 또 서적의 기록을 찾아보거나 사람들 사이에 전해지는 말을 수집해 하나하나씩 분명히 조사하여 보고하도록 명했다.
미불 의 묵적이 어느 시대에 속하는지를 밝혀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 조사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그 진지한 추구정신에 대해 사람들은 실로 탄복했다. 이런 복잡하고 오랜 소란 끝에 마침내 자신의 판단이 정확했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나서야 건륭제는 마음을 놓았다.
건륭제는 줏대 없이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르는 것을 싫어했다. 유가의 비조鼻祖인 공맹孔孟, 정주程朱를 읽을 때도 마찬가지여서, 그는 이에 대해서 자세히 연구하여 자신의 의문과 견해를 제시했다. 주희朱熹가 주를 달았던『시경詩經』에서 '경수는 위수로 흐리다涇以渭濁'라는 구절은 글자로만 본다면 경수는 본래 맑지만 위수 때문에 비로소 탁해진다는 뜻인데, 주희는 거기에 '위수는 맑고 경수는 흐리다渭淸涇濁'라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
건륭제는 이 주석이 틀렸다는 의문이 들어 곧바로 섬서陝西 순무에게 경수와 위수 두 강의 물을 직접 조사하도록 명했다. 그 결과 위수가 탁하고 경수가 맑다는 것을 알아냄으로써 주희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또 주희는 시에 주를 달 때, 무지개[虹]를 '천지의 음기淫氣'로 보았다. 그러나 건륭제는 그렇지 않다고 여겨『월령칠십이후시月令七十二候詩』의 내용을 들어 반박했다.
천지에 어떠한 음기가 운행되기에 회옹晦翁(주자를 말함)은 그 말로 나의 의심을 사는가.
주자는 전해지는 말들을 모아 무지개를 천지의 음기로 보았으니 그 이치를 해害하는 것이다. 무지개는 일광日光과 우기雨氣가 만나 형성된 것으로 음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써 주희의 말에는 전혀 근거가 없지만 건륭제의 견해에는 상당히 현대적인 과학 논리가 들어 있음이 드러났다.
만주족이 과연 어디에 속하는지 그 기원에 대한 문제는 건륭 시기에 와서도 여전히 의견이 분분했는데, 건륭제는 만주족 원류에 대한 수많은 역사책을 보면서도 이전의 견해들을 무조건 믿기보다 진정으로 만주족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자신이 직접 찾아내고자 했다.
여러 고증들을 수차례에 걸쳐 조사한 끝에 만주족은 옛날에는 숙신肅愼이었으며, 근세 금인金人의 후예임을 확인했다. 그 근거는 이렇다. 금나라 세조가 완안부完顔部에 살았는데 그곳에는 백산흑수白山黑水가 있었다. 백산은 곧 장백산長白山(백두산)을 말하고 흑수는 흑룡강黑龍江을 뜻하는데, 청조는 동북에서 흥기興起했으며 산천지리 또한 금과 상통한다. 건륭제는 만주족이 가장 처음 숙신에서 나왔다는 사실도 증명해 말했다.
나의 왕조가 처음 일어났을 때 이전에는 만주滿珠라 불렀으나 한자가 잘못 전해지면서 만주滿洲로 불리게 되었으며 우리의 조상은 바로 옛날의 숙신이었다.
만주족이 금과 같은 기원을 가졌다는 사실을 청대에는 줄곧 꺼려왔으나 건륭제는 오히려 용감하게 앞장서서 그것을 금기시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내 왕조의 성은 애신각라씨인데 국어에서 금을 애신이라 하니, 금의 원류와 그 맥을 같이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의 왕조는 대금 때 완안完顔씨에 복속되지 않은 자가 없었으니 마치 지금 완안씨 가운데 내 왕조의 신하가 아닌 자가 없는 것과 같다. 이것이 바로 천하가 일존一尊으로 통일되는 이치인 것이다.
이와 같은 말을 통해 건륭제가 진리를 견지했음은 물론 개명開明한 군왕으로서 애신각라씨가 일찍이 금의 완안씨에 속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천하의 모든 이치가 본래 그런 것이라 여겼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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