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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간 [162.8]
특집 동경대전에 대한 견해
동학의 도통전수와 동학의 용어를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가?
광암 윤철현_전주교구
1. 들어가며
“동학의 도통전수와 동학의 용어를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너무도 당연한 것을 묻는 질문일 것입니다.
또한, 동학이 곧 천도교임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천도교에서는
1세 수운 최제우 대신사부터
4세 춘암 박인호 상사까지
도통 전수기념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4대 기념일로 지정하고
매년 기념행사를 하고 있습니다.
천일기념일은 해월신사 재세 시부터,
천일기념일을 포함한 지일·인일·도일기념일은
의암성사 재세 시부터 매년 기념행사를 하였고,
당시 신문에도 대서특필되는 등 전국적인 행사였음을
역사적 사실로 증명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하였던
천도교 4대 기념일 행사를 생각해 보면서,
당시와 비교되는 지금의 천도교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반갑게도 유불선을 깊이 연구한
유명한 철학자에 의해
대신사의 『동경대전』 해석본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고,
그 내용이 유투브 방송을 통해 알려지기 시작하며
국민들의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동학의 시각이 아닌
유불선에 능통한 그 철학자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내용이었습니다.
사실 필자는 유불선에 능통한 그 철학자가
‘동학은 유불선과는 어떠한 관계가 있으며
다른 점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강의해 주기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동학의 시각이 아닌
유불선의 시각으로 동학을 해석하였고,
심지어는 역사적 사실인
도통전수까지도 부정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필자는 이번 기고에서
“동학의 도통전수와 동학의 용어를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오심즉여심’의 심학(心學)
『동경대전』 「논학문」에서
“도(道)는 천도(天道)이나
학(學)은 동학(東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용담유사』 「교훈가」에서
‘만고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열세 자 지극하면 만권시서 무엇 하며
심학이라 하였으니 불망기의 하였어라.”하신 것처럼,
동학은 마음을 배우고 익히는 심학(心學)입니다.
동학은 수운 최제우 대신사께서 한울님으로부터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이라는
5자 심법을 받으면서 시작됩니다.
동학은
‘오심즉여심’이라는 심법을 배우고 익히는 심학입니다.
동학은
대신사가 우리나라에서 시창한 심학이며,
금불문 고불문 금불비 고불비의
만고 없는 무극대도입니다.
그러므로 동학을
유불선이나 다른 도의 시각으로 보아서는
바르게 알 수 없습니다.
동학은 동학의 시각으로 보아야
비로소 바르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대신사의 동학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해월신사, 의암성사, 춘암상사의 가르침을
함께 보는 것이 동학의 시각으로
동학을 바라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의암성사님은 「성령출세설」에서
“대신사 주문의 뜻을 풀어 말씀하시기를
「‘시’라는 것은
안으로 신령하고 밖으로 기화하니
일 세상 사람이 각각 알아서
옮기지 못한다는 것이라」 하셨으니,
이는 영의 유기적 표현을 가리킴이요,
사람이 곧 한울인 정의를 도파한 것이니라.” 하시고,
해월신사님은 「개벽운수」에서
"인시천인이요
도는 대선생님의 무극대도니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람은 한울님이니
대신사님의 한울 도를
배우고 익히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즉, 사람은 본래 한울님이니
한울 마음으로 한울님 도인
대신사님의 무극대도를 배우고 익혀서
한울님의 덕을 갖추고
한울님의 도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용담유사』 「교훈가」에
“입도한 세상사람 그날부터 군자 되어”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를 두고 하신 말씀임을
알 수 있겠습니다.
3. 동학의 도통전수
기존 도덕에서 도통(道統)은
체계적인 사상이나 철학의 근본 내용이
시대를 뛰어넘어 계승·발전되는 것을 말하는데
사상이나 철학의 내용에 따라
학파가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철학의 신념 차이로 문호를 달리하면서
서로 다툼이 있기도 하였습니다.
이를 동학의 도통전수인 ‘오심즉여심’이라는
심법전수와 비교해 보겠습니다.
오심(吾心)은 천심(天心)이고
여심(汝心)은 인심(人心)입니다.
철학이란
사람의 마음(人心)으로 객관적인 입장에서
천도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그 사상을 달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동학의 도통전수는
사람의 입장에서
철학이나 사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한울님 입장에서
‘오심즉여심’의 심법을 직접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한울님은 둘일 수 없으므로
오직 하나의 계통으로 심법을 전하는 것이기에
문호를 달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 동학의 도통연원 ‘산상유수’
“태고에 천황씨는 어떻게 사람이 되었으며
어떻게 임금이 되었는가~
만물의 불연이여, 헤어서 밝히고 기록하여 밝히리라.
사시의 차례가 있음이여,
어찌하여 그리 되었으며 어찌하여 그리 되었는고.
산 위에 물이 있음이여,
그것이 그럴 수 있으며 그것이 그럴 수 있는가.
갓난아기의 어리고 어림이여,
말은 못해도 부모를 아는데 어찌하여 앎이 없는고.
~ 성인의 나심이여,
황하수가 천 년에 한 번씩 맑아진다니
운이 스스로 와서 회복되는 것인가,
물이 스스로 알고 변하는 것인가 ~
_ 『동경대전』「불연기연」
“말씀하시되 태고에 천황씨는
우리 스승께서 스스로 비교한 뜻이요,
산위에 물이 있는 것은 우리 교(敎) 도통의 연원이라.
이러한 현기와 진리를 안 연후에
개벽의 운과 무극의 도를 알 것이라.”
_ 『해월신사법설』「명심수덕」
「불연기연」은
알 수 없는(불연) 현묘한 조화가 세상에 자취를
나타내는 것에 대한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명심수덕」과 함께 그 내용을 살펴보면,
“태고에 천황씨”는
‘대신사’와 ‘다시 개벽의 운’에 대한 말씀이고,
“山上之有水”는
‘우리 교 도통연원’과
‘무극의 도’에 대한 말씀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으로 보면,
“山上之有水”는 은유적인 표현임을 알 수 있겠습니다.
‘산상유수’를 글자 그대로
‘산위에 물(호수)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게 되면,
한라산 백록담이나 백두산 천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산 위에 그렇게 큰 호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긴 합니다.
백두산 천지는 화산이 폭발한 후에
그 주위가 함몰되면서 만들어진 호수로
칼데라호수라고 하며,
천지의 물은
지하수가 61.51%, 빗물이 30.76%,
지표수가 7.73%로 이루어진 호수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연현상으로 이루어진 천지나 백록담은
기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황하수가 천년에 한 번씩 맑아진다니”라는
말씀도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티베트 고원의 북부에서 시작하는
쿤룬(곤륜)산맥에서 발원한 황하는
장장 5,464Km를 흘러
발해만으로 흘러든다고 합니다.
황하는 연간 16억 톤에 달하는
세계 최대량의 토사를 운반한다고 합니다.
이런 황하가 실제로 물이 맑아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황하수가 천년에 한번 맑아진다니”라고
하신 말씀은 앞 구절 “성인의 나심이어”라는 말씀과
『해월신사법설』 「개벽운수」에
“천년에 대일변, 백년에 중일변, 십년에 소일변은
이것이 인사이니라.”라는 말씀으로 생각해보면,
‘천년에 한번 성인이 나시어
세상 문명을 새롭게 밝힌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씀임을 알 수 있겠습니다.
‘山’은 고요하니 ‘性’의 은유적 표현으로
‘水’는 움직이니 ‘心’의 은유적 표현으로 보면,
‘용담수류 사해원(龍潭水流 四海源)’의 의미를
용담정의 물이 흘러 바다로 간다는 뜻이 아니라
‘산하대운 진귀차도(山河大運 盡歸此道)’의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산상유수’를
은유적 표현이라고 생각해 보면,
「명심수덕」에서의 말씀처럼
우리 도의 도통연원인
‘오심즉여심’을 의미하는 것이며,
‘천심(性)에서 인심(心)이 나온다’는 의미이고,
‘성령출세(性靈出世)’의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의암성사법설』「성령출세설」
“여기에 한 물건이 있어
문득 영성의 활동이 시작되었나니”의 뜻과
「무체법경, 성심변」
“성품이 닫히면
모든 이치와 모든 일의 원소가 되고,
성품이 열리면
모든 이치와 모든 일의 좋은 거울이 되나니,
모든 이치와 모든 일이 거울 속에 들어
능히 운용하는 것을 마음이라 이르고”의
뜻과도 같은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오심즉여심’의 심법전수에 대한
연원과 전함은 알기 어렵기에
불연이라고 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산상유수’는 춘암상사께서 말씀하신
“성심(性心)을 이분시(二分視)하면 안 될 것이다.
성재심리(性在心裏)하고 있다.
신재유형(身在有形)하면 성재심리(性在心裏)하고,
신재무형(身在無形)하면 심재성리(心在性裏)니라.
생각해 보라”라는 말씀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나. 동학의 도통전수는 「오심즉여심」이라는 심법전수
“나에게 영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_『동경대전』 「포덕문」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 너는 무궁 무궁한 도에 이르렀으니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_『동경대전』 「논학문」
위 두 경문을 살펴보면,
한울님이 ‘오심즉여심’이라는 심법을
대신사에게 전수하시며,
한울님 마음인 영부(천심)를 받아(회복하여)
장생의 덕을 펴라는
책임을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신사는 이 심법을 받으시고
1년여 동안 수이탁지한 후에
‘오심즉여심’의 심법으로
세상에 장생의 덕을 펴게 됩니다.
『용담유사』 「교훈가」에
“만단의아 두지마는
한울님이 정하시니 무가내라 할길 없네
사양지심 있지마는 어디 가서 사양하며
문의지심 있지마는 어디 가서 문의하며
편언척자 없는 법을
어디 가서 본을 볼꼬”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를 두고 하신 말씀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동학은 경신년 4월 5일
대신사가 한울님으로부터 ‘오심즉여심’이라는
심법을 받으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맨 처음 행해진 심법전수이고 도통전수입니다.
대신사는 경신년 4월부터 신유년 6월까지
닦고 단련하여 무극대도를 정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유년 6월부터
‘오심즉여심’의 심법인
무극대도의 포덕이 시작됩니다.
포덕4년(1863)년 8월 14일
대신사님은 한울님께 받은 ‘오심즉여심’의 심법을
해월신사에게 전수하십니다.
이것이 두 번째로 이루어진
심법전수이고 도통전수입니다.
해월신사는 대신사께 받으신 그 심법을
포덕38년(1897) 12월 24일
의암성사에게 전수하십니다.
의암성사는 ‘오심즉여심’의 심법을
포덕49년(1908) 1월 18일
춘암상사에게 전수하십니다.
춘암상사는 포덕68년(1927) 8월 14일
천도교인 일반에게
‘오심즉여심’의 심법을 전수하십니다.
그리고 현재는
천도교인이 스승님들의 뒤를 이어
무극대도의 책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현재까지
동학의 심법전수이고 도통전수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역사적으로 확실함에도
이를 부정하고 도통전수에 대해
의심을 품는 그 철학자는
동학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심즉여심’이라는 심법의 진리를 믿지 않고
사사상수의 심법전수를 부정하는 것은
‘오심즉여심’의 심법을
받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는 동학을
바르게 공부하지 않겠다는 뜻도 될 수 있습니다.
대신사께서는
“묘연한 가운데 주고받음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해월신사도
“시지불견 청지불문 할 수 있어야
도를 이루었다 할 것이요.
외유접령지기 내유강화지교를 투득해야
가히 덕을 세웠다 말할 것이니,
그렇지 못하면 탁명이나 하였다는 것을
면치 못할 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가르침은 ‘오심즉여심’을
체득하여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는 심법전수를 믿는 천도교인들도
깊이 생각해 봐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다음은 동학의 도통(심법)전수에 대해
역사적 자료를 통해 알아보겠습니다.
- 포덕1년 4월 5일 한울님께서
대신사께 「오심즉여심」의 심법을 전수하십니다.
- 포덕4년 8월 14일
대신사께서 해월신사께
‘수심정기(守心正氣)’ 4자와
검악인재일편심(劒岳人在一片心)이라는
결시(訣時)와 함께 심법을 전수하십니다.
- 포덕38년(1897) 12월 24일
해월신사께서 의암성사께 심법을 전수하십니다.
- 포덕49년(1908) 1월 18일
의암성사께서 춘암상사께 심법을 전수하시고,
10년 뒤 포덕59년(1918)
「천도교 제4세 대도주 승통10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의암성사께서 친명을 내려
천도교회월보(제91호,1918년 2월호, 4쪽)에
다음과 같이 특필합니다.
- 포덕68년(1927)에 8월 14일 춘암상사께서
천도교인 일반에게 심법을 전수하십니다.
의암성사 친명에
“천이 신사에게 전수하시던 동일한 심법이오”와
“신사가 천에게 수하신 동일의 정적이니”라는
말씀으로 알 수 있듯이,
동학의 도통전수는
대신사가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오심즉여심’의 심법전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춘암상사의 「윤고」를 보면,
그동안에는 ‘종문심법을
일개인에게 전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포덕68년 8월14일에
단전(單傳)이 아닌 ‘천도교인 일반’에게
‘나의 심법을 전수’한다고 언명하십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그 철학자는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천도교인들은
오만 년 대업의 심법을 받았으니
대도발전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한마음 한뜻으로 스승님들의 노고가
헛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4. 동학의 용어는 동학의 시각으로 보아야
대신사께서는
부친이신 근암공이 퇴계학파의 고제임에도 불구하고
부친을 따르지 않고 유불은 다시 개벽운수에는
맞지 않은 도덕이라고 선언하고서
동학을 고수하시며 순도의 길을 선택하십니다.
그런 대신사의 『동경대전』 을 해석함에 있어서
유학의 용어를 왜 썼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유학 경전이나 옛 고사로 해석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아는 만큼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유불선의 선행 지식이 있으면
동학을 유불선으로 보기 쉽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선행 지식에 치우치지 않고
동학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주문수련을 지극히 하여
한울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대신사께서는
“금불문 고불문의 일이요,
금불비 고불비의 법이라”,
“만고 없는 무극대도”,
“천추에 없는 법을 어디 가서 본을 볼꼬”,
“유도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 했던가” 등등
여러 말씀으로 동학은
다시 개벽운수에 맞는 새로운 도덕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해월신사법설』「천도와 유불선」에서도
“우리 도는 ‘유’와도 같고 ‘불’과도 같고
‘선’과도 같으나, 실인즉
‘유’도 아니요 ‘불’도 아니요 ‘선’도 아니니라.
그러므로 ‘만고 없는 무극대도’라 이르나니,
옛 성인은 다만
지엽만 말하고 근본은 말하지 못했으나,
우리 수운 대선생님께서는
천지·음양·일월·귀신·기운·조화의 근본을
처음으로 밝히셨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동학 교리를 연구함에 있어서
유불선과 비슷한 용어가 나오더라도
그 용어들에 대해 신중하게 연구해야 할 것입니다.
만고 없는 무극대도인 동학은
기존 도덕으로 바라봐서는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동학은 동학의 시각으로 보아야
비로소 온전히 보일 것입니다.
대신사의 동학을 바르게 알기 위해서는
해월신사, 의암성사, 춘암상사의 가르침을
함께 보는 것이 동학의 시각으로
동학을 바라보는 것이 될 것입니다.
경전을 보면
시경, 서경, 주역, 선왕, 오제, 공부자, 선성,
성현, 대학, 중용, 맹자 등등
옛 글을 인용한 경우에는
대부분 출처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경전 문구에 대해서는
일단은 동학의 뜻으로 생각하고
깊이 연구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유불선의 용어 같지만
동학의 시각으로 봐야 하는 용어가
경전에 많이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동경대전』 「논학문」에
“‘조화’라는 것은 무위이화요”라는 경문이 있습니다.
‘무위이화’라는 용어는 경전 여러 곳에 나옵니다.
‘조화’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조화로 인하여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사람들이 헤아리기는 어렵지만
조화의 결과는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씨를 뿌리면
새싹이 돋고,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습니다.
이렇게 형체가 ‘변화하는 것’을 ‘조화’라고 하고,
그러한 조화는 귀신의 작용으로 그렇게 된다고 합니다.
「논학문」에 “귀신이라는 것도 나니라” 하였으니,
천지 만물이 나고 자라고 꽃 피는 것이
모두 한울님 조화 아님이 없다는 것입니다.
대신사님은 조화를 무위이화라고 하였습니다.
‘무위’는 ‘함이 없다’ 또는
‘인위를 가하지 않는다’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무위(無爲)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무위’를 말하면
대체로 노자(老子)를 생각하게 되고,
노자의 사상인 ‘무위(無爲, 함이 없다)’,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
함이 없으되 하지 않음이 없다)’,
‘도법자연(道法自然,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등을
떠 올리게 됩니다.
이러한 사상은 그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의 입장에서 자연을 보고
자연의 스스로 그러함을 본받아야 한다는
철학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연을 배워야 하고
자연을 인위적으로 어떻게 하려해서는 안 된다는
사상입니다. 참으로 고상하고 높은 사상입니다.
이번에는 동학의 시각으로 보겠습니다.
무위(無爲)의 반대말은
유위(有爲)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爲’의 뜻은 ‘~하다’입니다. 즉,
누군가 주체가 있어서 무언가를 한다는 뜻입니다.
새싹이 돋고 줄기가 자라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는 것은 누군가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주체가 없이 그냥 함이 없이 그렇게 될 수는 없습니다.
‘자연은 함이 없다’고 말하지만,
꽃이 피는데
꽃나무의 작위가 없이 꽃이 필 수는 없습니다.
배나무에 배꽃이 피고, 배가 열리기 위해서
배나무는 비바람을 이겨내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이 있는데
어찌 배나무의 작위 함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배나무에 배꽃이 열리고
배가 열리는 자취를 나타내는 것이 천도입니다.
「논학문」에서
‘夫天道者 如無形而有迹’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천도의 주체는 한울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화의 주체인 무형한 한울님은
체가 없기에 무체(無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든 무엇이든
형체를 이루게 되면 ‘유체’라고 하지만,
형체를 갖추기 전에는 ‘무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암성사법설』 「무체법경」에서 말하는
그 ‘무체’입니다.
유체와 유위, 무체와 무위를 나누어 생각해 보면,
‘유체’의 작위가 있는 것을 ‘유위’라고 할 수 있고,
‘무체’의 작위가 있는 것을 ‘무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체는 체가 정해져 있어서
그 개체에 구속되기에 천지를 아우를 수 없으나,
무체는 체가 정해지지 않았기에
어떠한 개체에 구속되지 않아서
천지를 아우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학은 소극적으로
천도의 그러함을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천도에 참여할 수 있는 마음을 회복하고자
‘오심즉여심’의 심법을 배우고 익힙니다.
『용담유사』 「도수사」에서는
유학자면서도 도가(道家)사상을 숭상하였던
전자방 단간목을
난법난도의 대명사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전자방 단간목은 위문후의 스승으로,
위문후는 전자방의 가르침을 받고는
왕으로서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야 함에도
자기가 다스려야할 나라를
굴레로 생각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고,
단간목은
왕의 요청을 피해 뒷담을 넘어 달아난 사람입니다.
하지만, 동학 도인들은
주문을 외우면서 동학혁명을 하였고,
49일 기도를 하고서 삼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어린이날을 제정하였고,
청년운동·출판문화운동·농민운동·여성운동 등
신문화운동을 펼칩니다.
이렇듯 동학은 현실 도피적이지 않고
적극적이고 실천적으로 세상과 함께합니다.
5. 나가며
동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유불선과 구별하며 연구하는 것이
대신사에 대한 후학들의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동학이 유불선을 겸하고 있다”고 하니
어떤 사람은 동학을
유불선의 짬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유불선으로
동학을 풀어보려는 사람도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동학은 “유도 아니요, 불도 아니요,
선도 아니다”라고 언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동학을 공부함에 있어서
자기가 잘 알고 있는 유불선의 지식으로
해석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동학은 유불선을 겸하였으나
유도 아니요 불도 아니요 선도 아니라고 하였으니,
동학의 그 무엇이 유불선을 아우를 수 있는가를
깊이 연구해 봐야 할 것입니다.
내 안에 그 무엇이 있어서 숨 쉴 수 있고
세상에 응하는 지혜가 나오는 가를
생각해 봐야 합니다.
내 안에서 세상에 응할 수 있도록 지혜를 주는
‘그 무엇’은 바로 ‘모신 한울님’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각자 모신 한울님 은덕으로 태어나고,
각자 모신 한울님 간섭을 받으며 살고 있기에,
그 은덕을 생각하고 생각하여
기리 잊지 않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동학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숨 쉬고 살아가는 것은 불연에 붙이고,
박학(博學)하여야 현명한 지혜가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스스로 알아서
굴신동정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각자 모신 한울님의 응함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진실을 모르고 자신이 가진
박학한 지식만으로 동학을 해석하려하지만,
기존 지식만으로는
만고 없는 무극대도를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동학의 심학은
생명의 주체인 한울님의 입장에서
천도를 배우고 익히는 생명의 심학입니다.
인식(認識)의 심학이
어떤 개체가 또 다른 개체를 인식하는
개체간의 관계도덕을 배우고 익히는 심학이라면,
생명(生命)의 심학은
세상을 인식하는 그 개체의 생명이 태어나고 살아가는
생명의 진리를 배우고 익히는 심학입니다.
생명의 심학을 배우고 익히면
인식의 심학은 자연한 가운데
알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동경대전』 「논학문」에
“닦는 사람은 헛된 것 같지만 실지가 있고,
듣기만 하는 사람은 실지가 있는 것 같지만
헛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즉, 주문수련 없이 철학으로만 접근해서는
동학을 알 수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므로 동학을 진실로 배우고 싶거든
교리연구와 함께 주문수련을 권합니다.
동학의 ‘오심즉여심’이라는 심법은
관념(觀念)이 아니라 실재(實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