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듣는다] 의 모순
많은스님들의 법문에서 말씀하기를,
[죽비 딱! 하는 소리를 들을 때]
그냥 들릴 뿐, 나니 너니 하는 분별 없이 그냥 딱! 하는 “있는 그대로” 듣는다고 합니다.
이 말뜻은,
다른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 듣지 못하고, 각자 자기의 기분에 따라 어떤 때는 기분 좋은 소리로 듣고 또 어떤 때는 기분 나쁜 소리로 듣는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면 자기의 기분을 빼고 들으면, “그냥 들릴 뿐”이라는 뜻은 어떤 의미일까요?
나니 너니 하는 분별을 빼고 “그냥 들릴 뿐”이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다른 사람과 달리, 자신만이 갖는 특별난 들림이 있다는 뜻일까요?
그런 특별난 들림을 얻으려면 “귀”가 어떻게 변해야 할까요?
이것은 일부스님들이 큰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라고 하니까 “진실 그대로”의 뜻으로 해석됩니다. 다시 말해, 조금도 불순물을 담그지 않은 순수 그대로란 뜻일 겁니다.
조금도 불순물이 없는 순수 그대로란 어떤 것일까요?
우리 중생은 “업중생”이기 때문에 자기의 업으로 세상의 소리를 듣습니다. 개는 개의 업대로 듣기 때문에 멍~ 멍~ 이라고 하고, 사람은 사람의 업대로 듣기 때문에 죽비 소리를 딱! 이라고 듣습니다.
그렇다면 자기의 “업” 없이 진실 그대로 듣는다면 죽비 소리는 어떻게 들릴까요?
다시 말해,
딱! 이라는 소리는, 사람의 “업”으로 듣는 소리이므로, 이불 진드기의 업도 아니고, 개미의 업도 아니고, 굼벵이의 업도 아니고, 또 물고기의 업도 아닌, 인간의 업으로 들리는 소리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각자 자신의 업으로 소리를 듣습니다.
그러면 그들 각자의 업을 빼고 들으면, 죽비의 딱! 소리는 어떻게 들릴까요? 특별히 들리는 소리가 있을까요?
모든 소리는 생명체 각각의 의미로 들립니다. 대나무나 소나무도 그들의 업으로 소리를 감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진정 순수한” “있는 그대로” 조금도 업의 오염이 없이 “딱!” 하는 죽비 소리는, 어떤 소리일까요?
전지전능한 신(神)에게 물어보면 정답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정말 그런 소리가 있다면,
그것은 생명체가 생기기 전, 순수 그대로의 우주에서 들리는 소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소리는 인간이나 동물이나 식물이나 어떤 생명체도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각자의 생명체들은 모두 자신의 업으로 소리를 변화해서, 자신들의 업으로 듣기 때문입니다.
소리는 하나의 파동입니다.
즉 물결과 같이 둥근 원심을 그리면서 퍼져나가는 파동입니다.
이 파동은 공기를 밀고 나가는 힘입니다. 이 힘을 각자가 자기식으로 해석해서 듣는 것이지, 어떤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스님들이 말씀한 “순수한 있는 그대로,” “조금도 오염이 없이” 듣는다는 것은 망념일 뿐입니다.
부처님께선, 순수한, 오염 없이, 있는 그대로를 듣기 위해서, 엄청난 수행과 집중을 했습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각자가 자기의 업으로 모든 것을 듣고 보기 때문에 그 듣는 업을 해체하지 않으면, 절대 순수 그대로의 자리를 얻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고는, 자기의 업을 부수기 위해 그토록 철저한 수행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얻은 결론은 무아(無我), 무상(無常), 고(苦)였습니다.
즉 “절대적인 순수한 경지”를 얻으려면 첫째 나를 해체하고, 둘째 세상을 해체하고, 셋째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은 기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뜻을 종합하면,
모든 것은 실체가 없기 때문에, 내가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지식”과 “내 몸에 대한 인식”을 전부 부수고 해체하지 않으면 절대 순수한 절대 자리에 접근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인식을 부수지 않으면, 내가 세상을 “내 식” 대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즉 순수 그대로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식” 대로 즉 “나의 업”대로 세상을 인식하기 때문에,
이 폐단을 없애기 위해서는 “나와 세상”을 모두 해체하지 않으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내 식”대로 세상을 오염시켜, “보고, 듣고, 판단,” 하는 기능을 멈출 수 없다는 뜻입니다.
[결론]
그러므로,
세상을 오염 없이 보고 들으려면,
단 하나의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세상을 판단하는)을 철저히 깨부수라는 것입니다.
오염의 절대적인 근원은, 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화엄경에 일체유심조라고 했습니다.
즉 내가 세상을 조작해서 본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이 세상을 오염시키는 원인이고, 또 환각으로, 엉뚱한 세상을 만들어내는 원흉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철저히 나의 인식을 깨부수었을 때, 비로소 환각을 만들어내는 “내가 사라지고” 또 그렇게 만들어진 세상도 다 사라져 “나”와 “세상”이 모두 사라져 철저히 텅 빈 무한대 허공만 남습니다.
(무한대 허공이란, 허공이라는 어떤 실체가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을 절대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생각의 찌꺼기를 부셔버려, 어떠한 것도 없다는 의미로 사용한 말입니다)
이것이 “있는 그대로” “진실 그대로”입니다.
이때는 나라는 중심이 사라졌기 때문에 나와 너라는 상대적인 환각이 사라져, 오히려 나와 너는 하나가 되고, 세상과 내가 둘로 나눠지지 않는 전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있는 그대로”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딱! 하는 “있는 그대로”라는 어떤 특별난 소리가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잘못된 판단들이 진리를 오염시킵니다.
그래서
반드시 올바른 판단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부언]
또
텅빔을 진리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텅빔도 결국 내가 느끼는 나의 업입니다.
그러나 텅빔의 뜻에는 “나와 세상”. 이 둘이 모두 환각이라는 것을 알으켜주는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이 요소만 취할 뿐, 이것 외 "텅 빔"도 진리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환각인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환각인줄 알면 절대 속지 않기 때문입니다.
속지 않으면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마치 서울 에버렌드 놀이공원에 있는 귀신동굴과 같아서, 그것이 가짜 귀신인줄 알면 속지 않게 되고, 속지 않으면, 그 귀신의 두려움에서 자유롭습니다.
이 자유를 바로 해탈이라고 합니다.
오직 이 해탈 만이 진리입니다. “텅 빔이 진리가 아니라” 구속에서 벗어나는 “자유가 진리입니다”.
“있는 그대로”란 모든 것을 부셔서 얻는 “자유(구속에서 벗어남)”를 말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