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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론 99
창세기 37:12-24
꿈꾸는 자
성경이 요셉의 채색옷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형제들처럼 일을 하는 입장에 있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형제처럼 일하는 복장이 아니라는 것은 다른 일을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 다른 일이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일하는 자로 야곱 언약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요셉이 후에 총리가 되었다는 것으로 꿈을 꾼 것이 비전이 되어 승리할 수 있었다는 허황된 해석을 할 것이 아니라 애굽의 총리로 역할을 한다는 그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기 위한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게 된다.
“12 그의 형들이 세겜에 가서 아버지의 양 떼를 칠 때에 13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 형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지 아니하느냐 너를 그들에게로 보내리라 요셉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내가 그리하겠나이다 14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 가서 네 형들과 양 떼가 다 잘 있는지를 보고 돌아와 내게 말하라 하고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12-14절). “그의 형들이”라고 성경은 요셉을 주어로 그의 형제들을 언급한다. 즉 요셉의 관점에서 사건을 본다는 것은 야곱 언약으로 말씀한다는 것이다.
“세겜”은 디나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세겜 성 사람들이 몰살을 당한 곳이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이 거기까지 간 것은 아마도 야곱이 사놓은 땅이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창 33:19). 디나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드러난 곳이었다. 이런 점에서 세겜은 인간들의 욕망이라는 죄의 증거가 있는 장소였다. 그곳에 요셉이 보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13절), “이스라엘이 그에게 이르되”(14절)라고 표현하여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는 것으로 단순히 야곱의 개인적인 차원의 명령이 아니라 언약적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야곱의 죽음을 통해 이스라엘이 드러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 그의 형제들을 이스라엘로 만드시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통해 한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마 2:6)
26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기록된 바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않은 것을 돌이키시겠고 27 내가 그들의 죄를 없이 할 때에 그들에게 이루어질 내 언약이 이것이라 함과 같으니라 28 복음으로 하면 그들이 너희로 말미암아 원수 된 자요 택하심으로 하면 조상들로 말미암아 사랑을 입은 자라 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30 너희가 전에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31 이와 같이 이 사람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니 이는 너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제 그들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롬 11:26-31)
이스라엘의 목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십자가 은혜와 긍휼을 입은 자가 이스라엘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요셉을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 보여주심으로 야곱의 아들들을 이스라엘로 만드시는 긍휼을 입히시는 과정이다.
“그를 헤브론 골짜기에서 보내니 그가 세겜으로 가니라”라고 하였는데 헤브론에서 세겜까지는 약 80Km이고 거기서 또 도단까지는 갔으니 세겜에서 도단까지 약 20Km로 전체 약 100Km 정도가 된다. 상식적으로 보자면 야곱이 귀한 아들로 여겼으니까 요셉을 혼자 보내지 않고 종들과 함께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언급을 전혀 하지 않음으로 요셉 혼자 고난을 겪고 있는 과정으로 보여준다. 먼 거리에 보내어졌다는 것은 어린 요셉에게 아버지의 말씀에 의한 고난의 현장임은 분명하다.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이 땅에 보내심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15 어떤 사람이 그를 만난즉 그가 들에서 방황하는지라 그 사람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네가 무엇을 찾느냐 16 그가 이르되 내가 내 형들을 찾으오니 청하건대 그들이 양치는 곳을 내게 가르쳐 주소서 17 그 사람이 이르되 그들이 여기서 떠났느니라 내가 그들의 말을 들으니 도단으로 가자 하더라 하니라 요셉이 그의 형들의 뒤를 따라 가서 도단에서 그들을 만나니라”(15-17절). 요셉이 형제들을 세겜에서 만날 수 없었을 때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계속 찾아 나선 것은 단순한 책임감이 아니라 끝까지 형제들을 찾아 그들에 의해 애굽에 팔려감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도단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한 형통의 길이다.
“도단”(히, ‘도탄’)이란 ‘두 개의 우물’이라는 뜻이다. 두 개의 우물이니 상징적으로는 말씀이 풍부한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나 형제들은 여기서 요셉을 죽이는 일을 하게 된 것이니 자기 율법으로 충만한 인간의 의가 극치로 드러난 자리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두 개의 우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는 율법적 행위와 인간의 자기 의가 충만한 상태를 보여주는 자리이다. 모든 인간은 율법적 행위와 죄인의 의라는 두 개의 우물을 말씀으로 착각하고 있는 존재이다.
“18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19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20 자, 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 하자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 하는지라”(18-20절). “요셉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기 전에”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에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싫어하였다는 뜻이다.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자를 성경은 대적자라고 한다. 그러니까 단순히 하나님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차원이 아니라 실제 죽이는 자로서 대적자이다.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살후 2:4)
형제들은 요셉을 꿈이 없던 시절로 되돌리려고 하였다. 즉 그들의 죄악은 단순히 요셉을 미워하였다기보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계시에 대한 무시와 시기심이었다. 언약을 알지 못했기에 언약을 거부하는 쪽의 삶을 살아갔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편에서는 언약을 이루는 차원으로 일은 진행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이란 언제나 인간의 죄를 고발하면서 주어진다. 이와 같이 인간은 항상 하나님의 계시를 무시하며 하나님을 싫어하고 거부한다. 그것이 우리의 죄다!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려고 한 결과로 예수님을 죽인 우리의 죄를 고발하면서 주어진 것이 십자가이다.
형제들은 요셉을 “꿈꾸는 자”라고 별명을 붙여 하나님의 계시를 조롱하고 있다. 요셉 당시에는 실제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계시로 보지 못하였기에 조롱하였지만 오늘날은 꿈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함으로 말씀을 조롱한다. 인간들의 개꿈을 말씀에 갖다 붙여 자기중심적으로 해석을 해 놓고 하나님께서 일하실 것을 미리 알려 주신 것이라고 사기를 친다. 그래서 인간들은 꿈을 꾸고 그것을 비전으로 삼아 자기 목표를 이루자고 한다. 이런 꿈을 성경은 악한 것이라고 증거한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창 8:21)
요셉의 꿈은 하나님의 언약을 자기 백성들에게 성취하시겠다는 계시의 말씀이었다. 다시 말해서 요셉은 하나님의 언약을 계승한 장자로서 꿈을 꾼 것이다. 만유의 주이시며 교회의 머리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그 마음에 지키는 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셉은 자기 형제들에게 버림을 당해야만 하는 것이고, 요셉과 동일한 꿈(말씀)이 있는 성도들 또한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의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니라”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제대로 되는지 아니면 인간들의 행위가 제대로 되는지를 보자는 심산이다. 인간들이 자기 행위로 구원을 이루어 하나님의 뜻이 거짓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이런 인간들의 행위가 하나님의 일하심을 앞설 것이라는 근자감이 우리의 죄성이다. 십자가 앞에서 명명백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마 27:42-49, 참고 막 15:29-32)
그러나 아무리 형제들이 분노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고 할지라도 요셉의 꿈이 보여주는 계시로 드러내 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은 언약으로 확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이다. 이렇게 언약으로 일하심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나의 행위가 아닌 십자가로 하늘의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확정되어 있다는 것이 성도에게 큰 위로와 감사가 되는 것이다.
“21 르우벤이 듣고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여 이르되 우리가 그의 생명은 해치지 말자 22 르우벤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피를 흘리지 말라 그를 광야 그 구덩이에 던지고 손을 그에게 대지 말라 하니 이는 그가 요셉을 그들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의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내려 함이었더라”(21-22절). 르우벤은 서모 빌하의 일로 장자권을 잃은 것에 대한 회복을 생각해서인지 모르지만 요셉의 구원을 계획하고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하겠다는 것과 같은 생각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르우벤이 요셉을 구원하겠다는 생각이나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23-24절). 결국 “채색옷을 벗기고”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확정된 왕과 제사장의 역할을 형제들이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요셉은 고난을 통해 형제들을 찾아왔으나 형제들은 요셉을 형제로 여기지 않았다. “구덩이”이라는 ‘보르’는 시편 30:3에서는 “무덤”으로 번역하였다. 즉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음을 의미한다.
9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요일 2:9-11)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형제로 여긴 자들에게서 당하신 죽음이다. 그러나 형제가 되셔서 자기 죽음 안에 생명이 되게 하신 은혜를 베푸신 것이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이다(2024122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