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 초대총재는 매국노 '송병준'의 외손자이자 명성황우 시신을 불태웠던 '구연수'의 아들인 '구용서' 한국은행이 일제에 의한 조작의혹이 짙은 <대동여지도>를 10만원권의 보조재료로 사용한다고 밀어 붙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정상적이라면 문제가 제기된 소재는 당연히 대상에서 제외시켜야 하는 것이 순리이거늘,
굳이 원안인 <대동여지도>로 밀어 붙이는 이유는 한국은행에 깊이 뿌리 박혀있는 친일 매국노의 잔영이 깊이 침투해 있기 때문으로 본다.
▲ 10만원권의 대동여지도. 이걸 세로 도안으로 보는 사람은 한국은행 뿐이다. |
|
대동여지도의 의혹은 김정호가 지도를 제작한 이후 그 행방을 모르다가 일제치하 조선총독부가 대동여지도를 일반에 공개하면서 제기되었다. 일본은 대동여지도에 독도가 그려져 있지 않은 것을 빌미로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증거로 악용한다. 실제로 공개된 대동여지도에는 독도는 물론 서문에는 언급이 되어 있는 만주(간도)가 빠져있다. 그리고 대마도가 조선 영토로 그려져 있다.
그런데 한국은행은 대동여지도가 문화재라는 이유로 채택하고는 독도는 임의로 새로 그려넣고 대마도는 빼는 등 가감을 한다. 이게 문화재라고 할 수 있는가?
대동여지도 이전에 만주가 그려진 고지도가 여러 점 있다 그리고 대동여지도 이후에 일본이 직접 제작한 지도인 <조선국세견전도>에도 흑룡강 이남의 만주가 조선 땅으로 그리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만주가 조선 땅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그런데 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만주(간도)가 없을까? 그 이유는 만주가 중국 땅이라 안 그린 것이 아니라 김정호선생 생전에 간도협약은 없었기 때문에 일제가 고의로 그 지역을 지운 것이다.
대동여지도는 언젠가는 일제의 조작임이 밝혀질 것이다. 아직까지 조작의 물적 증거는 없으나, 심증은 99%의 순도를 자랑한다. 누군가가 대동여지도 목판인쇄본을 가보로 가지고 있던 것을 공개하던가, 국립중앙박물관 이전 시 발견되었다던 목판(공식 발표 자료는 아니고 소문임)을 조사해 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자료는 현재 강단사학계가 쥐고 있어 아마 안 밝혀질 우려도 있다.
한국은행에 깊이 뿌리 박혀있는 친일 매국노의 잔영이 있다는 것은 초대 한국은행 총재가 구용서(具鎔書)이기 때문이다. 구용서는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이런 말을 듣는가? 그의 외조부는 가히 이완용과 함께 더불어 매국노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매국노의 쌍벽(?)을 이루는 송병준(宋秉畯)이며, 아버지는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의 시신에 석유를 끼얹어 소각하는 임무를 맡은 구연수(具然壽)이다. ▲ 명성황후 시해에 사용된 칼. 현재 일본 한 절에 보관되어 있다. 한국은행 초대 총재인 구용서의 아버지 구연수는 을미사변에서 명성황후의 시신을 태우고 처리하는 임무를 맡는다. |
|
구용서는 1918년 졸업생 105명 중 조선인이 단 2명뿐인 경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도쿄상대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졸업하던 해인 1925년에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 도쿄지점에 들어간다. 당시 식민지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은 조선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그리고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더불어 일제 침략기관의 중추부를 이루고 있었다.
해방 직전에 조선은행 오사카(大板) 지점 서구출장소 지배인을 맡고 있던 그에게 해방은 고통이나 비난이 아닌 최고의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1945년 11월 조선은행 부총재 호시노(星野喜代治)가 면직되면서, 일개 지점장도 못되던 구용서는 하루아침에 조선은행 부총재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 한국은행 건물에는 아직도 "조선은행"이라는 글자를 지우지 않고 있다. 식민지 일제의 잔영이 여기에도 남아 있다. 송병준-구연서-구용서로 이어지는 혼이 지키고 있는걸까?
|
|
1950년 조선은행 총재로 승진한 그는 조선은행이 한국은행으로 개편되면서 대한민국 중앙은행의 초대 총재가 되고 이어 산업은행 총재까지 된다. 이처럼 대한민국 은행/금융계의 최고 지위에서 해방이라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고 이승만 정권하에서 상공부장관까지 지냈다.
매국노 송병준의 외손자인 구용서는 해방 후 한국 금융계를 지배하고, 또 다른 매국노 이완용의 질손인 이병도는 사학계와 교육계를 완전 지배한다. 둘 다 조상을 잘 둔 덕이다(?). 특히 이병도는 일제 시절 일왕특명으로 만들어진 조선사편수회에 몸담으면서 조선인의 민족정신과 얼을 말살한 공로로 일왕에게 훈장까지 받는 민족 최대의 반역자였다. 그 이병도의 손자가 이장무 현 서울대총장과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다.
오늘날 이 두 매국노 가문의 번영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만일 나라가 힘이 없어 외국에 식민지배를 당하면 반드시 매국을 해야 당대는 물론 자자손손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이런 정신교육을 대한민국 정부가 국민들에게 하고 있다. 이제는 누가 이 나라를 찾겠다고 독립운동 같은 일을 하겠는가!
(원조 매국노 1호 송병준, 1857∼1925) ▲ 매국노 송병준의 사진. 한국은행 초대 총재는 송병준의 외손자이다.
|
|
친일매국노로서 이완용과 쌍벽을 이루는 송병준은 미천한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출세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은혜까지 저버리는 배신과 사기의 명수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기회주의자였다.
아버지는 송문수(宋文洙)이고 생모는 기생으로 홍씨라는 첩이었다. 도둑질하다 들켜 큰어머니에게 쫓겨난 송병준은 도둑질과 문전걸식으로 연명하다 서울로 올라오게 되어 민태호(閔泰鎬:고종의 외숙, 민영환의 양부)의 눈에 띄어 그의 애첩 홍씨 집에서 일하게 되었다. 후일 송병준은 이 홍씨를 자기의 생모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자기 출신을 미화하기 위해 꾸며 낸 거짓말이었다.
1876년 강화도조약 때 송병준은 수행원으로 참여해, 그 곳에서 일본 측 수행원인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를 만난다. 명치유신 전후로 떼돈을 번 오쿠라는 군납업자로 조선에 경제적 침략의 발판을 만들려고 했다. 이듬해 오쿠라는 송병준을 앞세워 고리대금업과 무역업을 겸하는 회사를 설립하여 많은 돈을 번다.
1882년 임오군란 때 송병준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일본으로 도망간다. 임오군란 후 박영효를 정사(正使)로 하는 대일 수신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는데, 이 때 송병준은 박영효의 부름을 받아 그의 수행원으로 동행·귀국해 다시 관직에 오르게 된다. 송병준은 이미 일본인과의 장사 경험 및 일본 체류 등으로 해서 일본 전문가가 되어 있었고, 이를 밑천으로 박영효 등의 일본 방문에 자문역을 맡았던 것이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주역들은 송병준을 민씨 일파로 지목해 가담시키지 않았다. 정변이 3일천하로 끝나고 박영효 김옥균 등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명성황후는 송병준에게 이들을 암살하도록 밀명을 내려 일본에 파견한다. 그러나 송병준은 명성황후의 밀명을 듣지 않고 주색에 빠져 있다가 그냥 귀국한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정부에서는 의화군(義和君)을 일본에 특파대사로 파견하게 되었는데, 일본통으로 자타가 공인하던 송병준이 그 수행원으로 같이 도일하게 된다. 얼마 후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송병준은 귀국을 포기하고 러일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일본에 눌러 앉게 된다. 이유는 조선내의 반일 분위기에 위기감을 느꼈고 명성황후라는 큰 권력 배경이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낭인생활을 하던 중 1904년 발생한 러일전쟁은 송병준에게 새로운 정치 활동을 재개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송병준은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공작자금을 받고 오타니 기쿠조 (大谷喜久藏, 육군소장)의 통역인 신분으로 귀국한다. 그에게 부여된 임무는 친일단체를 만들고 유력인사를 친일화하는 공작 등 이었다.
그는 풍부한 공작자금으로 일진회라는 친일매국단체를 만들었다. '을사늑약'으로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송병준의 위세는 더욱 높아져 그야말로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송병준이 통감부에 의해 체포된다. 이유는 이일식(李逸植)이 고종황제 옥새를 위조하여 일본인에게 각종 이권을 팔아먹은 사기 사건이 발생하는데, 송병준이 이일식을 숨겨주었다는 죄명이었다.
이 때 이토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막료로 있었던 일본 우익의 거두인 흑룡회(黑龍會) 회장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에게 도움을 청하여 석방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여 송병준과 일진회는 일본 우익의 사주를 받는 매국단체가 된다.
통감 이토오는 이완용 괴뢰 매국내각을 상대로 한일합방 공작을 공개적으로 전개시켰다. 일본은 이토-이완용 내각과 흑룡회-일진회라는 두 세력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병합공작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송병준과 이완용은 각각 다른 연줄을 가지고 견제·대립 혹은 협조하면서 나라를 팔아먹게 된다.
1907년 이완용 내각이 들어서자 송병준은 농상공부대신이 되었는데 그 때 이준 열사의 헤이그밀사 사건이 터졌다.
송병준은 칼을 차고 어전회의에 들어가 고종황제에게 "일본에 건너가 천황에게 사죄하든가, 통감 이토에게 무릎을 꿇어 사죄해야 하는데, 이토에게 사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만일 그럴 경우에는 폐하를 죽이고 자살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뒤, 둘 다 불가할 경우는 순종에게 양위하도록 협박한다.
이 일이 있은 후 고종황제는 황위를 순종에게 양위하고 영친왕을 일본에 인질로 보낸다. 송병준의 이와 같은 무례함은 역사상 일찍이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후 내무대신이 되고 나서 순종의 순행 문제로 순종에게 질책을 받자, 순종의 왕위를 영친왕에게 넘기려는 공작을 획책하다가 저지당하기도 한다.
1907년 이후 일본 군벌 세력들은 송병준을 이용하여 병합을 추진해 간다. 한편 일제는 송병준에게 일진회 명의로 '합방청원서'를 제출하도록 지령을 내려 병합의 분위기를 조장하고 결국 1910년 8월 29일 합방해 버렸다. 조선은 결국 '한일합방, 한일병합'이 아닌 '경술국치'를 당한 것이다.
송병준은 매국의 1등 공신으로 자작의 지위와 상금 10만원(약 10억원)을 받았고, 일본 국왕으로부터 금시계를 받는 영광도 누렸다.
일본 국왕을 만났을 때 일왕을 '살아 있는 신' 이라 칭송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한다. 뿐만 아니라 북해도에 광대한 목장을 하사받았으며 1920년에는 백작으로 승급하였다.
이후 중추원 고문과 경기도 참사 등을 지낸 그는 3.1 운동이 일어나자 재빨리 도쿄로 달아나 일본 정계 요인들과 만세 수습책을 의논하는 기민함을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1925년 뇌일혈로 사망하였는데 누군가에게 독살되었다는 일설도 있다.
송병준은 자기의 출세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철저한 기회주의자였다. 임기응변에 능하고 처세술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러기에 철저한 신분사회에서 기생의 몸에서 태어나 고아처럼 자란 그가 관직에 오르고 백작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매국노이면서 수전노였다. 충정공 민영환이 순절한 직후 그의 재산을 횡탈하려다가 물의를 일으켰다. 이에 대해 그는 민태호의 애첩 홍씨가 자기의 생모이기 때문에 그 재산을 찾으려 했다고 변명한다. 또한 친구가 죽은 후 그의 재산 관리를 맡고서는 부인까지 농락하고 재산을 가로챘다가 소송을 당하기도 하였다. 가히 파렴치범이라고 할 만하다.
▲ 돈을 받고 조선을 팔아 넘기겠다는 송병준. |
|
이처럼 돈과 권력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거리낌 없이 해치우던 그는 결국에는 1.5억 엔에 나라를 흥정하는 짓거리까지 하게 된다. 그가 1904년께 수상 가쓰라와 말을 주고받던 중 가쓰라가 "가령 조선을 병합한다고 하면 돈이 필요할 터인데 얼마쯤 있으면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송병준은 당장 되받아 "1억5천만엔 내라. 그러면 내가 책임지고 병합을 무난히 실행시켜 보이겠다." 고 말한다.(1.5억엔이면 지금 가치로 약 30조원) 이런 파렴치범에게 개인적 양심은 물론이고 민족적 양심을 찾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였던 것이다.
"송병준은 일본을 흠모하여 신변의 의식주는 물론 노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본풍을 모방하여 추호도 일본인과 다를 바가 없다"<조선귀족열전>라는 평가도 있듯이 파렴치범으로서 뿐만 아니라 반민족 범죄자로서도 그를 제1의 친일매국노라 하여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945년 2차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 송병준의 집 마당의 벚꽃 나무와 그의 묘역에 있던 일본송(日本松)이 전부 말라 죽어 있었다고 한다. 죽고 나서도 일본과의 인연을 끊지 못한 인물이다. 조선에서 조선인의 피를 받아 태어나 일제의 개로 그리고 아예 일본인으로 행세한 송병준.
'해방' 후 더 입지가 굳어지는 친일 가문 ▲ 구연수와 같이 명성황후의 시신을 불태운 우범선 일가의 사진. 가운데 아이가 훗날 육종학자가 되는 우장춘박사. 그는 아버지의 죄를 씻기 위해 평생을 조국의 식량을 위해 연구한다. |
|
송병준의 백작 작위는 아들 송종헌(宋種憲)이 물려받았다. 그는 경술국치 이후에 경기도 양지군 참사(1910∼1913), 중추원 참의(1921∼1933) 등을 지냈다. 송병준의 증손자는 몇 년 전 부평에 있는 미군기지 땅(시가 600억)을 놓고 재판을 벌였다.
송병준의 사위는 구연수(具然壽)로, 그는 을미사변 당시 명성황후의 시신에 석유를 뿌려 소각하는 일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던 인물이다. 통감부가 개설되면서 일제의 권력을 등에 업고 귀국한 그는 송병준의 천거로 통감부 경시(警視:총경)를 거쳐, 총독부 경무관으로 경무총감부에서 근무했다. 조선인으로 경무관을 지낸 사람은 지금까지 구연수 한 명뿐이다. 그는 3.1 운동이 나던 1919년부터 1923년까지 경무국장과 거의 맞먹는 경무국 칙임(勅任)사무관을 지냈으며 1925년 5월 6일에 사망했다. 사망 당시 그의 직위는 중추원 참의였다.
구연수와 같이 명성황후 시신을 소각하는 임무를 맡았던 우범선은 1903년 고영근에게 살해 당한다. '씨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박사가 우범선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의 죄과를 씻기 위해 일본 잔류의 유혹을 뿌리치고 조국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육종 개발에 헌신한다.
그러나 대부분 친일 매국노의 후손들은 조상의 죄를 느끼지 못해 우장춘박사처럼 조상의 죄를 씻지 않고 오히려 물려 받은 재산을 빼 돌리고 환수된 재산을 되찾으려고 국가와 재판한다.
▲ 국립 현충원에 버젓이 누워있는 특무대장 김창룡. 그는 독립군의 사냥꾼인 일본 헌병 출신이다. |
|
* 국군기무사령부는 초대 사령관을 추모해 매년 6월 6일이면 어김없이 대전 현충원 장군묘역에 누워 있는 김창룡에게 사령관 명의로 큰 조화를 보내고 추도를 한다.
* 민족정신과 얼을 파괴한 민족반역자 이병도의 손자가 대한민국 교육의 상징인 서울대총장으로 재직하면서 미래의 국가경쟁력에 대해 책임지고 있다.
* 대한민국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은 초대 총재였던 구용서의 몸에 흐르던 매국노의 피를 잊지 못하고 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일제 조작인 <대동여지도>를 최고액 화폐에 집어넣는 매국 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다.
일제청산은 민족정신을 바로 세우는 일이거늘 어찌하여 이 나라는 일제청산을 아직도 못하고 있단 말인가??? 국민의 정신이 썩어가는 있는데 국가의 미래가 과연 있을까!!! 이러고도 이 나라가 오래 갈 것 같은가??? 새 정부마저 친일청산을 하지 않는다면 국가와 민족의 미래는 없을 것으로 단언한다.
http://www.pluskorea.net/sub_read.html?uid=8667§ion=section78§ion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