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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U자걷기] 후기 스크랩 윤종영 고문의 대한민국 U자 걷기 제10구간 참가기(1)
함수곤 추천 0 조회 116 12.12.07 10:26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한밤의 사진편지 제1794호 (12/12/8/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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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U자 걷기 제10구간 참가기(1)

 

 

 

글 : 윤 종 영(한사모 고문yooncy1936@hanmail.net)

사진 : 이창조 (홍보위원장 lc191@hanmail.net)

 

 

2012115()

 

 

오전 10시경, 한사모 회원56명은 당진 왜목마을 견우직녀가 만나는 다리앞에서 별다른 큰 의식 없이 지휘부의 간단한 안내 설명만을 듣고 제10구간 380여리 대장정의 첫발을 내딛었다.

금년 4, 나는 이곳에서의 감격스러웠던 제9구간 꼴인 당시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10구간 완주를 기원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이제는 걷기에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회원들의 자만을 경계하려는 높은 곳에 계신 높은 분의 뜻 깊은 배려인지, 날씨가 예전과 달리 들떠있는 우리들의 마음을 식혀주고 조심스러운 걸음거리를 주문하는 빗방울을 내려주었다.

더욱이 오늘 오전 첫길은 바닷가 자갈길, 어렵고 걱정스러운 길이었는데 높은 분의 이러한 배려로 전원 무사히 거칠은 해변 자갈길을 완주할 수 있었다.

나는 해변의 자갈길을 걸으며 회원 몇 분과 당진 지명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록상에 등장하는 최초의 이곳 지명은 벌수지현(伐首只縣:백제시대)이었고 삼국통일 이후 신라가 전국의 지명을 한자식으로 개명(景德王16, 757)하며 당시 당항성(黨項城:경기도 화성, 남양) 다음으로 당나라 교역항으로 번성하였던 이곳을 당나라와 통하는 큰 나루라는 의미를 담은 당진(唐津)으로 개칭 하여 고려 조선왕조를 거쳐 현재의 당진시(2012)가 되었다.

간혹 당진의 지명 유래를 삼국통일 과정 중에 당군이 이곳에 오래 주둔한 것에 비롯 ?다는 설도 있으나 신뢰할 수 없는 이야기라 생각된다. 나는 빗속에 자갈길을 걸으며 옛날 명품 돌을 찾는다고 강가 바닷가를 탐석(探石)했던 생각이나 눈에 띄는 명품이 혹 없을가 걸음을 늦쳐 보았지만 늙어 감각을 잃어버린 눈에 별로 들어오는 것이 보이지 않아 몇 개 줍다가 떨어진 대오를 찾아 걸음을 재촉 하였다.

우리는 10여리를 걸어 장고항(당진시 석문면 장고항리)에 도착, 심해진 빗줄기를 피해 버스로 점심식당으로 이동하였다. 나는 차중에서 해뜨는 모습이 당진 8경의 하나로 꼽는다는 이 부근에 있는 노적봉(露積峰)과 촛대바위를 찾아보려던 계획이 무산되여 좀 아쉬웠지만 다음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마음 편히 눈을 감았다..

이곳에 있는 노적봉도 우리나라 여러 곳에 있는 노적봉과 같이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이곳에 대병력이 주둔했다고 속이기 위해 봉우리를 노적가리로 위장했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점심은 옥겸이네 횟집식당이름에 걸맞는 푸근한 시골아줌마가 차려주는 것 같은 구수한 게장 된장찌게 백반이 우리속을 달래주었다. 더욱이 오늘 점심은 박현자 시인이 정성이 곁들어 맛을 배가시켜주었다.

오후에 걷는 길은 석문 방조제 30여리길(송산면 장고항리에서 가곡리까지), 만만치 않은 거리다. 더욱이 비바람이 몰아치니. 그래도 회원모두의 표정은 밝고 자신 만만들 하다. 5년여의 걷기 수련의 결과 같다.

회원 모두는 손흥문기사의 따듯한 선물인 색색의 비옷을 입고 반별, 남녀별로 짝을 지어 방조제 길에 올라 걸음을 재촉하였다. 서해안은 거의 방조제로이어져 과거의 지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당진시만 하더라도 서산시와 당진시 사이에 대호방조제, 내일 걸을 당진시와 아산시 사이에 삽교방조제, 그리고 오늘 걷고 있는 석문방조제를 비롯해 인근에 있는 10여개의 섬도 거의 육지와 연결되어 과거의 해안선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며 우리세대가 지금까지 우리역사상 가장 큰 변화 발전을 이룩한 세대라 자부할 수 있겠다. 나는 비바람속의 방조제를 걸으며 내일이면 하직하게 될 이곳 충청도와 나와의 인연을 떠올려 보았다. 6.25전쟁 와중에 우리가족은 부여를 거쳐 예산에서 잠시 뿌리를 내려 나의 형제들은 이곳 학교에 피난학생으로 복학하여 학교를 다니었고 나도 이곳 예산중학교를 다녔던(2.3학년) 아련한 이런 저런 옛 추억을 반추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빗길속을 걷는 길이었기에 주변경관으로 머리도 돌리지 못하고 오직 앞사람의 발 뒷끝만 보고 걷다 보니 오늘 종착지인 가곡휴계소에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전회원이 무사히 도착, 이곳에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승차, 오늘 숙소인 당진관광호텔(당진시 송화읍 단촌리)로 이동하였다.

오늘 저녁 식사는 우렁이박사, 전국적으로 우렁이집으로 유명한 집이라고, 독특한 맛과 풍치로 비에 젖은 우리들의 으스스한 몸과 마음을 풀어주었고 저녁잠자리 또한 시설 좋은 호텔이어서 숙면

할 수 있었다.

 

 

다음날(116일 화요일)

 

새벽에 눈을 떠보니 새벽 5, 오늘 날씨가 궁금해 창문을 열어보았으나 어둠이 거치지 않아 잘 알 수는 없으나 비가 오는 것 같지 않아 다행 다행. 오늘 걸을 곳을 지도를 놓고 다시 한번 보니 아산만 일대의 U자 모양의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삽교천방조제 아사만방조제를 통해 충남 당진시를 떠나 아산시를 거쳐 경기도 평택시에 이르는 80여리길을 걷는 힘든 날이다. 날씨라도 좋아야 할턴데 작년 봄에 고생했던 왼쪽 발바닥 통증(족저근막증)이 좀 걱정스럽다. 괜찮겠지 하면서도.

아침식사장소인 8층 호텔 식당에 올라 보니 구름이 덮힌 하늘을 보면서도 모든 회원들 표정이 희희낙락(喜喜樂樂), 날씨를 걱정하는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어제 비속을 걸은 것이 그렇게 힘들지 않았는지. 모두들 따끈한 갈비탕으로 원기를 완전회복, 어떤 악조건도 쉽게 이겨나갈 것 같다.

우리는 버스에 승차, 한진포구로 이동, 이곳을 기점으로 오전 걷기를 시작하였다. 멀리 서해대교와 아득히 삽교천 방조제 윤곽이 어렴픗이 보이고 바다건너 아산시(牙山市)와 평택시(平澤市)로 짐작되는 산야가 보인다.

우리는 서해대교를 바라보며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나는 바다건너 아산시와 평택시를 건너다 보며 남해와 서해안을 걸으며 챙겨보았던 충무공(이순신)과의 마지막 총정리를 하고 싶었다.

우리가 걷는 아산시 코스에 현충사나 충무공 묘소(於羅山)를 찾을 계획이 없어 좀 아쉬웠지만 201211월에 이 부근을 지나는 것만으로도 나름대로 큰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금년이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지 7주갑(420)되는 임진해요, 음력이지만 11(19)은 충무공이 노량해전에서 장렬이 전사하였고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난 달이기도 하여서다.

그런데 충무공을 생각하며 떼어 놓을 수 없는 인물이 원릉군(原陵君:元均)인데 이분의 사당과 묘소(假墓)가 아산시 이웃 평택시 도일동에 있다. 나는 바다건너 아산과 평택을 건너다 보며 두 분의 숙명적인 관계를 떠올려 보았다.

충무공은 원래 한양 건천동(乾川洞: 인현동 명보극장부근)에서 태어나(1545) 이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다 10여세 때 부모님을 따라 외가인 지금의 아산으로 낙향, 이곳에서 성장하였다.

그런데 원릉군은 지금의 평택시 도일동에서 태어나(1540)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 15세 때 부모님을 따라 한양 건천동으로 상경하여 이곳에서 생활하였다.(유성룡은 1542년 경상도 의성에서 태어나 13세때 건천동으로 상경) 그래서 두 사람의 이런 인연 때문에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충무공과 원능군이 어린시절부터 가까운 사이였다고 기술하고 있으나 나이나 시간적인 간극(間隙)으로 보아 직접 교유할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무과급제이후 함경도에서 같은 시기에 근무했고 그 뒤 임란 당시에 같은 수사(全羅左水使. 慶尙右水使), 그 뒤 전란 중에 통제사(統制使)와 수사로, 그러다 통제사자리를 주고 받으며 남해에서 전사한 뒤, 이웃인 아산시와 평택시에 묻힌 인연을 가지고 있다.

나는 원능군에게 동정적인 애증(愛憎)을 가지고 있다. 원능군은 전란 중에 여러 가지 실책이 있었지만 임란 뒤 논공행상에서 충무공, 권률(權慄)과 더불어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3)으로 선정되었고 선조의 사랑과 기대를 모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후대의 역사적인 평가나 세론에서 무능하고 용렬(庸劣)한 인물로 매도(罵倒)되었다. 원능군이 충무공과의 이런 숙명적인 인연이 없었다면 당시 일반적인 무장 수준에서 그렇게 뒤떨어지지 않는 인물로 어떤 면에서 유능했던 무장으로 역사적인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원능군이 불행이도 충무공이라는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과 엮어짐으로 그와 여러모로 비교 평가 되어 지금의 원균상이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렇지만 최근 몇몇 인사들이 이런 원균의 잘못된 평가를 바로잡는다며 역사적인 사실을 도외시하고 그의 전공을 과장 왜곡하며 더욱이 충무공과의 얽힌 문제를 옳게 정리한다는 구실로 충무공을 폄하(貶下)하는 사례가 보여 식자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있다.

원능군의 역사적인 평가를 시정하려는 원균 옹호론을 전개할 수 는 있지만 이를 위해 충무공의 성웅상(聖雄像)을 훼손(毁損)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있어서도 않되는 일이다. 충무공이야말로 조국에 대한 충성심, 전장에서의 불굴의 용기와 신묘한 전략, 가정에서의 효성과 자애, 거의 완전에 가까운 고결한 인격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우리나라가 낳은 가장 위대한 성웅이라 하겠다.

나는 금년 4, 역사를 공부하는 후배 몇 분과 도일동의 원능군 사당과 묘소를 찾아 술잔을 놓고 참배하며 원능군 후손들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서 이들로부터 내가 구하고 싶어 하던 자료를 얻을 수 있어 고마워했던 일이 있었다. 이번걷기에 별로 찾는 사람 없는 원능군의 사당과 묘를 들러보았으면 하는 기대를 해보았지만 해안에서 떨어져 있어 코스에서 빠진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다음기회로 미룰 수밖에.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몇 분 회원과 주고 받으며 산업도로를 따라 행담도와 서해대교를 바라보며 걸었다. 바다에 오랜만에 갈매기 무리가 눈에 들어와 바다에 생동감이 느껴지고 주변 해안가에 굴뚝과 산업시설들이 여기저기 보여 걷는 피로를 잊게 해준다. 우리들은 서해대교밑을 지나 산업도로를 따라 걷는데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비속의 매산 해변 뚝길을 따라 계속 걸어 오전 도착지인 삽교호 함상공원에 도착, 버스에 승차, 점심 식당인 전라도횟집을 찾았다. 전통적인 전라도 우럭매운탕의 맛깔스러스럽고 따뜻한 국 맛은 비에 젖은 한기를 잊기에 충분하였다. 고맙게도 점심은 주재남 고문이 제공하여 모든 회원의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주었다.

오후걷기는 삽교천 전라도 횟집앞을 출발하여 오늘 저녁 숙소인 평택시에 대영파크장(현덕면 권관리)”까지 30여리 거리다. 더욱이 비바람이 부는 제방길이라. 걱정스럽다. 그런데 걱정스러워 긴장하고 있는 지휘부의 표정과 달리 회원들 표정은 여유만만(餘裕滿滿)들 하다 어제 빗길에 단련된 것인지. 우리는 이영균위원장의 안전에 대한 간곡한 당부를 들으며 삽교천 방조제 길에 올랐다. 오전보다 세찬 비바람을 받으며 걸음을 재촉하였다.

한참 걷다보니 어느 쪽이 내륙호수이고 바다 쪽인지 한참서서 주변을 살펴보아도 별로 감이 오지 않는다. 나이 탓인가. 앞서 걷는 남정현 3반반장에게 물어보니 정확하게 바다 쪽을 가르쳐준다. 그래도 낙오자 없이 무사히 방조제 뚝길을 내려 산업도로 갓길로 들어서 1열종대로 대오를 이루어 걷는다.

비는 여전히 바람과 함께 뿌리고. 드디어 우리는 오후3시경, 오늘의 최종 종착지 길인 아산방조제 길에 올랐다. 충청도를 하직하고 경기도로 걸음을 옮기며 아산 현충사를 찾을 때 마다 생각했던 것을 떠올려 보았다.

내가 현충사을 보며 가장 바랐던 것은 성역화라 하여 충무공의 인간적인 면모나 참모습이 감춰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예로서 충무공의 옛집은 당시의 모습으로의 복원이 아니라 통제사나 영의정의 새로운 관사나 저택으로 만들어져 충무공의 성장과정이나 생애를 엿보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있다.

언젠가는 충무공의 인간됨을 느낄 수 있는 옛집으로 복원되기를 기대해 본다. 이렇게 현충사가 계속 보완되어 충무공의 참모습을 가깝게 볼 수 있는 곳으로 우리역사와 함께 영원히 존속되기를 바라며 충무공에게 마지막 하직을 고하였다. 간혹 찾아 뵈였던 이곳 출신인 윤보선 전대통령 묘소(아산시 음봉면 동천2)를 향해 머리 숙혀 하직 인사도 하고.

아산방조제 길은 차갑고 세찬 비바람으로 우리 일행을 맞었다. 그런데다 제방 뚝길이 거칠다. 잘 다듬어지지 않은 큰 돌을 거칠은 세면트로 발라놓아 요철(凹凸)이 심하다. 그래도 회원모두가 걸음의 속도를 늦추지 않고 잘들 걷는다. 참대단하다. 5년여 걷기훈련의 결과인 것 같다.

나는 아산과 평택을 연결한 방조제길에 서서 이 지역에 얽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 옛 선인들은 이 지역을 산은 낮고 물은 천천히 흐르고 기름진들은 평평하다그래서 평택(平澤)이란 지명이 만들어진 것이라 이야기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평택이란 지명이 처음 등장 한 것은 신라 경덕왕 16(757) 행정구역명을 한자식으로 개칭하면서이고(지금의 팽성읍을 평택현), 아산(牙山)지명은 백제시대 아술현(牙述縣)에 기원을 둔 것 같다. 이 지역은 충청 전라 경상도를 연결하는 교통요충지이여서 고래로부터 각국 간에 쟁탈전에 대상이 되었던 곳이었다.

삼국시대에도 백제에서 고구려로 그 뒤 신라에 예속되었고 임진왜란 때도 격전지로 명군과 왜군 그리고 청일전쟁 때 한반도에서 첫 전투지역이였다. 6.25전쟁 때 도 이지역이라 볼 수 있는 오산에서 남하하는 북한군과 미군(스미스부대)과의 첫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기념비가 있음)

1597, 충무공이 통제사에서 파면 하옥되면서 일어난 정유재란 때 왜군은 칠천량해전에서 원균이 거느린 조선수군을 대파하고 기세등등(氣勢騰騰) 내륙으로 진격, 남원 공주 등을 함락하였다. 이렇게 북상하던 왜군이 이곳 평택시 소사(素砂)벌판에서 잠복해 있던 명군의 공격을 받고 대패 당해, 충무공의 명량승첩과 겹쳐 왜군은 기세가 꺾여 북상을 포기하였다.

명은 왜군에 대패 당했던 벽제관(碧蹄館) 전투에 필적할만한 임란에서 명군이 거둔 대승첩이라 기록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도 밭갈이할 때 이곳에서 당시 왜군의 총 칼 등의 유물이 발견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 이곳은 한말 우리나라를 사이에 두고 각축전(角逐戰)을 벌였던 청과 일본 이 처음으로 무력으로 충돌한 곳이기도 하다.

1894, 동학농민운동 당시 동학군에게 전주가 함락 당하자 당시 집권세력인 민비일파는 청에 원병을 요청하였고 청은 이를 한반도에서 자국세력을 만회할 수 있는 호기라 생각하고 청군을 파견, 아산에 주둔케 하였다.

이에 일본은 텐진조약(天津條約:청일양국의 파병에 관한조약)을 핑계 삼아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 인천에 상륙, 한양에 주둔하였다. .일 양군은 한반도에 증원군을 파견, 양군은 평택 아산으로 집결,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가 고조되었다.

결국 양국은 725, 선전포고도 없이 아산만 입구의 풍도(豊島:현재는 안산시)에서 해전을 벌려 전쟁의 막을 열었다. 이 풍도해전에서 일본군이 대승하였고(이곳 해저에는 당시 침몰한 청함이 아직도 남아있다고 함), 육전은 728, 소사벌판에서 벌인 전투에서 일본군의 대승으로 막을 내렸다.

81, 청일양국은 동시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면 전쟁에 돌입, 전쟁은 다음해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었다(1895). 그래서 전쟁초기 청일양국은 소사전투와 풍도해전을 두고 평택이 깨지느냐. 아산이 무너지느냐하며 전쟁의 승운을 걸었지만 결국 두 전장에서 승리한 일본이 전쟁의 승자가 되었다.

아산방조제길 걷기는 대한민국U자 걷기 5년동안에 처음 겪어보는 세찬비바람이었다. 더욱이 제방길이어서 몸을 숨길 수도 없어 빨리 이 길을 벗어나는 방법 밖에 없었다. 우리 일행은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도 속도를 높혀 가며 2시간여만에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제방길을 무사히 완주하는 성취감을 맛보았다. 수고한 회원들에게 지휘부는 예정에 없던 아산온천장의 따뜻한 선물을 선사해 비바람 속에 얼었던 몸을 풀어주었다. 나는 비목파 몇분과 어울려 즐거운을 시간을 가졌고.

저녁식사는 전주회집에서 꽃게탕백반과 막걸리, 거기에 겻들인 일공 심상석회원의 가고파 열창, 4, 2반의 합창 등으로 회원들의 빗속에 피로를 깨끗이 잊어주게 해주어 대영파크장(평택시 현덕면 권관리)”에서 경기도땅 첫 밤을 숙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다음날(117일 수요일)

 

새벽에 눈을 뜨자, 제일먼저 생각나는 것이 오늘 날씨, 다행히 일기예보에서는 비소리가 없어 마음이 행결 가볍다. 오늘은 어제보다는 10여리 짧은 70여리, 그렇지만 만만치 않은 거리다. 오늘도 무사히 완주하기를 마음속으로 되뇌여 본다.

아침식사는 전주횟집바지락 된장찌개 백반, 만나는 회원 모두 어제의 피로를 말끔히 털어 낸것 같다. 모든 회원이 원기왕성 다행스럽다.

아침 8, 선두의 지휘부 이영균위원장 이경환 대장의 선도에 따라 오늘 꼴인 지점인 화성시 우정읍을 향해 발걸음 옮겼다. 날씨는 다행히 비는 오지 않지만 구름이 많아 좀 불안하다. 다행히 9시경부터 햇살이 살아나 날씨 걱정은 안해도 되겠다. 일행의 뒤를 따라 서동대로를 걸으며 나는 주변에 풍경에 눈을 돌려 보지만 옛날 이 지역을 몇 차례 여행할 때 보았던 주변 풍경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세월도 많이 흘렀지만 그동안 변화의 규모와 속도가 엄청 컸던 것 같다. 이곳에 살던 친구의 안내로 낚시대를 메고 찾았던 옛 해안가의 모습을 찾을려 해도 어림짐작도 못하겠다. 한참을 걷다 보니 하만호길, 이 길을 따라 서해대교 밑을 지나 걸으며 처음 찾아 보는 평택항의 모습과 규모 그리고 부두마다 수출을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자동차대열을 보며 세계 10위권안의 수출대국이라는 조국의 모습을 확인, 놀랍고 자랑스러움에 정말 가슴 뿌듯한 희열에 잠기었다.

같이 걷는 회원 모두의 표정을 보니 나와 비슷하다. 1140분경, 예정대로 오전도착지점인 평택당진항부두 도로 끝지점에 전원 무사히 도착하였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버스에 승차, 점심식당인 영산나루로 이동, 소정자 회원이 베푸는 불고기 백반 정식으로 즐겁고 흐뭇한 식사시간을 가졌다.

오후 걷기는 30여리 거리, 우리일행은 반별, 남녀별로 대오를 이루어 여술근린공원을 거쳐 단풍든 나뭇잎이 일부남아 늦가을의 정취를 한 것 풍겨주는 길을 따라 걸었다. 더욱이 내왕하는 사람이 없어 우리만의 호젓한 분위기를 만끽(滿喫)하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걸었다. 걸으면서 누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천안함 사건, 연평도 사건으로 뉴스에서 보았던 제2함대사령부 앞이라고, 정말 시간이 있으면 찾아보고 격려해주고 싶었다. 한참 걷다 보니 드디어 오늘 최종 방조제인 남양방조제, 평택시와 화성시(華城市)의 군계가 지나는 길에 오르게 되었다.

평택시를 떠나며 이곳 출신 몇 분을 떠올리며 같이 걷는 회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화포 홍익한(花浦 洪翼漢:1586-1637), 병자호란때 척화파로 청에 잡혀가 죽은 삼학사(尹集, 吳達濟)의 한분으로 그의 묘와 포의각(褒義閣:碑閣)이 고향인 이곳 평택시 팽성읍 본정리에 있다. 공이 살았던 17세기는 중국에 명이 쇠망의 길을 걷고 여진족이 흥기하여 중국대륙의 패권에 도전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당시에 우리나라는 이전부터 명나라와 오랜 사대적인 우의관계를 유지해 왔고 임진왜란 때 도움을 받은 것에 대한 신의를 저버릴 수 없다는 유교적인 명분론이 양반층이나 사림들의 일반적인 정서였다. 성리학적 명분론이란 옳은 길이라면 나라가 망하고 흥하고 내가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말고 가야하는 것이 도리이기에, 은의를 지켜야할 나라가 힘이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옳은 길이라면 그 길로 가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바탕을 둔 공을 비롯한 삼학사 등의 척화론(斥和論)은 주화(主和)를 반대하고 적과 싸우자는 의기나 용기는 높이 평가 할 수 있지만 적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군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무시한 이러한 주장은 공리공담에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어떻든 그 뒤의 역사(남한산성의 비극적인 수모)는 당시의 현실론적인 입장에서 명에 대한 의리보다 국익을 우선했던 주화파나 인조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의 현명한 대외정책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 ?다고 하겠다. 이런 나의 생각을 몇분 회원과 주고 받으며, 몇 년전 학회 회원들과 이곳을 찾았던 생각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기었다.

또 잊을 수 없는 분으로 민세 안재홍(民世 安在鴻: 1891-1965)선생, 민세는 선각자로 일제강점기와 광복전후를 거쳐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인으로 지금까지 관심있는 식자들의 존경을 받고 계신분이다.

이곳 평택시 고덕면 두릉리에 선생의 생가가 있다. 선생은 조선일보 주필. 사장으로 언론활동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에 관심을 갖고 민족주의 사학자로 우리역사를 바로 세우는데 많은 업적을 남기셨고 특히 좌우합작을 위해 신간회 총무, 군정시대 민정장관으로 건국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2대국회의원으로 이곳에서 당선되었으나 6.25전쟁시 납북되였다.

최근 이런 민세의 사상과 뜻을 기리기 위해 민세 안재홍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져 민세상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금년 제3민세상은 정성헌 이사장(한국DMZ평화생명동산)과 한영우 교수(이화대학교 이화학술원장)가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민세상시상식에서 읽어졌던 이 나라의 논밭은 조선인이 먼저 갈아야하고---그것을 할 수 없는 곳에 함께 일어나 지켜야 하고 싸워야하고---” 라는 민세의 어록중 한대목에서 그의 조국애를 엿볼 수 있겠다. 미군정시대 신문에서 자주 보았던 민세의 안경쓴 옛 사진모습을 떠올려 보며 아직 찾지 못한 민세의 생가를 내년쯤에는 한번 찾아보기로 하고 걸음을 재촉하였다.

우리일행은 남양만 방조제를 지나 드디어 화성시에 진입, 기아자동차앞을 통과 남양만 해안도로를 딸아 걸었다. 우리가 걷는 화성시(華城市)는 수원과 떼어낼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화성이라는 지명자체가 수원에서 가져온 것이고 지역적으로도 오래 동숙했던 관계이다. 수원은 삼국시대 처음에는 백제, 다음에는 고구려 영토이었다.

삼국사기(지리지)에 보면 당시지명은 맷골-물골이라고 한자로 매홀(買忽)이라 표기하였다. 그 뒤 신라가 이 지역을 점유하면서 지명을 한자식으로 개칭 (경덕왕), ()는 물의 한자표기이므로 수성군(水城郡)으로 하였다. 고려때는 수주(水州)였다가 원종 12,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1271)로 바뀌면서 처음으로 수원이라는 지명이 등장했고 조선조 때도 수원도호부가 설치되였다.

그런데 당시에 수원은 지금의 수원자리가 아니고 지금의 수원에서 남쪽으로 20여리 떨어진 화산(花山)밑이었고 지금의 팔달산 밑으로 옮긴 것은 조선조 정조 13(1789)이고 모든 기구가 완전 이전한 것은 수원성이 완성된 정조20(1796)이다. 그리고 정조는 재위17년에 수원을 화성(華城)이라 개칭하였다.

지금의 수원성은 정조가 생부인 사도세자에 대한 지극한 효심에서 시작된 것이라 하지만 그보다도 정치적, 군사적(수도의 咽喉)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겠다. 정조의 사도세자 묘 이장은 묘 자리가 명당이라는 이유 때문만 아니라 묘 부근인 팔달산 밑에 정조의 꿈이 담긴 이상향을 건설하려는 계획, 즉 화성건설을 생각하고 묘를 이장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정조는 수원성이 완성되면 장차 썩은 신하(노론계 권신)들이 살고 있는 한양을 버리고 조선조의 중흥을 기하고저 수원성으로 천도하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수원성은 기존의 우리나라 성곽(平地城山城)의 약점을 보완하고 중국성과 서양성까지도 참고,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설계로 당시로는 최고수준의 성곽으로 축조되었고 세계최초로 만들어진 계획도시라 할 수 있다(정조는 築城全貌를 담은 華城城役儀軌 편찬).

정조는 화성에 서울의 관민을 이주시키고 시전(市廛: 관허상점), 국영농장(大有屯田), 수리시설(萬石渠, 萬年堤) 을 설치하고 또 새로운 병영(壯勇營)도 설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요지로 번영토록 하였으나 불행이도 정조의 급서(急逝)로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수원면이 읍으로, 정부수립이후 수원읍이 시로 승격(1949)하고 나머지 지역은 화성군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2001년 화성시로 승격하였다.

우리 일행은 오후 4시경 매향석천로 길을 통과 거의 예정시간에 오늘 걷기 도착지점인 우정읍 네거리에 도착, 버스에 승차 오늘 숙소인 발리모텔로 이동하여 숙소를 배정받고 인근에 있는 오늘저녁식당인 매향리 회정식집으로 옮겨 맛있는 회정식으로 오늘 하루의 피로를 풀고 가벼운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Horizons
Leif Ove Andsnes, pi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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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12.08 12:53

    첫댓글 10구간의 역사적 고찰 !! 아주 자세히 3일간의 여정을 그려 주셔서 여러번 읽어야 마음에 닿듯 잘 읽었습니다. 무사하 걸을 수 았으셨던 축복이 있으셨기에 감사하기만합니다.

  • 12.12.08 17:26

    윤종영 고문님의 10 구간 참가기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언제나 걸으시면서 역사적 지리적 고찰까지 생각하시어 좋은 글을 남겨주시니 감사드립니다. 어리 이창조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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