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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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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산 게시판 스크랩 [바람의 노래] 바람으로 남은 사람들
익명 추천 0 조회 32 09.09.12 19:4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바람의 노래] 독백

 

많은 이들이 산을 오르고, 수많은 이들이 그 산에서 잠들었다.

그들을 떠올려 본다.

최수남, 송준송, 전재운, 송준호, 고상돈, 지현옥, 고미영.... 내 후배 김지훈, 곽명자... 이루 열거할 수 없을 많큼 많은 이들이 산에 묻혔다.

 

혜은이 - 독백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독백, 슬픈인연外 3곡 .. 음악 목록보기 위의 리스트 클릭

음악을 들으며 먼저가신 그들을 떠올려 본다.

 

이 세상 모든 빛은 꺼지고 멀리서 밀려드는 그리움 조그만 내 가슴에 퍼지면 아련히 떠오르는 그모습
아직도 내귀에는 들리네 언제나 헤어지지 말자던 그말이 그러나 헛된 꿈이되었네 이제는 기다리며 살리라
오 그 모습 지워 버리려 눈을 감아도 감겨진 두눈엔 눈물만 흘러 내리네
아~
 
사랑한다는 말도 못하고 그렇게 멀어져야 하나요 그러나 떠나버린 날부터 이별의 서려움은 많았죠
아직도 내귀에는 들리네 언제나 헤어지지 말자던 그말이 그러나 헛된 꿈이 되었네
이제는 기다리며 살리라 오 그모습 지워 버리려 눈을 감아도 감겨진 두눈엔 눈물만 흘러 내리네
아아아~ -독백 혜은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으로 산화하여 한줌의 재로 변한 세상에 남겨 지기를 원했다.

죽어 재가 되어버린 나는 밤이 오면, 바위와 숲속의 흩어진 혼백을 불러 일으켜세워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고 싶다.

 

산마루에서 헤어진 그 사람은 그곳에서

기약없이 불어오는 바람으로 남아 있을까?  -외과의사 · 작가 전용문-   

 

▲ 등반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 그 짧은 헤어짐 속에 만남은 더욱 반갑다 ⓒ 2009 한국의산천 

비 내리고 개스로 가득한 산정. 사진은 뾰샤시하고...그래서 더 즐거웠다.   

 

나도 글을 쓸것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을 다 읽는 그날, 마지막 책장을 덮고 그 후 부터 글을 쓸것이다. -한국의산천- 

 

▲ 우리는 산을 오른다. 산으로 또 산으로 ⓒ 2009 한국의산천

 

암릉을 오르고 바위에 앉아 눈을 감고 귀 기울여 보라. 숲과 숲이 내통하고 바위와 바람이 몸을 섞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설악과의 내밀한 사랑을 꿈꾸는 이들은 저 멀리 바람 끝에 묻어오는 설악의 내음이 짙게 느껴질 것이니…. 사랑은 항상 목마른 법이다.


설악과 사랑에 빠진 산꾼이라면 가슴 어느 한 구석 어딘가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설악을 갈구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모순율을 가진 병이며, 설악에 가야만 치유되는 몹쓸 상사병이다.

설악의 부르심을 받았다면 별 수 없다. 떠나서 오르는 일이외는 답이 없다.

 

 

▲ 같이 자일을 엮었던 한국의산천팀 岳友들 ⓒ 2009 한국의산천 

 

저는 산악소설 " 바람으로 남은 사람들"을 읽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책장을 덮으며 아픈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저자인 전용문님과 매우 어렵게 통화를 했습니다. 저는 그분을 좋아합니다. 산의 선배로서, 신춘문예로 등단한 신경외과의사라기에... 

 

▲ 바람으로 남은 사람들 [전용문著]ⓒ 2009 한국의산천

오늘 다시 이책을 손에 잡았다 그리고 이곳 저곳을 읽어 내려갔다.  

   

전용문 그는 누구인가?

 

필자약력

 

1944 경남 마산 生

마산高 ·부산大 의대 

학창시절 부터 산을 다닌 전문 산악인

現 신경외과 의사(의학박사)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소설 <바람,저편> 으로 등단

주요 저서 : 산악소설 '바람으로 남은 사람들', 에세이집 '새벽에 찾아온 손님', 창작집 '후송병원의 개' '역설',수양애사'등 다수..

 

◀ 사진은 1980년대 설악산 대청봉에 올랐던 모습.

 

그날이 없었다면   전용문 /산악인 ·소설가 ·의사

 

 20년 전 어느 가을날, 내 영혼을 갉아먹기 시작한 운명의 톱날은 석양에 돋아났다. 그 전날 동창 모임에서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 다음 날은 일요일이고 과음한 후라 늦게까지 잠을 잤다. 충분히 잠을 자고 난 덕에 기분은 상쾌했고 온몸의 신경이 느슨하게 풀어진 듯한, 지극히 안온한 오후의 한때였다

 

신문을 보던중에 고개를 들고 서쪽 창으로 무심히 눈을 돌려 지고 있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지는 해를 무연히 바라보던중 나는 문득 젊은 한 시절 온통 나를 지배 했던 문학이라는 미망의 끝에 서고 말았다. '소설을 쓰고 싶구나'. 순간 그 희구는 너무나 간절하여 나를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게 옭아매기 시작했다.

 

나는 공책을 펼쳐 두고 밤이 이슥하도록 글을 써 내려갔다. 그렇게 해서 쓴 소설은 신문사로 보내졌고 이듬해 신춘문예 당선작이 되어 돌아왔다. 1988년이었다. 현실로 나타난 그 결과는 나에게 멈추지 않는 바람이었고 헤어날 길이 없는 미늘이 되어 나를 묶었다. 그때부터 소설 쓰기라는 암담한 절벽을 마주 보고 살지 않으면 안 될 운명과 맞부딪치게 되었다.

 

소설 쓰기는 순간적인 광기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 오랜 지구력이 동반 되어야 하며 소설을 쓰기 위해 바쳐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 신경외과 의사와 소설가의 병행은 대단히 힘든 작업이다.

 

나는 글을 쓰기 시작하면 완성을 볼 때까지 쫓겨 다니는 도망자처럼 갈팡질팡하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을 쓸 때였다.나는 진료실 뒤 골방에 처박혀 밤낮으로 소설 쓰기에 매달린 탓에 진료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환자들도 잠을 못 자 푸석푸석한 의사의 얼굴을 마주 보고는 간호사한테 넌지시 묻기도 했다. "원장님이 병색이 완연한데 어디가 아픈가요?" 간호사는 우물쭈물 대답을 미루었다.

 

욕심을 내지 않는다면 의사로서 모자랄 것도 없는 삶을 살 수 있었다. 한사코 그 평온한 길에서 벗어나 험한 길로 들어서기를 주저하지 않은 것은 내가 치러 내야 할 숙명적인 몫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에 와서 저 아득한 날의 장려했던 저녁노을만을 탓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오늘도 글쓰기에 매달려 운명의 한 시대를 넘기고 있다.  

 -좋은생각 2008년 1월호 78쪽 "그날이 없었다면"에 실린 전문-

 

▲ 설악 '한편의 詩를 위한 길'을 오르며 2009 한국의산천

병 속의 새를 꺼내는 것이 노승(老僧)이 갖는 유일한 화두였다면 나의 과제는 땅의 끝, 산의 꼭대기에서 하늘의 문을 여는 빗장을 벗겨내는 일이었소.

  

전용문 그는 의사인가 소설가인가 산악인인가.아니면 이 시대의 우울한 방랑자인가?   

그는 산악인의 눈에 비친 현실의 삶과 그곳에서 일어나는 스스로의 고통을 극사실적으로 써내려갔다. 삶의 슬픔을 통하여 산을 오르고 둘과의 아픔을 서로 위로했다. 이 책의 모든 글들이 마치 전용문 작가(의학박사)의 일상의 경험담처럼( 적어도 산행만큼은 경험적인 사실에 근거한 논픽션으로 보인다)  적어 내려갔다.

이책은 그 자신이나 주변에 관한 허무의 통곡인가 아니면 한번쯤 겪은 어두운 시절의 우울한 이야기인가. 또는 산꾼 아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이가 겪는 아픈 현실을 말한것은 아닌지...

 

 겨울, 설악산으로 향하는 내 유랑의 발길은 지긋지긋한 서울생활을 마감함으로써 출발점에 섰다. 가슴 깊은 바닥에서는 신산한 바람이 불어왔고 마음은 흘러가는 구름 같았다. 나는 왜 떠나는가? 떠나려고 하는 곳의 풍경은 그리움인가, 외로움인가? 이곳이 아닌 그곳으로의 이전은 내 마음속에 무의식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외로움이 동반된 은밀한 그리움이 그 근원일 것이다. 직장을 놓은 후 최악의 상태로 전락하는 걸 방지하고 어느 정도 생활의 리듬을 갖기 위해 선배의 소개로 강릉에 직장을 구했다. 커다란 밀레 배낭을 메고 비브람 슈즈를 신은 나는 중앙고속버스에서 내려 강릉에 첫발을 내딛었다. 눈이 내린 도시는 차갑게 얼어 있었고, 사람들은 외투자락을 펄럭이며 어딘가로 부산하게 떠나고 있었다. 1984년 겨울이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 환자라야 얼마나 있을 것인가, 하는 내 짐작과는 달리 내가 직장을 잡은 종합병원 신경외과에는 교통사고 환자들이 많았다. 아흔 아홉 굽이라는 대관령을 넘어 환자를 원주나 서울 쪽으로 이송하기가 쉽지 않아 영동지방에서 생기는 크고 작은 교통사고 환자들이 전부 강릉으로 몰려왔다. 편한 직장생활을 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많은 환자들의 뇌수술을 감당해야 했다. 주중에는 그렇게 바쁘다가도 주말만 되면 대부분의 의사들이 서울로 떠났다. 가족을 서울에 두고 혼자서 강릉 생활을 했던 탓이다. 과장들이 서울로 떠날 때 나는 혼자서 배낭을 꾸려 설악산으로 향했다.

 

산은 땅의 한 부분이지만 그 끝은 허공이다. 산을 오르는 것은 허공을 향해 가는 길이다. 산의 정상에 섰을 때 우리는 손으로 무엇 하나 잡을 수 없다. 그러함에도 사람들은 하늘의 문을 여는 빗장이라도 찾으려는 듯 산으로 오른다. 산은 사람들에게 가식된 생활의 일상을 벗겨내고 스스로를 직립해서 바라볼 수 있게 만든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거울을 찾기 위해 산을 향해 길을 떠난다. 순례의 길이기도 하다.

 

그날은 적설기의 입산통제가 내려진 날이었다. 주말에 갈 곳이 없었던 나는 배낭을 메고 무작정 길을 나섰다. 그 즈음 나는 삶에 대한 지독한 회의와 바닥 모를 염세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의 내 삶은 타당한가? 나는 밥을 먹어도 되며 잠들고 사람들을 만나 아무렇지 않은 듯 이야기를 나눠도 되는 것인가? 내 마음 밑바닥에는 무엇이 고여 있는가? 온갖 의문이 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뒤흔들어 놓는 걸 피하기 위해 혼자 눈 내리는 길을 떠났다. 발길은 속초행 버스 정류장에 닿았고 떠나기 직전의 냉기 서린 버스에 올랐다. 차창 틈새로 몰아치는 눈보라가 밀려들어 왔다. 한 시간 반을 달려 물치에 닿았다. 설악산으로 들어가는 초입이다. 어둠이 몰려오고 있었다.

 

늦은 시각이었는지 설악산 소공원으로 들어가는 매표소에는 사람들이 철수하고 비어 있었다. 소공원에서 비선대까지는 키 큰 나무들이 어둠 속에 장막을 펼쳐놓은 듯 길 양옆으로 나열해 있다. 등산객은 물론 신흥사에 들르는 사람 하나 없이 산은 텅 비어 있었다. 헤드 랜턴을 밝히고 캄캄한 산길을 걸었다. 나붓나붓하게 내리던 눈은 폭설로 바뀌었다. 비선대 바위를 건너뛰는 곳에는 눈이 상당한 부피로 쌓여 있었다. 마등령과 천불동 계곡으로 나뉘는 갈림길에서 아이젠을 묶었다. 짧은 시간에도 차가운 바람은 노출된 목덜미를 사정없이 파고들며 등허리를 훑고 지나갔다. 천불동 계곡 쪽을 선택했다.

 

설악골을 지나서 좌측으로 돌아 귀면암으로 내려서는 고갯길에 올랐다. 고개 위의 반반한 돌 위에 앉아 잠시 가쁜 숨을 가다듬었다. 이곳에서 바위굴을 만들어 처소를 삼아 간단한 음료를 팔며 생계를 이어왔던 유만석 씨를 생각했다. 그는 쉰 두 살 때 조난당한 등산객을 구한 후 자신은 계곡을 벗어나지 못하고 급류에 휘말려 죽었다. 폭우가 내리면 귀면암 아래로 지나는 계곡에는 사방에서 쏟아지는 빗물이 합류하여 좁은 골을 타고 흘러내린다. 커다란 바위조차 물 속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판에 설악산에서 터전을 잡고 살았다는 그도 급류에 휘말려 생명을 부지하기는 불가능했으리라. 죽은 후 그를 기리는 설악산 적십자 구조대원들이 동판에 글을 새겨 바위에 부착해 놓았다.

 

귀면암을 지났다. 어둠 속의 산은 사람들이 다닌 흔적 하나 없이 적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병풍바위를 오를 때는 기온이 떨어져 철 난간을 붙잡은 우모장갑이 쩍쩍 달라붙어 장갑을 난간에 매달아 둔 채 맨손만 빠져나오기가 일쑤였다. 얼음에 달라붙은 장갑을 떼어낼 때마다 무서리가 일 듯 얼음 파편들이 튕겨났다. 흰 눈 위에 헤드 랜턴의 불빛이 난파하는 배처럼 출렁거렸다. 어둠 같은 목마름이 일순간 여윈 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양폭산장에 닿으니 밤 10시가 지나 있었다. 배낭을 벗겨 내리고 겉옷을 벗었다. 가슴과 등짝으로 흘러내린 땀이 홍건했다. 캄캄한 야밤에 눈 쌓인 양폭산장 앞에서 반팔 셔츠만 입고 마른 수건으로 흘러내린 땀을 닦아 냈다. 영하 20도의 냉한은 벗어놓은 몸뚱이를 순식간에 동태처럼 얼어붙게 만들었다. 얼른 겉옷을 껴입었다.

 

양폭산장에서 맞은편으로 곧장 오르면 만경대와 맞닥뜨린 후 화채봉으로 붙을 수 있다. 그쪽 코스가 상당히 매력적이고 하산 후에도 교통편이 편리하다. 후에 강릉을 떠난 후 부산에 정착해서 소설을 쓸 때 그쪽 코스로 야간 등정하다 위장조난으로 자살하는 의사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 적이 있다. 그 소설은 '바람, 저편'이라는 이름이 붙어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날은 왠지 그 길을 피하고 싶어 오른쪽으로 꺾었다. 눈은 밤새 쉴 새 없이 내려 눈 위에 또다시 새로운 눈을 쌓아놓았다.

 

무너미 고개를 오를 때는 눈이 무릎 위까지 차올라 걷기가 매우 힘들었다. 몇 번이나 눈 위에 미끄러지며 배낭째 뒤로 나뒹굴면서 고생을 했다. 산을 오르는 것이 아니라 거대한 눈덩이 위를 걷고 또 걷는 고행이었다. 희운각을 지나 소청을 오르기 위해 바위가 많은 북쪽 사면을 지나면서 사람을 통째로 날려버릴 듯한 강한 바람을 만났다. 얼음같이 차가운 바람은 얼굴의 표피를 예리한 면도날로 도려내는 듯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면서 뺨이 마취가 된 듯 얼어버려 감각을 전혀 느낄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인적이 완전히 끊어진 산자락에는 설악을 할퀴고 지나가는 겨울 바람소리만 적막을 깨고 있었다. 건너편 공룡능선은 산허리를 길게 휘감은 눈과 그 사이로 쭈뼛하게 솟아오른 암봉들이 기묘한 대비를 이루며 깊고 푸른 별빛 속을 뚫고 시야 속으로 쏠려 들어왔다. 등산화도 눈에 젖었고 스패츠 한쪽은 앞쪽 고리가 벗겨져 제멋대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눈은 오버트라우저의 가랑이를 비집고 등산화 속으로 밀고 들어와 양말까지 흥건하게 적셔 놓았다.

 

대청봉에 섰을 때는 천천히 어둠이 걷히며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발아래 수많은 봉오리들이 눈앞에 정명하게 솟아났다. 산은 어둠을 걷어내고 원래의 모양 그대로 땅과 숲의 냄새를 토해냈다. 나는 새벽 산행을 가장 좋아하며 소중하게 생각한다. 살아나는 산의 정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루 중에 아주 짧은 시간에만 누릴 수 있는 기쁨이다. 첫 새벽, 하루를 비상하기 위해 깃을 털고 잠에서 깨어나는 산새의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밤새 눈 내리는 산길을 걸은 후 힘들게 도달한 정상에서 나는 빈손으로 무엇을 붙잡았던가? 한 줌의 청량한 공기? 비말처럼 부서지는 망상의 껍데기? 아니면 채울 수 없는 욕망의 앙금들? 알 수 없다. 그러나 그해 겨울. 눈 내린 설악이 내 가슴 깊은 곳에 웅혼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으므로 그 후의 23년을 살아 남았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 갈수 있을 것 같다. [출처 :부산일보]

  

▲ 선녀봉과 그 아래로 멋진 암릉 "경원대 릿지" "솜다리 추억 릿지"그리고 "별을 따는 소년" 릿지. ⓒ 2008 한국의산천

 

사람을 이끄는 그 묘한 매력을 가진 山

아! 

山行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언제나 산행은 갈망되고 이어 준비된다. -한국의산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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