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순자, 노자. 장자 , 상망의 思想
맹자
맹자는 기원전 372년에 나서 298년에 죽었습니다. 공자가 죽은 뒤 100년쯤 지나서 태어난 셈입니다. 앞의 대화에서 보았듯이 맹자 스스로도 공자를 이었다고 자부했으며, 후세 사람들 또한 맹자를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亞聖)'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래선지 생존 연대가 잘 맞지 않는 문제가 있음에도, 맹자가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인에게서 배웠다고 전해집니다.
맹자는 전국 시대의 철학자였습니다. 전국 시대는 공자가 활동했던 춘추 시대보다 혼란이 더 심했습니다. 봉건 체제 내의 하극상이 매우 잦아졌고, 민중에 대한 수탈이 극에 달했습니다. 맹자의 표현처럼 들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그득하고, 살아 있는 민중들도 굶주린 기색이 뚜렷했습니다. 그래서 위로는 부모를 모시기에 부족하고, 아래로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런데도 지배자들은 사치와 탐욕, 그리고 침략 전쟁을 일삼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점차 몇몇 세력 있는 제후들에게로 힘이 모아졌고, 맹자는 그 가운데 일부 임금들에게 질서 회복의 기대를 걸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제선왕, 양혜왕, 등문공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제후들은 맹자의 뛰어난 말솜씨에 걸려들기는 했지만, 그의 말대로 실천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당시 왕들에게 환영받은 주장은 부국 강병 전략인 합종책과 연횡책이었을 뿐입니다.
맹자의 이름은 가(軻)이고,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와 아주 가까운 추나라에서 태어났습니다. 추나라는 오늘날 중국의 산동성 남쪽 지역에 해당합니다. 맹자에게는 성장과 관련된 몇 가지 고사가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 교육을 위해 애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겠지만, 맹자 어머니도 아들 교육을 위해 무던히 애썼던 모양입니다. 처음에 맹자네는 묘지 근처로 이사를 갔습니다. 거기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은 장사지내는 일이었기에, 맹자는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장사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곤 했습니다. 이런 모습에 놀란 맹자의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집을 옮겼습니다. 이번에는 시장 부근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맹자는 물건을 팔고 사는 흉내를 내면서 놀았습니다. 맹자 어머니는 다시 학교 부근으로 이사했습니다. 그러자 맹자는 공부하는 흉내를 내면서 놀았고, 그제서야 맹자 어머니는 마음을 놓았습니다. 이 이야기가 유명한 '맹모삼천지교'입니다.
'맹모단기지교'라는 일화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 자란 맹자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맹자가 어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하던 공부를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와 버렸습니다. 이때 비단을 짜고 있던 맹자 어머니는 틀에 걸린 비단을 칼로 끊어 버림으로써 아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다고 합니다.
맹자의 생애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공자가 했던 것처럼 제자들과 함께 여러 나라를 찾아다니면서 도덕을 바탕으로 한 왕도 정치를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제나라 수도의 직문(稷門)아래에 학자 단지를 세워 놓고, 훌륭한 선비들을 초빙하여 우대하였습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을 직하학파(稷下學派)라고 불렀는데, 맹자도 한때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맹자의 주장에는 임금들이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민본 사상이나 혁명 사상이 그랬습니다. 따라서 어느 임금으로부터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맹자는 공자와 마찬가지로 70세 무렵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했습니다.
맹자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는 책이 <맹자>입니다. 이 책을 지은 사람이 누구인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맹자가 쓴 글도 있고, 제자들이 정리한 것도 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맹자는 모두 일곱 편이고, 각 편이 상하로 나뉘어 있습니다. 뒤에 주자가 대학, 중용, 논어와 한데 묶어 4서로 만들고 나서 유명한 책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인간의 참 모습인가
공자가 살던 시기에도 인간의 본성에 대한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중심 주제는 아니었습니다. 공자는 "인간의 본성은 소로 비슷한데, 습관에 의해 서로 멀어진다"는 말을 했을 따름입니다. 본성론은 맹자에 이르러 철하그이 중심 주제로 자리잡습니다.
이 같은 변화는 당시의 급격한 사회 변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혈연 관계에 기초한 강력한 통치력을 갖추고 있던 주나라가 후기에 접어들며, 혈연 관계가 점점 엷어지면서 큰 혼란에 빠졌고, 이 틈을 타서 제후들은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을 끊임없이 벌여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자식을 서로 바꿔서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전국 시대 중기와 후기의 사상가였던 맹자와 순자에서 인간 본성에 대한 관심이 논의의 핵심 주제가 된 것은 이런 사회 변동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맹자 이전에는 어떤 것을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을까요? 성(性)은 심(心)과 생(生)을 합쳐 만든 글자입니다. 글자대로 풀면, 성의 본래 뜻은 '마음속에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는 도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생리적 욕구와 감정이 같이 들어 있습니다. 원시 상태에서 인류가 본 자신의 모습은 도덕적인 면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보다 생리적인 면과 감정적인 면이 더 자연스러운 본질로 보였을 게 당연합니다. 이 같은 생각은 맹자 무렵까지도 계속 이어져 왔습니다.
맹자는 여기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습니다. 도덕성을 인간의 본질로 본 맹자의 성선설은 그때까지 내려온 인간의 자기 규정을 뒤엎은 혁명이었습니다.
맹자 당시에 인간의 본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어떤 논의들이 있었을까요? <맹자>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견해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첫째, 본래는 착한 요소도 없고, 악한 요소도 없다는 주장입니다.
둘째, 착해질 수 있는 요소와 악해질 수 있는 요소가 동시에 들어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 두 견해는 결과적으로 선으로도, 악으로도 갈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을 채우고 있는 내용을 본다면, 정반대인 셈입니다.
셋째는, 날 때부터 본성이 착한 사람도 있고, 나쁜 사람도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에 맞서 맹자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인간의 본성은 착하다고 했습니다. 맹자의 이러한 주장은 공자가 사람의 본질로 내세운 사람다움, 즉 인(仁)을 체계화한 것이라고 평가됩니다.
그러면 맹자의 주장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요?
맹자는 용자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하면서, 만일 어떤 사람이 누구를 위해 신발을 만들어 준다고 할 때, 그 사람의 발 크기를 모른다고 해서 신발 모양을 삼태기처럼 만들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그 까닭은 모든 사람의 발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맹자는 사람의 겉모습에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시 겉모습만이 아니라, 맛을 보고 소리를 듣고 모습을 보는 데도 공통점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외모나 감각 기관에만 공통점이 있을까요?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에도 공통점이 있으며, 이것이 바로 사람들의 도덕적 품성이라는 것입니다.
외모나 감각으로부터 마음의 공통점을 이끌어 낸 것은 뛰어난 유추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비약이기도 합니다. 사실 미각, 청각, 시각 자체는 생리적 본능에 속하는 감각이며, 맛있다거나 아름답다거나 소리가 듣기 좋다거나 하는 느낌들은 감각 능력을 통한 결과로서 의식 형태의 범주에 속합니다. 그런데 맹자는 본질적으로 선의 요소가 마음에 들어 있다는 가설을 입에 맛보는 기능이 있다는 생리적 사실과 일치시켰습니다. 이것은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을 하나로 보는 유가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는 증거로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의 예를 들었습니다. 누구든 길을 가다가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즉시 '저런, 저거 안 되는데'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황급히 달려가 아이를 구하는데, 그렇게 하는 것은 나중에 어린애를 구해 준 것을 빌미삼아 그 아이의 부모와 사귀어 보려 해서도 아니고, 동네 사람들이나 벗들에게 침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며, 사람들로부터 물에 빠지는 아이를 그냥 보고만 있었다는 비난의 소리를 듣기 싫어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모습을 본 순간 생겼던 순수한 마음, 이 마음을 맹자는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라고 부르며, 누구에게나 다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런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규정합니다.
맹자는 이런 마음말고도 자기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다 있다고 합니다. 이 마음들을 잘 기르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것들을 '착해질 수 있는 네 가지 실마리(四端)'라고 합니다. 맹자는 이 네 가지 단서가 사람 마음에 있는 것은 몸에 팔다리 네 개가 있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맹자는 4단을 선천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선천적인 요소를 '양지', '양능'이라는 말로도 설명했습니다. 양지 양능이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린 아이가 제 부모를 따를 줄 아는 것처럼, 배워서 아는 것도 아니고 따져 봐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태어나면서부터 저절로 갖춘 것임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맹자의 양지 양능은 뒤에 명나라 때 나온 양명학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맹자의 인간 규정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사람이 살아가는 현실은 이상과 다릅니다. 악한 행동과 그로 인한 혼란이 꼬리를 물로 일어납니다. 본래 착한 사람들이 왜 악한 행동을 하게 될까요? 그들의 나쁜 행동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맹자는 사람들이 하는 나쁜 짓은 본질적인 모습이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나쁜 행위 자체는 사람이 하는 것이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 환경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맹자는 그 증거로 산을 비유로 들어 말합니다.
본래 나무가 빽빽이 들어찬 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무꾼들이 매일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내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풀을 뜯어 먹여서 헐벗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헐벗은 산의 모습을 보면서, 저 산은 처음부터 나무가 없는 산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 산의 본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본성도 매일 나무를 잘라내듯 착한 마음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나쁜 환경 때문에 악한 짓을 하는 것이지, 그것이 본래 모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맹자가 산을 비유로 든 것은 썩 어울리는 설명은 아닙니다. 하지만 맹자는 환경적 요소에 따라 좌우되는 감정과 욕구를 악의 근원으로 보고, 그러한 힘은 내적인 자발성에 근거하지 않은 부차적인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자신의 철학을 세워 갔습니다.
군자의 본성과 소인의 본성
맹자가 살던 시대에는 노예부터 귀족에 이르기까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맹자가 본성이 착하다고 한 그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일까요? 보편적인 사람 모두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중 어떤 계층에 강조점이 있는 것일까요?
물론 맹자가 착하다고 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맹자는 분명히 남에게 차마 나쁜 것을 못 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고 했고, 또 4단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맹자의 말 가운데는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는 내용이 보입니다.
입이 단맛을, 눈이 아름다운 빛깔을, 귀가 밝은 소리를, 코가 향기를 좋아하고 팔다리가 편안함을 원하는 것이 본성이긴 하다. 하지만 그 속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命)'이 있기 때문에 군자는 본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맹자는 감각적·생리적인 것도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본성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체를 군자에 한정짓고 있습니다. 맹자가 부정한 감각적 생리적 본성이란 배고픔, 목마름, 피곤함 같은 것입니다. 배고픔을 의지로 참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감각 자체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맹자가 말한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란, 배고프다고 느끼는 것 자체는 내 의지 밖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본성으로 보지 않는 사람은 군자입니다. 따라서 군자가 아닌 사람들은 그런 것을 본성으로 보기도 한다는 말이 됩니다. 맹자는 그런 사람들을 소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면 군자의 본성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의예지입니다. 인의예지는 감각이나 생리적 욕구가 아닌 마음속의 도덕 의지에서 나옵니다. 맹자는 감각 기관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은 소인이고 마음이 하고자 하는 옳은 방향대로 따라가는 사람은 군자이며, 감각 기관은 천한 것이고 마음은 귀한 것이라고 합니다.
소인은 일정한 생활 근거가 있을 때는 변치 않는 마음이 있지만, 일정한 생활 근거가 없어지면 마음도 변하는 사람입니다. 군자는 이와 달리 일정한 생활 근거가 없을 때도 마음이 변치 않는 사람입니다. 즉 소인은 자기 밖의 변화에 따라 안이 달라지는 사람이지만, 군자는 밖의 변화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는 사람입니다. 맹자는 군자를 선비, 대인이라는 말로도 부릅니다.
그러면 맹자가 말하는 군자·선비·대인은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떠한 지위에 있고 어떠한 역할을 하는 사람일까요? 맹자는 소인과 대인이 사회에서 하는 역활을 다음과 같이 나눕니다.
대인이 할 일이 따로 있고, 소인이 할 일이 따로 있다. 사람이 살아가자면 여러 공인들이 만든 물건이 필요하다. 하지만 만일 그 모두를 반드시 스스로 만들어 쓰게 한다면, 온 세상 사람들을 끌어다가 일에 지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은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어떤 사람은 몸을 수고롭게 한다고 했다.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사람은 남을 다스리고, 몸을 수고롭게 하는 사람은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다. 남에게 다스림을 받는 사람은 남을 먹여 주고, 남을 다스리는 사람은 남에게 얻어먹는 것이 온 세상에 통하는 원칙이다.
대인은 마음 고생을 하면서 남을 다스리고, 그 대가로 남이 생산한 식량을 먹는 사람입니다. 소인은 몸 고생을 하면서 남에게 다스림을 받고, 자기를 다스리는 사람을 먹여 살리는 사람입니다. 맹자가 본 본성이 착한 사람은, 사실상 통치 지위에 있거나 아니면 통치 지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맹자는 현실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지배 계층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그들의 내면에 본질적으로 들어 있는 선의 요소를 완전히 발휘하여 현실의 혼란을 종식시킬 것을 바랐던 것입니다.
이러한 맹자의 주장에는 지배 계층의 입장에 선 군자·대인·선비의 교화에 의해 세상을 바로잡을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한계가 보입니다. 실재로 주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지배층을 군자라고 불렀으며, 피지배층은 소인 또는 민(民)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춘추 시대의 혼란은 신분 질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신분 질서의 변화는 지배 계층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피지배 계층에서도 엄청나게 심했습니다. 이러한 신분 변화를 통해 농노의 신분에서 벗어난 계층도 많아졌으며, 이들을 일반 백성(民)과 구별하여 소인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맹자가 모든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고 함으로써 소인과 민까지를 포함시킬 수 있게 말한 부분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것은 피지배 계층인 소인과 민에게 지배 계층인 군자·대인·선비의 교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 근거를 주기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이런 점이 유가가 민중 중심의 묵가 사상과 본질적으로 다른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맹자의 성선설에는 지배 집단이 피지배 집단보다 도덕적으로 뛰어나다는 의미 외에 다른 가치는 없는 것일까요? 물론 맹자의 주장이 후대 정권 담당자들에 의해 지배를 합리화하는 도구로 쓰였던 것은 분명합니다. 역사상 지배 집단은 언제나 피지배 집단보다 도덕적으로 뛰어나며, 따라서 피지배 집단을 교화할 능력과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리화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시의 시대적 조건 속에서 맹자 사상의 긍정적인 점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 당시는 엄청난 변화의 시대였습니다. 피지배 계층인 민중도 그러한 변화 속에서 신분 상승을 이룰 수 있는 기회가 많았습니다. 맹자는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이전까지는 노동 도구로서만 의미가 있었던 민중에게도 인간의 본질인 선의 요소가 들어 있음을 인정하여, 민중을 도덕적 실현이 가능한 범주로 끌어올린 것입니다. 비록 교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 정도의 의미이긴 하지만, 민중을 주체적 인간으로 파악하려 한 노력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둘째, 맹자는 군자·대인·선비에게 통치의 역할을 인정함으로써 그들의 지배를 합리화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도덕 실천을 통한 자아의 완성이라는 책무를 주었습니다. 그 결과 그의 정치 사상에서 보이는 것처럼 민중을 위해 지배 계층의 더 많은 양보를 확보해 내려 했습니다.
셋째, 맹자가 살았던 때는 전국 시대 중기였습니다. 당시는 이미 주나라 왕실이 유명 무실해졌고, 그 틈을 타서 힘을 길러 무력으로 통일을 이루려는 제후들이 큰 세력을 잡고 있었습니다. 맹자는 그들 가운데 몇몇에게 천하 통일의 기대를 걸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힘을 길러서 통일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맹자의 생각과 맞지 않았습니다. 맹자는 이런 거싱 모두 이익 추구에서 오는 것이며, 근본적인 원인은 인간의 생리적 본성을 중시하는 데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배 집단 혹은 지배 집단이 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본성이 감각적인 부분이 아니라 도덕적인 부분임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유가의 파수꾼
맹자가 살던 시기에 유가는 어떤 계층으로부터도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맹자는 사람들이 대부분 양주 아니면 묵적을 따른다고 비판했습니다. 이런 맹자의 비판 의식은 우리 나라 조선 후기에 천주교로 대표되는 서양 사상의 유입에 대응하는 척사 위정 논리의 근거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실 유가 이론은 지배 집단의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용적으로는 기존 질서를 지키려는 뜻이 강하게 들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맹자는 전통 질서와 신분제를 부정하는 민중 중심의 이론을 단호하게 배척했습니다.
맹자가 배격 대상으로 삼은 것은 크게 세 가기 사상입니다.
하나는 양주의 사상이었습니다. "내 몸의 털 한 가닥을 뽑으면 온 세상이 잘된다고 해도 나는 하지 않겠다"는 말에서 보이듯 양주의 사상은 극단적인 개인주의였습니다. 남으로부터 빼앗기지 않지만 결코 남을 위해 희생하지도 않겠다는 사상입니다. 일반적으로 양주의 사상은 노장 계열의 사유 체계로 봅니다. 이러한 사유는 언제나 지배 집단의 강압에 희생당하기만 하는 피지배 집단의 소극적인 저항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는 일반인의 개성이 존중되지 않는 봉건제 사회였습니다. 전국 시대의 혼란이 봉건적 질서의 붕괴에서 왔다고 보는 유가가 피지배 집단의 개성을 논함으로써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양주의 사상을 큰 적으로 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맹자는 양주의 사상을 따지면, 결국 자기 임금을 부정하게 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두번째 배격 대상은 묵자였습니다. 묵자는 지배 집단을 향해 피지배 집단을 똑같이 사랑하고, 이익을 함께 나누자고 외쳤습니다. 게다가 주장만으로 그치지 않고 집단을 통한 사회적 실천으로까지 나아갔습니다. 맹자는 묵자의 무차별한 사랑은 자기 아버지를 남의 아버지와 똑같이 사랑하라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자기 아버지에 대한 부정이 된다고 비판하였습니다.
세번째 배격 대상은 허행으로 대표되는 농가였습니다. 그들은 지배 계급이 노동하지 않는 것을 반대하면서, 임금도 백성과 함께 농사지어 먹고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맹자는 그들이 농사를 직접 짓기는 하지만 모자나 솥은 자신들이 생산한 곡식과 바꿔 구입한다는 데 착안하여, 지배 집단도 분업의 논리에 따라 다스리는 일을 맡은 사람들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맹자가 주 공격 대상으로 삼은 사상들은 모두 지배 집단에 불리한 것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맹자 사상의 또 다른 모습인 보수적 성격을 볼 수 있습니다.
참다운 임금의 길
맹자는 전국 시대의 혼란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왕도 정치의 실현이라고 보았습니다. 맹자의 왕도 정치 이론은 성선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성선의 근거는 하늘에 있습니다. 왕도 정치는 도덕의 근원인 하늘의 뜻을 실현하는 일인 동시에 하늘로부터 받은 인간의 착한 본성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인류는 자연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대 중국인들은 자연의 꼭대기에 하늘을 놓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맹자의 하늘은 단순한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도덕의 근원이었습니다. "사람이 제 마음을 다하면 자기의 본성을 알게 되고, 자기의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고 한 말은 이러한 맹자의 생각을 잘 나타내 줍니다.
하늘이 도덕의 근원이라는 생각은 정치적 입장을 설명하는 이론으로도 연결됩니다. 맹자는 도덕의 근원인 하늘이 덕이 많은 사람을 택해 임금을 시킨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통치자는 하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도덕에 바탕을 둔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착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그 본성을 잘 기르면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본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임금은 어진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잘 기르면 왕도 정치를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왕도 정치는 덕으로 하는 정치이고, 그 반대는 힘으로 하는 패도 정치입니다. 사실 고대부터 오늘까지 어떤 통치 집단도 국가와 사회와 민족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 자기 자신이나 자기 집안을 위해 일한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힘으로 다스리는 독재 권력도 언제나 민주를 가장합니다. 맹자가 주장한 참다운 임금의 길은 바로 이 같은 통치 집단의 허위 의식에 대한 지적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맹자가 양나라 혜황을 만났다. 왕이 맹자에게 물었다.
"선생께서 천리길을 멀다 않고 저희 나라를 찾아 주셨으니 저희 나라에 무슨 이로운 일이 있게 될까요?"
"왕께서는 하필이면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과 의가 있을 뿐입니다. 임금께서 어떻게 하면 내 나라에 이로울까를 따지면 벼슬아치들은 어떻게 하면 내 집안에 이로울까를 따지게 되고, 선비나 일반 민중들은 어떻게 하면 내게 이로울까를 따지게 됩니다. 그러면 나가가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맹자는 철저하게 이익을 배격했습니다. 심지어 맹자는 전쟁이 이롭지 못하다고 설득함으로써 초나라와 진나라의 싸움을 말리려 했던 송경이라는 사람을 보고,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설득해서는 안되며 오직 인과 의로써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면 인과 의에 기초한 왕도 정치란 어떤 모습일까요?
양혜왕이 고민스러운 표정으로 맹자에게 물었습니다.
"저는 나라를 다스리는 데 온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어떤 지방에 흉년이 들면 그 곳 뱅성들 가운데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을 다른 지방으로 옮겨 주고, 거동이 어려운 노약자를 위해서 곡식을 날라다 줍니다. 다른 지방에 흉년이 들어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합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저만큼 백성들에게 마음을 쓰는 임금이 없는데, 어째서 이웃 나라 백성이 줄지 않고 우리 나라 백성이 늘지 않는 것일까요?"
당시 제후국들은 독립적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모두 주나라에 속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언제라도 국경 통과세만 내면 다른 나라에 가서 살 수 있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 백성들을 크게 위한다는 소문이 나면 그 나라로 백성들이 몰리는 것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백성들이 느는 것은 노동력과 군사력이 느는 것입니다. 따라서 강한 나라를 만들어 천하를 틀어쥐려는 야심을 가진 양혜왕이 백성이 늘지 않는다고 고민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맹자는 양혜왕의 고민에 찬 질문에 대해 첫 마디부터 비꼬는 태도로 응수합니다.
"왕께서 전쟁을 좋아하시니까 제가 전쟁에 빗대어 말씀드리지요. 한참 맞붙어 싸우다가 힘이 달려 갑옷도 내던지고 무기를 질질 끌면서 달아나는데, 어떤 자는 쉰 걸음 도망가서 멈추고 어떤 자는 백 걸음 도망가서 멈추었습니다. 쉰 걸음 도망간 자가 백 걸음 도망간 자를 비웃으면서, '야, 이 비겁한 놈아!'하면 어떻겠습니까?"
"말도 안 되지요. 백 걸음이나 쉰 걸음이나 달아난 것은 마찬가지지요."
양혜왕은 맹자의 논리에 걸려들었습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맹자는 흐르는 물처럼 자기 주장을 펴 나갑니다.
"그런 이치를 아신다면 이웃 나라보다 백성이 많아지기를 바라지 마십시요. 백성들의 농사철을 빼앗지 않는다면, 곡식이 다 먹지 못할 정도로 많아지겠지요. 가는 그물로 어린 물고기까지 잡지 못하게 한다면, 다 먹지 못할 만큼 물고기가 많겠지요. 적절한 때에만 나무를 베어 내게 한다면, 재목이 쓸 수 없을 만큼 많아지겠지요. 이렇게 하면 산사람이 먹고 사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며, 죽은 사람 장사지내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왕도 정치의 시작입니다.
백성들에게 집 주변 땅에 뽕나무를 심게 하면 50세 이상 노인들이 비단옥을 입을 수 있고, 닭·돼지·개 같은 가축의 번식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하면 70세 이상 노인들이 고기를 먹을 수 있겠지요. 한 가구가 농사지어 먹을 수 있을 만한 땅에 농번기의 일손을 빼앗지 않는다면, 식구들이 굶주리지 않겠지요. 학교 교육을 잘 실시하고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간의 우애를 되풀이해서 가르치면, 머리 허연 노인들이 짐을 진 채 길을 가지 않게 되겠지요. 이렇게 하고서도 왕 노릇 하지 못한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위의 대화에서 보았듯이 맹자가 무조건 도덕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경제적 토대가 없는 왕도 정치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으며, 민중의 삶을 확보해 주고 나면 왕 노릇이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정전제를 실시하여 그 땅에서 난 수확에 대해 10분의 1의 토지세만 걷어야 한다는 견해와, 점포세와 국경 통과세를 폐지 하자는 명자의 주장들은 왕도 정치 실현을 위한 구체적 방안이었습니다.
음악도 여자도 제물도 민중과 함께
맹자가 하루는 제나라 성왕을 만나 물었습니다.
"어떤 신하에게서 들으니 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신다는 데 사실입니까?"
왕은 얼굴이 벌개지며 부끄러운 듯 대답했습니다.
"사실 제가 좋아하는 음악은 유행가입니다."
"왕께서 음악을 좋아하신다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습니다. 본래 음악이란 가곡이나 유행가나 원리는 같으니까요. 그런데 혼자서 음악을 즐기는 것과 남과 더불어 함께 즐거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좋을까요?"
"그야 여럿이 즐기는 게 좋겠지요."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즐기는 것과 몇 사람이 즐기는 것은 어떨까요?"
"많은 사람이 즐기는 것이 좋겠지요."
제선왕도 맹자의 말에 말려들었습니다. 맹자는 신이 나서 거침없이 하고 싶은 얘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면 음악을 가지고 얘기해 보지요. 왕께서 음악을 연주하는데 배성들이 듣고는 머리를 흔들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우리 임음 음악 되게 좋아하지. 우리는 이 지경으로 사는데 말야'라고 말합니다. 또 왕께서 사냥을 나가는데 백성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머리를 흔들고 얼굴을 찡그리면서 '우리 임금 사냥 되게 좋아하지. 우리는 이 지경으로 사는데 말야'라고 말합니다.
또 반대로 왕께서 음악을 연주하는데 백성들이 듣고는 좋아서 벙글대며 '우리 임금 다행히 건강하신가 봐. 어쩌면 저리도 연주를 잘 하실까'라고 말합니다. 또 왕께서 사냥을 나가는데 백성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좋아서 벙글대며 '우리 임금 다행히 건강하신가 봐. 어쩌면 저리도 사냥을 잘 하실까'라고 말합니다. 이 차이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왕께서 백성과 함께하느냐 그러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며칠 뒤 제선왕이 다시 맹자를 보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왕도 정치를 할 수 없나 봅니다. 제게는 재물을 좋아하는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슨 어려움이 되겠습니까? 재물 좋아하는 것을 백성과 함께 하십시오. 떠나는 사람이 언제나 임금 창고의 곡식을 가지고 떠날 수 있고, 그대로 머물러 사는 사람들이 언제나 임금 창고의 곡식을 먹을 수 있으면 됩니다."
"아, 그렇겠군요. 그런데 제게는 또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제가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게 무슨 흠이 되겠습니까? 여자 좋아하는 것을 백성과 함께 하십시오. 그래서 시집 못 간 처녀와 장가 못 간 총각이 없게 하시면 됩니다."
며칠 뒤 제선왕이 맹장를 보고서는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터덜대면서 물었다.
"문왕의 사냥터가 사방 70리였다는 말이 정말입니까?"
"예,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사냥터는 사방 40리밖에 안 되는데도 백성들이 넓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문왕은 사냥터가 사방 70리나 되었지만 그 사냥터를 백성과 함께 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배성들은 오히려 좁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왕께서는 사방 40리의 사냥터를 혼자서만 쓰면서 그 안에 들어와 사냥을 하거나 나무를 베면 벌을 줍니다. 이것은 나라 안에 사방 40리짜리 함정을 파 놓은 것과 같으니, 어찌 넓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맹자의 왕도 정치는 현대 민주주의에서 보면, '민중에 의한' 정치나 '민중의' 정치는 아니었고 단지 '민중을 위한' 정치였습니다. 하지만 2000여 년 전의 절대 군주들에게 백성들에 대한 양보를 요구한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맹자는 군주들을 향해 민중을 위하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귀한 것이 백성이고 그 다음이 국가이며 가장 가벼운 것이 임금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마음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 것이라고 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덕이 없는 임금, 즉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 임금은 갈아엎어야 한다고까지 했습니다.
백성이 따르지 않는 임금
맹자는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는 사람이 왕이 될 수 있으며, 그 천명은 덕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천명을 받았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맹자는 민중이 따르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예전에 요임금이 순에게 왕위를 주었다. 그러자 순은 요의 아들이 있는데 자신이 어떻게 왕이 될 수 있느냐고 하면서 숨어 버렸다. 백성들이 모두 순을 쫓아갔다. 순은 신하인 우에게 왕위를 주었다. 우도 순의 아들이 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다고 하며 숨어 버렸다. 역시 백성들이 우를 쫓아갔다. 우도 신하인 익에게 왕위를 주었다. 익 또한 우의 아들이 있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다고 하며 숨어 버렸다. 그러나 백성들은 익을 쫓아가지 않았다.
맹자는 백성이 따르지 않는 임금은 이미 천명이 떠난 임금이며 따라서 혁명이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맹자는 그런 점에서 하나라를 무너뜨리고 은나라를 세운 탕임금의 혁명이나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혁명을 긍정했습니다. 그는 탕왕이 하나라의 폭군 걸을 죽은 것이나 무왕이 은나라의 폭군 주를 죽인 것은 못된 사나이 하나를 죽인 것일 뿐, 신하가 임금을 죽인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맹자는 또 이 혁명 전쟁이 아주 치열해서 피가 강물처럼 흘러 쇠절구공이가 둥둥 떠내려갔다는 옛 기록을 부정합니다. 백성들이 따르는 임금이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 한 사나이를 치는데 전쟁이 심했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맹자의 혁명론에는 한 가지 필수 전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혁명 주체에게 민중의 뜻에 근거한 도덕성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과거 봉건 왕조의 교체는 언제나 혁명이냐 아니냐의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5·16rhk 12·12의 주체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혁명이라고 강변하지만, 역사가 준엄하게 군사 쿠테타로 규정한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맹자의 혁명론은 지배 집단에게는 반갑지 않은 것이었지만, 임금이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주장이었습니다.
꿋꿋함은 어디서 오는가
<맹자>에 나타난 맹자의 모습은 당당합니다. 그런 꿋꿋함은 어디서 왔을까요?
맹자는 제자 공손추와의 대화에서 용기 있는 옛 사람으로 북궁유와 맹시사, 그리고 증자를 듭니다. 북궁유는 바늘로 눈을 찔리면서도 깜박거리지 않고, 모욕을 당하면 상대가 누구든 가리지 않고 반드시 보복을 하는 사람입니다. 맹시사는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이길 것처럼 대드는 사람입니다. 증자는 스스로 자신을 돌이켜보아 거리낌이 없으면 천만 명과도 대적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의 용기를 평가하고 나서 맹자는 자기가 호연지기를 잘 기른다고 덧붙였습니다. 맹자의 꿋꿋함은 바로 호연지기에서 온 것입니다.
호연지가가 무엇이냐는 공손추의 질문에 대한 맹자의 첫 마디는 "설명하기 어렵구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호연지기가 온 세상을 꽉 채울 수 있는 도덕 기운임을 밝힙니다. 호연지기는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실천을 통해 쌓은 정당함에서 나오는 기운입니다. 사실 맹자 이전의 기에 대한 이해는 대자연의 기운이나 인간의 혈기와 같이 자연적인, 또는 생리적인 것이었습니다. 맹자는 호연지기를 도덕적 실천을 길러진 도덕 기운으로 파악함으로써 기 개념을 확대 발전시켰습니다.
호연지기를 가진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일까요? 맹자는 세상에 살면서 올바른 자리에 서서 도를 실천해 가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부귀로 유혹해도 마음을 바꾸지 않고, 위협이나 무력에 굴복하지 않으며, 가난 같은 어려운 상황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맹자는 이런 사람을 대장부라고 하였습니다.
맹자는 강한 자기 확신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선이며 그 근거는 하늘이라고 하면서, 왕도 정치를 통해 인간의 선한 본성을 사회에 실현해 보려고 했습니다. 맹자는 자기 마음을 다함으로써 사람의 본성이 어떠한 것인가를 제대로 깨달은 사람을 하늘의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맹자가 바라본 사람은 사회를 떠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은 사회 속에서 실천하는 존재이며, 그 경우 강한 힘은 인간 본질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한다고 본 것입니다. 맹자의 사상은 후대 유학자들의 참된 표본이 되었으며, 지배 계급에게는 항상 경종이 되었습니다.
순자
순자는 공자와 맹자를 이어 유가 철학을 발전시킨 사람입니다. 순자가 언제 나서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대체로 기원전 298년 무렵에 나서 238년 무렵에 죽은 것으로 추정할 뿐입니다. 기원전 298년은 공자가 죽은 지 200년쯤 뒤이고, 맹자가 죽은 무렵입니다. 당시는 혼란이 극에 이른 전국 시대 말기였지만, 한편에서는 서서히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순자의 이름은 황(況)이고, 자는 경(卿)입니다. 순(筍)자가 손(孫)자와 발음이 비슷해서 손경이라고도 불렀는데, 경이란 벼슬한 사람에 대한 존칭이기도 했기 때문에 순자를 귀족 출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중국 고대의 가장 믿음직한 역사서인 <사기>는 순자의 일생을 50세 무렵부터 적고 있습니다. 50세 이전에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습니다.
젊은 시절의 순자는 어디로 갔을까? 아마도 이 점은 순자에 대한 뒷 사람들의 평가가 별로 긍정적이지 못했던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순자는 공자나 맹자의 삶과 비교해 볼 때 살아 있을 당시 상당한 영광을 누린 사람이었습니다. 순자는 조나라에서 태어났으며 50세 무렵에 제나라로 갔습니다. 당시 제나라로 모여든 학자들을 직하 학파라고 했다는 것은 앞서 이야기했습니다. 수자는 직하에서 가장 덕망 있는 학자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래서 직하의 최고 사상가가 맡는 좨주 벼슬을 세 번이나 지낼 수 있었습니다. 좨주는 대부 정도에 해당하는 명예직에 지나지 않았지만, 국가의 큰 행사가 있을 때면 술을 부어 제사하는 일을 담당하는 벼슬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가장 덕망 있는 사람에게 맡겨지는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순자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마침내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로부터 참소를 당한 순자는 제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갑니다. 진나라는 당시 최강대국이었으며, 부국 강병을 주장하는 법가 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덕을 강조하는 순자의 사상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습니다. 그 뒤 순자는 조나라에 잠시 머물렀다가 나중에는 초나라의 실력자 춘신군 밑에서 난릉이라는 지역을 맡아 다스리게 됩니다.
난릉은 사방 백 리 정도의 작은 고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가 순자가 처음으로 자신의 철학을 구체적으로 실천해 본 시기였습니다. 춘신군이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에서 살해당하자 순자는 그대로 난릉에 정착합니다. 그리고는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짓는 일로 여생을 보냅니다.
순자의 제자 가운데서 법가 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세운 한비자와 진시황을 도와 중국을 통일한 이사가 나옵니다. 그러나 후대 학자들은 한비자와 이사를 유가 사상가로 보지 않고, 순자를 법가 사상가로 보지도 않습니다. 순자는 유가와 법가의 갈림길이었던 셈이며, 순자의 현실 지향적 사고가 법가 사상의 모체가 된 것입니다. 덥스는 순자를 원시 유가를 틀에 구어 낸 사람이라고 평하였습니다. 순자가 예를 강조하면서 공자의 사상을 구체화시킨 점에 대한 평가일 것입니다. 이런 평가는 순자의 사상 속에 현실 지향적 측면이 들어 있음을 잘 지적한 것입니다. 사실 후대 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순자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사유를 통해 유가의 본질인 인본주의가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순자는 사후에 몹시 불행해졌습니다. 죽은 뒤에 그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송나라 이후 성리학자들은 공자의 맥을 정통으로 이은 사람으로 맹자를 꼽았고, 그 뒤로는 도통이 끊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평가가 나온 근본적인 이유는 순자가 인간의 본질을 악하다고 규정했기 때문입니다. 그 뒤 현대로 들어오기 직전까지 순자는 사상사에서 거의 매장되다시피 했습니다.
순자의 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 책이 <순자>입니다. <순자>는 본래 323편이었다고 하는데, 한나라 때 유향이 32편으로 정리했습니다. 책의 편제는 대화체가 많은 논어나 맹자와는 달리 논문식으로 되어 있으며, 제자들의 기록이라고 짐작되는 일부분을 빼면 대부분 순자가 직접 쓴 글로 보입니다. 어떤 학자들은 <예기> 가운데 많은 부분을 순자가 지은 것으로 보기도 하고, 증자가 그의 문인들과 함께 지었다고 하는 <대학>도 순자의 글로 보기도 합니다. <순자>에 들어 있는 대부분의 글은 표현이 소박하며 꾸밈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글의 전개 방식의 체계적이며, 비교적 논증이 세밀합니다. 이 점은 순자의 철학이 객관적 방법론 토대 위에 서 있음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악설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악하다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면, 착하다고 대답하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이 점은 철학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본성을 선으로 규정한 철학자가 대부분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어떤 사람이 인간의 본성을 착하다고 생가가하는 것과 그렇게 생각하는 그 사람 자신이 과연 착하냐 하는 것은 별개 문제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보는 문제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자신이 악한 사람인간의 문제와는 별개입니다. 그런데도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악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상한 눈으로 보기 마련입니다. 아마 이런 탓이었을까요? 순자는 생존 당시를 빼놓고는 역사적으로 별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특히 송나라 이후의 유학자들은 순자를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순자는 무슨 근거로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한 것일까요? 순자도 맹자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선천적인 것으로 규정합니다. 본성이란 배우거나 노력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도덕적인 측면에 주목한 맹자와 달리 순자는 배고프면 먹고 싶고, 추우면 따뜻하게 하고 싶고, 피곤하면 쉬고 싶은 인간의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욕구에 주목했습니다. 이 욕구는 귀가 좋은 소리를 듣고 싶어하고, 눈이 좋은 빛깔을 보고 싶어하는 감각 기관의 이기적 욕구와도 통합니다. 순자는 이러한 생리적 욕구에 바탕한 이기심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욕구대로 간다면 다툼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순자가 볼 때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 춘추 전국 시대의 혼란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사람들이 악한 행위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고 해 봅시다. 피곤하면 쉬고 싶은 게 인간의 생리적 욕구입니다. 그 욕구대로라면 아버지와 자식 사이라도 일을 하다 피곤해지면 서로 상대방에게 남은 일을 맡기고 자기는 얼른 들어가 쉬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실제 행동은 반대로 나타납니다. 서로 자기가 남은 일을 다 할테니 먼저 들어가 쉬라고 합니다. 이처럼 스스로 자신의 악한 본성을 거스르는 착한 행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순자는 인간의 마음 작용을 성(性), 정(情), 려(慮), 위(僞)의 4부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이 4부분은 마음이 움직이는 순서이기도 합니다. 이 4단계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며,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살펴봅시다.
첫 단계인 성은 사람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으로서, 삶의 자연스러운 본질이자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성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배고프면 먹고 싶고, 목마르면 마시고 싶고, 피곤하면 쉬고 싶은 생리적 본성입니다.
두번째 단계인 정은 밖에 있는 사물들과 만나서 생기게 되는 감정입니다. 좋다, 나쁘다, 기쁘다, 노엽다, 슬프다, 즐겁다 하는 것들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세번째 단계인 려는 구체적인 감정이 생긴뒤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문제입니다. 사람의 사고 작용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네번째 단계인 위는 선택이 끝난 후 실행해 나가는 의지적인 실천입니다.
위에서 말한 4단계를 구체적인 상황과 연결해서 생각해 봅시다. 지금 내가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본성은 끊임업이 먹고 마시고 싶다는 방향으로 움직일 것입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생리적 현상입니다. 그때 떡과 음료수를 본다면, 입에 침이 고이면서 저 떡을 먹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 음료수를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감정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당연히 먹을 자격이 있는데도 누군가가 부당하게 먹지 못하게 한다면, 노여워질 수도 있고 슬퍼질 수도 있습니다. 또 내게 먹을 차례가 돌아오면, 기쁘다 즐겁다 하는 감정이 생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본성과 감정대로 움직이지만은 않습니다. 내 곁에 나보다 더 불쌍한 어린아이나 노인이 있다면 고민에 빠질 것입니다. 모른척하고 나 혼자 먹어 버릴 것인가, 아니면 나누어 먹을 것인가? 먹을 것이 많지 않으니까 그냥 다 주어 버릴 것인가? 만약 그 자리에 주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음식들이 누군가의 소유물이라면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허락을 받기 위해 주인이 올 때가지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먼저 먹고 볼 것인가?
이런 고민의 결과는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습니다. 나 혼자 다 먹어 버릴 수도 있고, 불쌍한 어린이나 노인과 나누어 먹든가 다 주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주인이 올 때까지 기다릴 수도 있고, 그냥 먹고 달아나 버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은 나 혼자 다 먹어 버리거나, 주인이 오지 않더라도 그냥 먹고 달아나는 것이 본성에 충실한 행동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본성의 욕구와 반대 방향으로 행동을 선택하고 굳센 의지로 본성을 억누르면서 참아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참는 작용이 순자가 마음의 네번째 작용으로 파악한 위입니다.
사람들의 심리 상태에 대한 순자의 분석은 심리학자를 방불케 합니다. 순자는 본성대로 가면 결과가 악이고, 본성을 거스르는 의지적 실천대로 가면 선이기 때문에 성은 악이고, 위는 선이라고 합니다. 순자가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고 보았다고 해서 본성대로 살자고 한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의지적 실천을 통해 본성이 가져올 악한 결과를 변화시켜 갈 것이냐가 문제였습니다.
따라서 순자의 철학이 갖는 가치는 위에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순자의 철학은 의지에 기초한 실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라는 글자를 한자 사전에서 찾아보면 거짓이라는 뜻이 가장 먼저 나옵니다. 그러나 위자의 의미를 거짓이라는 뜻으로 새기면 순자의 철학은 죽습니다. 여기서의 위는 사람 인(人)과 할 위(爲)를 합쳐 놓은 글자입니다. 사람이 하는 것, 즉 의지적인 실천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순자의 철학은 철저히 인간 중심적이었으며, 그 속에는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착하다고 한 맹자의 주장은 본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사람이 타고난 본성과 후천적인 의지에 의한 노력을 구분하지 못한 것이라는 지적이빈다. 그리고 맹자의 말대로 본성이 본래 착한 것이라면, 현실의 인간은 대부분 태어나면서 바로 자신의 착한 본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셈이라고 비판합니다. 또 인간이 본래 착한 존재라면 애초부터 훌륭한 임금이나 좋은 제도 따위는 필요가 없게 된다고도 했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맹자의 인의 도덕이 인간에게 선천적으로 갖추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어린아이가 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았을 때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불쌍하게 여기는 감정을 들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주장의 근거를 인간 내면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순자는 현상에서 출발하여 인간 내면으로 거슬러 들어가서 본성이 악하다는 규정을 내립니다. 순자는 사회가 잘 다스려지는 상태는 선이고, 혼란한 상태는 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현실은 혼란 상태로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적 혼란은 인간의 이기적 욕구 때문에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순자는 맹자와 달리 선악을 가르는 기준을 인간 외적인 현실에 두었습니다.
맹자는 모든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하면서도 실제적인 강조점은 군자에게 두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생리적인 면에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생리적인 면을 본성으로 보는 사람들은 소인이고, 군자는 도덕성만을 본성으로 본다고 하였습니다. 맹자는 사실상 군자의 도덕성만을 인정한 것이며, 일반 백성들에 대해서는 도덕성에 근거한 군자의 교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의 토양만을 인정한 셈입니다. 그렇다면 순자는 어떨까요? 순자가 본래부터 악하다고 한 그 본성은 누구의 본성을 가리킬까요?
순자는 어떤 사람인가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고 합니다. 가장 훌륭한 사람의 표본이었던 요순의 본성과 가장 악한 사람의 표본이었던 걸임금이나 도척의 본성이 같다고 보았습니다. 순자가 같다고 본 본성은 당연히 생리적·감각적인 본성입니다. 그렇다면 도덕성은 본성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실에서의 부차적인 노력인 셈이 됩니다.
물론 순자도 맹자처럼 군자와 소인을 나눕니다. 그렇다면 이런 구별은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요? 순자는 사람의 성품과 지능, 그리고 이기적인 욕심은 군자와 소인이 같다고 보았습니다. 다만 그것을 구하는 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소인은 본성이 하고자 하는 욕구를 그대로 따라가지만, 군자는 교육과 예를 통해 절제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본성을 거스를 수 있는 의지적인 노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입니다. 순자가 그러한 의지적인 노력을 제도화하려고 한 것이 예였습니다.
인간의 홀로서기
당시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정치와 가장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은 하늘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늘이 덕이 가장 높은 사람을 뽑아서 통치를 맡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어진 임금이 나온 것도 하늘의 뜻이고, 포악한 임금이 망한 것도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사실상 지배 권력이 자신들의 통치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상가들이 이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일반 민중들은 운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재해나 일식, 월식 같은 급작스러운 자연 현상의 변화가 보이면 하늘로부터 다스림을 위임받은 임금들의 덕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라고 보았고, 그래서 하늘에 빌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순자는 인간과 하늘이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합니다. 잘 다스려지느냐 그렇지 못하냐는 다만 통치자가 하기에 달려 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자연 현상은 자연 현상일 뿐이고, 인간 행위는 인간 행위일 뿐입니다. 이러한 순자의 이해는 하늘을 도덕 근원으로 이해한 맹자와 전혀 다릅니다. 순자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하늘로부터 인간을 독립시켰습니다.
순자는 하늘에 빌고 매달리는 행위를 비웃었습니다. 기우제를 지내니까 비가 왔다고 합시다. 순자는 이런 일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고 합니다. 기우제를 지내지 않았는데도 비가 오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낮과 밤이 끊임없이 바뀌는 것이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이 변하는 것고 인간의 삶과 인과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순자는 이러한 주장을 통해 인간을 하늘과 대등한 자리로 끌어올렸습니다.
하지만 순자는 기우제 같은 것도 아주 의미가 없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제례와 상례 그리고 점을 치는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자가 이런 일에 대해 의미를 둔 것은 미신을 믿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순자는 이런 행위들에 대해 문화적인 기능으로서의 사회적 가치를 인정하였습니다. 일반 민중들은 그런 일이 귀신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지식인들은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삶을 장식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일반 민중들에게까지도 상례와 제례가 보편화되어 있었습니다. 순자는 상례란 삶과 죽음의 의미를 밝히고 죽은 이를 슬픔과 존경으로 따나 보내는 것으로,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꾸미는 행위라고 규정했습니다. 제례와 대해서도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산 사람의 감정을 꾸미는 행위라고 하였습니다.
순자는 사람들에게 있는 지성과 감정을 다 인정한 셈입니다. 지성적인 판단으로 보면 귀신이란 없으며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나 감정의 측면에서 보면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에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고, 불안한 감정이 지나치면 아무것에나 의지하려는 미신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또 가까운 사람이 죽으면 슬퍼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 감정을 잘 조절하지 못하면 혼란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순자는 지성과 합리를 강조했지만, 인간의 이런 정서적인 부분도 그냥 버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경우 예식을 통해 감정을 조절하고 순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제사, 점, 기우제 등을 인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순자는 본질적으로 하늘을 자연적인 현상으로만 이해했습니다. 하늘은 사계절의 변화를 보이는 기계적인 하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땅은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자료를 제공해 주는 존재입니다. 그 가운데 사람이 있는 것이며, 사람은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늘, 땅과 대등하게 만물의 변화에 참여하는 존재입니다. 순자의 이러한 생각은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에 대한 강조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늘과의 관련성을 부정한 것은 프로메테우스처럼 하늘에 맞서는 인간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늘로부터 벗어난 인간을 세우는 힘은 무엇일까요? 순자는 결국 그 힘을 인간 자신에게서 찾았습니다. 앞에서 본 의지적인 노력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순자는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든 일을 하늘의 뜻에 맡겨 놓고 운명이라고 생각하던 데서 벗어나, 인간이 반드시 하늘을 이겨야 한다는 과감한 주장을 내 놓았던 것입니다. 순자의 철학은 운명론에 대한 부정이었고 인문 정신의 극치였습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순자의 이런 점에 주목해 유물론 철학의 창시자라고 평가합니다.
공동체를 위한 규범 : 예
순자는 질서 잡힌 사회는 좋은 것이고 혼란스런 사회는 나쁜 것인데, 인간이 타고난 본성대로 가면 혼란이 올 수밖에 없지만 자신의 악한 본성을 거스르는 의지적 행위를 통해 질서 있는 사회로 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의지적인 행위를 제도화한 것이 예입니다. 그는 예에 의한 통치를 강조했습니다.
순자는 인간이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물건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혼자서 그 여러 가지 물건들을 일일이 만들어 가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회와 따로 떨어져 혼자 살면 가난해질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까닭입니다. 순자는 또 사람들이 힘센 것으로 따지면 소를 따를 수 없고, 달리기에서는 말을 따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말과 소를 부리면 살 수 있는 까닭은 사회 조직을 이루고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순자는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살면서도 화합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모두가 화합하여 하나가 되면 사회의 힘이 풍부해지고 강해지며 그 결과로 어떤 것이든 이겨낼 수 있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제물은 부족하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서로 더 많이 갖기 위해 다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을 다투지 않고 화합하게 할 수 있는 통제 수단은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예입니다. 순자는 사람에게 예가 없다면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합니다.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의 구분 자체는 자연적인 것일 뿐입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 사이의 분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아껴줌은 인위적인 노력입니다. 이러한 인위적인 노력이 짐승과 다른 점입니다. 순자는 예를 통해 인간의 행위를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규제하려 하였습니다. 이 경우 예를 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최대한 고르게 채우기 위한 방법인 셈입니다. 그리고 앞에서 보았듯이 의식과 예절을 통해 사람들의 감정을 순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회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요청되는 행위 규범인 예의 제도는 누가 만드는 것일까요? 예 자체는 의지적 노력을 구체화시킨 것일 뿐 인간의 본질은 아닙니다. 따라서 타율적인 규제일 수밖에 없습니다. 순자는 구체적인 예의 제도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성인이라고 했습니다. 성인이란 과거의 훌륭한 임금들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사회는 항상 바뀌는 것이고, 예는 언제나 구체적이며 현실적이어야 합니다. 사회가 바뀌면 여기에 따라 구체적인 예의 제도도 바뀌어야 합니다.
순자는 예가 바뀐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핵심은 현실 중시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는 변법이 행해지던 사회였고, 변법의 생명은 그 이전의 제도와 예법을 지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맞는가의 시의성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어떠한 제도도 현실에 맞지 않는다면 정당성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순자의 현실 중시 관점은 복고적인 모습을 보였던 맹자의 관졈과 다릅니다. 순자는 적어도 현실 중시, 아니면 미래 지향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과거에 만들어진 예의 제도만 강조한다면 권위주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권위적의는 변화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청조적인 지성을 묵살하게 됩니다. 그러나 순자는 예의 제도가 바뀔 수 있다고 봄으로써 예의 탄력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예전의 훌륭한 임금들이 만들어 낸 예의 제도를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은 또 누구일가요? 순자는 오늘날의 임금들이 옛 훌륭한 임금들을 이어받아 예의 제도를 새롭게 만들 수 있다고 했습니다. 순자는 예를 만들고, 그 예를 가지고 남들을 가르치는 역할이 통치자들의 몫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물론 이 경우 그러한 통치자들은 후천적인 인위적 노력을 통해 자신이 타고난 본성의 악한 본질을 극복한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따라서 힘이 센 군주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군자를 의미합니다.
이 같은 순자의 주장에는 사람의 본성이 악하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통치자의 권위를 더 보강해 준 면이 있습니다. 즉 본래의 악한 모습을 극복하고 남을 다스리는 지위에 오른 사람만이 선한 것이며, 그로부터 통치받는 사람들은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악한 본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순자가 이처럼 모든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규정하고, 이 악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예에 의한 교육을 성인의 몫으로 돌리고, 그 구체적인 실현을 통치자 한 사람에게만 인정한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연관하여 이해해야 합니다. 순자가 살전 시기는 전국 시대 말기입니다. 전국 시대 말기는 양면성이 있었습니다. 한쪽으로는 혼란이 더 심해졌지만 동시에 다른 한쪽으로는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통일의 가능성은 덕에 의한 것보다는 변법에 기초한 무력에 의해서였습니다. 비록 무력 통일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혼란의 종식인 동시에 법질서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순자는 혼란의 원인이 인간의 무한한 욕구에 있다고 보았고, 동시에 통치자의 교화가 무한한 욕구들을 조절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순자는 이런 간절한 희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지금 통치자들이 모두 자신의 생리적, 감각적 욕구대로 전쟁과 침략을 일삼고 있지만, 통일과 동시에 자신의 본성이 더 이상 욕구대로 움직이지 않게 인위적인 의지로 억누르면서 나아가 모든 사람들의 욕구가 다시 일어나지 않게 다스려 나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같은 통일이 가능한 상황과 통일을 가능하게 할 현실적 힘의 주체에 대한 순자의 기대를 '후왕 사상'이라고 합니다. 후왕이란, 과거의 훌륭한 임금을 뜻하는 '선왕'에 대한 반대 개념으로 현실의 군주를 의미합니다.
후왕 사상을 당시의 시대 상황과 연관해서 생각해 봅시다. 전국 시대 후반에 올수록 주나라가 임명했던 구 귀족의 몰락이 심화되고, 신진 지주 계층의 성장이 두드러집니다. 아울러 구 귀족들을 돕던 관리들의 세습도 점점 없어져 갔습니다. 따라서 그나마 지탱되어 오던 구제도나 문화 유습은 급속히 무너져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같은 사회 변화는 모든 제도의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빠른 속도로 변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면 아무리 훌륭한 사상이라 해도 도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이 순자에게 과거의 제도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는 강한 현실 의식을 주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결과가 바로 후왕 사상이었습니다.
후왕은 현실적으로 철저한 세습제의 부정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순자는 말한 후왕은 지금 있는, 또는 앞으로 올 군주를 의미합니다. 순자는 주나라의 통치가 이미 무너졌다는 현실 긍정의 토대 위에서,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의지적인 노력으로 극복하고 동시에 강력한 통치력을 가진 군주를 후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의 통치가 피치자 모두의 생리적·감각적 욕구를 잠재우고 선왕의 훌륭한 정치를 현실에 맞추어 되살려 낼 수 있기를 기대한 것입니다.
순자가 이처럼 사회의 통제 수단으로 강조한 예는, 한비자와 이사에 의해 법치주의를 강조하는 생각으로 발전해 갔습니다. 하지만 법가 사상은 순자의 예에 대한 생각과는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병으로 치면 예는 사전 예방이고, 법은 병에 걸린 다음에 하는 치료입니다. 또 순자는 예의 제도가 바뀔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법가 사상이 말하는 법은 불변이어야 했습니다. 순자의 후왕 사상 또한 신진 지주 계층에서 올라 온 당시 모든 임금들의 권위를 인정한 것이 되어 후대 통일 국가의 통치자를 옹호하는 이론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순자는 폭군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세습적 군주들의 권위에 대한 부정은 곧 폭군에 대한 부정이기도 했습니다. 순자는 서민도 재상이 될 수 있고, 왕이나 귀족들도 서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당시는 이미 이런 경우가 많이 있었습니다. 순자는 군주란 민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민중의 뜻을 거스르는 폭군은 혁명의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순자는 폭군을 길길이 뛰는 난폭한 말이나 철모르는 갓난아기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을 배를 띄우는 물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을 위하지 않는 군주는 물이 배를 뒤엎듯이 혁명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순자의 혁명론은 맹자의 혁명론과 다릅니다. 맹자의 혁명론도 민중이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에 민중의 뜻에 근거를 둔 것이기는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하늘의 뜻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순자는 하늘을 끊어 버렸습니다. 순자의 혁명론은 직접적인 민중의 의지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순자의 논리학
순자는 고대 논리 체계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습니다. 순자의 논리는 공자와 정명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와 맹자의 논리가 도덕적인 목적을 그 안에 담고 있다면, 순자는 순수하게 논리적 관점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당시에는 명가와 후기 묵가들의 역설적 논리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순자는 이들의 논리를 극복하기 위해 명(名)과 실(實)의 문제를 따진 것입니다. 순자는 명이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생겨났는가, 그리고 어떻게 사용하는 것이 바른 방법인가를 탐구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순자의 '명실론'은 현대의 논리학과 여러 가지로 비슷합니다.
순자는 먼저 지(知)와 지(智)를 구별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지(知)와 지(智)를 별 구별 없이 사용하였습니다. 순자는 이러한 습관적인 부분을 과감하게 정리하고 두 개념을 엄격히 구분합니다. 순자에 따르면 지(知)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앎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지(智)는 사람이 안 것과 실제 대상이 들어맞았을 때 쓰는 용어입니다. 순자는 인간의 인식 기능을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감각 기관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心)입니다. 감각 기관은 바깥 사물을 받아들이는 통로이고, 마음은 감각 기관을 통해 받아들인 사물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기능을 합니다.
마음의 작용을 더 세분해서 보면, 먼저 감각 기관이 받아들인 사물을 비슷한 것끼리 나누고 그것들을 이전에 가졌던 경험과 맞추어 봅니다. 이 과정에서 같은 것도 있고 다른 것도 나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인식이 성립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감각 기관이 받아들이고도 알지 못하거나 또는 마음이 해석해 내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모른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인식 대상을 구분하면서 생기는 것이 명(名)입니다. 사물의 명칭이 생기는 이유는 편의라는 필요에 의해서라고 합니다. 그 필요성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하나는 윤리적 이유이고, 다른 하나는 논리적 이유입니다. 윤리적 이유란 명칭을 통해 귀한 것과 천한 것을 구분하기 위함이고, 논리적 이유란 같은 것과 다른 것을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명칭은 약속입니다. 새로운 것이 생겼을 때 과거의 어떤 것과 같으면 같은 이름을 붙이고, 다르면 다른 이름을 붙입니다. 그리고 가장 좋은 명칭은 간단하면서도 쉽게 이해가 되고, 사물을 직접적으로 가리켜 혼동이 없는 이름입니다.
그 밖에 알맞는 이름은 아니지만 습관적으로 써 오는 명칭은 실명(實名)이라고 했습니다. 순자는 명칭도 여러 종류로 나누었습니다. 말이나 돌 같은 단순 명사와 흰 말이나 단단한 흰 돌 같은 복합 명사가 있습니다. 순자는 단순 명사를 단명(單名)이라고 했고, 복합 명사를 겸명(兼名)이라고 했습니다.
또 공명(共名)과 별명(別名)이라는 구분도 있습니다. 공명은 보편적인 명칭이고, 별명은 구분하는 명칭입니다. 예를 들어 동물이 공명이라면, 사람이나 말은 별명입니다. 순자는 한 걸은 더 나아가 더 이상 포괄할 수 없는 통칭을 대공명(大共名)이라 했고, 더 이상 세분할 수 없는 명칭을 대별명(大別名)이라고 했습니다.
순자는 이런 기반 위에서 묵가나 명가의 궤변적인 논리를 비판합니다. 묵가의 주장 가운데 도둑을 죽이는 것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 순자는 이러한 논리는 도둑이 사람에 포함되는데도 도둑과 사람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여 명칭을 가지고 명칭을 혼란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순자는 혜시가 제시한 산과 연못이 똑같이 평평하다는 논리도 비판합니다. 사물은 구체적이지만 명칭은 추상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높은 지대에 있는 연못이 낮은 지대에 있는 산보다 고도가 높을 수는 있지만, 산과 못이라는 일반 명칭은 일반적인 법칙에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혜시의 논리는 구체적인 사실로 일반 명칭을 혼란시킨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또 공손룡의 흰 말은 말이 아니라는 논리도 비판합니다. 흰 말은 말 속에 포함되는 것이므로, 이런 논리는 명칭만을 가지고 사실을 혼란시키는 것이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순자는 이 같은 잘못된 논리들이 논쟁과 시비거리로 발전하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훌륭한 임금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순자 철학의 가치
순자가 살던 시대는 주나라가 완전히 몰락하던 전국 시대 말기였습니다. 공자 때에도 이미 겸병 전쟁의 주체가 점점 아래 계층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나타냈지만, 전국 시대에 이르면 구 귀족만이 아니라 새로운 지주 계층들까지 등장하면서 혼란이 더 심해집니다. 그리고 이같은 상황은 기존 통치 세력과 신흥 지주 계층의 대립으로 압축됩니다. 구 귀족은 봉건 통치의 부활을 꿈꾸면서 예치(禮治)를 내세웠고, 신흥 지주 계층은 개혁을 표방하고 법치(法治)를 주장했습니다.
순자는 이런 상황에서 예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법에 의한 통치 이론을 완성시킨 제자들, 한비자와 이사를 통해 열매맺게 됩니다. 역사의 발전이 가져온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순자의 사상은 위에서 본 것 같은 사회적 배경에서 나왔습니다. 순자 사상의 특징은 철저하게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것입니다. 순자는 사람의 본성을 악하다고 했지만, 그 악한 본성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인간 자신의 의지적인 노력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의 구체적인 제도로 예제의 부활을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한 복고가 아니라 현실의 임금들이 당시에 맞는 예의 제도를 만들어서 피치자 모두를 교화시켜 가기를 바랐습니다.
순자는 자신의 철학에 여러 가지 가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는 이유 때문에 동양의 프로메테우스가 되어야만 했습니다. 카우카수스 절벽에 매달려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던 프로메테우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을까? 아니면 인류를 위한 자신의 행동이 옳았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을까?
순자는 자기보다 먼저 유가를 높였던 맹자를 혹평하였습니다. 맹자는 글과 말만 뛰어났을 뿐 현실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덕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오히려 유가의 몰락을 재촉했다는 것입니다. 순자는 유가가 몰락한 책임을 맹자에게 물었던 것입니다.
순자는 날카로운 눈으로 인간의 어두운 면을 집어내고 그 현실적인 처방을 제시하였습니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에 들어 있던 불행들처럼. 그러나 그 제일 밑에 희망을 남겨 놓았습니다. 착한 일을 행하면서 본성을 거스를 수 있는 인위적인 의지가 그 희망입니다.
노자
노자 사상
1. 고대 동양철학의 현재적 반추
역사이래 가장 역동적이고 혁명적인 세기로 일컬어지는 현세기를 뒷받침해 온, 이른바 'Modern Project'라고 불리는 많은 서구 사상들이 만들어 놓은 '오늘'에 대해 아무도 '최고', '최선'의 평가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성 상실, 인구폭발, 환경오염 등 현대문명이 노정한 부작용들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주류 사상ㅑ사회를 근본으로부터 변혁할 사상이 필요함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다.
특히, 수세기 동안 서양 사상과 기술의 합리성, 과학성, 대량성, 공격성에 눌려 '사상'의 명목마저 위협 당할 지경에 이르렀던 동양사상은 그것의 자연주의적, 인본주의적 매력이 적극적으로 재론되고 있다. 중국(中國)에는 두 줄기의 큰 사상의 흐름이 있다. 하나는 공자(孔子),맹자(孟子)를 중심으로 하는 유교(儒敎)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노자, 장자를 비조(鼻祖)로 하는 도교(道敎)사상이다. 그런데, 이 두 사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대조적이다. 유교(儒敎)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해서 먼저 개인적인 인격을 수양한 후, 이것을 확충해서 치국평천하(治國平千下)를 하여 현세적인 행복을 추구하자는 것인 데 반해, 도교는 인위적인 노력을 포기하고, 오직 천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면서 모든 일을 운명이 명하는 대로 따르는 것이 진정 행복한 생활이 된다고 하였다.
위와 같은 두 사상이 주장의 결과도 또한 대조적으로 나타났다. 유교는 중국 사회의 상류계급에 침투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지도자의 위치에 있게 만들었고, 도교는 일반 서민 사이에서 신봉되어 그들의 마음을 위로 해 주었다. 다시 말해서 유교는 귀족적이 되었고 도교는 훨씬 서민적이 되었다. 유교는 다분히 정치적인데 반해 도교는 상당히 종교적인 경향을 띄었다.
2. 노자 사상의 대강
1) 노자사상의 핵심- 도(道), 덕(德), 무위(無爲)
'도덕경'이라는 책이름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노자사상의 핵심은 도(道)와 덕(德)이다. 노자가 보기에는 사회와 자연을 통틀어서 지배하는 진리(道)가 있는데, 그것이 도다. 그러나 초기의 도교사상을 기록한 문헌에 도와 덕을 강조하는 발언이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은 언뜻 납득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나, 이들 고대문헌에서는 도와 덕 같은 관념들이 본래 도에 내포된 의미들 (공허, 태일, 무위) 을 뜻하는 다른 낱말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도덕경에서 어머니, 암컷 그리고 신비스러운 자궁 등의 관념은 공허라는 관념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道家적 사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의 하나인 공허의 문제는 도덕경 제5장과 11장에 다음과 같이 극히 상징적이고 시적인 문체로 묘사되어 있다.
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 속은 텅 비었지만 힘이 다하는 일이 없고,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힘이 더욱 솟아난다. (제5장)
30개의 바큇살이 바퀴의 중심인 바퀴통에 집중한다. 바퀴통의 텅 빈 공간 속에 바퀴의 유용성이 있다. 출입구와 들창 구멍을 뚫어서 집을 만든다. 집안의 텅 빈 공간에 집의 유용성이 있다. 따라서 무엇인가 있는 것으로부터 이익을 얻는 것이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없는 것의 유용성이 근본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제11장)
이상에서 보듯이 공허란 다름 아닌 무로서, 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인식 가능한 성질의 부재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러한 공허는 무한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데, 왜냐하면 공허는 풀무처럼 마음대로 바람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인(仁), 의(義), 지(智), 효(孝), 충(忠) 이러한 관념이나 태도들은 만일 인간이 자신의 행위를 자연의 질서에 순응시킬 줄 안다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도로부터 한 걸음씩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다음에서 보듯이 도덕과 정치의 무질서 상태로 점점 빠져들게 되기 때문이다.
높은 덕을 지닌 사람은 자신의 덕을 자랑하는 법이 없다. 그러므로 덕을 유지하는 것이다. 낮은 덕을 지닌 사람은 어떻게 해서라도 덕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자 한다. 그러므로 실제로는 덕이 없는 것이다. 높은 덕을 지닌 사람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아도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있다. 최상의 인애(仁愛)의 마음을 지닌 사람은 행동을 해도, 동기가 있어서 하는 법이 없다. 최상의 도의심을 지닌 사람은 행동을 해도, 동기가 있어서 하는 것이다. 예의를 익히 잘 아는 사람은 행동을 해도, 그에 대한 반응이 없으면 소매를 걷어올리고 상대방을 억지로 끌고 가려고 한다. 이런 까닭에 도가 사라지고 난 뒤에 인애의 마음이 사라지고 난 뒤에 도외심(度外心)이 생겨났고, 도외심이 사라지고 난 뒤에 예의가 나타나게 되었다. 대체로 예의란 충실과 신의가 희박해져서 생겨나는 것으로 사회적인 혼란의 첫걸음이 되는 것이다. 미래를 예견하는 것은 도의 화려한 꽃이기는 하지만 어리석음의 출발이 된다. 그러므로 대장부는 도와 같은 돈후한 입장에 서지만, 예의와 같은 경박한 입장에 서지는 않고, 도라는 과실이 있는 성실한 입장에는 서지만, 지식이라는 화려한 꽃과 같은 입장에는 서지 않는다. (제38장)
여기에서 노자는 덕이라는 말에 대해 두 가지 서로 다른 가치 기준을 적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최상의 덕은 실제로 도 자체와 구별하기 힘든 것이고, 도가 지닌 효력이 바로 그러한 최상의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경의 사상은 추론적인 사고보다는 직관적인 인식을 우선시하고, 정적주의적인 방법을 통해서 궁극적인 실체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사실상 일종의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다(노자는 여러 곳에서 성인이 지니고 있는 우주의 신비를 꿰뚫어보는 특이한 통찰력을 지시하는 말로서 빛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우주의 신비는 "우리의 감각 능력이나 인식 능력을 초월하는, 빛으로 가득 찬 어두움"이다). 모든 신비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노자 역시 자신의 주장에 대한 어떤 합리적인 설명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그의 가르침은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하고 불명료하며, 흔히 한 가지 이상의 다층적인 의미로 해석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 노자의 자연주의 정치사상
노자(老子)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연대의식이 피어나는 자연사회를 이상사회로 생각하였다. 자연사회의 중요한 조건은 신분계급이 철폐되는 것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신분계급의 철폐는 단순한 제도의 폐지 문제가 아니라 문명의 문제였다. 그리하여 그의 자연사회는 물질적으로 또는 도덕적으로 진보한 사회라기보다는, 정신문명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정신문명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자연스러운 연대의식이 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노자가 보기에는 사회와 자연을 통틀어서 지배하는 진리(道)가 있었다. 이러한 진리에서 벗어나는 인위적인 노력이나 제도는 오히려 사회를 부자연스럽게 만들고 오히려 이상적인 사회로부터 멀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이러한 사회를 보장하는 사회체제는 무엇인가? 그에 대한 노자의 대답은 소국과민(小國寡民)이었다. 즉 그는 공동체의 규모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인간의 세계가 작은 규모의 공동체로 분화되어 있을 때만 도가 자연스럽게 구현되는 사회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상의 내용을 {도덕경}의 몇 구절을 통해 살펴보자.
찬란한 五色의 빛은 사람의 시각(視覺)을 멍들게 하고, 난잡한 五音의 음악 소리는 사람의 청각(聽覺)을 혼란케 하며, 잡다한 음식의 맛은 사람의 味覺을 상하게 한다. 멋대로 말을 몰아 달리며 사냥을 하는 놀이는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만들고, 얻기 어려운 귀중한 재물(財物)은 사람을 타락시킨다. 그러므로 無爲自然의 道를 터득한 聖人이 다스릴 때에는 오직 生命의 근원(根源)인 배를 실하게 채워주는 일만을 할 뿐, 사특한 빛을 쫓는 눈을 위하는 人工的 作爲를 꾸미지 않는다.聖人은 外形的 감각세계(感覺世界)를 버리고 내실적(內實的) 無爲自然을 취한다. (제12장)
學文이나 智慧를 버리면 백성들의 利得이 백 배가 될 것이며; 仁義道德을 버리면 백성들이 本性의 효자(孝慈)로 되돌아갈 것이며; 기교(技巧)나 명리(名利)를 버리면 도적(盜賊)도 없게 될 것이다. 이상의 버려야 할 세 가지는 모두가 인간들이 조작해서 꾸민 가식적인 것이며, 그것으로는 백성을 잘 다스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귀의(歸依)할 바 있게 해야한다. 즉 外面的으로나 內面的으로나 순진소박(純眞素朴)을 따라 지키고, 사심(私心)과 慾心을 적게 하는 것이다. (제19장)
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다. 유용한 도구들이 있지만 결코 쓰려 하지 않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죽음을 소홀히 생각지 않게 하고 멀리 떠돌지 않게 한다. 배와 수레가 있지만 타고 다닐 필요가 없고 투구와 갑옷이 있지만 쓸 일이 없으며 백성들도 문자를 버리고 다시 옛날처럼 새끼줄을 묶어 일을 기록하도록 한다. 그들로 하여금 거친 음식이 달고 거친 옷이 아름다우며 초라한 습속이 즐겁고 띠풀로 지은 집이 편안하다고 생각하도록 한다. 이웃나라가 서로 보이고 닭과 개짓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은 늙어 죽도록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장자
본명은 장주(莊周). 그가 쓴 〈장자〉는 도가의 시조인 노자가 쓴 것으로 알려진 〈도덕경 道德經〉보다 더 분명하며 이해하기 쉽다. 장자의 사상은 중국불교의 발전에도 영향을 주었으며, 중국의 산수화와 시가(詩歌)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기록으로 본 장자의 생애
후대의 학자들이 가장 뛰어난 장자 연구가로 평가한 서진(西晉)의 곽상(郭象 : ?~312)은 장자의 저작에 처음으로 주석을 달았고, 장자의 위치를 도가사상의 원류로 끌어올렸다. 불교, 특히 선(禪) 불교의 학자들도 장자의 책을 많이 인용했다. 이러한 장자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한대(漢代)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司馬遷 : ?~BC 85)은 그의 〈사기〉 열전(列傳)에서 장자의 생애에 대해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열전에 의하면 장자는 전국시대 송(宋)나라의 몽(蒙 : 지금의 허난 성[河南省] 상추 현[商邱縣])에서 태어났고, 이름은 주(周)이며, 고향에서 칠원(漆園)의 하급 관리를 지냈다. 그는 초(楚)나라 위왕(威王 : ?~BC 327) 시대에 활동했으므로,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으로 존경받는 유교사상가인 맹자와 같은 시대 사람이다. 열전에 의하면 장자의 가르침은 주로 노자의 말을 인용한 것이지만 장자가 다룬 주제가 훨씬 광범위하다고 한다. 장자는 자신의 문학적·철학의 천부적재능을 발휘하여 유가와 묵가(墨家 : 謙愛說을 주장한 묵자의 추종자들)의 가르침을 반박했다. 또한 유가의 가르침을 반박한 어부(漁父)·도척(盜c7501;)·거협() 등을 썼으며, 상상으로 지어낸 〈외루허 畏累虛〉·〈항상자 亢桑子〉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다.
장자는 자신의 이름을 딴 저서 〈장자〉(〈남화진경 南華眞經〉이라고도 함)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장자〉는 총 33편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4세기에 읽히던 〈장자〉는 53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증거도 있다. 그 이후 수많은 판본이 나왔으며 〈장자〉에 대한 다양한 해석 때문에 본래의 내용이 불분명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장자〉 내편(內篇 : 1~7권)의 7편은 대부분 장자 자신이 지은 것이 분명하지만, 외편(外篇 : 8~22편)과 잡편(雜篇 : 23~33편)은 그 자신이 쓴 것도 일부 있는 듯하나 대부분 위작(僞作)으로 보인다. 그의 인품에 대해서는 〈장자〉의 내편과 외편에 나오는 일화들을 통해 잘 알 수 있다.
일화로 본 장자의 인품
장자는 이 일화 속에서 개인의 안락함이나 대중의 존경 따위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은, 예측불허의 괴팍한 성인으로 나타나 있다. 그의 의복은 거칠고 남루했으며 신발은 떨어져나가지 않게 끈으로 발에 묶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비천하거나 가난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친한 친구인 혜시(惠施)가 부인의 상(喪)을 당한 장자를 조문하러 와서 보니, 장자는 돗자리에 앉아 대야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혜시가 장자에게 평생을 같이 살고 아이까지 낳은 아내의 죽음을 당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따지자,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아내가 죽었을 때 내가 왜 슬프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아내에게는 애당초 생명도 형체도 기(氣)도 없었다. 유(有)와 무(無)의 사이에서 기가 생겨났고, 기가 변형되어 형체가 되었으며, 형체가 다시 생명으로 모양을 바꾸었다. 이제 삶이 변하여 죽음이 되었으니 이는 춘하추동의 4계절이 순환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내는 지금 우주 안에 잠들어 있다. 내가 슬퍼하고 운다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모른다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슬퍼하기를 멈췄다."
장자의 임종에 즈음하여 제자들이 그의 장례식을 성대히 치르려고 의논하고 있었다. 이것을 들은 장자는 "나는 천지로 관(棺)을 삼고 일월(日月)로 연벽(連璧)을, 성신(星辰)으로 구슬을 삼으며 만물이 조상객(弔喪客)이니 모든 것이 다 구비되었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라고 말하면서 그 의논을 즉시 중단하게 했다. 이에 제자들은 깜짝 놀라 매장을 소홀히 하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땅 위에 있으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되고, 땅속에 있으면 땅속의 벌레와 개미의 밥이 된다. 까마귀와 솔개의 밥을 빼앗아 땅속의 벌레와 개미에게 준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위와 같은 장자의 기괴한 언동은 그의 숙명론에 대한 깨달음과 직결되어 있다. 장자에 의하면 인생의 모든 것이 하나, 즉 도(道)로 통한다는 것을 인식해야만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장자의 도관(道觀)
장자는 말로 설명하거나 배울 수 있는 도는 진정한 도가 아니라고 가르쳤다. 도는 시작도 끝도 없고 한계나 경계도 없다. 인생은 도의 영원한 변형에 따라 흘러가는 것이며, 도 안에서는 좋은 것, 나쁜 것, 선한 것, 악한 것이 없다. 사물은 저절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어야 하며 사람들은 이 상태가 저 상태보다 낫다는 가치판단을 해서는 안 된다.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은 환경, 개인적인 애착, 인습, 세상을 낫게 만들려는 욕망 등의 집착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져야 한다. 장자는 관리생활의 번잡함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초나라의 재상직을 거절했다. 그의 인식에 대한 철저한 상대성은 〈장자〉에 나오는 유명한 '나비의 꿈'(胡蝶之夢)에 잘 나타나 있다.
"언젠가 나 장주는 나비가 되어 즐거웠던 꿈을 꾸었다. 나 자신이 매우 즐거웠음을 알았지만, 내가 장주였던 것을 몰랐다. 갑자기 깨고 나니 나는 분명희 장주였다. 그가 나비였던 꿈을 꾼 장주였는지 그것이 장주였던 꿈을 꾼 나비였는지 나는 모른다. 장주와 나비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음은 틀림없다. 이것을 일컬어 사물의 변환이라 한다. "
〈장자〉에서 모든 경험이나 지각의 상대성은 '만물의 통일성'(萬物齊同)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도가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 장자는 도가 없는 곳이 없다고 대답했다. 더 구체적인 설명을 요청받자 장자는 개구리와 개미, 또는 그보다 더 비천한 풀이나 기와 조각, 더 나아가서 오줌이나 똥에도 도가 깃들어 있다고 단정했다. 도가 어디에나 있다는 단정은 그뒤에 중국불교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은 이와 유사한 예를 들어 아무리 미천한 것에도 불성(佛性)이 깃들어 있다고 설명했다. 장자야말로 무애자재(無碍自在)의 도를 깨친 위대한 사상가였다.
상앙
중국 전국 시대의 정치가. 법가를 대표하는 주요 인물. 공손씨(公孫氏)이고 이름은 앙. 위앙(衛椽)이라고도 부른다. 처음엔 위(魏)의 재상인 공숙좌의 가신이었다가 후에 진(秦)으로 가서 진 효공에게 유세하였다. 진 효공 6년에 좌서장(左庶長)으로 임명받아 변법을 실행하였다. 그 후 전공으로 인해 상(商)의 15읍을 봉토로 받아 상군(商君) 또는 상앙(商椽)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세상을 다스리는 도라는 것은 하나로 국한된 것이 아니며, 그 나라에 편리하다면 옛날의 법을 본받을 필요는 없다" 라고 하여 변법(變法)을 실시했다. 농지를 정리하여 경지간의 가로 세로의 도로나 경지간의 경계를 허물어 경작케 하였고, 정전제(井田制)를 폐지하고 토지 사유를 승인하였다. 또한 분봉제와 작위 세습제를 폐지하고 현제(縣制)를 실시하여 중앙 집권을 강화하였다. 경전(耕戰) 정책을 실시하여 농사일이나 전쟁을 통해 공을 세운 자가 상을 받고, 작위를 받을 수 있게 했다. 법에 의한 통치를 엄격히 실행하여 연좌법(連坐法)을 밀고 나갔다. 상앙의 변법은 진의 정치 경제적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진이 부강하게 되는 기초를 다졌다. 진 효공이 죽은 후 귀족들에게 해를 입어 거열형(車裂刑)을 받고 죽었다. <한서 예문지>에 <상군> 29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즈금 남아있는 것은 24편이다
진나라 효공3년(기원전 395년)에 상앙은 첫번째 변법을 시행하게돼죠
첫번째 변법은 농사에 종사하면서 전쟁을 수행하도록 재촉하는 법령을 반포하게된다 이것이 상항이 시행한 1차 변법입니다. 그 내용을 보자면 백성들의 가구를 오(伍)로 열가구를 십(什)으로 하는 연대 조직체를 만들고 그 무리 내에서 죄를 범하는 일이 있으면 연대조직의 책임을 물어 형벌을 가함으로써, 백성들을 법망에 묶어둔다. 다음의 귀족의 세록제(世祿制)를 폐지하고, 농사와 전쟁에 온 힘으로 종사하여 공이있는 사람에게는 큰상을 내리고 관직과 작위를 내리되, 상공업자와 하는일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에게는 세금과 부역을 가중시켜 백성들에게 농사와 전쟁수행에 온힘을 쏟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자 신법을 시행하는 첫해에, 백성의 원망이 들끓게되었다.
상앙은 신법을 따르게 하기 위해 일부러 수도의 남문에 긴 장대를 세워놓구서 누구든지 이 장대를 북문으로 옮긴 사람에게 황금 열 덩어리를 준다고 명령했다. 사람들은 손을 한번 움직여 큰 금덩어리를 얻으리라고는 아무도 믿지 않아 장대를 옮기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상금을 황금 쉰덩어리로 올렸다.
그러자 어떤 사람이 호기심에 장대를 북문으로 옮겼더니, 정말로 상금을 타게 됐다. 이로부터 사람들은 나라의 명령에 의심을 품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태자가 법을 범하자, 상앙이 태자의 스승인 공자건(公子虔)과 공손가(公孫賈)를 처벌하자, 백성들은 비로서 신법을 따랐다.
효공12년(기원전 350년)에, 상앙은 2차 변법을 당행했는데, 그 내용은
정전제(井田制)를 폐지하고, 토지의 사유화를 인정하여 매매를 허용하되 전답의 크기에 따라 조세를 징수하였다. 그리고 성진(城鎭)과 향촌(鄕村)을 현(縣)으로 통합 편성해 현령(縣令)과 현승(縣丞)을 설치해 관리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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