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9 - 8. 15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 4층 1관 (T.02-736-6347, 인사동)
EVDLUTION_내 마음의 달
모하 김규리 개인전
김규리의 인물들은 필경 상처받고 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춥고 배고픈 사람들 일 것이다. 그들의 처참한 모습은 애써 이 고달픈 삶에 고상한 의미를
부여 하려는 인간의 몸짓이 얼마나 무모한가를 환기시켜주며 죽음의 공포를 몰아온다.
서승석(평론가·불문학박사)
모하 김규리 화백의 예술세계는 나날이 진화한다. 다년간 ‘Evolution’이라는 테마를 끈질기게 추구하여왔던 혼합작품 시리즈에서, 작가는 과감한 붓 터치와 세련된 색상의 파격적인 색채의 대비효과로 인간 내면세계의 갈등과 모순을 생동감 있게 보여준다. 그동안 서양의 표현주의 기법에 기대어 단단한 회화작업을 구축해 온 작가의 시선은 이제 한국적인 아름다움과 고전적 소재로 이동한다. 초기 작품에서 드러나는, 때로 과격하기조차 한, 대담함과 격동적이고도 적나라한 마음의 파동이 근작에 이르러서는 적멸과 비움을 향하며 한결 유순하고 잔잔해져가고 있다.
Evolution-Lightened.moon 91.0×72.7cm mixed media 2017
김규리의 근작들은 “보라, 옥빛, 꼭두서니 / 누이의 수틀을 보듯 / 세상을 보자 / 누이의 어깨 너머 / 누이의 수틀 속의 꽃밭을 보듯 / 세상을 보자”(서정주, 「학」 일부)던 서정주의 시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서 꼭두서니는 그 뿌리로 붉은빛을 내기 때문에 빨간색을 의미한다고 한다.1) 그녀도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 내 누님같이”(서정주, 「국화 옆에서」 일부)” 세상을 알만한 나이에 이른 때문일까? 그녀는 ‘울음으로도 못 다한 설움’과 시름을 잔잔한 강물에 흘려버리려는 듯 새삼 수틀을 매만지고 있다. 회화가 단순히 그리는 행위에 갇히지 않고, 이미 있는 소재들을 재조합·재구성하고 활용하는 것으로 그 영역을 확장되도록 한 일련의 시도는, 이미 마르셸 듀샹(Marcel Duchamp)이 남성용 도기 변기에 ‘샘(Fontaine)’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전람회에 출품한 레디 메이드(Ready-made) 작품의 출현 이후, 여러 예술가들에 의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부단히 추구되어왔다. 그녀는 비단 천과 자개, 심지어 팔각 상 조각 등을 콜라주하며 고전 문양과 색채를 연구하며, 한국적 전통에 뿌리를 내린 색다른 미술세계를 창안하여 발전시키려는 실험을 모색하고 있다. 심지어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미학자 고유섭이 막사발을 논하며 언급하였던 “무기교의 기교”조차 자신의 작품에 접목시키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있는 그대로 서로가 서로에 기대어 말없이 어우러지고 힘이 되어주는 아름다움이 바로 우리 고유의 미덕이 아니었던가?
Evolution-Empty Fulless mixed madia on canvas 53.0×45cm
뭉개지고 이지러지고 지워지고 덧칠하고 흘러내리는 과정을 반복하며, 김규리의 작품 속 인물들은 새롭게 거듭난다. 유년시절부터 가시세계와 비가시세계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왔던 작가는 ‘있음과 없음’이라는 주제에 천착하며, 불굴의 의지로 인간 본연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화폭에 담아보려는 과제에 탐닉한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 그녀의 정체성의 문제는 ‘표리의 문제’로 부각되고, 꾸밈없는 뒷모습이 가식과 위선으로 포장된 앞모습보다도 더욱 정직할 수 있음을 그녀는 간파한다. 일찍이 미셸 투르니에는 “뒤쪽이 진실이다.”라고, 한평생 뒷모습만을 카메라에 담은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작품을 조명한 그의 저서 『뒷모습』에서 말하였지 아니했던가. 타인의 어깨 위에 무겁게 내려앉은 삶의 무게를 가늠하며, 아픈 이들의 등을 토닥이는 작가의 손길은 거룩하다.
Evolution-Lightened moon 53.0×45,5cm mixed media 2015
김규리의 ‘진화(Evolution)’연작의 인체회화에서는 비장미가 느껴진다. 영원히 치유할 수 없는, 아물 줄 모르는 상처로부터 뚝뚝 흘러내리는 선혈과도 같은 검붉은 빨강. 모두를 집어삼킬 듯 광폭하게 내려앉은 짙은 어둠을 뚫고 가냘프게 새어나오는 한줄기 희망의 빛과도 같은 하양. 얼굴이 뭉개진 채, 혹은 목이 잘려나간 채로 어딘가를 향해 황급히 달려가는 군상들. 렘브란트식의 어두운 배경 속에서 충격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김규리의 인물들은 필경 상처받고 이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춥고 배고픈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의 처참한 모습은 애써 이 고달픈 삶에 고상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몸짓이 얼마나 무모한가를 환기시켜주며 죽음의 공포를 몰아온다. 흡사 뭉크의 ‘절규’에서 드러나는 현대인들의 영혼을 잠식시키는 불안과 환청과 불협화음조차 감지된다.
Evolution Lightened moon 30×30cm mixed media 2017
인간 본연의 모습에 대한 깊은 성찰과 사유의 결과물인 작가의 석사논문 『변형·왜곡·진화(Evolution)된 인체의 회화』에서 밝히듯이, 김규리는 ‘독일 표현주의와 추상주의의 영향’을 받았다.2) 특히 붓 터치와 강렬한 색채로 1980년대 회화의 새로운 길을 제시한 독일 신표현주의의 선구자 게오르그 바젤리츠, 인간의 뒤틀린 욕망을 포착한 삼면화로 유명한 영국화가 프란시스 베이컨, 그리고 과격하고 파괴적인 붓놀림으로 과장된 공포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한 추상표현주의의 핵심인물인 미국화가 웰렘 드 쿠닝은 개성 있는 김규리의 인물회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 한다.3) 그녀의 추상화된 누드연작은 상기 언급한 작가들의 새로운 기법과 정신을 이어받되, 단지 모방에 그치지 않고, ‘흘러내림과 같은 질감의 변화로써 화면에 다양함을 제시’하고, 또한 ‘동양적이며 절제시킴과 동시에 표현적이면서도 강렬한 제스처가 스며들도록 화면을 구성’함으로써 독창적인 자신만의 세계를 개척하고, ‘유연한 붓놀림으로 화면에 명시성, 유동성, 개방성을 부여’하려 애쓰며 경악스런 감정을 한층 완화시켜 보여주고 있다.4)
Evolution-Lightened moon 53.0×45.5cm mixed media 2017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최초로 강조한 미학자는 바로 플라톤Platon이다. 그는 저서 『국가론Politeia』 제10권에서 회화와 시의 모방적 활동이 ‘진리에서 떨어져 있고, 분별력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비판하고, 예술의 모방적 활동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피력하였다. 이상적인 국가를 꿈꾸었던 그는 예술의 도덕적 유용성과 타락한 영혼의 고양을 강조하며, 예술가들이 사회를 잘못 오도할까 염려한 나머지 심지어 예술가들을 추방해야한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김규리는 그의 기우를 비웃기라도 하듯 예술의 사회적 책임에 공감하며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고통 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희망을 제시하며 그들을 치유할 수 있기를 꿈꾼다. 그리고 뭉개고, 짓고 허무는 과정을 반복하며, 작가의 치열한 존재론적 사유의 흔적을 축적시킨 ‘진화(Evolution)’연작은 부정적 계기로 한층 강화되고 고양된 특수한 아름다움을 성취시키고 있다. “비극성의 의미는 초극超克에 있다”고 본 야스퍼스Jasprs는 ‘비극적 지’에서 비로소 인간은 참으로 눈뜨게 되어 자기의 한계상황을 알고 인간존재 자체의 깊이에서 일어나는 역사에 참여하는 움직임을 갖는다고 말하였다. 폴켈트Volkelt는 『비극적인 것의 미학』에서 비극미란 ‘인간적 위대성’이라고 규정한다. 김규리의 비장미 넘치는 인체회화는 표리부동한 인간의 삶의 모순에 대하여 사유하고, 인생의 부조리에 저항하는 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예술의 ‘카타르시스’ 기능을 논하며 언급한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연민과 공포의 감정’이 김규리의 인체회화를 통해서 경쾌한 정신적 회복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술이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면 우리가 더 이상 그 무엇을 바랄 수 있으랴?
초기작품에서 짙게 드러나는 서양적인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갈무리하고, 이제 동양적인 정신세계와 기법과 소재에 천착하며, 자신만의 새로운 미술작업을 개척해가는 김규리가 한국인의 끝 모를 저력을 바탕으로 무궁무진하게 발전하여 대한민국의 예술적 국가 위상을 국제무대에서 한층 드높여주기를 기원할 뿐이다.
1) 이숭원, 『미당과의 만남』, 파주, 태학사, 2013, p. 146.
2) 김규리, 『변형·왜곡·진화(Evolution)』, 서울,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석사논문, 2011년, p. 3.
3) Ibid., p. 25.
4) Ibid., pp. 27-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