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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IP와 가톨릭 신문 ․ 출판인의 자세
<언론도 성직이다>
저는 저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이 시간을 풀어 나갈까 합니다. 가톨릭 사제에의 길을 걷다가 나와 신문기자로 살아온 저의 지난 인생길이 우리 한국사회의 치열했던 최근세사와 함께 했기에 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려는 주제와 맞아 떨어지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톨릭 사제가 되려고 서울 혜화동에 있는 소신학교인 성신고등학교에 입학해 대신학교 3학년 1학기까지 5년 반을 신학교에서 사제 수업을 받았습니다. 친가와 외가 모두 대대로 가톨릭 집안이어서 사제가 되는 것이 가장 큰 영광이요 가장 바람직한 인생길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자라 중학교 때 신학교에 들어가겠다는 어르신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다가 결국 1965년 고등학교 과정부터 신학생이 된 것이지요. 소속이 대구대교구여서 대신학교는 광주에 있던 대건신학대학으로 1968년에 진학했습니다. 당시 대전교구 이북은 혜화동의 가톨릭대학에, 청주교구 이남 교구 소속 신학생들은 무조건 광주로 갔습니다. 그 때 대건신학대학은 서강대학교를 맡아 운영하던 예수회에서 함께 운영했습니다. 따라서 2학년 때 각 교구에서 1~2명씩 서강대학에서 위탁교육을 실시했는데 저에게도 올라올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신학생들도 일반 학생들과 함께 어울려 공부하고 생활하면서 단련되고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과 함께 광주의 열악한 교수난 등이 서강대 위탁교육을 하게 한 요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1969년은 박정희의 3선 개헌이 있던 해여서 전국의 대학은 연일 반대 시위로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지요. 신학교 당국에서는 신학생들을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고 판단, 2학기 중간쯤 서강대에 갔던 학생들을 전원 철수하고 말았습니다. 무척 아쉬웠지만 학교 방침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생활하던 저로서 잠시지만 바깥세상 구경한 것이 잘못 바람이 들어서인지 이듬해 한 학기를 더 하고 결국 신학교를 나오고 말았습니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지(智) ․ 덕(德) ․ 체(體)의 모든 것을 갖춰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사제라면 누구에게나 존경심을 갖고 우러러 받듭니다. 그 어렵고 고결한 과정을 거쳐 그 자리에 오르신 것을 잘 알기 때문이지요. 저는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지혜롭지도, 덕스럽지도, 건강하지도 못했습니다. 세 가지 덕목 모두가 부족했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덕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신학교를 나오긴 했습니다만 막상 세워둔 계획도 없어 자원입대할 수 있는 해병대에 가려고 마음먹었으나 그 마저 실행에 옮기기엔 용기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듬해 마침 한양대학교에서 편입생을 모집하기에 신문학과에 응시해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사제가 아니라면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생각한 끝에 기자가 가장 적합할 것 같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지요. 대신학교에서 3학년 1학기까지 마쳤으나 교양과목 외에는 인정 받을만한 과목이 없어 2학년부터 다시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공부한 것이 언론에 관한 전공과목들을 모두 배울 수 있어서 저에게는 훨씬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2학년을 마치고 공군에 입대해 36개월 복무한 뒤 3학년에 복학해 1977년 2월 졸업했습니다.
졸업반 때 누구나 그랬지만 공모하는 언론사마다 응시하다가 서울신문사에 합격, 수습기자 21기로 신문기자를 시작했습니다. 입사시험 때 필기시험을 마치고 면접시험을 보는 중에 한 면접관이 저의 이력을 확인하고는 “천주교 신부가 되려다가 왜 신문기자가 되려고 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저는 준비하지도 않았지만 “신부가 하는 일과 기자가 하는 일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고 대답했던 겁니다. 지금 생각하니 정답을 말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신문기자를 시작한 저는 사회부, 문화부, 체육부, 전국부, 시사주간지 뉴스피플 기자와 부장, 부국장, 초대 직선 편집국장을 거쳐 논설실장, 이사 대우로 2005년 12월 31일 28년간의 기자생활을 마쳤습니다. 이어 한국언론재단 기금이사로 3년,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겸임교수로 2년을 재직한 뒤 현재 월간 <사목정보> 고문으로 있으면서 글도 쓰고 중견사제들 인터뷰도 하고,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보도교양 특별위원으로 방송 뉴스와 교양프로그램들을 심의하고 있습니다. 저와 비슷한 연배의 선 ․ 후배 사제들을 잘 알기에 중견사제 인터뷰 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언제나 저에게 적합한 일을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절감하면서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대학에서 만난 스승들의 가르치심>
한양대 신문학과에 갔던 1971년 봄에는 수많은 시민과 학생, 민주인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969년 국회 제 3별관에서 날치기 통과시킨 3선 개헌으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40대 기수론을 내세우고 무서운 돌풍을 몰고 나선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7대 대통령선거(4월 27일)가 있었습니다. 이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 6,342,828표(53.2%), 김대중 후보(5,395,900표(45.2%)를 얻어 불과 90여 만 표 차이로 박정희가 3선에 성공해 이듬해 10월 유신의 발판을 마련하던 때였습니다. 그 선거에 제가 대학생 참관인으로 상도동 어느 투표소에 나가 참관하며 투표를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 선거는 명백히 부정선거였고 김대중 후보의 당선이 확실합니다. 부재자 투표에서 무더기 몰표라는 부정이 저질러 진 것이 저에게도 명백히 보였던 겁니다. 마감 시간이 임박하자 분위기가 이상해졌습니다. 갑자기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고 무더기 기표한 뒤 투표함 투입해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나 그게 무슨 행위인지 당시에는 정확하게 몰랐습니다. 훗날 월남 파병 군인이었던 어느 인사가 부재자 투표가 있던 날 느낫없이 주월사령부 차원의 대대적인 작전이 있었었다고 합니다. 파월 장병 5만 명은 어느 누구도 투표하지 못했으나 모두 투표한 것으로 기록되었다니 그 표가 어디로 갔겠습니까? 상도동 그 투표소에서도 그랬고 주월사령부에서도 그랬으니 전국적으로 어느 정도였겠는지 짐작하기 충분합니다.
당시 장용 박사가 학과장으로 있던 신문학과에는 언론인 출신 팽원순, 현원복, 오소백, 사회학자 이강수, 신문학을 전공한 오진환, 정수경, 정대철 등 여러 교수들이 있었는데, 마침 서울신문 편집국장이던 남재희(南載熙 1934년 1월 18일 ~ . 충청북도 청주 출신. 서울법대 졸업) 선생께서도 기사작성법을 강의하고 있었습니다. 남 국장은 중간고사 문제로 어떤 주제라도 좋으니 생활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소재로 글을 써 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바로 그 참관 현장에서 목격했던 일들을 숨김없이 써서 제출했더니 A+ 점수를 주고 교단에 나와 낭독까지 시켰습니다. 저는 그 글에서 “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박정희 후보가 아니라 김대중 후보가 당선된 것이 다.”고 썼는데도 남재희 국장은 저를 칭찬해 주었습니다. 나중에 언론인의 길을 떠나 10~13대 국회의원과 노동부장관을 역임하는 길을 걸었지만 적어도 그 당시 남재희 선생은 진실과 거짓을 가릴 줄 알았고,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준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어수선한 때였기에 대학가는 연일 데모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양 대학생들도 문리대의 경우 우리 신문학과가 주축이 돼 강의실을 뛰쳐나가 데모를 하기 일쑤였습니다. 저는 남재희 선생 강의 덕분으로 항상 성명서 작성을 맡았기에 ‘논설위원’이란 별칭을 얻기도 했습니다. 신문학과에서도 앞장섰던 친구들은 ‘한마음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지금까지 만나고 있습니다.
이듬해인 1972년 2월 1일 공군에 자원입대했습니다. 그해는 바로 ‘10월 유신’이 있던 해였지요. 3선에 성공한 박정희였지만 그 선거에서 실질적으로 패배했다는 것을 절감한 박정희로서는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유신은 그렇게 강행됐고 제가 근무하던 전투비행단에서는 연일 유신의 절실함에 대한 교육과 웅변대회 등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투표일. 제가 속한 본부중대원들은 본부중대 사무실에서 투표했는데 완전 공개 투표였습니다. 참모들이 죽 앉아있고 그 앞에서 공개로 투표하라는 거였지요. 더욱이나 O, X로 표기하도록 한 붓두껍은 정확하게 O까지만 미치도록 끈을 묶어 둔 상태였습니다. X쪽을 찍기 위해서는 투표용지를 당겨야 했습니다. 저는 거침없이 투표용지를 끌어 당겨 X에 찍었습니다. 그냥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습니다. 보안부대에 끌려가 조사를 받은 것은 물론 다른 부대로 전출가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출 간 부대가 훨씬 더 생활하기가 좋았습니다. 장교가 70여 명, 사병이 20여 명에 불과한 기술고등학교였습니다. 장교들은 모두 교관이었고 사병들은 모두 대학 재학 중이던 병사들이었습니다. 학교이기에 긴 여름, 겨울 방학이 있었고 그 기간 동안 사병들은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꼴로 각자 전공에 따라 준비해 주제 발표를 하고 토론을 하는 군대 같지 않은 군대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1974년 이른바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사건은 1974년 12월부터 1975년 5월까지 동아일보의 지면이 비거나 이상한 광고로 채워지고 일반시민들의 작은 광고들이 지면을 채우던 일을 말합니다. 제 발표 차례 때 바로 이 사건을 아는 만큼 준비해 발표하기도 했지요.
1972년 10월 박정희정권이 비상계엄과 국회해산을 포함한 유신헌법을 발효시키고 73년 박정희가 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지식인, 학생, 종교인 등 많은 시민들의 극렬한 저항은 이후 2년여 동안 계속되었고, 유신정부는 74년 1-4호의 긴급조치를 선포했습니다. 이 때 수많은 사람들에게 장기형이 쏟아졌고, 언론은 철저한 통제를 거쳐 제작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언론보도태도에 불만을 품은 대학생들이 동아일보 앞에서 동아일보를 불태우는 시위가 벌어져, 부끄러움과 자괴감에 빠진 동아일보 기자들이 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수호실천대회’를 갖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처한 미증유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언론의 자유로운 활동에 있음을 선언한다. 우리는 교회와 대학 등 언론계 밖에서 언론의 자유 회복이 주창되고 언론인의 각성이 촉구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뼈아픈 부끄러움을 느낀다.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과제일 뿐 당국에서 허용 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어주는 것은 아니다."
가슴 뭉클한 동아일보 기자들의 결연한 의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대회를 계기로 동아일보 기자들은 그동안 신문에 실리지 못했던 기사들을 신문에 게재했고, 당황한 정부는 결국 광고주들에게 압력을 가해 동아일보에 광고를 싣지 못하게 하면서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은 시작되었습니다. 동아일보가 백지로 광고를 내 보내자 시민들의 폭발적인 격려가 이어져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첫 광고를 시작으로 장준하, 문동환 등 지식인들의 동아일보 지지 광고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국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얻은 이 사건은 그러나 75년 3월에 접어들면서 경영난을 우려한 경영진이 부서를 폐지하고 18명을 전격 해임하게 됩니다. 이에 항의한 송건호<宋建鎬, 1927년 9월 27일 ~ 2001년 12월 21일. 호는 청암(靑巖). 충청북도 옥천 출신. 1956년 서울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편집국장이 사표를 제출했고, 기자와 동아방송의 아나운서, 프로듀서 등 130여 명이 3월 17일 무더기로 해고되고 맙니다. 이 때 해직된 사람들로 구성된 조직이 바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즉 동아투위로서 오늘까지 민주언론운동과 복직투쟁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 회원이신 김태진 선배께서도 이 때 해직되시어 회장도 역임하셨습니다.
1975년 1월 31일, 36개월의 공군 복무를 마치고 3학년에 복학하니 70 ~ 80년대 방황하던 젊은이들의 ‘사상의 스승’으로 일컬어지는 리영희(李泳禧 1929년 12월 2일 ~ 2010년 12월 5일. 평안북도 운산 출신. 1950년 한국해양대학 졸업) 선생께서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을 교재로 시사영어를 가르치고 계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때는 리영희 선생께서 젊은이들의 ‘사상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전환시대의 논리’를 막 펴낸 다음 해였습니다. 이 책이 나오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대립적이고 이분법적 냉전시대의 사고방식에 사로 잡혀 있던 젊은이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많은 다른 대학생들이 읽고 선생께 질문도 하고 자기들끼리 토론도 벌이는 등 온통 ‘전환시대의 논리’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정작 선생께서 직접 가르치는 한양 대학생들의 반응은 영 신통치 않았던 모양입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기신 선생께서는 시사영어 시간에 중국문제와 베트남문제, 주한미군, 일본 문제만 나오면 ‘타임’지 독해는 뒤로 미룬 채 국제정세를 바로 보는 눈을 갖고 진실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고 열강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둔한 제자들은 얼마나 알아들었는지 의문입니다. 한 시대의 위대한 스승을 만난 큰 행운을 제자들은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보물인지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미련한 제자가 초판이 나온 지 31년이 지난 2006년 8월, 한국언론재단에 근무하면서 선생께서 그 이후 연이어 쓰신 ‘우상과 이성’, ‘8억 인과의 대화’ 등을 묶어 13권짜리 전집을 펴내 드린 것으로 가르치심에 대한 보답이 될 수는 없겠지요. 그 책들로 인해 반공법 위반으로 2년간의 옥고를 치르신 뒤 투옥과 해직을 거듭하시고 그로 인해 얻은 후유증으로 돌아가신 스승께 죄인된 심정으로 고개를 숙입니다.
스승께서 강조하신 점은 한 마디로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볼 때 허위의식을 버리고 진실을 꿰뚫어 봐야 하며, 그 진실을 삶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실을 알고 그것을 실천해야 진정한 지식인이요 언론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스승께서는 아는 것과 삶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미국 닉슨 대통령이 1969년 1월 취임 직후부터 대외정책의 전면적인 재검토에 착수, 1970년 2월18일 ‘평화를 위한 새 전략’을 발표하고, 모택동과도 만나는 이른바 ‘핑퐁외교’를 전개하고, 베트남전쟁도 호치민의 승리로 끝난(1973년) 직후의 엄청난 전환의 시기에 박정희 군부정권은 여전히 반곤(反共)을 앞세워 영구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제정하고 국민의 민주적 권리를 박탈하는 것을 본격화 하던 때 나온 ‘전환시대의 논리’는 사회주의 중국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각을 교정하고, 베트남전쟁, 일본의 재등장,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관계 등을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함으로써 냉전적 허위의식을 타파하는 현실인식, 편협하고 왜곡된 반공주의를 거부하는 넓은 세계적 관점, 냉철한 과학적 정신을 계몽하고 민주적 시민운동에 앞장서는 이론적 역할을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리영희 선생께서는 사실 이 책에서 철저히 민중 속으로 들어가 민중과 함께 살며 제국주의 침략자들과 싸운 중국의 모택동과 베트남의 호치민의 승리와 민중을 외면하고 짓밟으며 막강한 권력과 부를 독차지한 장개석과 고 딘 디엠, 그 이후 등장한 군부정권과 미국의 처절한 패배를 증언과 증거 위주의 과학적이며 이성적인 방법으로 과감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1963년 11월 2일 고 딘 디엠이 군부쿠데타로 살해되기 얼마 전 당시 미국 케네디 대통령은 현지 조사단을 보내 “중국 말기의 장개석 역할을 고 딘 디엠이, 장개석 부인 송미령의 역할을 고 딘 누 부인이 완벽하게 재현하고 있는지에 놀랐다.”는 보고를 받고, “나는 인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는 한, 전쟁의 승리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지난 2개월간의 정세를 보건대 사이공 정부와 민중의 연대감이 완전히 상실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슐레징거가 쓴 케네디 전기 992쪽)는 내용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특히 1964년 8월 2일 미국 구축함 매독스호가 북베트남군 어뢰정 3척의 공격을 받아 북베트남을 폭격했다는 이른바 ‘통킹 만 사건’은 미국 정부가 이미 그해 2월부터 ‘34 알파 작전계획’이란 암호명으로 치밀하게 계획한 ‘북베트남에 대한 정교하고 은밀한 군사작전’이라는 사실을 ‘뉴욕 타임스’가 국방성 비밀문서를 인용해 폭로 보도한 내용을 소개하면서 언론의 자유가 왜 중요한지를 강조한 부분은 언론자유가 철저하게 통제되던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었습니다. 이런 내용들을 한 학년 내내 필자인 리영희 선생으로부터 직접 들을 수 있었으니 우리는 정말 행운아들입니다.
이로 인해 스승은 다음해 강제 해직되었고, 이어 1977년 나온 ‘우상과 이성’, ‘8억 인과의 대화’로 반공법 위반혐의로 기소돼 2년형을 받고 복역한 것을 시작으로 1995년 정년퇴직하기까지 구속과 해직을 되풀이 하는 형극의 길을 걸었으나 그 자세는 언제나 꼿꼿했습니다.
1976년 4학년이 되자 2년 전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에 사표를 낸 뒤 민주언론실천운동과 번역, 집필 활동으로 어려운 생활을 이어가시던 송건호 선생께서 ‘신문 문장론’ 과목을 맡아 강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분 또한 얼마나 큰 언론계 어른이셨습니까? “한 번 기자는 영원한 기자이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2003년 한겨레신문사에서 물러난 뒤 역시 1980년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구속돼 2년 동안 받은 고문으로 얻은 파킨슨씨병으로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2001년 8월 21일 오전 8시 영면에 들기까지 한 눈 팔지 않고 언론인으로 올곧게 사신 우리의 스승이십니다. 송건호 선생께서는 수줍은 표정의 선비로 저희들에게 다가오시어 당신의 경험을 들려주시면서 “기자는 항상 글과 삶이 일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시면서 "수십 년 후에 보더라도 부끄럽지 않은 글을 써야 한다. “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스승의 맏아들 준용 씨의 “아버지는 평소 역사의 진실이나 사회의 논리에 앞서 인생의 올바른 자세가 앞서야 한다는 점을 항상 강조하셨다.”는 회고는 우리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강조하시던 점입니다. “인생의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결코 역사의 진실을 깨닫지 못하며 오늘의 논리를 파악하지 못한다. 진실과 논리를 파악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논리의 무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다.”고도 하셨지요. 스승께서는 그러나 유신독재정권의 압력으로 1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교단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 후 여섯 아이와 아내를 둔 가장으로서 궁핍한 생활을 하시면서도 군사정권의 문공부장관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고 평생 언론인으로 사시던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면서 늘 존경했습니다.
<언론인은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
이 무렵 저를 사로잡은 책 가운데 하나가 천관우(千寬宇 1925년 8월 10일 ~ 1991년 1월 15일. 호는 후석(後石). 충청북도 제천 출신.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 졸업) 선생이 1969년에 쓴 언관 사관(言官 史官)이었습니다. 이번 강의를 준비하면서 다시 읽어 보려고 서점을 뒤졌으나 절판되고 없어 다시 읽지 못했으나 언론인은 조선시대 언론 삼사(言論 三司) 이었던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언관(言官)과 같이 하고, 글을 쓰기를 목숨을 내놓고 임금의 언행과 정치, 문무백관의 행정 등에 관한 사초(史草)를 썼던 사관(史官)과 같이 하라는 내용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자세로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삼사의 직무와 언관의 자세에 대해서 잠간 살펴보면 우선 사헌부(司憲府)의 언관은 시사적인 정치문제나 행정의 득실을 정확이 파악하여 그것을 비평하는 일, 사회의 기강이나 풍속을 바로잡는 일, 그리고 대소 관리들의 공과를 따져 포상할 것은 포상하고 탄핵하여 벌줄 것은 벌주는 것이 주요 직무였습니다.
사간원(司諫院) 언관의 직무는 간쟁(諫諍)과 논박(論駁)이 그 핵심이었습니다. 간쟁은 군주의 과오를 지적하고 그것을 바로잡아 고치도록 하는 일이며, 논박은 정부 인사문제의 공정 여부를 비평하는 동시에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하는 일입니다.
홍문관(弘文館)은 원래 궁중의 경적(經籍)과 문한(文翰)을 다스리고 왕의 고문에 응하며, 경연(經筵)을 담당하는 학자들의 연구기관으로 집현전의 휴신이입니다. 따라서 홍문관은 제도적으로는 언론을 담당하는 곳은 아니었으나, 그 주요 직무 가운데 하나가 왕을 모시고 경사를 강론하는 경연이었기 때문에 때로 시사적인 사회 ․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의견을 개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경연은 왕의 면전에서 말로 직접 언론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영향력은 매우 컸습니다.
이와 같은 중요한 직무를 수행하는 언관의 자세에 대해 다산 정약용(丁若鏞)은 1810년 유배지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큰 아들에게 보낸 편지, 시학연가계(示學淵家誡)」라는 제목의 글에서 “언관의 자리에 있을 때에는 모름지기 날마다 격언(格言)과 당론( 論 : 곧고 바른 의논)을 올려야 한다. 위로는 임금의 잘못도 공격하고 아래로는 알려지지 않은 백성들의 고통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在言地 日進格言 論 上攻袞闕 下達民隱)라고 명확한 정의를 내려 언관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를 거론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언관의 임무는 임금의 잘못을 공격해야 하며, 그 다음이 알려지지 않은 백성들의 고통을 통치자에게 상달하여 해결책을 강구하도록 촉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악한 관료들을 퇴출시킬 때의 원칙도 설명했습니다. 지극히 공정한 마음으로 처리해야지 치우친 의리에 근거하거나 당동벌이(黨同伐異 : 같은 당인과만 함께하고 타당인은 공격함)의 정신으로 처리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경고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고려 광종 때 당(唐)의 사관제도(史館制度)를 받아들여 궁중에 사관(史館)이라는 관청을 설치하고 실무를 맡게 하면서 시작됐다고 보는 사관 또한 언론인이 본받아야 하는 모범입니다. 사관은 직필(直筆)로 국가의 사건, 왕의 언행, 백관의 잘잘못, 사회상을 기록해 후세에 올바른 정치가 행해지도록 한 제도였습니다. 사관이 기록한 사초는 시비(是非)를 가리지 못하고, 고치지도 못했으며, 사관의 기록행위도 면책권이 있어 신분이 보장되었습니다. 그러나 광해군과 같은 폭군 시절에는 목숨을 잃은 사관도 많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사관은 정확한 기록을 자신의 생명 보다 더 중하게 여겼던 것이지요.
1968년 <신동아 필화사건>으로 동아일보 편집국장직에서 물러나 있던 천관우 선생께서 3선 개헌 직전, 그 광폭의 시대에 왜 이 책을 섰을까 하는 뜻을, 1974년 긴급조치가 내려진 뒤 복학해 ‘언관 사관’을 접하면서 충분히 이해하고 언론이 무엇인고. 언론인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임금의 잘못도공격하고 아래로는 알려지지 않은 백성들의 고통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는 명쾌한 정의를 다산은 200년 전에 내렸는데, 삼선개헌과 유신을 획책하던 군부독재권력에 대해 당시 언론은 무엇을 했던가요? 그리고 오늘의 국가 상황과 언론의 역할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
천관우 선생에게서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대학 졸업 후 조교로 있으면서 ‘반계 유형원 연구’(磻溪 柳馨遠 硏究)를 쓰며 사학자가 되려다가 6.25전쟁으로 1951년 부산에서 대한통신 기자로 언론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분을 당시 무척 좋아했고 존경하는 또 한 분의 스승으로 여겼습니다.
제가 신문기자가 되어 종로경찰서를 출입할 때 동아투위 선배들과 함께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언론운동을 펼치시다가 종로경찰서 정보과에 자주 연행되어 오시던 때를 기억합니다. 2층 정보과에서 조사를 받으시고는 1층 형사과 철창 너머 보호실에 갇혀 계실 때 그분들은 당당하셨고, 현역 초년 기자이던 저는 한없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렇게 목숨을 걸고 언론인으로 사셨던 천관우 선생께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 민족통일중앙협의 의장, 국정자문위원 등 군사독재정권의 제의를 뿌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여 그분을 따르던 수많은 후배들의 외면 속에 말년을 보내시다가 가신 것이 너무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를 잘 아는 남재희 선생은 대한언론인회에서 발간한 ‘한국언론인물사화’에서 “천관우 선생을 따르는 후배들이 너무 많아 30대에 이미 설날이면 그의 집에 세배객들이 줄을 이었는데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을 맡고부터는 후배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면서 “차라리 그 직을 맡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다.”고 회고했습니다. 신우식 서울신문 전 사장도 “말년을 너무 쓸쓸하게 보냈으며, 그의 장례식장에 갔을 때도 너무 조문객이 없어 오히려 민망했다.”고 했습니다. ‘언관 사관’을 쓰셨고 유신독재에 그토록 항거하며 민주언론을 지키시던 분의 말년을 보면서 과연 언론인으로 잘 사는 길이 어떤 길인가를 새삼 깊이 생각해 봅니다.
<진실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기자였던가?>
“신부가 하는 일이나 기자가 하는 일이 같다.”고 말하고, 위의 스승들의 가르침을 받고 기자생활을 시작한 저 자신은 과연 이를 제대로 실천했던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저의 주보성인 베드로 사도처럼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세 번 배반’한 그 태도로 기자생활을 하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합니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제대로 먹이지도, 교육시키지도 못하면서도 ‘자유언론’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스승들과 수많은 민주언론 주역들에게 부끄럽고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그 부끄러움과 죄스러움을 조금이나마 갚기 위해 1988년 서울신문 노조를 만들어 “권력과 금력으로부터 독립한 참 언론 서울신문을 만들자.”고 외치고 28일 동안 파업하면서까지 싸우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수많은 시민, 학생, 노동자들의 6 ․ 10항생으로 얻은 우리 사회 전반에 불던 민주화 바람의 영향이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그 결과로 2000년 전격 도입된 직선제 편집국장제에 의해 기자들이 직접 뽑은 초대 직선 편집국장에 선출돼 2년 동안 나름대로 노력했습니다. 이 신문사, 저 방송국 기자시험에 모두 응시했다가 운 좋게 합격한 서울신문사였지만 막상 들어가서 보니 1904년 창간된 한말 전설적인 민족지 ‘대한매일신보’에 뿌리를 둔 민족의 신문임을 알았습니다. 해방 후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꿔 ‘정권의 나팔수’ 노릇만 하던 민족의 신문을 그냥 둘 수만은 없었습니다. 뜻있는 동료들과 노조를 만들어 ‘깨어나라, 서울신문’이라 외치기도 했고, 그 정신을 이어받자며 제호를 ‘대한매일’로 바꿔 편집국장을 하면서 권력과 금력으로부터 독립된 신문이고자 최선을 다한 것만은 사실입니다.
이런 기자생활을 하는 중에 가톨릭언론인회에 참가한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이었고 은총이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초년 기자 때부터 그냥 나가야할 것 같아 나온 가톨릭언론인회입니다. 이 회에 나오면서 엄혹하던 당시 기자로서 제대로 주어진 일도 못하며 방황하던 저로서는 많은 위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선 그렇게 정신없이 살아가던 기자의 일상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기도를 하면서 하느님의 위안을 받을 수 있었고, 엄하기만 한 회사 선배들 대신 언제나 따뜻하게 대해 주시며 위안의 말을 해 주시는 많은 언론계 선배들을 만나 사랑을 나눌 수 있어 너무 좋았습니다.
맨 처음 나왔을 때 가톨릭언론인회 회장은 KBS PD 김현(金炫)선배였는데 정말 온화한 미소를 언제나 잃지 않으시고 후배들을 편안하게 해 주셨습니다. 8대 회장으로 1982년 2월부터 1988년 6월까지 재임하시던 기간 동안 매년 서울과 지방을 번갈아 가며 전국대회를 열어 전국의 언론인들이 자연스럽게 성지순례와 피정을 하며 신앙을 확인하고 친교를 돈독히 했습니다.
그 다음 9대 회장(1988년 6월 ~ 1990년 5월)을 맡으셨던 분이 한국일보 ․ 일간스포츠 편집국장이셨던 정달영(鄭達泳. 1939년 11월 14일 ~ 2006년 8월 21일. 충청북도 진천 출신. 한국외국어대학교 독문과 졸업) 선배이셨습니다. 무섭고 엄격한 신문사 편집국장답지 않게 정말 선비 같은 풍모를 잃지 않으시면서 언제나 타사 후배들까지 따뜻하게 대해 주시며 모든 후배들의 큰 기둥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 분이 그토록 유명한 명편집자요 데스크며 명칼럼리스트였던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정 선배께서 돌아가신 뒤 한국언론진흥재단 팀장으로 근무하는 둘째 아들 민이 생전에 남기신 대학 강의록과 ‘신문과 방송’에 실린 글 및 신문 칼럼들을 엮어 만든 ‘정달영의 언론학 특강, 참언론인이 되려는 젊은이들에게’를 읽으며 이 분이 얼마나 좋은 기자 선배였고 신앙 선배였던가를 알고 고개 숙입니다.
정 선배가 생각하는 기자도 춘추필법의 정신으로 역사의 길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어느 누구에게서도 쉽게 찾을 수 없는 정 선배만의 기자 필수 요건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의 책 27쪽에서 정 선배는 “기자는 평생 사람을 만나고 그 만남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직업이다. 많은 사람들과 통화하고 만나고 의견을 나누어야 한다. 사람에 대한 사랑, 경천애인(敬天愛人)이 바탕을 이뤄야 기사를 쓴다. 나쁘게 이용하거나 공격하거나 수단으로 삼는 대신에 사람을 사랑하고 인격을 존중하는 태도가 기자의 기본적 심성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정 선배임을 다시 확인하고, 천국에서 영원한 안식 누리시기를 빕니다. 우리 가톨릭언론인, 아니 모든 언론인이 갖춰야 할 으뜸 덕목이 바로 이 대목, ‘사랑의 실천’이 아닐까요?
<위기의 한국 언론, 신뢰도 추락이 주범>
한국언론진흥재단이 1984년부터 2년 주기로 실시하는 언론수용자 의식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신문, TV, 라디오, 잡지, 인터넷의 신뢰도는 해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신문의 신뢰도 추락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50% 수준은 유지했으나 해마다 추락하다가 2006년 18.5%로 뚝 떨어지더니 2008년 16.0%, 2010년 13.1%로 곤두박질 쳤습니다. 특히 2008년에는 인터넷의 20.0%보다도 뒤지는 수모를 겪을 정도였으나 2010년 들어 인터넷 10.8%보다 약간 높아 꼴찌의 수모는 모면해 그나마 다행이라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뉴 미디어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인터넷의 신뢰도가 이토록 바닥인 것은 근거 없이 마구 써대는 무책임한 보도와 비방 댓글 등에 대한 시민들의 반응이라 주목 됩니다.
이런 신뢰도의 추락은 곧바로 독자의 이탈을 낳고, 독자의 이탈은 광고주의 외면을 불러옵니다. 신문의 주 수입원인 판매수입과 광고수입의 저하로 경영난을 초래한 것은 당연한 결과라 하겠습니다. 선진국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판매수입과 광고수입이 50 : 50 비율로 균형을 이뤄야 건전한 재무구조를 갖춰 언론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진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신문의 경우 광고 의존율이 90%나 되니 광고주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지요. 광고주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언론 자유의 심각한 위기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광고주의 대부분이 대기업 등 재벌그룹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저널리즘의 위기 그 자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가뜩이나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문사뿐 아니라 전 언론사가 심각한 경영위기를맞고 있습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로 2010년 봄 언론계와 학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해 ‘신문위기 극복을 위한 대토론회’에서도 “외환위기 이후 광고시장은 급속히 위축되었고, 언론사에 대한 특혜 금융도 줄었으며, 인터넷의 등장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구독률이 감소하고, 매체간 경쟁이 심화되면서 정부와 대기업을 포함한 광고주 및 핵심 구독층에 대한 언론의 눈치 보기가 우려할 만한 수준에 달했다.”고 진단했습니다. 이 토론회는 언론이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취한 사업영역이 다각화와 인터넷을 활용한 신규 수익모델의 개발, 인력의 감축, 경영합리화 및 유통비용의 절감 등에 몰두한 결과취재윤리, 보도윤리, 및 광고윤리 등이 지속적으로 악화되고 있으며, 언론에 대한 불신도 비례해서 증가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언론에 대한 신뢰도는 1987년 민주화 이후 지속적으로 악화되었고, 무료신문, 포털, 인터넷매체 등 뉴스 콘텥츠를 무료로 제공하는 대안 매체의 증가에 따라 신문의 구독률은 끊임없이 하락하고 있으며, 특히 젊은 층에서 신문을 읽는 비중이 현저히 낮아지고 있는데도 신문의 신뢰도를 높이는 등 고품격화를 위한 노력은 오히려 후퇴하고 있다고 이 토론회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저널리즘의 위기는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그러나 국내 신문의 경우, 뉴미디어의 혁명에 따른 대안 매체의 증가와 글로벌 단일시장의 등장으로 인한 경쟁심화 등 국제사회의 공통된 요인 외에 언론의 자유와 다양성 후퇴, 뉴스 콘텐츠의 품질 악화, 언론인의 전문성 부족과 공익성 부족, 언론사와 언론인의 윤리의식 미비 및 국민과의 소통 부족 등 고유의 문제점이 있다고 이 토론회는 밝히고 있습니다.
<위기 극복,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서 찾아야>
위기 극복을 위해 이 토론회는 1) 언론의 독립성과 다양성을 위한 환경조성 2) 고품격 맞춤형 뉴스콘텐츠의 확보 3) 전문적이고 공익적인 언론인의 육성 4) 언론(인)의 윤리성과 책임성 제고 5)국민소통 강화 및 신뢰회복 등 5대 핵심의제를 설정하고, 다양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맞는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위기 극복의 핵심은 저널리즘의 기본에 더욱 충실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에서 소개한 스승들의 실천적인 언론인생과 삶 자체로 보여주신 가르침들도 분명 그 기본에 속합니다. 위기의 미국 저널리즘을 구출하기 위해 미국의 저명한 언론인과 학자들의 모임인 ‘저널리즘을 염려하는 위원회’(CCJ가 2000년 내놓은 1) 진실추구 2) 시민에게 충실 3) 검증의 규율 4) 언론인의 취재대상으부터의 독립 4) 권력의 독립된 감시자 5) 대중의 비판과 타협을 위한 포럼 제공 6) 저널리스트들이 개인적 양심을 따를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라는 제안들도 분명 저널리즘의 기본 요소입니다.
이에 더해 저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야말로 언론의 위기 극복을 우한 최고의 처방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론인으로서도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언제나 진리만을 가르치셨고, 그 진리를 낮은 사람에게나 권력 있는 사람에게나 골고루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전하신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수용자의 수준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구사하셨지요. 힘없고 가난하며 병든 사람들에게는 한없는 사랑으로 말씀하셨지만, 바리사이와 가두사이 등 권력을 남용하는 자들에게는 날카로운 비판을 서슴지 않으셨습니다. 삶 자체로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가장 낮은 곳으로 가시어 가난하고 병들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안아 주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탈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성교회는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으로 ‘42行 성경’을 인쇄한 이후 최초의 매스 미디어인 출판물의 홍수를 이루던 1766년 교황 클레멘스 13세의 ‘출판물에 관한 사목교서’를 발표한 이래, 오는 6월 5일 제 45차 홍보 주일을 맞아 교황 베네딕토 16께서 지난 1월 24일 발표하신 ‘디지털시대의 진리, 선포, 참된 삶’에 이르기까지 매스미디어의 선용을 위한 가르침을 끊임없이 내놓고 있습니다. 제 2차 바티칸공의회는 특히 인쇄기, 영사기, 라디오, 텔레비전과 기타 유사한 새로운 매체들의 출현을 지켜보면서 이는 개인뿐 아니라 온 인류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놀라운 기술’(Inter Mortific)로 정의하고 이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새로운 매체는 그 이후에도 계속 놀라운 발전을 거듭해 인터넷의 홍수를 이루는 가운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저는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인 인터넷의 등장이라는 우리 시대의 특징적인 현상에 대하여 몇 가지 성찰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고 시작한 올해 홍보주일 담화에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개인과 인류 전체의 온전한 선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는데,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몇 가지 전형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습니다.”고 지적하시고 “이는 곧 소통의 일방성, 자기 내면세계의 일부만을 전달하려는 경향, 자칫 자아도취에 빠질 수 있는 자기 허상을 만들어낼 위험 등이 바로 그것입니다.”고 하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이어 “새로운 기술은 공간과 문화의 경계를 넘어 사람들을 서로 만나게 해 주고, 그렇게 하여 우정을 쌓을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며 이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기회이기도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위험들을 깨닫고 더욱 조심하여야 합니다.”고 지적하시고, “이 신세계에서 누가 우리 ‘이웃’입니까? 우리가 날마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소홀해질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는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에 몰두하여 우리 관심이 흩어지고 현실에서 멀어질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선택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참으로 깊고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키워 나갈 시간이 있습니까? 우리는 가상 세계의 만남이 우리 삶의 모든 차원에서 직접적인 만남을 대신할 수 없고 대신하여서도 안 된다는 것을 늘 기억하여야 합니다.”고 하시면서 모든 신자들에게 주의를 환기시켜 주셨습니다.
교황께서는 이어 “디지털 시대에도 모든 이는 진실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 되어야만 하며, 정직하고 개방적이며 책임감 있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특히 그리스도인은 이런 새로운 상황 안에서 새로운 표현 형태를 통하여, 자기가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하도록 다시 한 번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1베드 3,15 참조).”고 하시면서, “이 시대의 복음 선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셨을 때 보여 주신 방식(루카 24,13-35 참조), 즉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시어 대화를 나누시고 그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던 것을 드러내게 하시어 그들이 차츰 신비를 이해하도록” 이끄신 대로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의 진리는 관계와 친교와 의미를 향한 인간의 열망을 충족시키는 참된 응답이라고 교황께서는 강조하고 계십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께서는 2008년 홍보 주일 담화에서도 “미디어는 총체적으로, 사상의 전파 수단일 뿐만 아니라 더욱 정의롭고 단결된 세상을 위한 봉사에 쓰이는 도구가 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디어는 사람들에게 현재 지배적인 권익을 대변하는 문제에만 집중하게 만드는 체계로 변질될 위험이 있습니다. 커뮤니케이션이 이데올로기를 위해서나 소비 상품의 공격적인 광고에 사용될 때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현실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미이어는 개인과 가정과 사회생활에서 왜곡된 형태를 정당화하거나 강요하기도 합니다. 더구나 청취자를 끌어들이고 시청률을 높이려고 때로는 도를 넘어선 외설과 폭력에 주저 없이 의존하기도 합니다.”라고 미디어의 역기능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신바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언론에 대한 교회의 관심과 가르침은 매스미디어의 적극적인 활용이라는 측면과 함께 매스미디어의 역기능적 부작용으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하려는 상반된 측면을 함께 포함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언론과 매스미디어는 ‘놀라운 기술’이라는 표현에 맞게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지만, 그 내용과 사명 수행에 있어서는 오히려 후퇴하고 있어 교회의 관심과 가르침은 후자에 더 방점을 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팔일 축제 내 토요일입니다. 예수님 부활과 함께 우리 언론의 부활도 기대하며 기도합니다.
20011년 4월 30일
최 홍 운 베드로 (UCIP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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