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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4. 궁창(하늘)을 만드심
2019. 12. 21. 이현래 목사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게 하리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창1:6-8)
궁창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하늘이다. 1장 1절의 하늘은 heaven이고 6절의 궁창은 sky다. 2절에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셨다고 했는데 이것은 온 땅이 물로 덮여 버렸다는 뜻이다. 땅은 물에 덮이면 쓸모가 없다. 논에는 물이 적어서 벼를 심을 수 있지만 큰 물이 덮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아주 깊은 물은 밑바닥이 캄캄하다. 물에 덮여버리면 생물마저 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궁창이 있으라고 하신 것은 그 물을 둘로 갈랐다는 뜻이다. 위엣 물과 아랫 물로 갈라서 그 사이에 궁창을 두셨다. 이것은 과학적인 말이 아니라 직관이다. 하늘도 푸른 색이고 바다도 푸른색이다. 비행사들의 말에 의하면 높이 올라가서 보면 하늘과 바다가 구별이 안된다고 한다. 훈련이 안되어 있으면 거꾸로 처박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볼 때는 분명히 위 아래가 있는데 높이 올라가면 위 아래가 없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비행기를 몇 바퀴 회전을 하고 보면 자기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게 된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아래의 물과 위의 물로 나뉘게 하셨다고 하였다. 재미있는 말이다. 성경은 과학적인 말도 아니고 논리적인 말도 아니다. 직관이다. 궁창을 두셨다는 말은 물과 물 사이에 공간이 있다는 말이다. 공간이 왜 필요한가? 공간은 숨 쉬는 곳이다.
물에 덮이면 만물이 숨을 쉴 수 없는데 중간을 갈라놓으니까 숨 쉴 곳이 생긴 것이다. 생명이 살려면 숨쉴 곳이 있어야 한다. 세포도 그렇다고 한다. 세포와 세포 사이에 공간이 있다. 살이 다 들어붙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세포와 세포 사이에 틈이 있어서 공기가 유통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물에 뜨는 것이다. 허파에 공기가 있어서 뜨기도 하지만 세포 사이에 있는 공기 때문에 사람이 물에 뜬다. 겁을 내니까 가라앉는 것이지 사람이 물 위로 뜬다. 물을 많이 먹고 죽으면 물 속으로 가라앉고 심장마비로 죽으면 물 위로 뜬다. 공기가 없이는 생물이 존재할 수 없다. 빈 사이가 있어서 거기서 발효작용이나 다른 모든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궁창을 만드셨다는 말은 직관적인 말인데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여유, 숨쉴 곳, 자유, 이런 것이 궁창에 해당된다. 우주가 한 덩어리로 붙어 있다면 아무 것도 안될 것이다. 그 사이에 궁창이 있어서 생명이 태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숨을 쉰다. 숨을 못쉬면 죽는다. 인생은 어떤가? 인생도 자유와 여유가 있어야 되지 조여들면 못산다. 강박관념이라는 것이 있다. 뭔가 자기를 물고 있어서 마치 갇혀 있는 것처럼 되는 상태가 강박관념이다. 어려서 부모가 너무 쪼았거나 강압적이었던 사람은 밑바탕에 강박관념이 생기고 초조해지게 된다. 아이들에게도 자유가 있어야 되고 숨 쉴 구멍이 있어야 된다.
자기대로 생각을 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공간, 숨쉴 공간이 필요하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자유가 있고 여유가 있는 사회인가 아닌가에 따라 생활의 지혜에 큰 차이가 있다. 일제 하에 있을 때는 주권이 없으니까 정치적 자유가 없었다. 해방 후에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재미있는 구호가 있었다.
자유가 없으면 죽는 것이 낫다는 뜻이다. 감옥에 계속 갇혀 있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더구나 빛이 없는 감옥이면 더 그러할 것이다. 사람은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있어야 되지 갇히면 못산다. 먹는 문제 다음으로 중요한 문제는 자유다. 배가 고프면 우선 먹어야 하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 해결되면 자유가 필요하다.
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싸우고 있는가? 공산주의는 물질적인 평등을 주장한다. 어떤 사람은 한 달에 천만 원을 버는데 어떤 사람은 백만 원을 벌면 불평등하니까 다 비슷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는 물질적인 평등이 있다. 대신 권력의 자유가 없다. 마음대로 이사도 못한다. 국가의 계획에 따라야 되니까 이사하고 싶으면 허가를 받아야 된다. 인민을 정부가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자유가 없는 것이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차이는 물질적 평등이냐 아니면 권리의 평등이냐의 문제다. 사람들은 결과만 보고 이것이 좋다고 하고 저것이 좋다고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물질을 똑같이 갖고 자유가 없는 것이 나은가, 아니면 물질의 균형이 어긋나도 자유가 있는 것이 나은가 하는 것이다. 미국은 자본주의기 때문에 물질은 엄청나게 불평등하다. 대신 자유가 있는 것이 특색이다. 그에 비해 구 소련에서는 물질은 평등하고 특별히 잘 사는 사람이 없는데 권리가 평등하지 못했다.
어느 곳이 더 살기 좋은 곳인가?
사람들은 자유가 있는 데를 택한다.
조금 적게 먹더라도 자유가 좋다고 한다. 인생은 자유와 여유가 필요하다. 여유가 없고 자유가 없는 사회는 숨막히는 사회다. 나는 우리 교회가 자유와 여유를 가지려면 사람이라는 것으로, 인격만으로 만나지는 사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그런 사회를 지향한다. 여기는 계급장도 없고 차별도 없다. 공산주의처럼 물질이 평등하지 않고 자본주의라서 자기 능력껏 벌어서 살아야 하지만 교회는 그런 것과 관계된 사회가 아니다.
그래서 사람이라는 존재만으로 만나지는 사회를 지향하고 있다. 누가 우리 교회의 특색을 묻거든 이렇게 말하면 된다. “우리는 존재적으로 사는 교회다.”라고.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존재적으로는 같으니까 그것이 우리를 평안케 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와서 우리 교회를 보고 “뭔지 모르지만 편안하다.”고 한다. 왜 평안한가? 계급이 없기 때문에, 존재만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물론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존재적인 평등, 존재적인 만남을 지향하고 추구하고 있다. 그래서 그나마 살아보면 물질적인 평등이 없어도 교회생활을 하는데 별 문제가 없는 것이다. 시편 136편 5절에는 “지혜로 하늘을 지으신 이에게 감사하라.” 했고 예레미야 10장 12절에는 “명철로 하늘들을 펴셨으며…….”라고 하였다. 하늘이라는 말에 지혜라는 말이 수반된다.
여유, 자유, 이것이 지혜다. 돈만 벌기 위해서 아등바등하는 것은 여유가 없고 지혜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혜로 하늘을 지으셨고 명철로 하늘을 펴셨다. 성경을 참고해 보면 하늘이라는 말이 나올 때는 지혜라는 말이 수반된다. 그러나 동산을 떠나서 하나님을 잃은 아담은 여유가 없어졌다. 하나님이 없으면 여유가 없어진다. 이상한 일이다.
왜 여유가 없는가? 쫓기게 되기 때문이다. 각자 자기대로 뭔가를 해 보려고 하지만 길이 없기 때문에, 없는 길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에 쫓기는 것이다. 길이 놓여 있으면 쫓길 필요가 없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네 시간이면 가니까, 어차피 네 시간이 걸려야 하니까 네 시간 동안은 쫓길 필요가 없다. 그러나 길이 없으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두 시간이 걸릴지 열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그래서 답답하고 조급하게 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부산에서 서울까지 기차로 열두 시간이 걸렸다. 지금은 KTX로 세 시간이면 된다. 그렇게 시간이 정해져 있으니까 사람들은 마음을 놓을 여유가 있다. 세 시간 동안은 기차를 타지만 그 후에는 내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을 전혀 모르면 몇 시간이 걸릴지 언제까지 가야할지 모른다. 그래서 조급해지게 된다. 길이 없으니까 한 시간을 가도 조급하고 다섯 시간을 가도 조급하다.
하나님이 없으면 인생은 길이 없어진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고 왜 만들었는지 모르니까 길이 없어지는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자기 스스로 연구해도 안된다. 세상은 끝이 없기 때문에 안된다. 내가 원한다 해서 그 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마음대로 다 되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한이 없는 무덤은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아담에게 내려진 말씀이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하신 말씀이다. 가시덤불이 있으면 어딘지 모르니까 헤쳐야 한다. 깊은 산에 들어가면 동서남북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나무가 꽉 차 있으면 하늘이 안보인다. 내가 살던 곳 앞 보길도에는 큰 산이 있다. 거기는 상록수로 차 있어서 항상 푸르다. 나도 한 번 그곳에 들어가 보았는데 중간쯤 가니 무서웠다.
하늘이 안보이니까 어디로 가야할지 몰랐다. 바로 인생이 그런 길이다. 하늘도 땅도 안보이고 동서남북을 구분할 수 없으니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 그래서 인생이 불안한 것이다. 갈 길이 환하면 불안할 일이 없다. 길만 있으면 가다가 쉬면 되고 언제 가도 갈 수 있다. 그러나 길이 없으면 동으로 가야할지 서로 가야할지 모른다. 잘못 가면 동으로 갈 것을 서로 갈 수 있다. 군대에 가면 독도법을 배운다고 한다.
깊은 산 속에서도 나침반이 없이 동서남북을 구분해야 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방법을 배우고 나무가 자라나는 모습을 보거나 해서 동서남북을 구분한다. 길을 찾아서 가다 보면 갈 때는 다섯 시간쯤 걸린 것 같은데 돌아올 때는 한두 시간밖에 안걸린다. 돌아올 때는 길을 아니까 쉽게 돌아온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갈 길을 알면 쉽게 갈 텐데 갈 길을 모르니까 헤치느라고 여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리고 헛된 목적을 위해서 땀을 흘려야 하기 때문에 여유가 없는 것이다. 목적이 분명하면 달려가도 피곤치 않다. 마라톤 선수를 보면 백리가 넘는 길을 달리는데 목적이 없다면 그렇게 달릴 수 없다. 목적이 있으니까 40Km를 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목적이 없으니까 왜 사는지 모른다. 남이 가니까 가는 것이지 왜 사는지, 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6.25때 우리는 방위가 전혀 없었다. 탱크로 밀고 내려와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그래서 하나뿐인 한강 다리를 폭파시켜 버렸다. 그것 때문에 문제가 되어서 폭파한 사람은 사형을 당했다. 이번에 복권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일에 대해서 여러 가지 복잡한 해석이 많다. 어차피 전쟁은 얼마나 살고 얼마나 죽느냐의 계산이지 인권이라는 것은 없다.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지만 피란을 나온 사람들은 앞을 모르면서도 서로 빨리 가라고 밀었다. 앞에서는 다리가 끊겼는데 뒤에서 미니까 선두에 있던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었다.
어디로 갈지 모르니까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앞에 길이 있는 줄 알았는데 길이 끊어져 버렸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겠는가. 인생이 그러하다. 무엇이 될 줄 알고 좇아가지만 가 보면 아무것도 없다. 젊었을 때는 공부를 잘하면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할 것 같다. 그런데 기업이 다 문을 닫아서 취직을 못하게 되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취직을 해서 돈도 벌었다 해도 또 다른 문제가 생기면 또 허망해진다. 무엇이든 다 성공해 놓고도 인생은 허망하다.
오죽하면 이병철 씨 같은 분이 마지막으로 인생에 대해서 질문을 했겠는가. 그분은 자기 앞길을 몰라서 차동엽 신부에게 질문서를 내놓고 세상을 떠났다. 그분은 객관적으로 볼 때 모든 것을 다 이루어 놓은 사람인데 마지막에는 갈 데가 없고 자기 것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자기가 죽는데 삼성이 자기 것이 되겠는가. 그럴 줄 알고 재산을 다 국가에 헌납했으면 자손들은 고생을 안해도 되었을 텐데 사람 일을 모르니까 여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목적이 분명하면 자기가 죽더라도 감사하게 되지만 목적이 없으면 땀만 흐른다. 왜 땀을 흘려야 되는지 모르면서도 계속 해서 땀을 흘려야 한다. 성경은 얼굴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인생은 여유가 없다. 뭔가 되고 끝나는 것이면 여유가 있을 텐데 그렇지 않으니까 여유가 없는 것이다. 기결수보다 미결수로 있을 때가 더 괴롭다고 한다.
형을 얼마나 받을지 모르고 언제 출소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다 일 년이든 이 년이든 형이 결정되면 그때부터 편안해진다고 한다. 일 년이나 이 년 후에는 출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사형수도 미결수로 있을 때는 바짝바짝 마르는데 사형 언도를 받고 나면 편안해진다는 것이다. 사람이 평안이 없는 것은 목적이 없으니까 결론이 없고 그래서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없이는 안되는 이유가 이것이다. 하나님이 있어야 목적도 생기고 목적이 있어야 여유가 생기는데 목적이 없으니까 여유가 없다.
언제까지 해야 되는지 모르는 것이다. 기독교인들도 옛날에는 잘 살다가 믿음을 가지고 죽으면 천당에 간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런대로 살았다. 그런데 요즘은 천당을 믿는 사람이 별로 없고 기독교가 대답을 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안해지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기독교 인구가 계속 줄고 있고 한국에서도 줄어들고 있는 중이다.
기독교에 답이 없으니까 기독교 인구가 주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으면 모든 것이 답이 없어진다. 사람이 얼마나 여유가 없는지 보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라고 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죽을 죄를 지어서 설 자리가 없는 여자를 끌고 와서 “이런 여자를 어떻게 하면 되느냐?”며 다그쳤던 것이다.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여유가 없었으면 그렇게 했겠는가. 조금만 여유가 있어도 다른 생각을 해 볼 수도 있을 텐데 너무 여유가 없으니까 “이런 여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하겠느냐?”고 했던 것이다.
자기 일이 아니고 남의 일이니까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대답한 것을 보면 얼마나 여유가 있는가!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시오.” 얼마나 여유가 있는가! 예수님은 그 여자를 살려야겠다는 여유가 있었다. 사람들이 생각해 보니 자기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하나씩 하나씩 가 버렸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고 보내셨다는 이야기가 요한복음 8장에 나온다. 여유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이것이다.
“돌로 치라 명했는데 선생은 어떻게 하겠느냐?”라던 사람들은 한 치의 여유도 없다. 바늘구멍조차 없다. 얼마나 강퍅했으면 그렇게 했겠는가. 우리 교회 초창기에 그런 일이 있었다. 찬송가를 만들면서 여기 저기서 좋은 것을 뽑아다가 만들었는데 어떤 사람들이 자기들이 만든 찬송가를 베꼈다며 항의를 하러 왔다. 내가 찬송가는 하나님을 찬양하려고 만든 것이니 여러 사람이 부르면 더 좋지 않느냐고 했지만 그들은 자기들 것이니 부르지 말라는 것이었다. 자기들이 만든 찬송가를 다른 사람들이 불러 주면 좋아해야 할 텐데 얼마나 여유가 없으면 자기들 것이니 부르지 말라는 소리를 하겠는가. 그들이 책을 내놓으라고 해서 주었더니 자기들 노래는 찢어버렸다. 사람이 행동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여유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다. 여유가 있어서 넉넉한 사람도 있고 바늘도 안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나면서 소경된 사람을 만났을 때 소경된 것도 억울한데 제자들은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자기의 죄 때문입니까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라고 예수님께 물었다. 죄가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면, 죄 때문에 벌을 받아서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것이라면 어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죄 받아서 그런 것이니 당연하다.’고 할 만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고 하셨다.
엉뚱한 대답 같지만 얼마나 여유가 있는 말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날 때도 ‘앞뒤가 다 막혔구나. 이것을 어떻게 할꼬?’라며 막막해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실지 모르겠다.’라고 여유 있게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어찌할 수 없지만 하나님이 여기서 무엇을 하실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 여유가 생긴다.
여러분의 삶에서 도저히 길이 없다고 생각되면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지 모르겠다.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있게 하신 분이니까 이것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지 모르겠다.’라고 생각하면 여유가 생긴다. 그러면 기다려지게 된다. 즉석에서 해결되지 않을 일은 땅을 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길이 없다고 땅바닥을 치고 있을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기다려 보자.’고 하면 여유가 생긴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의 차이가 이것이다. 예수님이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의 눈을 뜨게 하시니 사람들은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눈을 떴다.”며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그에게 와서 “누가 너의 눈을 뜨게 해 주었느냐?”라고 물었다. 그 말은 자기들도 눈을 떠 보려고 묻는 말이 아니다. 사람들은 “누가 그랬느냐?”고 물었고 “나는 모르겠다.
어떤 사람이 뜨게 해 주었다.”라고 대답하니까 사람들은 그의 부모에게 물었다. “누가 저 아이의 눈을 뜨게 했느냐?” 그 부모는 “우리도 모르겠느니 당신들이 가서 알아보시오.”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자기들도 눈을 뜨고 싶어서 온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이기에 눈을 뜨게 했는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누가 뜨게 했으면 어떤가? 좌우간 눈을 떴으면 좋지 않은가. 소경이 눈을 떴으면 축하할 일이지 따지고 다닐 일이 아니다.
나면서부터 소경인 사람이 절에 가서 눈을 떴다는 말을 기독교인이 들으면 일단 축하를 하고 볼 일이지 ‘뭐, 불교에서 눈을 떠?’라고 하면 되겠는가? 어떻게 떴든지 눈을 떴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스님이 뜨게 했든 누가 뜨게 했든 캄캄한 사람이 눈을 떴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그러면 축하를 해야 되지 “누가 네 눈을 뜨게 했느냐?”며 쫓아다니면 되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많다. 그 사건 자체는 안보고 다른 생각만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예수라는 사람이 눈을 뜨게 했다고 하니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눈을 뜨게 했다.”며 틀려먹었다고 했다. 그들은 그렇게 트집을 잡으려고 묻고 다녔던 것이다.
그들이 인생이 얼마나 여유가 없으면 그런 짓을 하고 다니겠는가. 안식일이든 아니든 눈을 떴으면 좋은 일 아닌가.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굉장히 중요한 날이다.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반드시 죽이라는 것이 안식일에 관한 계명이다(출31:15). 안식일이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이 눈을 뜬 것보다 더 중요한가? 이런 점이 여유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다.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셨다(요11:3). 그런데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시고 이틀을 더 머무셨다. 죽겠다고 급하게 소식을 보냈는데 예수님은 거기서 이틀을 더 머물다 나사로에게 가셨다. 그런데 와 보니 나사로는 이미 죽었다. 그래서 “이미 죽었습니다. 선생님이 이틀을 머무는 동안에 죽었습니다.”라고 했는데 그 말이 무슨 말이겠는가. ‘그때 왔으면 될 텐데 이틀이나 더 유했으니 살겠습니까. 나사로가 죽은 것은 선생님 잘못입니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자는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요11:11).” 그래서 제자들은 잠들었으니 깨어나면 되겠다고 한 것이다. 비아냥인 것이다. 기다려 보면 될 텐데 제자들은 “잠들었어요? 그러면 일어나겠네요.”라며 비아냥거렸던 것이다. 이것이 세상 사람의 생각이다. 여유가 없는 사람의 생각, 하나님 없는 사람의 생각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을 하실지 모르니까 항상 여유를 남겨 두어야 한다. 우리 인생에서 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 알 수 없으니까 나보다 더 크신 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 여유를 남겨 놓아야 한다. 사방이 다 막혀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콩을 맷돌에 갈아도 이상하게 갈리지 않는 놈이 거기서 나온다. 그래서 그런 속담이 나왔다. 맷돌에 들어가도 갈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여유 있는 말인가. 콩 백 개가 들어가면 아흔아홉 개는 갈리고 어쩌다 갈리지 않은 한 놈이 생기는데 그것을 보고 한 말이다. 긍정이라는 것은 확률에 달린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마음이 긍정적인 사람은 끝까지 긍정적인 생각을 한다. 그러나 마음이 부정적인 사람은 끝까지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 부정적인 사람치고 잘사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이 말은 아주 중요한 말이니 명심해야 한다. 내가 CCC에 들어가서 김준곤 목사님에게 배운 것 중 가장 큰 것이 이것이다.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 부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성공한 사람은 없다.’ 여러분 주위를 자세히 보라. 부정적인 생각으로 성공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실패한 사람은 모든 것이 부정적이다. 정주영씨의 성공담 가운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울산 미포만의 백사장 사진과 오만분의 일 지도 한 장을 들고 참모들과 함께 영국으로 돈을 빌리러 갔다는 이야기다. 그분이 얼마나 긍정적이고 배짱이 크면 그렇게 했겠는가. 영국의 금융가는 그의 말을 듣고 “우리 은행에서 돈을 빌려 주려면 근거가 있어야 하니까 배 한 척만 수주해 오면 돈을 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종이 한 장을 갖고 와서 무슨 조선소를 만들겠다고 하느냐?’는 뜻이었다. 참모들이 낙심했지만 정주영 씨는 모나코로 선박왕을 찾아갔고 배 한 척을 수주했다. 그쪽에서는 밑져야 본전이니까 선박을 수주했던 것이다. 현대중공업이 그렇게 세워진 것이다. 보통 사람은 그렇게 하기 어렵다. 그래서 정주영 씨가 돈을 번 것이지 특혜를 받아서 번 것이 아니다. 맨 바닥에서 시작한 사람이다. 부정적인 사람은 아예 시작도 못한다. 긍정적이라야 시작도 할 수 있고 추진해 나갈 수도 있다. 김준곤 목사님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가지라는 말을 굉장히 강조해서 하셨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을 때가 있었다. 충주로 발령을 받아서 갔는데 본부에 회의가 있어서 팔십 명의 간사들이 모여서 각 지구별로 보고를 했다. 학생 수가 얼마고 헌금이 얼마고 하며 긍정적인 보고를 했는데 나는 보고할 것이 없었다. 마지막에 나보고 “이 목사, 말해 보시오. 학생 수가 얼마나 됩니까?”라고 묻기에 솔직하게 열두 명 된다고 했더니 “이 목사, 뭐 잘못된 것 아니요?”라고 하셨다. 나는 생전 처음 그런 무안을 당해 보았다. 대중 앞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얼굴을 들 수 없었다. ‘가까스로 구한 직장인데 잘리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고 ‘내가 여기서 버티고 있어야 되는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오래된 간사 한 분이 오더니 “목사님, 너무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 CCC 보고에 문제가 있습니다.”라고 하기에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또 한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위로를 받고 충주로 와서 철야기도를 하기도 했다.
김 목사님은 그렇게 해 놓고 나를 부르지 않았고 문책도 하지 않았다. 알고 보니 여러 사람이 있는 데서 김 목사님에게 부정적인 보고를 하면 안되었던 것이다. 사람은 이상하게 한 사람이 부정적인 것을 내놓으면 다른 사람들도 부정적인 것을 내놓는다. 한 닭장 안에 있는 병아리들은 한 놈이 긁기 시작하면 다 긁고 한 놈이 울기 시작하면 다 운다. 개도 한 놈이 짓기 시작하면 다 짓는다.
한 사람이 부정을 내놓으면 모든 사람이 부정에 전염되어 버려서 ‘나도 그렇다.’고 하게 된다. 용기를 내야 될 텐데 그렇게 되면 오히려 침체되니까 부정적인 보고를 못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간사들의 보고가 어느 정도 허풍이 있는 줄 알아도 김 목사님은 그 보고를 그냥 받아들인 것이다. 그래야 서로 고무가 되지 나 같은 사람이 나와서 학생들이 열두 명뿐이라고 하면 망하기 때문이다. 내가 해 보니까 학생들이 전도를 하러 갔다가 와서 긍정적인 보고를 하면 기분이 좋은데 이래서 안되고 저래서 안되고 하면 맥이 빠진다. 한두 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이 다 그렇게 하면 힘이 나겠는가. 긍정적인 보고를 한 사람이 성경에 나온다.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더니 열 명은 돌아와서 “우리는 끝났습니다. 그들은 얼마나 큰지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메뚜기 같습니다. 우리는 갈 데도 없고 다 죽었습니다.”라며 부정적인 보고를 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아닙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붙이셨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열 명은 광야에서 죽고 긍정적인 보고를 한 그 두 명만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김 목사님은 부정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은 성공을 못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하셨다. 장사를 해도 처음부터 좋은 것만 골라서 파는 사람이 있다. 사과가 한 상자에 백 개 정도 들었는데 손님이 오면 그 중에서 제일 좋은 것만 골라 준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제일 나쁜 것부터 골라 준다. 긍정적인 사람은 손님들을 기분좋게 하려고 좋은 것부터 파는데 부정적인 사람은 좋은 것은 남겨 놓고 나쁜 것부터 처리하려는 생각으로 나쁜 것부터 판다. 손님들은 귀신처럼 안다. 그러니 자기에게 좋은 것을 주는 사람에게 가는 것이다. 똑같이 사과 한 상자, 백 개를 파는데 좋은 것부터 세어서 백 개를 파느냐, 나쁜 것부터 세어서 마지막까지 나쁜 것을 파느냐의 차이다.
인생도 똑같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마지막까지 긍적적이게 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마지막까지 부정적이게 된다. 긍정이 따로 있고 부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에 달렸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예수님은 분명히 안될 일인데 그 길을 가셨다. 다른 길에도 좋은 것이 있는데 그 길을 희망을 가지고 가셨다. 하나님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가 그것이다. 하나님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으니까 항상 여유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자기뿐이니까 자기 생각이 끝나면 다 끝나 버린다. 더 이상 갈 데가 없다. 아무리 길이 막혀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젊은 날에 내가 그러했다.
사방이 다 막혔는데 딱 한 군데 하늘로 열린 구멍이 하나 있었다. 그 구멍으로 내가 부름받았다. 나는 그 구멍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내가 모르는 데서 나를 찾으시는 하나님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어느 경우에도 낙심할 필요가 없다. 공간이 있다는 것은 숨 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미있는 것은 계란을 깨 보면 안에 얇은 막이 있고 껍데기가 있는데 한쪽에 빈 공간이 있다. 알이 병아리가 되어 나올 때 보자기 같은 막 속에 있다가 병아리가 되면 그 막을 뚫고 나오는데 맨 먼저 공기가 있는 그 공간을 뚫는 것이다. 그래야 숨을 쉴 수 있다. 주머니 속에 있을 때는 숨을 쉬지 않아도 살 수 있는데 병아리가 되어 나오려면 숨을 쉬어야 한다.
그래서 병아리가 숨을 쉴 만큼 그 공간에 공기가 들어 있는 것이다. 거기서 다시 신호를 하면 어미가 알고 뚫어 준다. 신기하다. 어떻게 그렇게 만들어 놓았는지 계란 속에 공기 주머니가 있다. 계란을 자세히 보면 그 공간을 볼 수 있는데 병아리가 뚫고 나오는 시간동안 살아날 수 있는 공기가 그 안에 들어 있다. 하나님은 다 살게 만들어 놓으셨다. 살 구멍이 있는데 모를뿐이지 죽으라는 법은 없다. 만일 다른 데를 뚫으면 병아리는 죽는다. 꼭 거기를 뚫어야 살 수 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우리가 모를뿐이다. 하나님이 있는 사람은 내가 모르는데도 누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눈으로 봐서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정되기 때문에 ‘아, 나는 끝인데, 나는 안되는데 하나님에게는 다른 길이 있을지 모른다.’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유가 생긴다. 이것이 바로 궁창이다.
우주 안에 궁창이 없다고 생각해 보자. 궁창이 없으면 만물이 다 죽는다. 여유가 없는데 어떻게 살겠는가! 사람이 마지막으로 자살을 하는 것은 여유가 없어서다. 마지막 희망이 있으면 살지만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니까 죽는 것이다. 하나님이 있는 사람에게는 계란 속에 공기 주머니가 있는 것처럼 궁창이 있다. ‘설마 나를 버리시겠는가!’ 하는 것이 있다. 하나님이 자기 목적에 쓰려고 만들어 놓으셨는데 그냥 버리시겠는가! 나도 지금 그렇다. 병으로 보면 내 병은 절망적인 병이다.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다. 점점 죽어가는 병이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는데 쓰실 만큼 쓰시지 않겠느냐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나를 안쓰시면 하나님이 손해나는데 손해나는 일을 하시겠는가. 그래서 나는 하나님과 흥정한다. “내가 쓸모 없으면 데려가셔도 좋고 쓸모가 아직 남아 있으면 당신이 알아서 하십시오.”라고. 사람은 어디에 쓸모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나는 어디에 쓸모가 있는가? 쓸모만 있다면 하나님이 쓰시지 않겠는가. 여유는 어디 있는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궁창 안에 우리의 여유가 있다. 궁창을 만드신 이유는 여유를 두신 것이다. 왜 궁창을 만들어 놓으셨겠는가? 우주 안에 궁창이 필요하기 때문에 만드신 것이다. 우리를 부르신 이는 우리에게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아신다. 숨이 콱 막히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아신다. 하나님이 있는 사람은 궁창이 있고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궁창이 없다. 자기밖에 없으니까 더 이상 생각할 수도 없고 더 이상 갈 길도 없다. 결국은 죽으러 가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궁창을 만드셨다는 말은 참으로 은혜로운 말씀이다. 어떤 사람들은 궁창을 만들고 하나님이 기뻐하셨다는 말이 없다면서 궁창이 안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옛날에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써 놓은 것을 보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정말로 필요한 것이 궁창이다. 궁창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다. 숨통이 끊어져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빛이 있고 난 다음에는 궁창이 있어야 한다. 빛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숨을 쉴 수 있어야 한다.
숨이 막혀서 죽는다고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세월호 학생들이 물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은 것은 궁창이 없어서다. 배 안에 물이 차 버리니까 궁창이 없어서 죽은 것이다. 심장마비는 순간적으로 죽지만 물을 먹고 죽으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시체도 심장마비로 죽으면 물에 뜨는데 물에 먹고 죽으면 물에 뜨지 않는다. 며칠 동안 가라앉았다가 뜬다. 그래서 시체를 못찾는 것이다. 법의학에서 폐를 해부해 보고 그 사람이 심장마비로 죽었는지 물에 빠져 죽었는지 안다. 순간적으로 심장마비가 오면 물을 먹지 않고 죽는데 물에 빠져서 살려고 발버둥치면 물을 잔뜩 먹어서 더 이상 호흡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죽는다. 궁창이 없으면 절대로 안된다. 그래서 지혜로 궁창을 만드시고 명철로 펴셨다고 하였다.
다른 데는 다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이 나오는데 궁창을 만드셨을 때는 그런 말이 없다. 그래서 궁창을 부정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궁창을 악령들이 돌아다니는 공중이라고 해석한다. 나도 옛날에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궁창이 없었다면 숨통이 없어질 뻔했다. 궁창이 없으면 우주의 숨통, 인생의 숨통이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숨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시오. 내가 여러분을 편히 쉬게 하겠습니다.”(마11:28)라는 유명한 말씀을 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무엇인가? 당시는 그것이 율법이었다. 이것을 인생 전부로 생각한다면 하나님 없는 사람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자기가 다 해야 하니까 다 자기 몫이다. 잘해도 자기 몫이고 못해도 자기 몫이다. ‘자기 주도형 인간’이 좋을 것 같은데 숨구멍이 없다. 물이 얼어도 숨구멍이 있다. 호수에 얼음이 꽁꽁 얼었어도 잘못하면 빠져 죽는다. 아무리 단단하게 얼음이 얼어도 얇은 데가 있다. 거기를 숨통이라고 하는데 거기 빠지면 죽는다. 백곰은 북극 얼음 속에서 들어가서 사냥을 하고 나올 때 그 숨구멍으로 나온다. 물도 숨을 쉬고 있다. 그래서 얇은 데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궁창이 되신다. 예수께서 우리의 궁창이 되셔서 무거운 짐진 자들을 부르신다. 어떻게 예수는 이런 궁창이 되셨는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셨다(요8:32). 여기서 진리는 참이다. 참 실재를 알면 자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 자유케 하면 더욱 자유하게 된다고 하셨다(요8:36). 여기서 왜 예수께서 우리들의 숨통이 되셨는지 볼 수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인간에게 오시면 그것이 우리의 숨통이 되는 것이다. 그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죽은 나사로를 살릴 때는 좋기는 한데 아직 우리의 숨통은 아니다. 병이 들어 죽게 되면 그분에게 고침을 받을 수 있다. 그것은 인생 자체의 숨통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오시니까 우리의 숨통이 열렸다. ‘야, 저분이 십자가를 지고 죽는구나. 나만 죽는 줄 알았는데 저분이 죽는구나.’라고 보이니 내 인생에 여유가 생겼다.
‘나만 죽는 것이 아니구나. 나만 십자가에서 못뛰어 내리는 것이 아니구나. 예수님도 못뛰어 내리는구나. 하나님 아들이라는 사람도 뛰어내리지 못하는구나.’라고 아니까 여유가 생겼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여러분도 경험해 보면 알 수 있다. ‘아, 저런 분도 돌로 떡을 만들 수 없구나.’라고 알면 인생에 여유가 생긴다. ‘왜 나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없었을까? 천사가 와서 조롱하는데 나는 왜 대답을 할 수 없을까. 세상에 능력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왜 나는 이것밖에 안될까?’라고 생각할 때는 답답했다. 그런데 참 사람이신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내려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아, 사람은 저것이구나. 돌로 떡을 만들 수 없는 것이 사람이구나.’라고 알고 나에게 여유가 생겼다. 내가 여러분에게 이 말을 늘 하는 이유는 이것 때문이다.
누구나 돌로 떡을 만들고 싶어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돌로 떡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렇게 못해서 한이고 뭔가를 해야 되는데 그렇게 못해서 한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저런 분도 못하는 것이 있다. 원래 사람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원래 사람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속아서 ‘나는 왜 돌로 떡을 만들지 못하는가, 나는 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가?’라고 생각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만드실 때는 당연히 십자가에 못박으면 죽게 만들어 놓으셨다.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왜 이렇게 만들어 놓으셨는가? 이렇게 된 인생을 쓸 데가 있어서다. ‘내 인생을 어디다 쓰겠나? 아무 데도 쓸데 없구나. 돌로 떡을 만들지도 못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놓으면 내려오지도 못하는구나.’ 하다 보면 천사에게 속아서 네피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참 사람으로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것을 보니까 내 인생에 여유가 생겨났다. 그분과 나는 같은 사람이다. 그분은 하나님이고 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나와 같은 사람이다. 전혀 불가침의 영역이 있는가 하면 그분과 내가 같은 데가 있다. 그래서 내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 내가 누구같이 살 것인가? 이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한다. 내가 꼭 그렇게 살아야 할 사람이 이 사람이다. 이제 생각해 보니 돌로 떡을 만들지 않아도 살 수 있다. 참 사람의 길로만 살면 돌로 떡을 만들 필요가 없다. 참 사람으로 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십자가에서 내려올 필요가 없다. 그래서 내가 살아났다.
옛날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천당 가니까 믿는다고 했는데 천당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오늘 아침에도 아내에게 천당이 없고 다음이 없어도, 설사 부활이 없다 해도 내가 참 사람으로 사는 이것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 모든 데 여유가 생긴다. 사람은 사람으로 살라고 만들어졌다. 천당에 가라고 만들어 놓으신 것도 아니고 네피림이 되라고 만들어 놓으신 것도 아니다. 사람이 되라고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벼를 심는 것은 벼가 되라는 것이지 감을 열라는 것이 아니다. 벼를 심었으면 벼가 나오는 것이 정상이다. ‘그러면 우리는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라는 생각이 들 것이다.
물론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이 쓰시면 영광스러워진다. 여기 비밀이 들어 있다. 흙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주인이 쓰시면 영광스러워진다. 흙보다 천한 것은 없다. 그런데 주인이 와서 씨를 심으면 밭이 된다. 사람의 위치가 그러하다. 그래서 비밀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내가 발버둥쳐도 안되던 것이 하나님이 쓰시면 쉽게 된다. 흙이 얼마나 노력을 해서 옥수수 밭이 되겠는가? 흙은 노력할수록 벽돌밖에 안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쓰시면, 주인이 쓰시면 옥수수 밭이 된다. 이것이 사람의 영광이다.
이렇게 생각해야 인생의 문제가 없어진다. ‘아, 하나님이 쓰시면 만사가 다 되는구나. 하나님이 쓰시면 나는 영광스러워지는구나. 하나님이 안쓰시면 영광이 아니구나.’라고 알면 인생이 풀린다. 하나님이 쓰신 것만 영광스러워진다. 성전 안에서 사용하는 기물들은 거룩한 것이다. 그래서 성물이라고 한다. 왜 거룩한가? 하나님이 쓰시니까 거룩한 물건이 된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쓰시면 거룩하게 되지만 하나님이 안쓰시면 쓰레기나 마찬가지인 것이 인생이다. 멸망이 다른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멸망은 하나님께 필요없게 되어 버렸다는 뜻이다. 쓰레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이 쓰레기가 안되려면 하나님께 쓰임이 돼야 한다. 우리가 세상의 영광을 찾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쓰이는 영광을 찾을 것인가? 하나님께 쓰여서 받을 영광을 원하면 세상에 대해서 여유가 생긴다. ‘나는 하나님께 쓰여서 영광스러워지겠다.’라고 생각하면 세상에 대해서 자유자가 된다. 세상에서는 영광스러워도 되고 아니라도 되니까, 참된 영광이 따로 있으니까 세상에 대해 자유하게 된다. 이 참된 영광을 모르면 세상 속에서 아등바등 싸워야 한다. 그러나 싸워서 내 맘대로 이기는 사람은 없다. 내 위에 기고 나는 놈이 또 있다. 가 보면 또 있고 가 보면 또 있다. 제주에 있는 서명균 원장은 고등학교 때 전교에서 일등을 했고 그래서 자기 머리가 좋은 줄 알았는데 의대에 들어가서 보니 자기보다 머리가 더 좋은 있었다고 한다. 자기는 책을 세 번쯤 봐야 외워지는데 어떤 학생은 한 번 보고 다 외우는 것을 보고 손을 들었다는 것이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끝이 없다. 거기서 어떻게 참된 자유를 누리겠는가. 하나님이 쓰시면 그때 참된 자유가 있고 참된 영광이 있다. 하나님이 쓰시는 영광은 영원하지만 사람들에게 쓰이는 영광은 잠깐 있다가 없어진다. 킥복싱을 하는 것을 보니 챔피언 타이틀을 앞에 두르고 나왔다가 도전자에게 빼앗긴다. 죽을판 살판 싸웠지만 주먹 한 방에 떨어져서 챔피언 타이틀을 빼앗기고 마는 것이다. 세상의 영광은 금방 무너질 영광이다. 영원히 있을 영광이 없다. 하나님이 쓰시면 두고 두고 영광이다.
흙은 해마다 주인이 쓰니까 해마다 영광스럽다. 금년에 영광스러웠다고 내년에는 영광스럽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년에도 또 영광스러워진다. 킥복싱 선수들을 보니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피터지게 두드려 맞는지 모른다. 그렇게 맞고도 타이틀을 뺏기고 들어간다. 그리고 또 다른 선수가 도전해서 또 빼앗아 간다. 나이는 들고 젊은 사람들은 치고 올라오니 타이틀을 지킬 수 없는 것이다. 챔피언 벨트를 받고 어떤 선수는 너무 좋아서 뛰고 돌아다니고 어떤 선수는 땅에 엎드려서 기도를 하지만 어느 날 그것을 빼앗기면 코가 빠져서 같이 서 있지도 못한다.
세상의 영광이 다 그렇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영광은 그렇지 않다. 금년에 잘된 밭은 내년에는 더 많이 열리고 더 영광스러워진다.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오시면 우리의 궁창이 열린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 안에 있으면 더욱 더 영광스러워진다. 평안이 온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가 되면 안식이 온다. 그와 내가 하나가 되면 안식이 온다. 자유가 있고 여유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참된 자유다. 어떤 것을 봐도 부럽지 않은 자유다. 그래서 참된 해방이 오는 것이다. 어느 것을 봐도 부럽지 않으니까 해방이 오는 것이다.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무엇인가에 얽매여 있다. 불교에서는 거기서 해방을 찾으려고 평생을 노력한다. 가정을 버리고 집을 떠나서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참된 자유를 찾으려고 한다. 반야에 이르려는 것이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우리 안에 오시면 저절로 자유가 오고 해방이 온다. 묶인 사람을 보면 아무도 자기를 쫓아오지 않는데도 항상 불안하다. 누가 쫓아오는 것 같으니까 불안한 것이다. 정신병이 들면 공통적인 것이 불안을 느끼는 것이다. 밑바탕에 있는 불안을 어느 정도 합리화할 수 있으면 괜찮지만 합리화할 수 없으면 병이 되고 만다. 그래서 자기를 몇 겹으로 철저히 포장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한 말을 못한다. 두려우니까 거짓말을 하고 남이 못알아 듣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귀신 들렸다고 한 것이다.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지키느라고 거짓말을 하고 남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남이 묶지 않았는데도 자기가 묶어서 어찌하지 못하는 것이다. 참된 해방, 참된 자유, 참된 영광, 이것은 예수와 우리의 관계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분과 나와의 관계에서 나에게 참된 자유도 있고 참된 평화도 있고 참된 여유도 있고 참된 해방도 있다. 궁창을 만드신 하나님, 오늘 내 인생에 궁창을 주신 하나님, 나를 여유있게 만드신 하나님! 참으로 신기하다. 나는 조급한 사람인데 여유 있게 만들어 놓으셨다. 여러분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에 대해서 알기만 하면 인생이 달라진다.
모든 해석이 달라진다. 인생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문제인데 해석이 다르게 된다. 복으로 해석되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 일이고 감사한 일인가! 이 복을 전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나는 해방되었네.’ 이것을 전하는 것이다. ‘나는 자유를 얻었네. 나는 세상에 없는 것을 얻었네.’ 이것이 복음이고 이것을 전하는 사람이 사도다. 그러므로 젊었을 때 어디로 갈 것인지 길을 잘 잡아야 한다. 길을 잘못 잡으면 평생 헛일을 하게 된다. 고생만 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자기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길만 옳게 잡으면 인생은 갈수록 더 영광스러워진다. 길을 잘 잡아야 하는 것이다. 어느 차를 탈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좋은 일만 나오는 차를 타면 좋은 일만 나오고 긍정적인 일만 나오는 차를 타면 긍정적인 사람이 된다. 빛이 있는 사람, 궁창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여러분의 인생에 궁창이신 하나님, 궁창을 만드신 하나님이 찾아오시기 바란다. 그러면 여러분은 여유 있게 숨을 쉬게 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하늘이 확 열려 있으면 시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면 감방이고 매일 감방이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중환자실에 있어 보니 일어나면 중환자실이고 또 일어나도 중환자실이다. 중환자실에서는 내 맘대로 못한다. 말을 안들으면 손발을 묶어 버린다. 감옥이 따로 없다. 창문을 열면 푸른 하늘, 궁창이 보여야 마음이 확 터지지 매일 눈 뜰 때마다 그런 것이 보이면 어찌 되겠는가. 옛날에 각북에 살 때 그 집이 정남향이고 높은 산 중턱에 있어서 전망이 굉장히 좋았다. 아침마다 커튼을 열면 앞이 확 트여 있어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지금 우리 집은 다른 것은 다 좋은데 앞이 막혀서 답답하다. 항상 푸른 것만 보인다. 그런데 거기는 가을에는 가을 색이 있고 봄이 오면 봄의 색깔이 있다. 용천사라는 절이 가까운 데 있었는데 그 집이 그 절보다 터가 더 좋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좋은 터다.
아침마다 문을 열면 그리스도고 새 날이다. 사랑방에 들어가면 매일 박운봉 형제의 간증이 나온다. “와~~~새날이다~~^^.” 그리스도가 궁창이 되기 때문에 매일 새날이다. 이제 궁창을 만드셨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실 것이다. 우리의 궁창은 열려 있다. 하나님이 궁창을 만들어 놓으셨으니까, 누구든지 이용하도록 하셨으니까 값없이 이용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를 값없이 쓸 수 있다. 행복을 여러분 마음대로 누릴 수 있다. 헛 것을 찾으면 안된다. 자기 머리를 굴려서 찾으려고 하면 안된다. 만들어 놓으신 것만 가지려고 해도 다 갖지 못하는데 무엇 때문에 머리를 굴리고 있는가. 직장에 가면 일이나 부지런히 하면 된다.
쓸데 없는 머리를 굴려 봤자 행복해지지 않는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행복을 가져야 하고 이미 정해 주신 행복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행복해진다. 한철이를 보면서 나는 한편으로는 인생은 순간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철이는 들을 때는 굉장히 좋아하고 얼굴이 밝아진다. 그런데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무엇을 들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이 인생 아닌가. 지금 듣고 있으면서 좋아하는 그것이 인생이다. 기억하고 못하고는 문제가 안된다. 내가 볼 때 한철이는 오래 살 것 같다.
항상 서른 살이니까 늙지도 않는다. 나이는 벌써 오십이 다 됐는데 항상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마 한철이는 팔십이 넘어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비디오를 찍던 이야기를 할 것이다. 육신은 늙어도 항상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니 보통 일이 아니다. 어제 것을 기억하지 못해도 오늘 즐겁고 행복하면 되지 않는가. 다 갖고도 오늘 행복하지 못해서 쥐어짜는 판인데 아무것도 없어도 지금 행복하지 않은가!
그래서 요새 한철이가 다시 보인다. 할렐루야! 이러면 되지 않는가. 저렇게 좋은 사람도 있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으면 되겠는가. 이 순간 뿐이다. 이 순간이 지나가면 없다. 또 오는 것도 아니고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내가 이렇게 말할 때 누리지 못하면 그만이다. 생각해 보면 인생은 아주 단순하다. 좋을 때 좋으면 된다. 좋을 때도 딴 생각 하느라고 고개를 처박고 있으면 그 인생은 불행하다. 궁창이 열렸다.
이것이 둘째 날이다. 첫째 날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고 둘째 날 궁창이 있으라 하시니 궁창이 있는 것이다. 빛이 있으라 하셔서 혼돈과 공허화 흑암이 물러갔고 궁창이 있으라 하니까 억울함과 부자유한 것, 속박받은 것과 매여 있는 것이 다 풀어져 버렸다. 숨을 쉬게 된 것이다. 호흡을 깊이 하자. 국선도는 호흡하는 운동이다. 나는 호흡이 문제고 산소 호흡을 해야 되기 때문에 특별히 호흡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것이다. 옛날에는 이렇게 해석이 안됐는데 지금 숨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 되고 이렇게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잠잘 때도 산소 호흡기를 끼고 자야 한다.
산도포화도를 재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궁창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궁창을 여러분이 100% 누리기 바란다. 100% 누리고 전파하기 바란다.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셨다.” 이것을 전하는 것이 복음이다. 잘 들어주어서 감사하다. 이렇게 즐겁게 살면 된다. 인생이 별 것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