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오후 7시55분쯤 경기도 안성시 공도읍의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편도 4차로의 고속도로를 달리던 프레지오 승용차가 고장으로 갑자기 3차로에 멈췄다. 고속도로 한가운데서 내린 40대의 여성 운전자는 동승자와 함께 차 옆에 서서 뒤따라 오는 차들에 손을 흔들어 주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안전삼각대나 섬광신호 등 최소한의 후방 안전조치도 없는 상태였다. 고속으로 달리는 사고 차량이 자칫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대로 지속되고 있었다.
몇 분 후 시속 100여㎞로 달리던 3.5t짜리 화물차 1대가 이 차량을 들이받고 수신호를 보내고 있던 탑승자들까지 치고 지나갔다. 추돌과 함께 승용차와 화물차가 오른쪽으로 밀리자 4차로를 달리던 4.5t짜리 화물차와 재충돌하는 대형 사고로 번졌다. 이 사고로 승용차 탑승자 2명을 포함, 3명이 숨지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3일 발생한 인천대교 고속버스 추락사고를 계기로 고장·사고 자동차의 후방 안전조치를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후방 안전조치 소홀이 음주운전 못지않게 타인의 생명까지 앗아가는 사고로 이어지는 사례가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인천대교 사고는 후방 안전조치 소홀이 빚은 전형적인 참사로 꼽히고 있다. 고장이 난 승용차의 후방에 안전삼각대만 설치했어도 충분히 피해갈 수 있는 사고였다.
비상시 후방 안전조치를 소홀히 하는 데는 우선 법적인 강제성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김기복(56) 시민교통안전협회 대표는 “대부분의 운전자가 안전삼각대 하나를 설치하고 안 하고가 치명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법적 강제성이 거의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안 해도 그만”이라는 의식이 굳어 있다는 것이다.
도로교통법은 고장 자동차의 표시를 위해 주간에는 100m 후방에 안전삼각대를, 야간에는 200m 후방에 섬광·불꽃신호를 설치토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안전삼각대를 소지하지 않은 것이 적발돼도 범칙금 2만원이 고작이며 비상시에 설치하지 않았을 경우에도 범칙금 4만원이 전부다. 인천대교 버스 추락사고를 수사 중인 인천 중부경찰서는 고속버스 운전자와 안전삼각대 설치 등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마티즈 승용차 운전자를 함께 형사입건한다는 방침이다. 경찰 관계자는 “사안의 중대성에 비추어 형법상의 업무상 중과실치상죄를 적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교통사고 전문가들은 무리한 법 적용으로 실질적인 처벌이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마티즈 차량을 추돌한 화물차와 버스 운전자의 전방 주시 의무 소홀 등 운전과실이 사고의 더 직접적인 원인이기 때문이다.
사고차량 안전조치 미비에 대한 범칙금 등의 처벌 조항도 고속도로와 자동차전용도로에 한한다. 일반도로에선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아 운전자들의 경각심을 일깨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사고 위험이 더 큰 야간의 후방 안전조치는 권장사항에 불과하다. 섬광·불꽃신호 설치 규정은 있지만 강제조항이 없어 이들 기구를 싣고 다니는 차량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외국의 경우 야간의 2차 후방 추돌을 막기 위해 이들 기구의 소지·설치가 일반화돼 있다. 미국 뉴저지주에 사는 김태형씨는 5일 본지의 ‘삼각대만 세웠어도…’(7월 5일자 1면)라는 제하의 기사에 대해 “미국에서는 차량마다 로드 플레어(Road Flare)가 실려 있다”며 이를 설치한 장면을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법적 강제성에 앞서 후방 안전조치에 대한 운전자들의 안일한 안전의식도 문제다. 도로교통공단의 명묘희 연구원은 “고장 차 운전자는 차로의 방향도 주의해서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우측 차로에서 멈췄다면 오른쪽으로 내리는 편이 좀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야간에 사용하도록 돼 있는 섬광 기구는 불꽃을 내는 신호탄을 말하는데, 인화성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 명 연구원은 “불꽃이나 연기를 내는 물건은 구하기도 어렵고 사용하기도 까다롭다”고 말했다. 사고 상황을 알릴 때 일반 휴대전화가 아닌 고속도로용 비상전화를 사용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휴대전화로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어려운 탓이다.
사고 발생 시 당해 차량 운전자의 안전수칙 준수 여부에 치중해 있는 현행 도로교통법과 관련, 최재영 교통안전공단 교수는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뿐 아니라 처음부터 사고 요인을 제공한 차량에 대해서도 책임을 묻도록 법이 개정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천 중부경찰서는 5일 마티즈 운전자 김모씨와 인천대교 순찰팀 직원을 불러 조사를 벌였다. 조사에서 순찰팀 직원은 “김씨에게 ‘견인차를 부르거나 차를 고쳐서 이동하라’고 했다”고 진술했으나 마티즈 운전자는 “순찰팀 직원이 ‘괜찮으니 가도 된다’고 말했다”고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진술이 서로 달라 누구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대질조사를 벌이는 한편 폐쇄회로 텔레비전 녹화 내용을 확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