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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배필에 대한 주님의 갈망
[에베소서 5:25-27]
“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27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
지난 시간에는 남편들과 아내들에게 하는 말씀을 드렸다.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형이고, 아주 좋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은 교회의 기본 단위라고 말씀드렸다. 가정은 교회의 기본 세포이다. 교회생활은 바로 결혼생활에 비유할 수 있는데, 결혼생활은 교회생활의 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은 배필에 대한 주님의 갈망에 대해 나누고자 한다.
교회를 필요로 하고, 교회를 양육하기를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창조되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에 옆구리를 찌르니까 물과 피가 나왔더라 하는 말씀이 있는데, 아담의 갈빗대에서 하와가 나온 것처럼, 주님의 옆구리에서 교회가 탄생되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생명에서 교회가 나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모양은 달라도 본성은 하나다. 아담과 하와가 모양은 달라도 본성이 하나인 것과 같다.
그리스도와 교회는 한 본성과 한 생명을 서로 나누고 있는 한 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보면 그 안에 교회가 있고, 교회를 보면 그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한 실체, 한 통일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교회는 아직 자라지 않은 어린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담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는데 몇 살 정도의 아담을 창조했는지 성경에 안 나타나 있다. 내 생각에 '예수님이 삼십 세 때 공생애를 시작했으니까 아마 그 정도의 어떤 성인 아담을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으셨겠나?'라는 생각을 해 본다.
아담은 하나님이 흙으로 창조했다. 하와는 창조했다는 말이 없다. 하와는 지어졌다. 영어로는 빌드(Build), 즉 지어졌다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지어졌는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거기서 하와를 지으셨다. 아담이 잠이 깨어서 보니까 자기 앞에 하와가 있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이야기했다. 깊이 잠들었다는 말은 그냥 잠자다가 깨어나는 그런 잠이 아니다. 아내는 남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지어진다. 이것처럼 잠들었다는 말은 그냥 단시간이 아니고, 하와가 아담의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로 완전하게 하나가 될 때까지 아담이 깊이 잠들었다고 생각된다.
그리스도는 온전하지만, 교회는 지금 성장하는 과정에 있다. 작은 나무에서 열매를 기대할 수 없다. 나무가 자라야 거기서 열매가 나온다. 생명은 반드시 성장해야 거기서 열매가 나온다. 우리 인격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거듭나서 금방 주님을 대신하여 살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성장해야 배필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교회를 양육할 필요가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았어도, 아직 자라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더 영양을 공급받아서 자라야 할 필요가 있다.
무엇을 통하여 영양 공급을 받는가? 우리는 옛날에 잘못 생각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해야지.'라고 잘못 생각했다. 우리는 말씀하고 어떤 행동하고 바로 연결시킨다. 그래서 율법을 선포할 때도 '우리가 준행하겠습니다.'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본성이 율법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주신 것은 무엇을 행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양식으로 주신 것이다. 양식을 먹으면 자란다. 생명이 자라면 자란 결과 그렇게 살게 된다.
말씀을 듣는 것은 무엇을 하기 위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자라게 하기 위해서 말씀을 듣는다. 그리고 우리가 형제들끼리 서로 교제하는데, 교제를 하다 보면 우리가 또 자라게 된다. 형제들이 교제하는 것은 서로를 돌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과 교통을 통하여 우리를 자라게 한다. 속으로는 하나님 당신의 생명을 공급하시고, 밖에서는 또 교통을 통해 우리를 돌보셔서 우리를 자라게 한다.
어디까지 자라는가? 씨는 열매까지 자란다. 열매 안에는 씨가 들어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 그리스도와 결혼할 수 있을 때까지 자라게 하신다. 삼국시대 이전에 함경도 지역의 옥저라는 나라에는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열 살쯤 된 여자아이를 미리 데려와서 시댁에서 키우고 크면 결혼을 시켰다. 그때는 노동력이 필요하니까 그런 제도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도 금방 그리스도와 결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자라야, 배필이 될 수 있을 때까지 자라야, 결혼할 수 있다.
왜 이렇게 그리스도는 교회를 양육하려고 하시는가? 배필이 돠게 하시려는 것이다. 우리는 옛날에 종교적으로 경배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찬송하는 것을 하나님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기도하고 예배를 드린 후에는 도로 자기 생활로 돌아가고 만다. '오늘 예배 드리고 기도도 했다. 하나님 앞에 도장 찍었다.'라고 생각하고, 그 다음에는 자기 마음대로 생활한다. 그런데 결혼생활은 그것이 아니고 평생을 같이 사는 것이다. 우리는 평생 주님의 배필이 되어 사는 것이다. 어디서나 함께 살 수 있는 배필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양육하신다.
"아담이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아담 혼자서는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기에 완전치 못하기 때문에, 돕는 배필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창세기 1장26-28절에 나타나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을 우리 안에 넣어서 그 생명이 생육하고, 번성해서 땅에 충만하고, 그 생명이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림으로써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다스릴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당신의 생명이 이렇게 퍼져야 그 생명이 땅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하나님의 나라가 될 때에 그 나라가 만유를 통치하게 된다. 그래서 이 목적을 위하여 생육하고 번성케 할 배필이 필요하다. 이 예를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확실하게 볼 수 있다. 예수님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조금도 흠이 없으신 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옛날에 관운장 같은 장수는 싸움 실력이 대단했다. 그가 지니고 다닌 청룡언월도는 그 무게가 육백근, 즉 60kg이다. 얼마나 힘이 세면 그것을 맘대로 휘두르겠는가. 하지만 아무리 위대한 장군이라도 혼자서는 땅을 정복할 수 없다.
땅을 정복하려면 많은 군대가 필요하다. 최첨단 폭격기가 아무리 폭격해도 지상군이 없으면 땅을 정복할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이 중국을 점령하려고 해도 중국 땅덩어리가 워낙 넓고, 인구가 많아서 아무리 정복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 북경, 하얼빈, 상하이 같은 도시만 정복했지, 나머지 땅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왜냐하면 땅을 정복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생육하고 번성해서 생명이 퍼져야 땅을 정복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배필로 교회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우리 교회는 목사님 한 분이 대구에 오심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때는 아무도 이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일 년 후에 한 형제가 말씀을 알아들었다. 말씀과 교통으로 계속 생육하고 번성하여 오늘 우리 교회는 우리나라와 전 세계에 퍼지게 되었다. 주님은 당신 자신의 생명을 넣어서 그 생명을 증가시킴으로써 어디에 가든지 다 그리스도가 차도록 하시려는 것이다. 옛날 왕들은 부인들을 많이 거느렸다. 왕이 자기 아이들을 다 알지 못할 정도로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온 땅을 왕의 나라가 되게 하기 위해서는 왕자들을 곳곳에 파견해야 했다. 시골 마을까지 완전히 다스리기 위한 임금의 본성 때문이다.
식물의 씨가 퍼져서 식물의 세계가 되고 또 동물의 세계가 되는 것처럼, 자기의 생명이 생육하고 번성해서 퍼지기를 원하는 것이 바로 생명의 본성이다. 예수님도 수많은 아들을 낳아서 실질적으로 이 나라를 지배하고 정복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증인은 목격자와 다르다. 사과의 증인은 사과이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증인은 예수의 배필이다. 예수의 생명을 받아서 그 생명을 뿌리는 사람이 예수의 증인이다. 그래서 당신 자신을 복제해서 그리스도를 증가시키려는 것이다. 그래야 실질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숫자만 늘어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몇 천명, 몇 만명의 교인이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꼭 그 생명이어야만 된다. 꼭 예수의 생명이어야만 예수님의 나라가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교회를 증가시키고, 교회를 양육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땅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이렇게 자기와 똑같은 생명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갖기를 원하신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말은 자기 생명에서 나왔다는 말이다. 이것은 내 생명과 똑같다, 내 속에서 나온 것이라는 뜻이다.
아담이 하와에게 하듯이, 주님이 오셔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가 오늘 어디에 있는가? 거대한 교회 건물을 보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겠는가? 예배 드리고 찬양하는 모습을 보고 이 말씀을 하시겠는가? 옛날에 목사님이 예수님이 오시면 우리 교회에 오실 수밖에 없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생명과 똑같은 생명이어야만 거기로 오시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자기 교회를 향하여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신다.
교회는 반드시 예수의 생명으로 양육을 받아서, 그리스도의 신장의 충만한 데까지 자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키가 170㎝이면 우리도 170㎝만큼 자란다. 생명만큼 그 지체도 함께 자란다. 몸이 이렇게 큰데 발이 작다면 뒤뚱거린다. 그러니까 생명은 참 신기하다. 그 몸을 감당할 수 있도록 손과 발과 모든 지체들이 함께 자란다. 교회생활을 보면 처음에는 차이가 나는 것 같지만 평균적으로 고르게 자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지체가 함께 자라기를 원하신다. 최근에 온 자매를 보더라도 처음에는 말씀을 못 알아들었는데 교회생활을 하다 보니까 함께 자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지체들은 함께 자란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를 완전하게 양육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도 인간적으로 자기 자신을 볼 때에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있겠나? 어떻게 그리스도와 같아질 수 있겠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면 안 된다. '나는 매일 잘못하고 매일 넘어지고 실수하는데, 이런 내가 어떻게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있겠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자기를 들여다보면 점점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 그래서 자기를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다. 물로 씻어 깨끗케 하시는 것은 누가 하는 것인가? 내가 씻는 것인가? 아니면 신랑이 씻는 것인가? 신랑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필요도 모르고 목적도 몰랐다. 우리가 처음에 교회에 부름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의 목적과 필요를 전혀 몰랐다. 나는 내 사정 때문에, 세상이 너무 힘들고 무겁기 때문에 도피처로 우리 교회에 온 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듣다 보니까 하나님의 필요와 하나님의 목적이 먼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하나님은 당신의 필요와 목적으로 우리를 당신의 배필로 그렇게 양육하시는 것이다. 배필로 우리를 자라게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예수님도 볼 수 없다. 누구를 보고 하나님을 알며 예수님을 아는가? 그의 배필인 교회를 보고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게 된다. 우리가 그의 완전한 배필이 될 수 없으면, 하나님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이것은 너무 중요하다. 이 문제는 내 문제가 아니다. 나를 배필로 삼으시려고 하는 그 분의 문제이다. 그분은 우리가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우리를 꼭 그의 배필로 만드시고야 만다. 이것이 하나님의 필요와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를 들여다 볼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은 절대로 당신의 부르심을 후회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가 없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절대로 거짓말 하는 분이 아니고, 절대로 실패하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하든지, 이것을 완전하게 할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방법을 다 알 수 없어도, 하나님은 당신의 목표와 필요를 이루시고야 만다는 것이다. 옛날에 나는 내 자신을 항상 돌아보는 사람이었다. 매일 나를 점검하고 매일 깨끗해지려고 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점점 절망이 되고 점점 어두워졌다.
그때는 이 육신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다. 육신 때문에 이상한 생각도 들고, 육신 때문에 욕심도 들고, 육신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을 위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육신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간구했다. 스님이 되거나 수도원에 가는 사람들이 이해가 됐다. 오히려 수도원에 가는 사람이 부러웠다. '세상과 고립된 곳에서 안 보고 안 듣고 하면, 경건하고 거룩하게 하나님을 위하여 살 수 있지 않겠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생각하니까 아! 하나님은 우리 육신을 필요로 하시는 분인데, 우리 육신이 없다면, 우리가 전부 다 산에 올라가서 도 닦고 있다면, 생육하고 번성은 누가 하겠는가! 하나님 나라는 언제 되겠는가! 하고 알아진다.
하나님은 당신을 표현하는 육신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신다. 그때는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시는 줄 몰랐다. 내가 나를 어떻게 해 보려고 했기 때문에, 내 형편과 처지를 생각하니까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었다. 육신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서 절망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것이 천당이다. 성경에는 "내가 죽어 음부에 가면 어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겠는가. 내가 산 자의 땅에서 여호와를 찬양하리라."고 했는데, 육신 때문에 안 된다고 생각하니까 있지도 않은 천당을 소망하게 된 것이다. 주님은 우리를 천당으로 불러다가 거기서 온전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 땅 위에서 자기의 배필이 되길 원하시는 것이다.
땅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기 위해서 씨를 받아야 할 배필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결국 그분의 생명을 공급해서, 양육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 '내가 육신이 되어서 안 된다.'는 생각이 하나도 없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셨으면, 당신의 배필이 되기 위해서 나를 양육하시지 않겠는가! 교회생활 안에서 옛 생각이 다 떠나고 내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이것이 얼마나 하나님에게 필요한가! 이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옛날엔 육신 때문에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육신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육신 때문에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을 대신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목표이고 관심인 것을 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평가할 필요가 없게 된다. 하나님의 필요와 목적이 있고, 이것은 우리의 생각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으로 자기를 평가해서 자신을 평가절상시켜도 합당하지 않고, 평가절하해도 합당하지 않다. 하나님이 보시는 나를 나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은, 나를 깨끗하고 거룩하게 해서 영광스러운 교회로 자기 앞에 세우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양육의 목표는 절대적인 것이다. 절대적이란 말은 반드시 그렇게 하시고야 만다는 것이다. 부부는 수준이 비슷해야 된다. 부부가 서로 말을 못 알아 듣는다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영어를 못 하는데,미국에 가서 미국인과 부부가 되었다면 교통이 참 안 될 것 같다. 언어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수준, 생활방식이 완전히 다르면 부부생활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답답하겠는가! 아내와 남편은 서로 수준이 비슷해야, 말을 알아듣고 서로 이해하고 함께 동역할 수 있다.
주님과 우리를 보면 차이가 많이 난다. 그런데 이건 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양육해서 당신의 수준까지 우리를 끌어 올리는 것이다. 우리의 수준이 끌어 올려져서, 그분 자신의 어떠함에, 배필도 보조가 맞아야 한다. 그래서 말을 하면 말귀를 알아 듣고, 주님 자신을 깊이 이해하고, 주님의 일이 내 일이 되는 그런 배필이 될 때까지 우리를 그렇게 양육하시는 것이다.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우주적인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다.
우주적인 임무가 무엇인가? 창세기1장28절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고 했다. 그래서 주님은 배필를 통하여 당신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하여서 우리를 양육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자기의 생명과 같아야 되고, 두 번째는 수준이 같아야 된다. 생명이 같고 수준이 같아야만 함께 일을 할 수 있다.
제자들과 예수님의 사이를 보면, 제자들은 오른쪽으로 가는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쪽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제자들의 방향이 예수님과 다르니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장로들에게 핍박을 받고 넘겨져서 죽임을 당하는 것을 이야기했을 때, 베드로가 “주여, 그리하지 마옵소서”라고 말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그렇게 되면 베드로의 소망이 깨지는 것이다. 베드로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서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그때 제자들은 주님의 뜻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양육을 받아서 성장을 하게 되었을 때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하셨다. 그리고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요21:18)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바로 베드로가 주님의 수준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어떤 방법을 통하여 하실지 모르지만, 반드시 우리를 그런 수준까지 이끌어 올리실 것이다.
주님의 방법은 당신의 수준까지 끌어 올리는 것이다. 당신의 배필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은 다 자 버렸고, 주님이 십자가에 갔을 때 제자들은 다 도망가 버렸다. 그러니까 최후의 방법은 십자가 안에 제자들을 다 집어 넣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버지와 내가 하나 된 것 같이 저들도 우리 안에 하나 되게 하옵소서”라고 하셨다. 어디서 하나 되는 것인가? 바로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옛날에 우리는 젊은 형제들이 주님을 위하여 많은 일을 했다. 그런데 열심히 하다 보니까 내 의가 생기고 내 자랑이 생겼다. 그러니까 열심히 안 할 때는 문제가 없었는데, 열심히 하게 되니까 그것 때문에 또 문제가 생겼다.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교회 분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제자들은 누가 크냐고 키재기를 했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되는가? 십자가 안으로 가야 된다. 십자가 안에 가서 바로 주님의 새로운 생명, 주님 자신의 생명이 내 생명이 되어야 우리는 주님을 대신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전하는가? 그와 내가 교통하기 위해서다. 그 사람을 우리와 같은 수준으로 끌어 올리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대구에 있는 열 살 먹은 손자하고 30분 동안 스카이프를 한다. 창세기부터 시작해서 지금은 열왕기하까지 왔다. 이런 교제를 왜 하는가? 하나님 말씀을 어려서부터 안 들으면, 더 자라서는 교통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계속 말씀을 심어야 한다. 우리 교회 아이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 놀랍다. 아이들이 십자가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몰라도 십자가가 무엇인지 감을 알고 있다. 이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아이들을 방치하면 안 된다. 말씀을 계속해서 심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그 아이들을 십자가 안으로 끌고 가야 된다.
하나님 말씀 안에 있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이상하게 한번도 보지 않았는데도 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생소하지 않다. 지난주에 우리교회 중심부 자매가 블로그에서 만난 사람을 나와 만나게 하기 위해 점심 때 자리를 마련했다. 그분은 그 동안 여러 형제들을 만나면서 우리교회 말씀을 들었는데, 얼마나 교제가 잘 됐는지 모른다. 나도 울고 그 자매도 울고 교통이 너무 잘 됐다. 왜 그렇게 교통이 잘 됐는가?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하는 말을 다는 못 알아 들어도, 충분히 알아 들었다. 수준이 비슷하게 되니까 교통이 너무 잘 되는 것이다. 전부터 알았던 사람, 항상 같이 있었던 사람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같이 있으면서도 교통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교통을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될 때에만 우리는 동역할 수 있다. 어떤 것을 함께 할 수 있는 것이다.
교회가 출현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자기 자신을 주셨다. 교회는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태어났다. 예수님이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줘서 태어난 것이 결국 교회다. 엄마가 아이를 낳다가 아이는 살고 엄마는 죽는 경우가 있는데,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는 살고 예수님은 죽으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교회 안에 계신다. 교회를 보고 그리스도를 모르면, 이제는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예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 하느냐"라고 하신 것처럼 누구를 보고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가? 교회를 보고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케 하시는 것이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게 하사'라는 말은 '말씀 안에 있는 물로 씻어'라는 뜻이다. 말씀 안에 있는 물이 무엇인가? 말씀의 내용은 무엇인가? 무엇으로 씻는 것인가? 말씀의 내용은 십자가다. 십자가의 운명으로 우리를 씻는 것이다. '십자가 운명'이라는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 안에서 씻김이 되어, 옛 것이 사라진다. 하나님 말씀은 좋은 말씀이 아니고, 우리를 심판하고 구원하는 말씀이다. 옛 것은 심판하고 새 것을 주시는 그런 말씀이다.
십자가의 운명이 내 운명이구나! 그의 죽으심이 바로 내 죽음이구나! 그의 위치가 바로 내 위치구나! 이렇게 알게 되면 우리는 옛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사람으로 그리스도 앞에 세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래서 영광스런 교회로 하나님께 드려지게 된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가 십자가로 간다는 것은 우리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근본으로 돌아간다. 우리의 자리는 흙으로 지어 생기를 불어 넣으신 그 자리다. 더 근원인 자리는 티끌인 자리다. 십자가는 내가 티끌이구나!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는 자리다. 이 자리가 근본인 자리이고 우리의 위치다.
우리는 십자가로 돌아가서 거기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근본으로 들어가고 또 그 근본에서 나와서 아버지 앞에 가는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를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는 자리다. 하와는 아담에게서 나왔다. 그리고 다시 아담 앞에 세워졌다. 교회도 그리스도에게서 나와서 다시 그리스도에게 드려지게 될 것인데, 이것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근원으로 돌아갈 때는, 처음 나올 때와 다르다.
씨를 보면, 씨는 처음에는 너무 초라하다. 그런데 씨가 땅에 떨어져 열매가 될 때는 너무나 풍성하다. 처음에 떨어진 것도 씨고, 열매가 된 그 안에도 씨가 들어 있다. 그런데 이 씨가 십자가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아주 풍성한 열매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도 이제 많은 열매 가운데 하나다. 열매는 너무나 풍성하고 영광스럽다.
봄의 보릿고개는 매우 배고프다. 보리씨마저 먹으면 안 되니까,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 씨는 남겨 두어야 한다. 물을 먹고 허리를 싸매고 씨를 뿌린다. 이것이 바로 눈물로 씨를 뿌린다는 말이다. 얼마나 가난한가? 그런데 추수할 때는 그 씨가 30배, 60배, 100배, 200배로 번성하여 가을에 잔치가 벌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다. 우리교회가 처음 시작할 때에는 봄에 씨를 뿌리는 것과 똑같았다. 지금은 얼마나 풍요로운지 모른다. 교회는 그리스도보다 더욱 풍성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 풍성한 것을 가지고 땅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이다. 온 땅이 그리스도의 밭이 되게 하는 것이다.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티는 천연적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