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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20:1~16
본문의 '포도원 품꾼 이야기'는 예수님의 불의한 청지기와 혼인잔치 비유와 함께 3대 난해 비유 중 하나라고 한다.
나 또한 믿고 난 후, 이 말씀을 접했을 때, 포도원 주인의 비상식적이고 불공정한 처우에 고개가 갸웃하면서도 그래도 난 어쩐지 다섯시에 온 사람 같아 기분이 좋아지기도 했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이 비유를 일찍 믿으나 늦게 믿으나 구원은 똑같고 차별이 없다는 뜻이라 알고 있다.
그 말처럼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전에 믿은 강도나 온갖 죽을 고생을 하며 평생을 복음전파하다 순교한 사도들이나 다 똑 같은 구원을 받는다. 반쪽짜리 구원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비유는 천국에서의 상급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천국에도 다 같이 한데나리온을 받는 품꾼처럼 차별이 없다면 예수님의 천국에서 받을 상급이야기나 달란트 비유, 또는 계시록의 면류관 이야기는 의미가 없는 게 되고, 바울도 고전 9:24에서 운동장에서 달음박질 하는 자 중 오직 상받는 이는 하나라는 말을 할 이유도 없다.
우선 예수님이 이 포도원 품꾼 비유 이야기를 하시게 된 계기를 살펴보면,
이 말씀 전에 예수님이 영생을 어떻게 얻겠냐는 부자 청년에게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해서, 부자청년이 근심하고 돌아간 사건이 있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의기양양해서 예수님께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으니 무얼 얻겠냐는 말을 한다.
참 속보이는 질문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베드로를 면박하지 않고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전토나 가족을 버린자는 여러 배를 받고 영생을 상속받는다고 약속한다. 그리고 다음의 유명한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먼저 된자로서 나중되고 나중된자가 먼저 되느니라"
이 말씀 후에 덧붙인 이야기가 '포도원 품꾼' 비유이다.
비유의 로그라인은 '포도원 주인이 포도수확을 위해 장터에서 시간별로 품꾼들을 구하고 삯을 다 똑같이 지불함으로 주인과 먼저 와 일한 자와의 마찰을 그린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장터는 헬라어로 우리가 익히 아는 '아고라'인데, 이 당시의 이런 아고라와 같은 장터나 광장에서 일꾼을 구하는 풍속이 있었다.
지금은 인터넷이 생겨 이런 인력시장은 거의 사라졌지만 우리나라도 불과 얼마전까지 이런 사람이 많이 모이는 역 광장의 뒷골목 같은 곳에서 공장이나 건설현장에 투입될 일꾼을 뽑아가기도 했다.
여하튼 본론으로 돌아가 포도원 품꾼 비유의 줄거리와 부연 설명하면,
어느 날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에 품꾼을 구하러 장터로 나간다.
포도원 주인이 품꾼을 구하는 이유가 포도수확 때문인지 아니면 포도나무를 심기 위해서인지는 안 나와있지만 아마도 급하게 나중에 일꾼을 추가로 구한 걸로 보아 포도수확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들은 아침 여섯시부터 일을 시작한다하니, 포도원 주인이 장터로 갔을 땐 아직 동이 다트지 않아 어스름할 때 였을 것이다.
주인은 장터로 가서 나와 있는 사람들에게 그 시대의 노동자들의 하루품삯인 한데나리온을 약속하고 자기 포도원으로 들여 보낸다.
그런데 포도원 주인은 일을 시키다가 아무래도 오늘안에 못 끝낼 것 같았는지 제3시에, 한국시간으로 아홉시에 장터로 나가 사람을 더 데리고 온다. (이스라엘시간과 우리 시간은 여섯시간이 차이가 있다.)
이땐 주인이 일꾼들에게 얼마를 주겠단 약속을 하지 않고, 상당하게 주리라 약속하는데 '상당하게'는 그에 알맞게 주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사람이 부족해서 제6시, 정오 열두시에도 나가 사람을 또 데려오고 또 제 9시, 오후 세시에도 나가 일꾼을 데려온다.
그리고 제 11시 다섯시가 될때, 이쯤되면 일도 슬슬 마무리 할때도 됐는데도 주인은 또 장터로 나간다.
아마도 포도는 당도가 최상일때 수확을 해야 하기도 하고 또 9월은 포도를 수확하는 시기과 우기가 곂치는 때라 당일에 다 수확을 했어야 해서 마음이 급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가보니 장터에 사람들이 또 서성이고 있어서 주인은 그 사람들에게 왜 지금까지 종일 빈둥거리며 놀고 서 있으냐고 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우리도 일하고 싶지만 우리를 품꾼으로 써주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사실 이때가 포도수확철이라면, 모처럼 농번기라 손이 부족할 때인데 다섯시 까지 일꾼으로 뽑혀가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이 일을 하기엔 뭔가 신체에 하자가 있었을 것이다. 병약하다던지, 너무 늙었다던지, 장애가 있다던지...
하지만 주인은 아랑곳 하지 않고, 너희들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말을 하고 모두를 데려간다.
이 당시 유대 사회는 일자리는 귀한데 일꾼은 너무 많아서 노동자들은 거의 하루 벌어 하루먹고사는 극빈자들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렇게 몸이 건강치 못한 품꾼들은 일자리 얻기가 더 어려워서, 뒤늦게 온 품꾼들은 '오늘은 저녁 한끼라도 입에 풀칠은 할수 있겠구나' 하며 하루종일 마음 고생한것에 대해 조금이나마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저 주인이 좀더 일찍 써줬더라연 좋았겠다' 하는 마음도 들었을 것이고,그래도 이거라도 다행이다 싶어 한시간 동안 나름 열심히 일했을 것이다.
반면, 아침부터 일한사람은 빨리 한데나리온 일당이나 챙겨 가서 집에가 쉬고 싶은 마음에 일도 대충 성의 없게 했을 것 같다.
사실 열두시간 포도밭의 노동을 했으면 무척 지치고 짜증이 슬금슬금 밀려들어 올 때라 아침에 품꾼으로 뽑혔을 때의 안도와 기쁨은 다 사라졌을 것이다.
드디어 여섯시가 되어 일이 끝나고, 주인은 청지기에게 품꾼들에게 나중 온 자 부터 삯을 나눠주게 한다.
이 당시엔 때에 따라 이렇게 한시간이나 몇시간만 일하는 시간제 품꾼도 쓰기도 했는데, 이런 경우는 그에 맞는 삯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청지기가 다섯시에 온 품꾼들에게 온전한 한데나리온씩 주는 것이다.
당연히 삯을 받은 다섯시에 온 일꾼들은 놀람과 동시에 너무 기뻤을 것이다.
아마도 감격에 겨워 "주여, 고맙습니다." 란 소리가 저절로 나오며 눈물을 흘리는 품꾼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다른 일꾼들이 눈이 휘둥그레 해져 있는데, 청지기가 이번엔 세시에 온 품꾼들에게도 한데나리온씩 준다.
세시에 온 일꾼은 한데나리온보다 좀더 받을 줄 알았지만 그래도 자기가 애초에 예상했던 사분의 일 데나리온의 삯보다는 많은 돈이니 나름 만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다섯시에 온 사람보다는 덜 기뻤을 것이다.
그런데 이 청지기가 열두시, 아홉시에 온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한데나리온 씩 나눠 주는 것이다.
이들은 '이게 뭐야, 무슨 계산법이 이래?' 하면서 뭐라 불만을 터트리고 싶지만 그래도 애초 생각한 한데나리온 보단 덜 일했으니 애써 화를 삭힌 채 집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때쯤 이 모습을 지켜 본 아침 여섯시에 온 사람들은 '우리 한테도 한데나리온을 주기라도 해봐. 가만있지 않겠어.'하는 표정으로 청지기를 바라봤을 게당연하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아침 여섯시에 온 사람에게도 역시 한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아닌가.
드디어 아침 여섯시에 온 일꾼들은 폭발한다.
"나중에 온 사람들은 한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여기서 더위는 '태우다'이란 뜻이 포함된 뜨거운 태양열과 중동의 '시록코'라는 열풍을 가리킨다.
포도수확철이 9월이라 해도 아직 태양이 뜨거울 때이다. 특히 중동의 더위는 우리나라와 비교할 바가 못 된다. 그러니 이런 반응이 나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마 이런일이 현재 일어났다면 항의 정도가 아니라, 불은 못질러도 락카로 문이나 CEO차에 욕설과 함께 '악덕고용주 물러가라.'어쩌구 하는 글을 휘갈겨 놓을 일이다.
그런데 주인이 이렇게 따지고 든 일꾼에게 말한다.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 한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데나리온을 약속하지 않았느냐. 네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것을 가지고 내뜻대로 할것이 아니냐.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보느냐."
여기서 주인의 말중, '네가 악하게 보느냐'란 말은 헬라어로 '마귀의 눈으로 보느냐'를 직역한 것인데, NIV 영어성경엔 네가 질투하느냐? (Are you envious?)로 번역되있다. 악한 눈이 원래 질투를 할때 쓰는 관용어라는 점에서 유래한 영어 번역이다.
그래서 여기서 '악하게 본다'는 즉 마귀의 눈, 시기, 질투를 하는 눈으로 본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의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은 눈이다. '질투로 눈이 이글이글 타오른다' 란 표현이 있는 것처럼 시기하는자는 다른 것은 숨길수 있어도 눈빛은 절대 숨길 수 없다.
그렇게 우리에게 시기하는 마음이 들어가면, 눈이 악해져서 타인이 무슨 행동을 하든, 나를 골탕먹이려는 그런 나쁜 꿍꿍이가 있어 그런 것이라 의심을 하는 등, 모든것이 악하게만 보인다.
이런 시기심은 인간의 죄악 중 교만만큼 가장 근원적인 죄이다.
성경에선 시기 질투로 인해 죄를 저지른 인물들이
너무도 많다. 아벨을 시기해 죽인 가인, 요셉을 시기해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 다윗을 시기해 죽이려한 사울, 예수님을 시기해 십자가에 죽게 한 바리새인들, 그리고 바나바를 시기해 성령을 속인 아니니아와 삽비라 등등...
이 포도원 품꾼의 비유도 인간의 악한 죄성인 시기와 하나님의 선한 관대하심을 대비시켜 놓은 비유이다.
일반적인 신학자들의 의견은 일찍 일을 시작한 품꾼은 나면서부터 엄격하게 율법을 지키며 절제된 삶을 산 유대인을 의미하고, 나중 온자는 세속적으로 방탕하게 살다가 하나님을 믿게 된 이방인들은 의미한다고 한다.
또는 어떤 학자는 아침 여섯시는 노아시대, 아홉시는 아브라함시대, 열두시는 모세시대, 세시는 그리스도 초림시대, 다섯시는 그리스도이후 세상종말까지의 성도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또 어떤 학자는 예수님의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열두제자들이 아침 여섯시에 온 품꾼이고, 그이후 바울과 바나바는 아홉시 , 열두시는 폴리캅 같은 그 이후의 제자들, 그리고 세시는 '아퀴나스' 같은 중세시대 수도자들, 다섯시는 그 이후로 현대에서 그리스도의 재림시까지의 성도로 나누기도 한다.
예수님의 비유는 이처럼 해석이 너무 다양해서 뭐가 옳다고 단정 할수는 없고, 자기에게 은혜되는 쪽으로 받아 들이면 되는 것 같다.
어찌됐든, 시대를 막론하고 포도원의 품꾼 같은 시기, 질투는 인류 역사속에서 끊임없이 어디에나 다발적으로 일어 났고, 치정이나 재산다툼 등으로 서로 죽이기도 하는 죄악을 일으켜왔다.
교회 안도 예외가 아니라, 그런 시기 질투로 인해 많은 사람을 실족케 하며 스스로도 실족 했다.
예를 들면 심한 경우는 작은 교회 목사가 자기성도를 뺏어간다는 이유로 큰 교회에 불을 지른다든가, 소소하게는 담임옥사가 자기보다 능력있는 부목사를 질투해 내쫒는 일이나, 자기가 전도한 초신자 친구가 자기 보다 교회 사람들의 관심을 끌면 미워져서 교회로 인도한 걸 후회하기 까지 한다.
그런데 이 시기 질투가 마귀의 품성이며 죄란 걸 알지만, 가장 제어하기 힘든, 자기 마음데로 안되는 감정이다.
그런데 시기가 왜 죄일까?
저절로 올라오는 감정이니 잘 감추고 지내면 죄라고 할수 없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할수 있다.
하지만 시기란 감정은 너와 나를 분리할 때, 사랑하지 않을 때, 생기는 감정이다.
만약 자기가 아주 싫어하는 자에게 천만원의 공돈이 생기는 대신 자기에게 백만원이 공돈이 생긴다면 어떻게 하겠냐고 했을 때 많은 사람이 백만원을 포기한다고 한다.
이 처럼 시기하는 마음은 자기의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상대방이 잘되길 원치 않는다. 그래서 시기는 증오와 동일한 감정으로서 상대방을 죽이면서 자신도 죽이는 영적인 살인 죄이며 자살인 것이다.
솔직히 이런 글을 쓰는 나역시 시기로 괴로울 때가 있다.
또한 나 자신이 여섯시에 온 품꾼이라해도, 하루종일 고생했는데 다섯시에 온 사람과 똑같은 삯을 받으면 내 자신도 그리 썩 유쾌하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이 포도원 품꾼 비유에서 한 이야기를 가정해 추가해보자.
어느 가난한 아버지와 아들이 있다. 아버지는 4,50대로 농장일이나 건설일에 오랜 경력이 있고 건강하지만, 20대의 아들은 나이는 젊어도 경력도 없고 몸도 허약하다. 그런데 이 아들이 장가를 가서 아이까지 하나 덜렁 낳은 상태이다.
이 부자는 매일 아침마다 농장 주인이나 건설현장의 품꾼으로 일하기 위해 장터에서 만난다. 어느 날은 일이 없어 둘다 공치는 날도 있고, 또 어느날은 경력자인 아버지만 뽑혀 갈 때도 있다.
그런데 그날 따라 무슨 일인지 아들이 나오지 않았는데, 어느 부유한 포도원 주인이 나타나 품꾼들에게 한데나리온을 주기로 약속하고, 모두 포도원으로 데려 간다.
그래서 아버지는 일을 하면서도 '아들이 오늘 나왔으면 좋았을 걸' 하고 아쉬운 마음이 든다.
그런데 아홉시가 되자, 주인이 또 한무리의 사람들을 장터에서 데리고 온다. 그래서 아버지는 혹시 그 무리에 아들이 껴있나 살펴 보지만 아들은 없다.
그리고 열 두시가 되자, 주인이 또 한무리를 더 데려오고, 세시에도 또 한무리를 더 데려오는데 그중에도 아들이 없는 것이다.
아버지는 걱정이 되면서, 늦게라도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라고 생각 하지만 너무 늦었으니 이제 포기를 한다.
그런데 주인이 다섯시 무렵에 또 한무리를 데려오는데, 이번엔 절름발이, 노인네들, 품꾼으로 쓰기엔 한참 부족한 사람들 틈에서 아들이 껴 있는것이다.
아들은 반가워하는 아버지에게 다가와 오늘 몸이 너무 아팠는데 그래도 처자식을 굶길수 없어 몸을 추스리고 나왔는데 운좋게 품꾼을 뽑는 주인을 만났다고 말한다.
아버지는 늦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한다. 삯을 한데나리온의 십분의 일인 한 앗사리온 정도 밖에 못 받겠지만 그래도 일을 아예 못 하는 것보단 낫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자기 것을 좀 나눠줘야 겠다 마음을 먹는다. 하지만, 사실 이 아버지도 한데나리온은 자기네 식구 하루 먹기도 빠듯한 돈이다.
드디어 여섯시가 되어 일이 끝나자, 주인이 청지기에게 나중 온자부터 삯을 주라 한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지, 청지기가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에게 주는 것이다.
아들은 너무 기뻤지만 그보다 아버지가 더 기뻤다. 아버지는 아마도 주인에게 연신 굽신거리여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그런데 이 청지기나 세시에 온사람이나 열두시, 아홉시, 심지어 여섯시에 온사람에게도 똑같이 한데나리온을 준다. 이에 사람들은 아우성을 친다.
하지만 이 아버지는 그럴 수 없다. 아들에게 베푼 주인의 자선이, 온전한 한 데나리온의 삯이 너무나 고마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버지와 다른 품꾼의 감정과 반응이 다른 건 나중에 온 품꾼 중에 아들이 있고 없고의 차이, 즉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없고,의 차이이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많이 닮은 감정은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이다.
정신병자가 아니면 자식을 시기하는 자는 없다.
아버지가 월급을 받아와서 자기가 벌어온 돈이니 자기 혼자 쓰겠다거나, 엄마가 혼자 힘들게 만든 음식을 아들이 더 많이 먹는다고 시기한다면, 그게 어디 정상인 부모일까.
형제간도 서로 시기하고 계산하며 더가지려 하지만 부모는 순수하게 자식을 사랑한다.
자식이 잘되면 자기가 잘 된것 보다 더 기쁘고, 있는 것 다주고 싶어하고, 또 자식이 아프면 대신 아프고 싶어 하고, 그렇게 부모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일도 감수하려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린 것도 이와 같은 마음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런 아버지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으로 타인을 사랑하길 원하신다.
상대방이 잘되면 시기하고, 안되면 고소해하고, 비교해서 내가 나은 거 같으면 우쭐하거나 또는 못해보이면 위축되는 마음은 다 마귀의 품성이다
포도원 주인은 천국이라 했다. 천국은 포도원주인처럼 계산하지 않고 베푸는 은혜이며 사랑만이 있는 나라이다.
이 포도원 품꾼 비유는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교훈이 있다.
하나님은 포도원 주인이 직접 일꾼을 뽑으러 간것처럼 직접 우리에게 찾아와 부르셨다. 품꾼들이 주인을 찾아 간것이 아니다.
하지만 주인이 아무나 붙들고 데려온 것은 아니다.
자기를 써줄 주인을 기다린 사람들에게 찾아갔다.
사실 다섯시면 일이 마무리 될 때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흩어져 집에 갔을 시간이다. 하지만 남은 사람은 차마 자기를 기다릴 처자식 때문에 빈손으로 집에 갈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데나리온은 사실 이들에게 생명이다. 오늘도 돈을 벌지 못하면 또 굶어야 해서 이젠 더이상 힘이 없어 내일은 못 나올수도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제 너무 늦어 자기를 써줄 사람이 없는 것을 알지만 포기할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이처럼 하나님도 절박하게 생명을 구하는 사람,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사람에게 직접 찾아 가신다.
그렇다면 왜 포도원일까?
포도가 이스라엘 사람들의 주요작물이기도 해서 비유를 들었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비유는 '괜히'나 '아무런 이유 없이'가 없다.
요15장에서처럼 포도열매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내는 사역의 열매로 영혼구원 즉, 전도를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는 전도를 해야 한다. 예수님은 승천하실 때 우리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의 영혼 구원에 관심이 없는자, 전도하지 않는자는 예수님의 참 제자라 할수 없다.
또한 한편으론 포도열매로 만든 포도주는 예수님의 보혈이다. 그래서 수확할 포도가 많은 넓은 포도원은 한량없는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열두시간을 일했건 한시간을 일했건 포도원에 들어와 일한자는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에 참예한자로, 온전한 한데나리온의 삯, 영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뒤늦게 예수님의 포도원에 들어와 보혈의 은혜를 누리는 복된자들이다.
하지만 아직 삯은 지불되지 않았다.
그러니 우리모두 이 세상 끝 날에 하나님께 온전한 한 데나리온, 영생의 삯을 받기 위해, 남은 시간동안 열심히 포도를 수확하는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되길 소원한다.
주님의 산ㅡ나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