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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12. 중재인들(Les intercesseurs, 1985) [변호인]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in Pourparlers 1972-1990, 1990, pp. 165-184.(P.250)
L’Autre Jounal, n° octobre 1985, avec Antoine Dulaure etClaire Parnet
생소한 용어 ‘중재인들(Les intercesseurs)’이란 다양한 계열들이 다채로운 빛깔로 각자의 목소리와 몸짓을 행할 때, 그 다양체가 아제(앞으로) 행할 것이 무엇인지에 문제거리를 정확하게 보는 것, 솟아남의 힘들을 보는 것을 의미할까? 인민을 대하는 보살?
우리나라 철학계에서 70년대에는 영미분석철학이 주도권을 가졌다고 여겼을 때, 김여수 교수는 소통하는 여러 길들을 정리하는 교통경찰처럼 말했었다.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세상을 뜨고 난 뒤 80년대에 들어서, 군부 체제의 억압과 통제의 범위를 벗어날 때에도, 군부가 장악하는 것에 대해 박홍규 교수는 학자들이 공부를 안해서 그렇다고 말했다. 그 때에는 학자들이 학문별로 계열을 형성할 수 있는 학자들의 수가 적었다고 해야 하나. 사실 그 당시 몇 되었나 싶다. 80년대 후반에는 다양하게 분출구를 찾는 시도들이 있었고, 그 중에 한국철학사상연구가 2년여 과정을 거쳐서 1990년에 정식으로 발족하다. 그 발족에서도 기존의 학문틀에서 있는 교수들은 신생학회를 무시하였다. 소수자로 발언의 영역을 만들어갔다. 2008년 세계 철학자 대회를 치루려고 했을 때야, 노년층의 학자들은 이 신생집단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거의 20년이 걸렸다.
들뢰즈의 이 글은 1985년의 글이다. 다른 한편 한글 가로쓰기 신문이 나온 것은 1987년 이래로 새로운 구문과 입말이 퍼졌다. 천리안 시대를 거쳐서 손안의 게임이 마치 전염성 질병처럼 퍼졌다. 피시(PC) 통신에서부터 댓글과 유투버의 확장에서 30년 만에 2017년 인민의 촛불이 등장하였고 그 인민들 손안에는 스마트폰의 들려 있었다. 2020년 이래로 스포츠와 코로나가 다른 환경과 터전을 만들고 있을 것이다. (54SLE)
이 묘하게도, 대담 아닌 듯하면서도 대담처럼 쓴 것, 이 논문은 들뢰즈가 터놓고 자기 자신의 학문 작업을 이야기 한 것 같다. - 벩송에게 얼마나 영향을 입었는지가 보인다. - 철학이라기보다 선승이 화두를 던지듯이 이야기 한다. 우리들 속에서 솟아나는 것이 무엇인가? 프롤레타리아에서 나오는 것이 서툴고 미비하고 어쭙잖아도 나온다는 것은 불가능의 것으로 여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인민의 욕망은 상층의 탐욕과 달리 생겨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끼고 살아가면서 만들어가 본다. 그게 입말에서 그리고 몸짓에서 일어나고 솟아난다. 탈주선이라고. (54SLE)
게다가 들뢰즈는 글 속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의 활동성 또는 역동성을 강조하기도 하고, 사회주의가 필요한 이유도 언급한다. 다른 글에서 표현한 적이 없는 태도이다. 물론 리좀이나 다양체의 활동성과 권능을 이야기했지만, 사회주의와 연관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던 것 같다. 대담자인 끌레르 파르네와 연관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읽지 못한 들뢰즈와 파르네의 대담집인 대화(Dialogues, 1977)를 읽어보아야 연결점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이 대담보다 나중에 나온 철학이란 무엇인가(Dialogues, 1991)에서는 가타리와 함께 썼기에 구별될 수 있는 점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생각나는 김에 한 가지, 그리스 민주정 시대 그리고 소크라테스와 비극시인 유리피데서가 함께 살았고, 전쟁을 20년 겪는 시기에, 친구, 경쟁자, 주장자, 연인의 네 가지에서 같은 시민들이 있다는 관점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는다. 경쟁자는 경기에서 주장자는 연설에서, 친구는 완성체가 되고자 하는 욕망의 실현의 도움으로 – 이런 이야기는 “푸꼬의 초상(Un portrait de Foucault, 1986)”에서 언급하다가 그만 두었다. 다시 주목해야 할 것이다. (54SLF)
다시 이 대담이라기보다 글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과 좌파, 그리고 사회주의가 왜 필수적인가 대해, 나도 이런 식으로 여러 번 말했던 것과 같다. 전체를 꼼꼼히 번역하고 주를 달 필요가 있다. 철납 49년의 누더기가 되어가는 사유만큼이나 몸도 고물이 되어 삐걱거리며 간다. 들뢰즈가 중재자라고 하고, 변증법론자는 매개자로 하지만, 촉매자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공기처럼 숨결에 들락날락하며 삶을 살게하는 촉매. 다양체의 각각의 용출선들이 있고 그 “사이”에 촉매.
그런데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느냐고 묻는다며, 프롤레타리아의 출현은 촉매들의 영향에서 자율성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누구의 촉매가 아니라 복사권이 없는 모방권이 없는 그럼에도 원본없는, 삶은 많은 촉매들을 만나면서 생장하고 성장하여 우여곡절을 겪으며 누더기의 모습을 만들지 않았을까. (54SLF).
IV. Philosophie 163
12. 중재인들(Les intercesseurs, 1985) 165-184 [중재인 변호인]
13. 철학에 관하여(Sur la philosophie, 1988) 185-212
14. 라이프니츠에 관하여(Sur Leibniz, 1988) 213-222
15. 벤스마이아에게 보낸 편지: 스피노자에 관하여(Lettre à Réda Bensmaïa, sur Spinoza, 1989) 223-225
# IV. 12. 중재인들(Les intercesseurs) [변호인] 165-184
- L’Autre Jounal, n° octobre 1985, avec Antoine Dulaure etClaire Parnet
[*0. 무엇이 사이에서 일어나는가?]
오늘날 사유 속에서 잘 진행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근대주의 이름하에 추상작용들의 회귀이고 , 사람들이 기원들의 문제를, 모든 그것을‥…재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동들과 벡터들의 항으로서 모든 분석은 봉쇄되어 있다. 그것은 매우 연약한 시대이며 반작용의 시대이다. 그럼에도 철학은 기원들의 문제가 끝났다고 믿는다. 출발도 도착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질문은 오히려 이러했다: 무엇이 “사이(entre)”에서 일어나는가? 이것은 정확히 물리학적 운동들에서 동일하다. (165) [여기서 운동들과 벡터들이란, 물리학적 운동처럼, 나열되어 건너갈 수 있는 것들을 의미할 것이다. 실재로는 넘어갈 수 없는 틈, 심연이 있는데.. (차라리 여기 운동과 벡터는 수타식 면발이다(54SLF)) ]
.. 어떻게 운동 속에서 커다란 물결을, 올라가는 공기의 기둥을 받아들이게 하는가[하는 물음에서], 노력의 기원 대신에 “사이에 도달하는 것”, 그것이 근본적이다. (165) - [사이에서 틈을 넘어갈 수 없을 때, 연대와 아자르, 동맹과 공명이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철학에서, 사람들은 영원한 가치들로, 영원한 가치들에 대한 지적 문지기의 관념으로 되돌아간다. 방다(Julien Benda, 1867-1956)가 이미 벩송에게 비난했던 것이다: 운동을 사유하기 시도하면서, 자기의 고유한 계급에 배반자, 성직자 계급에 배반자라고. (166)
*1. 철학자는 반사자[반사물, 반성자]가 아니라 창조자 이다. 166-168
[칸트의 비판론은 반성의 산물이다. 게다가 판단론을 심판론으로 읽어보면 유일신앙자의 철학이다.]
이러한 이유로, 중요한 것은 철학자에게 “관한(sur)” 반성할 권리를 다시 끌어내는 것이다. 철학자는 창조자이지 반성체가 아니다. (166)
... 마찬가지로 중국적 그림자들 만드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자동-운동(auto-mouvement)을 할 수 있는 이미지들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 나의 첫째 책에서 나는 영화제작적 이미지를 마치 자동운동을 획득하는 이미지로서 생각했었다. 둘째 책에서 나는 자동-시간성의 획득에서 영화제작적 이미지를 생각한다. (167) [들뢰즈의 영화론은 벩송의 기억과 무의식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여기서 무의식은 프로이트의 무의식[추억]과는 전혀 다르다.]
물론 운동은 계속해서 이미지 속에 현재하고 있다. 그러나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상황의 출현과 더불어 시간-이미지가 자유로워지면서, 고려해야 할 것은 운동이 아니며, 운동은 인덱스[찾아보기]의 자격만이 있다. 시간-이미지, 그것은 앞서와 차후에 대해, 계속에 대해 전혀 말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계속은 서술부의 법칙처럼 처음부터 현존했다. 시간-이미지는, 그것은 공현존의 새로운 형식들이며, 계열화의 형식들이며 변형의‥…. (168) [벩송의 기억 속에서 이미지들이 솟아남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구나. 들뢰즈가 벩송의 MM이 철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 비추어서 설명한다.]
*2. 제빵장이의 변형 168-172 (La transformation du boulanger)
나에게 흥미있는 것, 그것은 예술, 과학, 철학 사이에서 연관들이다. 이들 사이에 각각은 창조적이다. (168) [벩송이 발명, 예술작품, 이론, 새로운 다음측정(보살, 신비가)가 창조적이라고 했다.]
기능(fonction), 집성체([un] agrégat), 개념(concept) ... (169) [예술, 과학, 철학을 의미한다.]
첫째 예: 수학에서 리만(Georg Riemann, 1826-1866)공간이라 불리는 공간의 전형이 있다. 수학적으로 매우 잘 정의된 함수들과 연관으로서, 공간의 전형은 이웃하는 작은 조각들의 구성을 함축한다. ... (169)
다른 예: 물리학 속에 훨씬 더 흥미로운 어떤 것이 있다. 그것은 프리고진(Ilya Prigogine, 1917-2003)과 스탕제르(Isabelle Stengers, 1949-)에 의해 분석된 것인데, 사람들은 그것을 “제빵장이의 변형(La transformation du boulanger)”이라 부른다. (169)
레네(Alain Resnais, 1922-2014)는 프리고진과 가깝고, 고다르(Jean-Luc Godard, 1930-)는 다른 이유들 때문에 톰(René Thom, 1923-2002)과 가깝다. (170)
본질적인 것, 그것은 중재자들이다. 창조작업(la création), 그것은 중재자들이다. 이들 없이는 작품은 없다. 그것은 일반인(des gens, 청년들)일 수 있다. .. 가타리와 나, 우리는 서로에게 중재자들이다. (171) [촉매자]
공동체의 내부에서 중재자들의 제작작업은 [카나다 영화제작자] 뻬로(Pierre Perrault, 1927-1999)에게서 잘 나타난다. ... 필요로 하는 것, 그것은, “설명문을 붙이는 현행범(flagrant délit)”으로서, “설명문을 붙이는” 중에 있는 다른 어떤 이를 장악하는 것이다. 그때에 둘로 또는 여럿으로 소수의 담론이 형성된다. 사람들은 여기서 벩송의 우화작업의 기능을 재발견한다‥…. 설명문을 붙이는 현행범으로서 일반인[청년]을 잡는 것, 그것은 인민의 구성적 운동을 파악하는 것이다. 인민들은 선현존하지 않는다. (171) [벩송이 정태적 종교에서 쓴 용어 “우화적 기능”을, 들뢰즈가 발생적으로 또는 생장적으로 연속성으로 본 것은 흥미롭다. .. 벩송도 인민이 우여곡절을 겪는다고 한다. (54SLF)]
나는 가타리와 작업한다. 각각은 다른 사람의 거짓계(le faussaire)이다. 그것은 각자가 다른 이에 의해 반대되는 용어를 자기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항들로 된, 반사된 계열이 형성된다. 여러 항들로 또는 복잡한 항들로 가지치기하는 계열을 배제하지 않는다. 진실인 것을 생산하려고 하는 거짓의 권능, 그것이 중재자들‥…. [원본 없는 개연성(확률론)의 세상에서 생산, 창조, 되기는 진리가 아니라 (서투른 진실 즉) 거짓들을 만든다. 인민들의 삶의 세상은 거짓계들의 다양체인 셈이다. - “거짓계”란 상징계에 반대로 쓰인 것 같다. 서로는 다르고, 서로가 각각 진리라고 말하지 않지만, 각자 진실을 말하는 점에서 서로에 대해 거짓계라고 말할 수 있다. - 사람들은 답이 없음을 참지 못하는 것 같다. 현대인의 병적 징후인데, 완전한 답을 찾다가, 서툰 타인을 배제하는 광기에 빠진다. 앵글로 색슨의 철학이 그러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공통점은 좌파(공산주의)가 구체적으로 현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배제하는 사고에 젖어 있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그들은 건전하다고 하는 상상을 넘어 망상에 빠져있다. 푸꼬가 건드린 것은 그것의 망상의 광기이다. - 망상에는 제국과 유일신앙(3 유일신앙의 싸움은 광기의 극치이다)이 있다. 세계사에서 20세기에서 21세기에 3가지 유일신앙이 제국을 형성하기 위해 인성을 피폐하게 하고 있다.]
*3. 좌파는 중재인들(les intercesseurs)을 필요로 한다172-174 [중재인 변호인]
[연대와 동맹에 합의와 동의가 필요하다는 의미에서 중재인들이 필요하다. 사유에서는 위계의 순위를 정하는 재판관과 심판관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국가와 종교는 체제와 위계를 갖춘 기구로서 판단과 비판(심판)이 필요한데 비해, 민주정에서 인민의 창안과 창의의 생성과 확장의 길들(선들)이 필수적이다. (54SLC) ]
정치의 퇴행. 사회주의 체제로부터, 많은 이들이 담론의 새로운 전형을 기대했었다. (172) [운동이미지를 기대했었는데, 시간이미지의 새로운 전형이 도래했다.]
우파의 젊은이들은 스스로 착각을 행하지 않는다. 내가 믿기로, 그들은 다른 이들처럼 더 이상 짐승이 아니다. 그러나 자신들에 속하는 그들의 기술(technique)은 운동에 대립되는 것이다. 그것은 철학에서 벩송에 반대와 동일하다. 그것은 그러한 모든 것과 같다. 운동과 결혼하거나[짝짓거나] 또는 운동을 멈추게 한다. 정치적으로 협상의 두 기술은 절대적으로 다르다. 좌파의 젊은이들에 대해, 그것은 말하는 새로운 방식을 함축한다. 질문은 설득하는 것이 아니고, 밝히는 것이다. 밝히는 것, 그것은 상황뿐만 아니라 문제들의 “자료(les données)”들을 부과하는 것이다. 다른 조건하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사물들)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다. (173)
우파는 질문들을 거절할 것이다. .. 따라서 좌파의 역할은, 권력(할 수 있음)이 있던 없던 간에, 우파가 모든 대가로 감추고자 하는 문제의 전형을 발견하는 것이다.(173)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정보들을, 문제를 제기할 그들의 방식들을, 전달하거나 정교하게 하는 인간들이 아니다. .. 나는 세 가지 다양한 예를 제시한다. 누벨-칼레도니아의 토지대장은 아마도 전문가들의 학술지에서 알려졌다. .. 사적이라 내버려 두는데, 그것은 카톨릭 교육이다. .. 다른 예로, 우파가 수많은 읍면을 재정복한 이래로, 크든 작든, 또는 지역적이든, 신용[신뢰]들은 모든 종류의 문화적 기획들에서 제거되었다. (174) [2가지만 말한다.]
그러나 좌파는 간접적이고 자유로운 중재자들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다른 스타일이며, 그 스타일이 중재자들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에서 그러하다. (174)
*4. 모방자들의 음모(Le complot des imitateurs). 175-176
오늘날 문학의 위기를 어떻게 정의하는가? 베스트셀러의 체제, 그것은 빠른 회전이다. 많은 서적상인들은 이미 톱-클럽 또는 히트-공연에 의해 반복 생산물만을 취하는 음반 상인들에게 줄서있는 경향이 있다. (175) [우리나라에서 주례사 비평이 위기라 한다. 문학이 인민들의 삶의 내적 공명과 공감에 대해 무관심하다. 문학이 우파의 돈에 끌려가는 분위기이다. 대중매체에서 그 분위기를 조장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무서운 것, 그것은 “돈호법(Apostrophes, 욕설들)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은 기술적인 큰 힘을 지닌 방송, 조직화, 틀짜기(une cadrage, 지면배치, 영상배치)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학비평의 제로상태이며, 다양한 구경거리가 된 문학이다. (175)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1906-1977)가 “‥… 내가 당신들에게 말했는데, 그러한 것은 나에게 영화를 더 이상 만들지 않게 규정했었다.” 그리고 그러한 것은 우선 인터뷰를 마땅히 더 이상 하지 않게 규정했다. 잔인성과 어린이스러움(l’infantilisme)은, 그것을 즐기는 자들에서도 힘의 시련(une épreuve)이며, 또한 그것을 회피하려는 자들에게 조차 필수불가결하다. (176)
*5. 짝이 넘쳐나다. 176-177
사람들은 가끔 마치 젊은이들이 스스로 표현할 수 없는 것처럼 행한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스스로 표현하기들 멈추지 않는다. 저주받은 짝들은, “너가 무엇을 가졌니, 표현해봐”라고 남성이 말하지 않고서는, 여성이 기분풀이도 피곤해지기도 할 수 없는 짝들이다. (176-177) [여성 또는 소수자의 언설을 남성 또는 지배자의 말로 바꾸어 표현해야 되는 것을 상층은 착각 또는 망상하고 있다. 그들은 말하고 있다. 그들의 입말을 그대로 들어보라고, 왜 자기들 방식으로 바꾸어 말해야 하는가. 상층은 그들의 말을 알라 들으려 노력도 공부도 하지 않을까? 상층은 제국의 주구, 유일자의 양떼이기 때문이다. (54SLF)
뿌앙까레(Henri Poincaré, 1854-1912)는 말하기를 많은 수학이론들은 어떠한 중요성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는 그것들이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이 최악이다. (177) [그래 그 많은 무한의 학술용어들이 있어, 그래 거짓이 아니야. 그럼에도 그 속에 들어가야 하나? 최악이지.]
*6. 식민지 출신 외디푸스(Oedipe aux colonies) 178-179
[콜론 출신 외디푸스(Œdipe à Colone, Οἰδίπoυς ἐπὶ Κολωνῷ)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이다. 약간 패러디 한 것이리라. 기자들의 글은 “식민지 출신 외디푸스”라고. 이런 견해는 앙띠외디푸스(1972)에서 주제였는데, 제국의 영토 속에 든 외디푸스에서 탈주선이 탈영토와 였다. 그런데 제국 속에 포획된 자들은 외디푸스라는 가부장적 가족제에 매여있다.]
아마도 [신문]기자들은 문학의 위기 속에서 일부분의 책임이 있다. 기자들이 자주 책을 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들이 책들을 쓸 때, 그들은 언론 잡지의 형식과는 다른 형식 속에 들어갔으며, 작가들이 되었다. 상황은 달라졌다. 왜냐하면 기자는, 자유로운 형식이 충만한 권리로 자기에게 속한다는, 그는 이런 형식에 도달하기 위하여 행해야할 어떠한 특별한 노동도 없다는, 확신을 얻었다. .. 그는 이로부터 표준 소설의 주인공의 하나로서, 즉 마치 식민지 출신 외디푸스처럼 어떤 것 – 즉 여성들의 개인적 탐문의 보고서 또는 한아버지의 탐색에 대한 보고서로서 - 보고자의 여행들처럼 말이다. ... 시장에 의해 판매촉진의 측면을 취하는 것은 책의 “이차적 작업(une seconarisation)이다. (178)
*7. 만일 문학이 죽는다면, 그것은 암살에 의해서 일 것이다. (Si la littérature meurt, ce sera par assassinat) 179
[뭐, 차트에 오른 것으로 가치를 정한다는 것, 이미 자본의 주구들에 의해 암살당하고 있는 것 아닌가.]
맥루한(Herbert McLuhan, 1911-1980)을 읽지도 이해하지도 않는 자들은, 그가 오디오비주엘(시청각 자료)이 책을 대체 한다는 사물들의 본성 속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이 죽은 문학만큼이나 또는 표현의 다른 양태들만큼이나 창조적 잠재성들을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오디오비주엘이 책을 대체하려 한다면, 그것은 경쟁적인 표현 수단인 한에서가 아니라, 오디오비주엘 자체 속에 창조적 잠재성들을 질식시키는 지식형성들에 의해 행사된 독점인 한에서 이기 때문이다. (179)
대안은 쓰여진 문학과 오디오비주엘 사이에 있지 않다. 대안은 창조적 권능들(문학에서와 마찬가지로 또한 오디오비주엘에서)과 예속화(domestication)의 권력들 사이에 있다. .. 창조의 가능성들은 고려된 표현의 양태[양식]에 따라서 매우 다를 수 있다. 이 가능성들은 그래도 어느 정도 소통하고 있는데, 즉 가능성들이“시장을 위한 생산”에 부합하는 것에도, 시장의 문화 공간에도, 설립에 반대해야만 한다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정도에서. (179)
*8. 테니스[스포츠]에서 프롤레타리아계급에 대하여, 179-181
스타일, 그것은 문학 용어이며, 그것은 구문론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과학들에서도 스타일에 대해 말한다. 거기에서는 스타일이 없는데도 말이다. 사람들은 스포츠들에서 스타일에 대해 말한다. 스포츠들에는 매우 추진력있는 연구들이 있으나, 나는 그것을 그렇게 잘 알지 못한다. (180)
테니스의 예를 들어 보자. 되 보낸 공이 그물(네트)을 넘어서 상대방의 발아래 떨어지는, 서브의 되받기의 전형(un type)이 언제 생겨날까? 내가 생각키로, 그것은 전쟁 전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위대한 선수 브롬위치(Bromwich, 1918-1999)이다. 그러나 확실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보르그(Björn Borg, 1956-)가 새로운 스타일을 발명했다. 그는 테니스를 일종의 프롤레타리아[무산자계급]에게 열었다. [미국 테니스 직업 선수인] 맥켄로(McEnroe, 1959)는 발명가이며 스타일리스트이다. 그는 테니스에 이집트 자세(서브 넣을 때)를 도입했고, 도스토에프스키 반성들(“만일 너가 기꺼이 머리를 벽에 부딪히는 시간을 보낸다면[쓸데 없는 시간을 보낸다면], 삶은 불가능하게 된다”)을 도입했다. 그 위에서 모방자들은 발명가들을 무너뜨릴 수 있고, 그들보다 더 잘 할 수 있다. 이것은 스포츠의 베스트-셀러들이다. 보르그(Borg)는 모호한 무산자(프롤레떼르) 종족을 생성시켰고, 맥켄로는 양적인 우승자에 의해 무너질 수 있었다. (174) [뭔 말인지?]
*9. 시다[에이즈]와 세계 전략(Sida est stratégie mondiale) 181-184.
의학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질병의 진화이다. 물론 외적인 새로운 요소들이, 미생물의 새로운 형태들, 사회적 새로운 자료들도 있다. 그러나 증상[징후]학, 증상[징후]들의 집단들이 있다. 매우 짧은 시간에, 증상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모여지지 않지만, 사람들이 다른 문맥에서 앞서서 분류했던 질병들이 따로 분리된다. 파킨슨 병, 성홍열 등등. (181)
이런 관점에서 전쟁 후에 무엇이 일어났는가? 그것은 “스트레스(stress, 긴장)”라는 질병들의 발견이다. 거기서 아픔이 공격자에 의해서도 아니고, 오히려 흥분되기도 하고 또는 소진되기도 하는 특별하지 않는 방어의 반작용에 의해서 생겨났다. (181)
시다(에이즈)는 두 축들, 스트레스와 자동면역 사이에 개입된다. 다고녜(François Dagognet, 1924-2015)가 현실 의학의 분석에서 말하듯이, 사람들은 아마도 의사도 환자도 없는 질병들로 향할 것이다. 징후들 보다 더 많은 이미지들이 있고, 환자보다 더 많은 전염자(질병 운반자)들이 있다. (182) [시다의 발병이 바이러스이며, 이 바이러스가 세포 속에서 DNA를 변형시켜 면역체계를 파괴시킨다는 과정을 잘 몰랐을 때 일 것이다. - 2021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문제이다.]
동성애는 어떤 생물학적 공격자의 역할을 할 위험에 처해있다. 이는 마치 소수자와 난민이 어떤 적(敵)의 역할을 하는 것과 같다. 이것이 사회주의 체제(un régime socialiste)를 더 많이 유지해야 할 이유이다. 이 체제는 질병과 사회라는 이중 이미지를 거부할 것이기 때문이다. (182)
불가능성들 사이에서 자기의 길을 그리는 것과 같은 창조에 대해 말해야 한다‥…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가 설명했다: 유태인 작가로서 독일어로 말하는 것의 불가능성, 체코어로 말하는 것의 불가능성, 말하지 않는 것의 불가능성. [카나다 영화감독인] 빼로(Pierre Perrault, 1927-1999)는 문제를 재발견한다: 말하지 않는 것의, 영어로 말하는 것의, 프랑스어로 말하는 것의 불가능성. 창조는 숨막힘이라는 목구멍들에서 이루어진다. (182)
창조자는 자기의 고유한 불가능성을 창조하는 어떤 이이며 동시에 가능적인 것을 창조하는 어떤 이이다. 맥켄로(McEnroe, 1959-)처럼, 사람들이 발견할 것은 머리를 부딪히면서 이다. 벽을 문질러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불가능성의 일체를 갖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탈주선[용출선]을, 창조를 구성하는 출구를, 진리를 구성하는 거짓의 권능을 갖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182-183) [탈주선의 동의어, 창조를 구성하는 출구...]
지각과 일상 견해들은 고체적이고 기하학적이기 때문에, 액체로 또는 기체로 써야만 한다. 철학에서 벩송(Bergson, 1859-1941)이, 소설에서 울프(Adeline Virginia Woolf, 1882-1941) 또는 제임스(James), 영화에서(그리고 물질 상태들의 탐험 속으로 너무 멀리 갔던 실험 영화) 르누아르(Jean Renoir, 1894-1979)이다. (183)
땅의 벡터들인 벡터들이 분간되기 위하여, 단어들을 열어야만 하고, 사물들을 쪼개야만 한다. 모든 작가, 모든 창조자는 어둠(une ombre, 그림자)이다. 어떻게 카프카와 프루스트의 전기(傳記)를 만들 것인가? 사람들이 그것을 쓰자마자, 그 어둠은 신체와 연관에서 첫째 그림자이다. 진리는 현존의 생산작업으로부터 이다. 그것은 머리속에 있지 않고, 현존하는 사물이다. 작가는 실재적인 신체들을 내 보낸다. [포르투갈 작가, 시인인] 페소아(Pessoa, 1888-1935)의 경우에서 그것들은 상상계들, 그대로가 아닌 상상계들인데, 왜냐하면 그는 등장인물들이 만든 무엇을, 그 자신은,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183)
작가들의 나르시시즘은 기괴하다, 왜냐하면 그림자의 나르시시즘은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장중(grave. 심각)하다는 것, 그것은 어떤 이에게서 사막을 가로지는 것이 아니라, 그가 거기에 대해 나이가 들고 인내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사막에서 태어나는 젊은 작가에게서 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이 이루어지기에 앞서서 자신들의 무화된 기획들을 볼 위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또한 그럼에도, 이미 거기에 작업들과 스타일들이 있는 작가들이라는 새로운 종족이 태어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183-184) [들뢰즈의 이런 글을 읽다보면, 들뢰즈가 불교의 선승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무와 거의 같은 그림자에서 새로운 스타일과 창조가 없을 수 없다. 사막을 거쳐 가는 데는 시간도 인내도 필요하다. 돈수가 기본이다. 그렇다고 기획대로 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생명의 기나긴 진화 또는 확장의 역사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기도 하겠지. - 시다와 마찬가지로 바이러스인 코로나의 전략도 마찬가지로 사막을 지나가게 하는 중일 것이고, 나이가 들고(시간을 보내고) 준안성의 수련을 거쳐서 새로운 스타일의 개인들이 등장할 것이다. (54SLE)]
(8:18 54SLF)
#. 인명
[1755 뒤로(Jacques-Antoine Dulaure, 1755-1835) 프랑스 고고학자, 역사가 정치가.]
1783 스탕달(Henri Beyle, 필명 Stendhal, 1783-1842) 프랑스 작가. Le Rouge et le Noir, 1830 La Chartreuse de Parme, 1841
1799 발작(Honoré de Balzac, né Honoré Balzac, 1799-1850)(à 51 ans) 프랑스 작가. 소설가, 극작가, 문학비평, 극작가, 수필가, 기자.
1821 도스토이에프스키(Fiodor Mikhaïlovitch Dostoïevski, 1821-1881), 러시아 작가
1842 제임스(William James, 1842-1910) 미국의 철학자, 심리학자. 프래그머티즘 철학의 확립자로 알려진다. 철학, 종교학, 심리학 등에 뛰어난 연구를 많이 남겼다.
1826 리만(Georg Friedrich Bernhard Riemann, 1826-1866)[마흔] 독일의 수학자. 해석학, 미분기하학에 혁신적인 업적을 남겼으며, 리만 기하학은 일반 상대성 이론의 기술에 사용되고 있다.
1854 뿌앙까레(Henri Poincaré, 1854-1912) 프랑스 수학자, 이론 물리학자, 과학철학자.
1859 벩송(Bergson, 1859-1941) 프랑스 철학자.
1867 방다(Julien Benda, 1867-1956)(à 88 ans) 프랑스 비평가, 철학자, 작가. 성직자들의 배반(La Trahison des clercs, 1927)로 명성을 얻음. 그의 할배는 이스라엘 종무회 회장이었다. Le Bergsonisme, ou Une philosophie de la mobilité, 1912
1867 랭동(Alfred Lindon, 1867-1948) 폴란드 아세키나제 유대계 보석상, 예술작품 수집가. - 손자 제롬 랭돔(Jérôme Lindon, 1925-2001) 미뉘(Minuit) 출판사 사장(1948-2001),
1871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À la recherche du temps perdu)(1913-1928)를 쓴 프랑스의 소설가. 이 소설은 1,000매를 넘는 대작으로 3인칭 수법으로 저술되어 있다. 장 상퇴유(Jean Santeuil, 1952), 생트 뵈브에 반대하여(Contre Sainte-Beuve, 1954)
1879 클레(Paul Klee, 1879-1940) 독일 출신, 화가, 예술가. 바우하우스(Bauhaus, 1919-1933)에서 활동.
1882 버지니아 울프(Adeline Virginia Woolf, 1882-1941) 20세기 영국 작가. 울프는 의식의 흐름 장르를 탄생시키고 완성한 작가 중 한 사람이다.
1883 카프카(Franz Kafka, 1883-1924)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유대계 소설가. 현재 체코의 수도인 프라하(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에서 유대인 부모의 장남으로 태어나 독일어를 쓰는 프라하 유대인 사회 속에서 성장했다.
1888 페소아(Fernando António Nogueira Pessoa, 1888-1935) 포르투갈 작가, 비평가, 시인. 3개국어 작가(포르투갈어, 영어, 프랑스어) 어린시절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보냈다.
1894 셀린(Louis Ferdinand Destouches, dit Louis-Ferdinand Céline, 1894-1961) 프랑스 작가. 의사. Voyage au bout de la nuit, 1932
1894 장 르누아르(Jean Renoir, 1894-1979) 인상주의 화가인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아들, 프로방스대학에서 수학과 철학을 전공, 1920년대에 감독. 위대한 환상(1937년), 게임의 규칙(1939년). 그는 오슨 웰스의 유명한 딥포커스 방식 이전에 ‘깊이있는 무대’(Staging in depth)를 통해 진실과 정직의 영화미학에 접근해갔다. 르누아르의 ‘깊이있는 무대’란 인물들이 전경 쪽으로 이동하거나, 배경이나 중경의 인물들을 강조하는 미장센을 통해 깊이감을 착각하도록 만드는 방식이다. “그는 가장 위대한 감독이다. 그는 영화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장 르누아르에 대한 데이비드 톰슨의 말이다.
1901 브레송(Robert Bresson, 1901-1999) 프랑스 영화인, 13편의 장편 영화 출품. Procès de Jeanne d'Arc, 1962 Au hasard Balthazar, 1966
1906 사뮈엘 베케트(Samuel Beckett, 1906-1989)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프랑스의 소설가, 극작가. 3부작 소설 몰로이, 말론은 죽다, 명명하기 힘든 것
1906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1906-1977) 이탈리아 영화감독. 스트롬볼리(Stromboli, terra di Dio, 1950: fr. Stromboli .
1911 맥루한(Herbert Marshall McLuhan, 1911-1980) 카나다 지식인, 영문학교수, 소통이론가. 매체(les médias 메디아) 연구자.
1914 뒤라스(Marguerite Duras, 필명 Marguerite Donnadieu 1914—1996) 베트남 사이공 부근에서 출생, 프랑스 여성문학자, 극작가, 영화감독 시나리오 작가. L'Amant de la Chine du Nord 1991)
1918 브롬위치(John Edward Bromwich, 1918-1999) 오스트레일리아 테니스 선수. 세계 대회 단독 2번 남성이인조 13번 혼성팀 4번, 19번 우승. Gaucher avec un revers à deux mains, il sert de la main droite.
1922 알랭 레네(Alain Resnais, 1922-2014), 프랑스 영화감독. ‘시간’을 탐구하는 그의 실험은 현대 아방가르드 영화들의 종합판을 연상시켰다. 지난해 마리앙바드에서(L'Année dernière à Marienbad, 1961), 1997년 작인 누구나 [과거에는] 그 노래를 알았다.(On Conna la Chanson, 1997)의 제목 뜻은 ‘누구나 아는 진부한 얘기’라는 관용어이다.
1923 톰/똠(René Thom, 1923-2002) 프랑스 수학자, 인식론자. 카타스트로프(파국)이론 창설자.
1924 다고녜(François Dagognet, 1924-2015) 프랑스 철학자. 깡길렘 제자. 1958년 의학박사. L'évolution créatrice d'Henri Bergson: investigations critiques / Yvette Conry ; préface François Dagognet. 2001.
1925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 프랑스 철학자.
1925 카스타네다(Carlos Castaneda, 1925-) 페루 출생 미국 작가, 인류학 박사.
1927 뻬로(Pierre Perrault, 1927-1999) 몬트리얼 태생 카나다 감독, 작가, 시인, 드라마작가.
1930 펠릭스 가타리(Félix Guattari 1930-1992) 프랑스 정신과의사. 공산주의자 들뢰즈와 함께 안티외디푸스, 카프카, 리좀, 천개의 고원, 철학이란 무엇인가(1991)까지 같이 작업하였다.
1930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 프랑스, 스위스의 영화감독, 영화 각본가, 영화 평론가. 1960년대 프랑스의 영화 운동인 누벨바그의 대표적 인물 중 한 명이다.
1932 뷔르흐(Noël Burch, 1932-) 미국 샌프란시스코 태생. 미국-프랑스인, 1951년 프랑스로. 교수, 영화감독, 영화사 전공.
1935 삐보(Bernard Claude Pivot, 1935-) 프랑스 기자, 작가. 텔레비전의 문화 편성을 활성화한 자이다. 공구르 상의 주제자이다.
1942 삐자니(Francis Pisani, 1942-) 프랑스 기자, 작가, 기록가. 멕시코 주재기자를 오래했다.
1949 스탕제르(Isabelle Stengers, 1949-) 벨기에 철학자, 과학자 과학철학과 논리학 수학(화이트헤드) 전공.
1956 보르그(Björn Borg, 1956-) 스웨덴 테니스 선수.
1959 맥켄로(John Patrick McEnroe, 1959) 미국 테니스 직업 선수. He was known for his shot-making and volleying skills, in addition to confrontational on-court behavior that frequently landed him in trouble with umpires and tennis authorities.
뒤로르(Antoine Dulaure, s.d.) 오트르 주르날 기자. 들뢰즈 대담자.
파르네(Claire Parnet, s.d.) 들뢰즈 제자, 기자. 들뢰즈 대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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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트르 주르날(L'Autre Journal, sous-titre d'origine: Les Nouvelles littéraires) (1984-1993) 1984년 창간에 일간지에서 1986년 주간지로 바뀌었고, 1993년까지 발간되었다. 작가인 뷔텔(Michel Butel, 1940-2018)에 의해 창간되었다. 참여자: d'écrivains et de journalistes tels Antoine Dulaure, Claire Parnet, Nadia Tazi, Marguerite Duras, Hervé Guibert, Marc-Edouard Nabe, Bruno Sulak (détenu à Fleury-Mérogis), Thierry Lévy (avocat), Maurice Najman (fondateur des comités d'action lycéen pendant mai 68), et de philosophes tels Gilles Deleuze, André Scala, Isabelle Stengers, Paul Virilio, Jean-François Lyotard ou Michel Foucault 등이다.
빵장이의 변형: Exemple de mesure invariante sous l'action d'une transformation du boulanger (sans rotation)
내가 처음 생각했던 수타식 면발이 아니었다. 들뢰즈가 조각 깁기, 누더기, 양모펠트 등을 말할 때 복잡계 정도인데, 비유를 넘어서면 이런 겉모습이 등장하기 전에 안모습의 뒤섞임이 있다. 이 뒤섞임이 표면적으로 매번 달리 그려지겠지만, 그 중의 한번의 모습이 카오스모스로 보여지는 것은 평면 이미지로 그려 본 것이라. (그림참조) 이 평면이 회오리처럼 솟아나는 방식을 묘사한다면 현란하다 해야 할까?
콜론출신 외디푸스(Œdipe à Colone, Οἰδίπoυς ἐπὶ Κολωνῷ) 소포클레스의 비극, 마지막 작품들 중의 하나. 소포클레스(Sophocle, Σοφοκλῆς, 전495-전406) 아테네의 한 콜론(구역)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죽었다.
Œdipe aux colonies: 들뢰즈가 소포클레스 작품((Œdipe à Colone)에 빗대어 썼을까?
후천면역결핍증후군(Le syndrome d'immunodéficience acquise, sida 시다: Acquired Immune Deficiency Syndrome; AIDS 에이즈) 면역결핍이 HIV 바이러스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바이러스 전염의 시작은 1970년대 말이다. 바이러스 발견은 1981년이라 한다. Dans les années 1980, le sida se transforme en une pandémie.
- 에이즈의 원인인 HIV는 대단히 약한 바이러스이다. 심지어 공기 중에 노출되기만 해도 죽는다. 따라서 인간 대 인간의 직접전염경로를 차단함으로써 에이즈를 예방할 수 있다. /에이즈의 완치가 가능하다는 사실은 발견되었으나, 보편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1995년에 시작된 일종의 칵테일 요법인 고활성 항바이러스 요법(highly active anti-retroviral therapy, HAART 요법)이 HIV 질환의 진행을 늦추고 생존기간을 연장시키는 데에 획기적인 성과를 나타내면서, 에이즈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당뇨병과 같은 조절 가능한 만성 질환으로 인식이 전환되고 있다.
- Mauvais Sang, 1986프랑스 감독 까락스(Leos Carax, 1960) 작품으로 시다를 주제로 한 첫 작품.
- 꼴라르(Cyril Collard, 1957-1993)[서른여섯]의 자기 일상생활을 영화화 하였던 Les Nuits fauves, 1992.
몸만들기: 경기에 맞는 몸 - 피켜스케이팅, 배구, 양궁
김연아(金姸兒, 1990-) 피겨 스케이팅. 대한민국 최초의 올림픽 메달리스트. 그녀의 공중회전은 새로운 스타일이라고 한다. 내가 열심히 장면을 보았지만, 전문가가 구별하는 3회전과 4회전을 구별할 수 없었다.
김연경(金軟景, 1988-) 안산시 출생, 배구 선수. 고향은 전라남도 구례군이며, 구례군에 조부모가 살고 있다 – ‘라이벌은 없습니다.’
안산(安山, 2001-) 양궁 선수, 2020 도쿄올림픽 3관(2021년 개최). 언니 안솔, 본인 안산, 남동생 안결의 이름을 합쳐 '소나무 산의 바람결'이라는 의미로 이름을 작명했다. ‘롤 모델은 없습니다.
여서정(2002-) 체조 선수. 2018년 아시안 게임 여자 도마에서 금메달, 2020년 하계 올림픽 여자 도마에서 동메달을 기록하였다. 여서정의 동메달은 대한민국의 선수가 올림픽 여자 기계 체조 종목에서 처음으로 획득한 메달이다./ 1996년 하계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체조 선수인 여홍철의 차녀이다. 2020년 하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하며, 대한민국 최초로 아빠와 딸이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한 '부녀(父女) 메달리스트'가 되었다.
- 도마(跳馬)는 체조 기구 중 하나. 로마에서 말타기훈련에 목마 사용에서 왔다고 한다. 도마에 오르고 착지까지의 몸놀림인데 15초라고 하던가? 그 과정에 여러 기술(테크닉)이 있다. 이를 들뢰즈는 스타일이라 할까.
* Vernunft 1. 이성, 2. [철학] 이성. <- 어원: Vernehmen
칸트의 순수 이유 비판이 맞을까? 순수 이성 비판이 맞을까?
Vernehmen 1.타동사 지각{인지}하다. 2. 타동사 «아어>듣다, 청취하다; 들어서 알다, 소문으로 듣다. 이 페르눈프트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다.
왜 이 단어가 이성으로 번역되었을까? 칸트의 순수 이유 비판이 로고스 중심의 비판이라기보다 로고스 중심을 도덕론에까지 확장하고 또는 예술론에 적용하려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에 비해 누스(Nous)의 다양체로부터 사유는 권력과 권위에 눌려 침잠해 있었다. 지식은 권력과 권위에 아부하거나 굴종할 때 지위를 얻는다. 그런데 저항할 경우에는 배제되고 소외된다. 로고스 중심에 대한 비판은 프랑크푸르트가 조금하다가 미국가서 로고스에 포획되었다. 프랑스에서 사르트르에서 솟아나려는 기미가 보였으나 구체적으로 등장은 푸꼬이고, 푸꼬와 달리 처음부터 누스에서 출발하는 철학이 가능함을 제시하고자 한 것은 들뢰즈이고, 그리고 그가 가타리를 만나 새로운 갈래들을 창안하고 각 줄기를 확장하였다고 할 수 있다. (54SLE)
(lu 54NKCC) (12:11, 54SLF)
제빵장이의 변형 (La transformation du boulanger)
첫댓글 (1544) Du latin intercessor.
1.m.(óris) 보증인, 담보자. 2.m.(óris) 집행자. 3.m.(óris) 이의 신청자. 4.m.남성 (óris) 반대자, 방해자, 거부자. 5.m.(óris) 중재자, 조정자, 알선자; 전구자(轉求者).
intercesseur: Celui qui intercède. [용어를 사용한 문장의 출전]
(André Malraux, La Condition humaine, 1946, réédition Folio Plus Classiques, 2019, page 280)
(Patrick Modiano, Livret de famille, Gallimard, collection Folio, 1977, page 35)
(Annie Ernaux, Mémoire de fille, Gallimard, 2016, page 149)
(들뢰즈, 중재인들(Les intercesseurs, 1985), in Pourparlers 1972-1990, 1990, pp. 165-1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