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집 산소를 70년간 돌본 평해(平海)의 인심(人心)!
1860년 고조부이신 19세 난석 정수현공께서 평해군수를 하시고 그후 고향 예산에서 이 곳으로 이주하셨다. 이후 1863년 8월 정평부사를 병이 나 사임하신 후 부친 수사공과 선비 여흥민씨의 묘소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는데, 1877년에 졸서하신 이후에 시점은 모르겠으나 증조부 정제민(정제일)공께서 다시 고향 충청도 예산으로 돌아오시게 되었다. 이에 따라, 수사공, 난석공, 선비 여흥민씨 묘소가 타향에 홀로 남게 되었다.
1928년에 아버지(22세 휘 상설)가 태어나신 해! 증조 할아버지(20세 휘 제민)께서 아버지(19세 정수현)와 첫째 어머니(여흥민씨) 산소의 금화벌초를 마을에 부탁하시고 무려 70년간 후손의 발길이 끊어졌다. 아버지께서 꿈에도 나타나는 선대에 대한 불효에 1990년 별세 시에 아우(고 정상진)에게 '내 대신 네가 반드시 산소를 찾아라!' 유언을 남기셨다.
가끔 나의 꿈속에도 마을 뒤 나즈막한 야산에 참나무에 둘러싸인 산소가 나타나곤 했다.
삼촌이 친구 분과 함께 수소문하여 찾아간 해가 1998년 2월 말이다. 평해 면사무소에 찾아가 족보에 나오는 지명을 묻고, 마을의 원로도 찾아 알아보았다. 2월 27일 금요일, 산소를 찾았다는 흥분된 목소리의 전화를 받고 토요일 아침, 정신없이 차를 달려 포항에서 다시 북행하여 평해로 향했다. 경북 울진군 온정면 조금리 산골 마을의 지관(地官)을 하시던 박씨 할아버지 댁이다.
지관 분이 말씀하시기를, 이 지역의 산소자리는 대부분 아는데 '정구관댁(鄭舊官宅) 산소' 라고 부르는 산소가 있다는 것이다. 깊고 깊은 국유림 칠보산(七寶山) 기슭의 여흥민씨 할머니 산소다. 1시간 넘게 임도(林道)를 따라 올라가 보니 무덤은 모두 무너져 평분이 되고 소나무가 우거져 빽빽하므로 다음 날 기계톱으로 베어야 한다고 한다. 날이 어두워지므로 지관댁에서 자고 이튿날 지관 어른 아드님께 벌목을 부탁하였다. 다음 날 오후 늦게 방문하였을 때는 정리가 끝나 있었다.
일요일, 평해 난석공 산소와 후포의 마룡산(당시에 마안산) 수사공 묘소를 방문하였다. 척박한 산길을 한참 올라 수사공 산소의 묘비를 보는 순간 묘표첩에서 보던 너무나 익숙한 묘비의 글씨에 감격의 눈물이 돌았다. 마을 황이장님으로부터 묘소에 대한 유래를 들었다. 새마을운동을 할 때, 마을 들어오는 길을 넓히기 위해 바위를 깨뜨렸는데 예전에 이 쉼 바위를 '장군바위'라고 불렀다면서 무척 아쉽다고 했다. 산소는 250미터가 넘는 높은 곳에 있는데 '말의 눈(馬眼)' 또는 '말의 안장(馬案)‘ 자리라고 한다. 이 마안에서 바라볼 때 동해(東海)가 부채 살처럼 펼쳐져 있다. 이 곳에 영림서의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산림청 직원이 산소의 소나무를 베고 풀도 깎고 학생들은 묘비를 닦아 탁본도 떠갔다고 한다. 일제시대 산직을 하신 어른이 황이장님의 조부가 되신다고 하셨다. 금년 가을 벌초 갔을 때, 이제 집사람도 나도 나이 들고 몸이 아파 후포의 아들 집에 가 있을테니 아들까지 4대째 소중한 인연인데 다음에는 아들에게 연락을 이어가라며 전화번호를 적어 주셨다.
그리고 평해 학곡리의 난석공 산소! 가파른 마을 뒷산의 정상부에 한 치의 흩어짐도 없이 매일 관리해온 산소처럼 건재하고 평해의 넓은 벌판을 바라보는 늠늠한 기상에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수가! 마을 원로이신 손씨 집안 댁을 방문하여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 곳 마을에서는 매년 벌초는 물론이고 1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드렸다는 것이다. 후손이 70년을 찾아오지 않는 산소를 누가 돌보아준다는 말인가? 책망을 받아야 하건만 오히려 이렇게 찾아와서 고맙다고 하셨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아니면 난석공께서 이 마을 분들에게 크게 베풀음이 있었을까? 이 마을 선조 중 제문을 쓰신 제자, 손석규라는 분도 계셨을 것이다. 마을 분들은 '이 정도 산소면 후손이 없을 수 없다.' 라며 기다렸다고 한다.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다.
후일 집안 문서를 정리하다가 이 묘소에 대한 계약서 두 통을 찾게 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928年 4月 묘소관리계약서(墓所管理契約書)
- 정수현공 묘소(鄭秀鉉公 墓所)
40.2cm*24.2cm

戊辰四月二日
本宅先山在於江原道蔚珍郡平海面元館谷里後麓巽坐之原而自靑陽平海至相距稍遠每年省拘有所不能之亟故協議山下門中給付拾圓(円)金十四取利以爲省拘之資門中代表二人名章授來爲永世不諼事
江原道蔚珍郡平海面元館谷里 里代表 孫尙建 仝 仝 仝 仝 仝 仝 孫永煥
忠南靑陽郡斜陽面白琴里 鄭濟一 殿
무진(1928년) 4월 2일
본 댁 선산이 강원도 울진군 평해면 원관곡리의 뒷산 손좌지원인 바, 청양에서 평해 까지 거리가 너무 멀어 매년 성묘하기가 불가능하므로 산 아래의 문중과 협의하여 금 십환(원)을 급부하고 14원의 이식자금으로 받아 성묘자금으로 사용하기로 문중대표 2인의 인장을 날인하고 영세 잊지 않기로 한다.
강원도 울진군 평해면 관곡리 대표 손상건 (인), 손영환 (인)
충남 청양군 사양면 백금리 정제일 전
2. 1928年 9月 묘소관리계약서(墓所管理契約書)
- 정수현공 배위 숙부인 여흥민씨묘(鄭秀鉉公 配位 淑夫人 麗興閔氏 墓)
27cm*27cm

契約書
一. 金六圜也
右 金額에 對하야 左記先塋山所가 在於 蔚珍郡 溫井面 操琴里 殘坮項(족보에는 將坮項 殘坮項 : 장대가 있는 고개)인 바 禁火伐草와 脯果酒物을 一年 一次로 尊獻而 更無異論之境하기로 玆에 御契約함
昭和三年(1928년) 九月 三十日
契約主
江原道 蔚珍郡 溫井面 操琴里 六四五番地 金和永
忠淸南道 靑陽郡 斜陽面 白琴里 番地 鄭濟一氏 前
계약서
일(一). 금육환(원)야
우 금액에 대하여 울진군 온정면 조금리 잔대항(족보에는 장대항 將坮項 : 장대가 있는 고개)에 소재한 선영산소의 금화벌초(산불감시와 벌초)와 더불어, 1년에 1차로 포과주물(술, 포, 과일, 봉물)을 올려 존헌함에 있어 아무런 이의가 없기에 계약합니다.
소화3년(1928년) 9월 30일
계약주
강원도 울진군 온정면 조금리 육사오번지 김화영(金和永)
충청남도 청양군 사양면 백금리 번지 정제일(鄭濟一)씨 전
< 1998년 3월 1일, 수사공 산소를 찾고, 좌 정철중, 우 정상진 >
- 과거 벌목 시 묘소의 수호목(守護木)으로 장송 몇 그루를 남겨 놓았다.



< 1998년 3월 1일, 정평부사 정수현공 산소 >
- 평해 뜰을 바라보고 있다.

< 1998년 2월 28일, 정수현공 배 여흥민씨 산소 >
- 벌목전후


< 2016년 구주령을 넘으며 : 백암온천에서 경북 영양으로 넘어오는 고개 >
- 1004미터의 백암산 줄기를 끼고 도는 백여구비 오름길에 구름도 쉬어 넘는다.


< 구주령에서 조망하는 금장산(845미터) : 벌초를 마치고 귀경 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