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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입무분별법문경(佛說入無分別法門經)
시호(施護) 한역
최윤옥 번역
[목차]
불설입무분별법문경(佛說入無分別法門經)
대송신역삼장성교서(大宋新譯三藏聖教序)
제계작성교서(御製新繼聖教序)
불설입무분별법문경(佛說入無分別法門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백천이나 되는 수없이 많은 대중들과 함께 계셨다. 이 모든 대중들이 부처님을 공경하며 에워싼 채 부처님의 설법을 들었다.
그 연설하신 말씀은 대승의 분별없는 법[無分別法]으로 이들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때 세존께서 모여 있는 모든 보살들을 두루 돌아보시자, 그 즉시 모인 대중 속에서 무분별광(無分別光)이라는 한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한 채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분별없는 법에 들어가는 방법[門]을 말씀해 주셔서 모든 보살들이 이 법을 듣고 나면 이치대로 배우고 닦도록 하여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들아, 너희들은 잘 들어라. 내가 분별없는 법에 들어가는 방법을 말해 주겠다.”
이때 무분별광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거룩하신 세존이시여, 기꺼이 듣겠습니다.”
이때 모든 보살들은 가르침을 받아들여 말씀을 들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일 모든 보살이 거룩하고 뛰어난 분별없는 법[增上無分別法]을 듣고 분별없는 마음[無分別心]에 머문다면 곧 모든 분별상(分別相)을 여의게 될 것이다.
지금 ‘무분별(無分別)’을 말함에 있어 먼저 처음 자성(自性)에 있는 ‘분별상(分別相)’부터 분명히 알아야 한다.
분별상이란 취하고 버리는 두 가지 법을 말하는데, 이 취하고 버리는 것이 곧 자성의 분별상이다.
이로 인해 곧 번뇌의 차별된 모습[有漏事相]이 일어나며, 번뇌의 모습으로 인하여 5취온(取蘊)이 있게 된다.
5취온이란 색취온(色取蘊)ㆍ수취온(受取蘊)ㆍ상취온(想取蘊)ㆍ행취온(行取蘊)ㆍ식취온(識取蘊)을 말한다.
선남자야. 어떻게 해야 자성의 분별상을 여의게 되는가?
이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과 다른 작의(作意)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하면 곧 자성의 분별상을 여의게 된다.
만일 자성과 다르게 상(相)을 취한다면 이는 곧 행(行)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걸림없이 상응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보시(布施)에는 색(色)도 없고 분별상도 없으며, 지계(持戒)ㆍ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에도 색이 없고 분별상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성(自性)에는 색이 없고, 공용(功用)에도 색이 없으며, 진실(眞實)에도 색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다른 작의(作意)를 일으켜 분별상을 여의려고 한다면 곧 뒤에 거기에서 벗어난 ‘색이 없는 무분별상(無分別相)’이 있게 된다.
이와 같으면 곧 행(行)하는 것이 있게 되어 걸림없이 상응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공(空)에는 색(色)도 없고 분별상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진여(眞如)ㆍ실제(實際)ㆍ승의제(勝義諦)ㆍ법계(法界)에도 색이 없고 분별상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자성(自性)에는 색이 없고, 공용(功用)에도 색이 없으며, 또한 진실(眞實)에도 색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색이 없는 무분별상을 자성과 다르게 관찰하지 말아야 하며, 작의를 일으켜 여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달리 작의를 일으켜 여의려고 한다면 곧 색이 없는 무분별상에 대해서 뒤에 얻어야 할 것이 있게 된다.
이와 같으면 행하는 것이 있게 되어 현재 일어나는 경계에 대해 걸림없이 상응할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초지(初地)에서 얻은 법은 색(色)이 없는 무분별상이고,
나아가 10지(地)에서 얻는 법 역시 색이 없는 무분별상이며,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는 것도 색이 없는 무분별상이고,
기별(記別)을 받는 것도 색이 없는 무분별상이며,
엄정(巖淨)한 불국토에서 유정을 성숙시키게 되는 것도 색이 없는 무분별상이며,
나아가 일체상지(一切相智)를 얻는 것 역시 색이 없는 무분별상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말하는 까닭은 이른바 자성에는 색이 없고, 공용에도 색이 없으며, 진실에도 색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보살이 얻은 이런 모든 법에 대해서 얻은 분별상(分別相)과 달리 다른 작의를 일으킨다면 곧 모든 무분별상(無分別相)에 대해서 다른 작의를 일으킬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면 곧 무분별의 이치[無分別理]와 상응하지 못할 것이며, 그는 무분별의 경계[無分別界]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보살이 삼마지(三摩地)에 머물러 마음이 무분별의 경계에 들어갔으나 들어간 것에 대해서 얻은 것이 없다는 생각을 일으킨다면, 그는 바르게 상응한 것이다.
이것은 바르게 행하는 것이며, 이것은 바르게 수행하는 것이며, 이것은 바르게 일을 실행하는 것이며, 이것은 바른 작의로 행을 짓지 않는 경지[無作行]에 머물러 발오(發悟)함이 없는 것이니,
이를 ‘진실로 무분별의 경계에 들어가 행하는 것이 청정하다’고 한다.
선남자야, 무분별의 경계라고 말했는데, 어떤 뜻으로 무분별의 경계라고 하는가?
이른바 모든 색에 대해 모든 분별을 초월하고, 모든 감관[根]에 대해 모든 분별을 초월한다.
모든 분별의 경계를 초월하고, 모든 표시[表了]와 모든 번뇌의 장애와 수번뇌(隨煩惱)의 장애를 초월하여 받아들여 간직할 것이 없다. 따라서 무분별의 경계라고 부른다.
이 무분별의 경계 속에는 색(色)도 없고, 바라봄[見]도 없고, 머묾[住]도 없고, 걸림[礙]도 없으며, 표시[表了]도 없고, 온갖 모습도 없다.
만일 보살이 이와 같이 분명히 안 뒤 이와 같이 무분별의 경계에 안주한다면, 곧 무분별의 지혜에 들어가 허공과 같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법에 대하여 보는 바가 없이 보므로 대낙행(大樂行)을 얻을 것이며,
큰마음을 증장시켜 큰 지혜를 얻을 것이다.
크게 무애(無碍)를 말하며 언제든 어떤 모습에게든 널리 모든 중생들에게 큰 이익을 지어 줄 것이며,
용맹한 힘을 증장시킬 것이며,
발오(發悟)함이 없는 불사(佛事)에서 대경안(大輕安)을 얻을 것이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곳에 커다란 돌산이 있는데 그 산 밑에는 큰 보배 창고가 있어 온갖 보배가 가득했다. 이를테면 은과 금과 갖가지 기이한 보배들이 있고, 또 큰 광명을 내는 마니보(摩尼寶)가 있었다.
이때 보배를 찾는 어떤 사람이 이 산에 와서 진보(珍寶)를 찾으려 하였다. 그 곳엔 보배가 숨겨진 곳을 먼저 알고 있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는 보배를 찾으러 온 사람을 보고 곧 말하였다.
‘보배를 찾는 사람이여, 마땅히 알아라. 이곳 큰 돌산 밑에는 큰 보배 창고가 있어 온갖 보배가 가득하고, 또 큰 마니보가 있어 광명을 내고 있다.’
이때 보배를 찾으러 온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즉시 온 힘을 다하고 작의(作意)를 굳건히 하면서,
‘이 산을 뚫어 대마니보를 가지리라’고 하였다.
드디어 보배 창고를 열고는 마침내 빛을 발하는 은과 빛을 발하지 않는 돌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것을 보고도 ‘큰 보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때 보배가 있는 곳을 먼저 알고 있던 사람 역시 앞사람처럼,
‘이 산을 뚫어 그 보배를 가지리라’ 하고는,
보배 창고를 열어 마침내 빛을 발하는 금과 빛을 발하지 않는 돌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사람 역시 그것을 큰 보배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때 보배를 알고 있던 사람이 마침내 말하였다.
‘보배를 찾는 사람이여, 온 힘을 다하고 작의(作意)를 굳건히 하면서 큰 보배를 찾아서는 안 된다.
만약 작의를 일으키지 않는다면 저 무지하게 큰 보배를 보게 될 것이다.
그 작의 때문에 보배를 얻지 못하는 것이다.
저 큰 보배를 얻는 사람은 곧 큰 부(富)를 얻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며, 자신과 남 모두를 이롭게 할 것이며, 두루 보시하여 모든 것이 원만하게 될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이러한 일들을 비유로 말하였으니, 만일 보살이 이 이치를 안다면 이 이치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음을 곧 보게 될 것이다.
하나의 커다란 돌산이란 곧 번뇌의 일법이처(一法二處)에서 짓게 되는 행(行)을 말하고,
산 밑에 있는 보배 창고란 곧 무분별의 경계를 말하며,
보배를 찾던 그 사람은 곧 보살을 말하고,
보배가 있는 곳을 알고 있던 그 사람은 곧 여래를 말하는 것이다.
돌의 자성(自性)이란 곧 분별하는 자성이 있다는 것이고,
캐내어 보배를 갖는다는 것은 곧 작의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돌 아래에 빛나는 은(銀)이 있다는 것은 자성(自性)의 분별(分別)을 말하는 것이고,
돌 아래에 빛나는 금이 있다는 것은 공(空) 등의 분별상(分別相)을 말하는 것이다.
돌 아래에 온갖 빛나는 보배가 있다는 것은 얻은 것이 있는 분별상을 말하고,
큰 보배를 찾으려고 생각하는 것은 곧 기꺼이 무분별의 경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선남자야, 이 이치가 어떠하냐?
만일 보살이 말한 것처럼 여실하게 볼 수 있다면 곧 무분별의 경계에 들어갈 것이다.
또 선남자야, 모든 보살은 허공계와 같은 무분별의 경계에 머물러야 한다.
왜냐하면 색(色)의 자성이건 분별(分別)의 자성이건 이와 같이 볼 때에는 그 상(相)이 현전(現前)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 자신에게 색(色)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분별상(分別相)을 행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에게 색이 있다고 생각해도 이는 분별상을 행하는 것이다.
만일 색이 생긴다거나 없어진다거나 더러움에 물든다거나 깨끗해진다고 생각한다면, 이것 역시 분별상을 행하는 것이다.
만일 색(色)에 대해서 자성(自性)이나 인(因)이나 과(果)나 업(業)이나 행(行)이 있다고 취착하거나 없다고 취착한다면, 이는 색행(色行)을 행하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이 행한다면 이는 분별상을 행하는 것이다.
만일 색에서 표시를 본다면 이는 분별상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색법(色法)은 상대하여 장애하건, 표시가 있건, 표시가 없건 어떤 곳에서도 끝내 얻을 만한 조그마한 법도 없다.
곧 이 색법에는 어떤 표시도 없고 볼 만한 어떤 성품도 없으며, 이 색법과 다른 모든 것에도 표시가 없고 볼 만한 어떤 성품도 없다.
저 색의 걸림[對礙]과 표시[表了]에는 모두 볼 만한 성품이 없으며, 표시가 있더라도 같은 성품이라 볼 수도 없고 다른 성품이라고 볼 수도 없다.
곧 그 표시가 나타나더라도 성품은 없는 것이니, 이것은 성품이 없고 또 성품이 없는 것마저도 아니다.
만일 이와 같이 본다면 곧 평등하게 관찰하는 것이며, 이와 같이 관찰할 때 일체의 분별에서 어떤 분별도 없게 된다.
이것을 무분별의 경계라 한다.
모든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하고, 이러한 경계에 들어가야 한다.
이 무분별의 경계에 들어가면, 분별이 있는 것에 대해서나 분별이 없는 것에 대해서나 모두 분별이 없게 된다.
이와 같이 평등하게 관찰하면, 이를 진실로 무분별의 경계에 들어간 것이라 하고, 이를 보살이 무분별의 경계에 안주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수ㆍ상ㆍ행ㆍ식과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의 모든 바라밀다(波羅蜜多)와 공(空)ㆍ진여(眞如)ㆍ실제(實際)ㆍ승의제(勝義諦)ㆍ법계(法界)ㆍ10지(地)에서 증득한 법과 나아가 일체상지(一切相智)와 출세간행(出世間行)에 이르기까지도 모두 이와 같다.
만일 수ㆍ상ㆍ행ㆍ식, 나아가 일체상지에 자성(自性)이나 인(因)이나 과(果)나 업(業)이나 행(行)이 있다고 취착하거나 없다고 취착한다면 곧 일체상지 등이 이에 장애가 되리라.
만일 이와 같이 행한다면 이는 분별상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저 일체상지 등에는 표시할 만한 성품이 없다.
만일 표시할 만한 것이 있다면 곧 일체상지 등을 행하는 것이고, 이는 분별상(分別相)을 행하는 것이다.
저 일체상지 등에 대해 그 표시 중에 행할 만한 상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분별상을 행하는 것이다. 행할 만한 상이 없다고 믿으면서 또한 일체상지 등을 행해도 이것 역시 분별상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 표시라는 법[表了法]은 같은 성품이라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른 성품이라고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표시라는 법은 성품이 없으며, 또한 성품이 없는 것도 아니다.
만일 이와 같이 일체상지 등에 대해서 표시가 있건 표시가 없건 모두 분별이 없다면 곧 이것이 무분별이며, 상(相)을 취하지 않는 이것이 바로 무분별의 경계이다.
모든 보살은 응당 이와 같이 관찰하고 이와 같이 들어가야 한다.
이와 같이 들어가는 것이 바로 진실로 무분별의 경계에 들어가는 것이며, 이것을 보살이 무분별의 경계에 안주하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이때 세존께서 다시 게송[伽陀]으로 말씀하셨다.
분별없는 마음에 안주한다면
그것에서 모든 부처님의 정법 생기니
모든 분별 다 멀리 여의면
행하는 것 모두 분별없게 되리라.
이 법은 적정하고 더러움 없으며 뛰어나니
명칭(名稱)과 공덕이 두루 모인다.
분별없는 법이 최상의 즐거움이니
보살이 이를 얻으면 보리를 이루리라.
대송신역삼장성교서(大宋新譯三藏聖教序)
태종신공성덕문무황제(太宗神功聖德文武皇帝) 지음
위대하구나,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이여. 헤매는 중생들을 교화해 인도하시고, 으뜸가는 성품을 널리 드날리셨도다.
넓고 크고 성대한 언변이여, 뛰어나고 훌륭한 자도 그 뜻을 궁구하지 못하는구나.
정밀하고 은미하고 아름다운 말씀이여, 용렬하고 우둔한 자가 어찌 그 근원을 헤아릴 수 있으랴?
뜻과 이치가 그윽하고 현묘한 진공(眞空)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며, 만상(萬象)을 포괄하는 비유는 끝이 없네.
법 그물[法網]의 벼릿줄을 모아 끝이 없는 바른 가르침을 펴셨고, 사생(四生)을 고해에서 건지고자 삼장(三藏)의 비밀스러운 말씀을 풀어주셨다.
하늘과 땅이 변화하여 음과 양을 이루고, 해와 달이 차고 기울며 추위와 더위를 이뤘으니, 크게는 선과 악을 말씀하셨고, 세밀하게는 항하의 모래알에 빗대야 할 정도네.
다 서술할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의 온갖 일들을 마치 상법(像法)을 엿보듯이 하고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이 하였다.
이는 육정(六情)을 벗어나 길이 존재하고 천겁이 지나도록 오래갈 만한 것이며, 마치 수미산이 겨자씨에 담기 듯 여래께서 끝없는 세계에서 걸림이 없으신 것이다.
달마(達磨)께서 서쪽에서 오시자 법이 동토에 전해졌고, 오묘한 이치를 선양하시자 대중이 돌아갈 길을 순순히 따랐으니, 피안(彼岸)은 보리요 애욕의 강은 생멸이라, 오탁의 악취(惡趣)에서 보살행을 실천하고, 삼업(三業)의 길에서 빠진 자들을 건지셨다.
세상에 드리운 경은 궁구하기 어렵지만 도는 사사로움이 없어 영원히 태평하도다.
설산(雪山)의 패엽(貝葉)이 눈부신 은대(銀臺)와 같고, 세월의 연라(煙蘿)가 저 멀리 향계(香界)를 일으켰지만 높고 우뚝하여 측량하는 자가 드물고, 멀고 아득하여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
이런 까닭에 도(道)를 깨달은 십성(十聖)과 덕(德)을 갖춘 삼현(三賢)께서 지극한 도를 건원(乾元)에서 일으키고 온갖 오묘함을 태역(太易)에서 낳아 무성한 생명체들을 총괄해 어둠을 뚫고 한 가닥 빛을 비추었으며, 저 시시비비를 단절하고 이 몽매함을 깨우쳤던 것이다.
서역의 법사 천식재(天息災) 등은 항상 사인(四忍)을 지니며 삼승(三乘)을 일찌감치 깨달은 분들이니, 불경의 참된 말씀을 번역하여 인간과 천상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이었다.
이는 꽃망울이 거듭 터진 것이요, 국운이 창성할 때를 만난 것이니, 문장(文章)에서 오성(五聲)을 윤택하게 하였고, 풍율(風律)에서 사시(四始)를 드러냈다.
당당한 행동거지에 온화하고 아름답도다. 광대한 세월 어둠에 빠졌던 세계가 다시 밝아 현묘한 문이 환하게 드러났으며, 궤범이자 두루한 광명인 오묘한 법이 청정한 세계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유정을 이롭게 하여 함께 깨달음의 언덕에 오르고, 장애를 만드는 일 없이 병들고 지친 자들을 모두 구제하였으며, 드러내지 않고 자비를 행하며 만물 밖으로 광대하게 노닐고, 부드러움으로 탐학한 자들을 조복해 어리석음을 씻고 깨우쳐 주었다.
소승의 성문(聲聞)을 연설하여 그 위의에 합하고 대승의 정각(正覺)을 논하여 그 성품을 정립하자, 모든 생명체들이 깨달아 복을 받았고, 삼장의 교법에서 결락된 것들이 다시 흥성하였다.
허깨비에 홀려 길을 잃은 것이니, 화택(火宅)은 심오한 비유로다. 부처님께서 비록 이런 가르침을 시설하셨지만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이에 “선념(善念)이 생기면 한량없는 복이 남몰래 찾아오고, 악업(惡業)이 일어나면 인연 따라 모두 타락한다”는 말씀으로 사부대중을 길들이고 시방세계에서 보살행을 쌓았다.
금륜왕[金輪]에게 꽃비를 쏟아 붓고 대궐에서 항하 모래알처럼 많은 세계를 보호하였으니, 유정천(有頂天)에 부는 바람도 파괴하지 못할 것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 홍수도 휩쓸지 못하리라.
맑고 고요해 담담한 것이 원만하고 밝으며 청정한 지혜요, 성품이 공하여 물듦이 없는 것이 망상으로부터 해탈하는 인연이니, 이로써 마음의 밭에서 번뇌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이로써 우주에서 청량을 얻을 수 있으리라.
짐은 부끄럽게도 박학하지도 못하고 석전(釋典)에 능통하지도 못하니, 어찌 감히 서문을 써서 후인에게 보일 수 있는 자이겠는가?
반딧불이나 횃불과 같아 찬란한 태양과 견주기에 턱없이 부족하니, 작은 소라로 바다를 측량하려다 그 깊은 연원을 끝내 밝히지 못하는 자일 따름이로다!
어제계작성교서(御製新繼聖教序)
높고 밝은 것이 처음으로 나뉘자 삼진(三辰)이 비로소 차례로 나타났고, 두텁게 실어주는 것이 비로소 안정되자, 만물이 이로써 실마리를 일으켰으니, 맑음과 탁함의 본체가 이미 밝혀진 것이요, 선과 악의 근원이 여기서 드러난 것이다.
이런 다음에 문물(文物)로 그 가르침을 세우고 바른 법전[正典]으로 그 세속을 교화하는 것이니, 이익의 공은 모두 이치로 돌아간다.
이렇게 상법(像法)이 서쪽 나라에서 와 진제(眞諦)가 중국에 유포되었지만 천고의 세월을 관통하는 진실한 이치는 궁구할 방법이 없고, 구위(九圍))를 포괄하는 현묘한 문은 궁구할 수가 없다.
허망한 생각으로 말하자면 오온(五蘊)이 모두 공하고, 참된 모습을 나타내자면 터럭 하나에도 원만하니, 광대한 그 가르침을 어찌 기술할 수 있겠는가!
삼가 살피건대, 태종신공성덕문무황제께서는 법성이 두루 원만하시어 인자함을 널리 베푸셨다. 오랑캐들을 교화하시자 만방(萬邦)이 바큇살처럼 몰려들어 온 백성을 인수(仁壽)의 영역에 올려놓으셨고, 교법을 숭상하시자 사해(四海)가 구름처럼 뒤따라 창생에게 풍요로운 땅을 베푸셨다.
존귀한 경전이 방대함을 보시고는 방편을 시설해 물에 빠진 자들을 구제하셨고, 법계가 광활함을 알시고는 정진을 행하여 나태한 자들을 거두셨다.
이에 아늑한 절을 선택해 저 참된 문서들을 교열하고는 천축의 고승들에게 명령하여 패다라(貝多羅)의 부처님 말씀을 번역하게 하셨다.
상아 붓대가 휘날리며 황금의 글자를 완성하고, 구슬을 엮어 다시 낭함(琅函)에 안치하자 용궁(龍宮)의 성스러운 문장이 새롭게 탈바꿈하였으니, 취령(鷲嶺)의 필추(苾芻)들마저 우러러 감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삼승(三乘)이 모두 하나로 꿰뚫어지고 사제(四諦)가 함께 원만해졌으니, 고(苦)가 공하다는 참되고 바른 말씀을 완전히 밝히고, 정밀히 연구한 비밀스러운 뜻을 환히 드러냈다.
상(相)을 찬탄하는 상이 바로 진실한 상이고, 공(空)을 논하는 것도 공하여 모조리 공이라 하였으니, 화엄(華嚴)의 이치와 궤도를 같이하고, 금상(金像)의 가르침과 규구(規矩)가 동일하였다.
짐은 대업(大業)을 계승하여 삼가 황위에 임했기에 항상 조심하면서 만백성을 어루만지고 매일 긍긍하면서 선황의 훈계를 지켜왔다.
불교경전[釋典]에 대해서는 더구나 정밀하지도 상세하지도 못하니, 진실로 그 그윽하고 심오한 뜻을 어찌 탐색하고 측량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역경원(譯經院)의 서역 승려 법현(法賢)이 간절한 글을 올리고 그 뜻을 너무도 열심히 피력하였다.
“선황제께서는 참된 교화의 바람을 크게 펼치고 부처님의 뜻을 높이 전하셨으며, 전대의 왕들이 빠뜨린 전적을 흥성시키고 각로(覺路))의 무너진 기강을 다시 떨치셨다”고 하면서,
하늘이 이룬 공로를 높이 휘날리고 성황의 글을 널리 알리고 싶다며 나에게 서문을 지어 성인의 가르침을 계승해달라고 청하였다.
성고(聖考)께서 승하하시고 추호(追號)가 아직 잊히지도 않았는데 정사 밖에 마음을 둘 겨를 어디 있었겠는가?
담제(禫祭)를 마치고 이제야 생각이 은미하고 오묘한 곳에 미치게 된 것이다.
어려서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능통한 재주가 본래 부족한 걸 어쩌랴?
법해(法海)의 나루터와 언덕을 어찌 궁구하리오! 공문(空門)의 문턱으로 나아가질 못하니, 대략 대의나마 서술하여 이로써 사람들의 마음에 부응할 따름이다.
소발자국에 고인 빗물이라 태양을 씻는 파도에 빗대기에는 부족하니, 한척짜리 채찍이 어찌 드넓은 하늘의 그림자를 측량할 수 있으랴! 이렇게나마 짧은 서문을 지어 이로써 성인들의 공로를 기록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