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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종의황제(애신각라 재순) | |||
생몰 |
1856~1874 |
재위 |
1861~1874 |
연호 |
기상→동치 |
능호 |
혜릉 |
시호 |
계천개원수중거정보대정공성지성효신민공관의황제 | ||
아버지 |
문종현황제 |
어머니 |
효흠현황후 엽협나랍씨 |
효철의황후 아로특씨(아로특 보음) | |||
생몰 |
1854~1874 |
별칭 |
황후→가순황후 |
시호 |
효철가순숙신현명공단헌천창성의황후 | ||
아버지 |
한림원시강 숭기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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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철의황후는 동치제의 황후이며, 아로특씨로 몽고 정람기 사람이며 한림원시강 숭기(崇綺)의 딸이다. 함풍 4년 7월 1일에 태어났으며, 동치제보다 두 살이 많고, 동치 11년 9월 14일에 황후에 책립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황후를 선택할 때, 서태후는 봉수의 딸에게 마음이 있었고, 동태후는 숭기의 딸에게 마음이 있었다. 동치제는 동태후의 뜻에 따랐고, 아로특씨를 황후로 선택했다. 이 때문에 서태후는 그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동치제와 황후는 아주 금슬이 좋았기 때문에, 혜비에 봉해진 봉수의 딸은 별로 총애받지 못했다. 서태후는 아주 화를 내었고, 동치제와 황후의 사생활에까지 간섭하였다. 야사에 의하면 황후는 서태후의 핍박에 의해 죽었다고 한다. 동치제가 붕어한 후, 아로특 황후는 가순황후(嘉順皇后)에 봉해졌다. 아로특씨는 서거한 후에 혜릉에 묻혔다. 그녀의 시호는 효철가순숙신현명공단헌천창성의황후(孝哲嘉順淑愼賢明恭端憲天彰聖毅皇后)이다. 야사에 따르면, 동치제가 붕어했을 당시에, 황후 아로특씨는 이미 회임하고 있었는데, 서태후는 자신의 황태후 자리를 지키기 위해(아로특씨가 아들을 낳는다면 그녀는 황태후가 되기 때문에, 서태후 자신의 권력이 아로특씨에게 넘어가기 때문에), 그녀를 자진하게 했다고 한다.(그 때 그녀가 금을 삼키고 자진했다는 설이 있다. 그리하여 청 황실의 무덤이 도굴당할 때, 도굴꾼들이 그녀의 배를 가르고 금을 빼갔다고 한다) | ||
숙신황귀비 부찰씨(부찰 난헌) | |||
생몰 |
1859~1904 |
아버지 |
원외랑 봉수 |
별칭 |
혜비→혜황귀비→돈의황귀비→돈의영경황귀비 | ||
숙신황귀비 부찰씨는 만주 양황기 사람으로, 원외랑 봉수(鳳秀)의 딸이다. 함풍 9년 12월 1일 태어났으며, 동치 11년에 14세의 나이로 입궁했다. 부찰씨는 청초하고 아름다웠으며, 다정다감했다. 서태후는 부찰씨에게 관심이 있었으나, 동태후는 아로특씨를 생각하고 있었다. 두 황태후가 팽팽히 맞서자, 최후 결정은 동치제가 하게 되었다. 동치제는 서태후의 친아들이었지만, 서태후의 엄격함 때문인지 모자의 정이 깊지 않았다. 동태후는 자상하고 후덕했으며, 동치제를 자신의 아들처럼 돌보았기 때문에, 동치제는 동태후를 더 따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황후 선택에 동태후의 손을 들어주었고, 아로특씨가 황후가 되었다. 동치제의 마음 하나로, 부찰씨는 황후의 자리를 잃었다. 서태후는 분노했고, 그녀는 동치제와 황후의 생활을 간섭하며 부찰씨를 우대했다. 원래 4명의 후궁이 함께 입궁했는데, 서태후는 부찰씨를 바로 혜비(慧妃)로 봉했다. 그러나 다른 세 명의 중 두 명은 빈이 되고 한 명은 귀인이 되었다. 청나라 황궁의 관례에 따르면, 황비나 궁빈의 책봉례는 황후의 책봉례와 같은 날에 거행한다. 그러나 동치제의 대혼 때에는 혜비 만이 황후와 동시에 책례를 행하였고, 나머지 두 빈의 책봉례는 한 달 후에 거행되었다. 동치 13년 11월 15일, 혜비는 황귀비가 되었는데, 이는 두 계급을 승진한 것이었다(나머지 세 후궁은 각각 한 계급만 승진). 동치제가 서거한지 보름 후, 서태후는 부찰씨를 돈의황귀비(敦宜皇貴妃)에 봉했다. 광서 20년 정월, 서태후의 환갑 직전에, 그녀는 다시 돈의영경황귀비(敦宜榮慶皇貴妃)에 봉해졌다. 황귀비가 봉호를 4글자나 얻는 것은 청나라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로, 서태후가 부찰씨는 얼마나 편애했는지 알 수 있다. 광서 30년 2월 28일, 부찰씨는 45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시호는 숙신황귀비이다. 그녀는 광서 31년 9월 21일에 혜릉비원침의 첫번째로 장사지내졌다. 그녀는 동치제의 비빈 중 가장 일찍 서거했다. | |||
공숙황귀비 아로특씨(아로특 수순) | |||
생몰 |
1857~1921 |
아버지 |
대학사 새상아 |
별칭 |
순빈→순비→순귀비→황고순황귀비→장화황귀태비 | ||
비고 |
목종의황제의 황후 효철의황후의 고모 | ||
장화황귀비 아로특씨는 몽고 양람기 사람으로, 출신은 명문이나 부친 새상아(賽尙阿)의 시첩 소생으로, 서출로서 함풍 7년 8월 3일에 태어났다. 효철황후의 부친인 숭기는 새상아의 셋째 아들이자, 장화황귀비의 오빠였다. 장화황귀비는 효철황후의 고모였으나, 황후보다는 세 살이 적었다. 동치 11년 초에, 고모와 질녀는 나란히 입궁하였으나, 질녀는 황후가 되었고 고모는 순빈(珣嬪)에 봉해졌다. 13년 11월 15일에 순비(珣妃)로 진봉되었다. 광서 20년 정월에는 순귀비(珣貴妃)가 되었다. 광서제가 붕어한 지 4일 후에 선통제는 그녀를 황고순황귀비(皇考珣皇貴妃)에 봉했고, 거처를 효철황후가 생전 머물던 저수궁(儲秀宮)으로 옮겼다. 청나라 멸망 후, 1913년 2월 5일에 선통제는 그녀를 장화황귀비에 봉했다. 1921년 4월 14일에 병으로 서거했는데 향년 65세였고, 시호는 공숙황귀비(恭肅皇貴妃)이다. 같은 해 12월 7일에 혜릉비원침에 안장되었다. | |||
헌철황귀비 혁사리씨(혁사리 군유) | |||
생몰 |
1856~1932 |
아버지 |
지부 숭령 |
별칭 |
유빈→유비→유귀비→황고유황귀비→경의황귀태비 | ||
경의황귀비 혁사리씨는 만주 양람기 사람으로, 지부 숭령(崇齡)의 딸이며, 함풍 6년 6월 1일에 태어났다. 그녀는 투명한 피부와 옥같은 얼굴을 지녀, 말 그대로 화용월태였다. 그녀는 네 명의 황귀비 중 가장 아름다웠으며, 총명하고 행동이 민첩하였고 문장에도 뛰어났고, 금기서화(琴棋書畵, 거문고와 바둑, 글과 그림)에 모두 능하였다고 한다. 이에 비해서, 그녀는 입궁 후에는 겨우 유빈(瑜嬪)에 봉해졌고, 2년 후인 동치 13년 11월 15일에 유비(瑜妃)가 되었다. 광서 20년 정월에 유귀비(瑜貴妃)가 되었으며 34년 10월 25일에 광서제가 붕어한 4일 후에 선통제에 의해 유황귀비(瑜皇貴妃)가 되었다. 1913년 3월 12일에 선통제에 의해 경의황귀비에 봉해졌다. 1932년 2월 5일에 병으로 서거하니, 향년 77세였으며 시호를 헌철황귀비(獻哲皇貴妃)라고 하였다. | |||
영혜황귀비 서림각라씨 | |||
생몰 |
1856~1933 |
아버지 |
주사 나림 |
별칭 |
진귀인→진빈→진비→진황귀비→영예황태비 | ||
영혜황귀비 서림각라씨는 주사 나림(羅霖)의 딸로, 동치제와 동갑이다. 처음에 입궁하여 진귀인(瑨貴人)이 되었고, 후에 진빈(瑨嬪)에 봉해졌다. 광서 연간에 진비(瑨妃), 진황귀비(瑨皇貴妃)가 되었고, 선통제 즉위 후에는 영혜황귀비 또는 영혜황태비(榮惠皇太妃)로 존숭되어, 자금성의 4대태비 중 지위가 가장 낮았다. 그녀는 청나라 후비 중 기록이 상세하지 않는 이 중 하나로서, 현재에도 그녀의 사망연도(1931년에서 1935년 즈음으로 추측)와 정식 시호 등 고증이 모두 어렵다. 그녀와 경의황귀비는 혜릉비원침에 가장 최후에 묻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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