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로 건져올린 아스라한 사랑의 기억들
-영화<봄날은 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던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수절은 황혼 속에 흘러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 구름 흘러가는 신작로길에
새가 날며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노래 <봄날은 간다>에서
8번 마을 버스 정류장이 보이는 눈 쌓인 소로를 한 청년이 할머니를 쫓아가는 장면으로 영화 <봄날은 간다>는 시작된다. 할머니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수색驛이 그곳이다. 수색(水色), 참 좋은 이름이다. 수색이라는 지명은 물빛이 출렁이듯 애틋한 사람사는 이야기, 그 낭만이 가득 서려있는 곳 같은 느낌으로 내게로 다가온다. 그곳에 가면 꺼져가던 사랑도 다시 타오를 것만 같다. 이 아름다운 공간에서 영화가 시작되고 있다. 왜 할머니는 매일 수색역에 가는가. 그곳 역 대합실에서 할머니는 끝도 없이 누군가를 기다린다. 오래 전에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해주던 연인(남편)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나 죽고 없는 남편은 끝내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할머니는 또 기다린다. 무작정으로 애절한 그 기다림으로.
영화<봄날은 간다>는 두 가지의 이야기가 중심 축으로 그 내용이 전개된다. 하나는 앞서 말한 할머니의 사랑 이야기. 신혼 초 한 때 자신을 끝없이 사랑해주던 남편이 훗날 자신을 버리고 다른 여인의 품으로 떠나 가버린 가슴 아픈 할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그것이다. 영화 속에서 할머니는 자신을 뜨겁게 사랑해주던 청춘 시절의 남편만 애타게 찾고 그리워하며, 그 훗날 자신을 버리고 떠나간 남편은 일체 인정하지 않고 부정해버리는 사람이다. 그리고 다른 한 축은 음향 채집가인 성우(유지태 분)와 지역 방송국 아나운서 한은수(이영애 분)와의 사랑 이야기가 그것이다. 두 사람이 일 때문에 처음 만난 곳은 그럴싸한 시내 찻집도 방송국 스튜디오도 아닌 시외버스터미널이다. 돌아옴과 떠남의 이중적 의미를 갖는 버스정류장에서 이들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게 의미심장하다. 이 공간 설정에서 작가와 감독은 그들의 사랑의 끝을 미리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영화 속에는 '소리'가 가득 들어가 살고 있다. 영화 시작부분의 강원도 정선군 북면 어느 들판의 대밭 속에서의 파-아 파-아 거리는 대숲소리나 겨울 계곡물 흐르는 소리, 새벽 눈발에 울음우는 산사의 풍경 소리, 깊은 산골 노부부의 아라리 가락, 젊은 두 주인공의 흥얼거리는 노래 소리가 그것들이다. 그러고 보니 영화 제목도 옛날 애절하게 불려진 우리의 유행가 제목이다. 그것도 봄날은 '간다'라고 되어있다. 소리는 한 자리에 내려앉으면서도 떠나가 버리는, 사라지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영화 속에 가득 들어차 있는, 한 곳에 계속 머물지 않고 사라져버리는, 떠나버리는 소리들이 암시하는 바처럼 두 젊은 남녀의 사랑도 사라져버리고 만다. 마치 봄날이 가듯이.
두 남녀가 서로의 관계를 끝맺는 장면이 퍽 인상적이었다.
"우리 헤어지자"(은수-이영애)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상우-유지태)
이 짧은 대화에서 알 수 있듯, 자신을 찾아온 사랑을 소중히 여기며 가슴에 붙들고 사는 이는 상우다. 매일 같이 수색역에 나가 오지 않는, 올 수 없는 사랑을 기다리고 있는 할머니처럼. 자세히 보면 영화 <봄날은 간다>는 짝을 이루고 있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할머니와 손자의 애절한 사랑이 그렇다. 헤어지는 장면에서 상대에게 사랑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느냐고 묻는 손자 상우와 신혼 초의 사랑을 죽을 때까지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할머니 사랑이 한 쪽을 이룬다면, 사랑하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헤어지자고 단숨에 말해버리는 은수 역은 할머니 곁을 훌쩍 떠나버린 할아버지와 짝을 이룬다. 그리고 작품의 주 무대인 상우의 삶의 공간(수색, 서쪽 내륙)과 은수의 삶의 공간(강릉, 동쪽 바닷가)도 대응되는 짝을 이루고 있다. 그리고 영화 도입부의 사랑이 막 시작되는 대숲과 사랑이라는 미망의 감정에 벗어나 상우가 새롭게 자신의 길을 나서는 끝장면의 누런 보리가 마구 출렁대는 공간도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한정된 짧은 시간 속에서도 영화의 탄탄한 구성을 갖추어 가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필자는 상우 역의 유지태 연기가 돋보였다. 사랑에 물들어갈 때 일상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동작과 표정의 연기, 사랑을 잃어갈 때의 힘겨운 듯 애절한 연기는 참 인상적이었다. 그에 비해 은수 역의 이영애 연기는 적잖이 실망적이었다. 밋밋한 표정 연기와 살뜰하지 않은 대사가 거슬렸다. 그러나 두 번째 다시 영화를 보았을 때는 그 생각이 바뀌었다. 이 영화 속에서 이영애의 연기는 다른 어떤 그녀의 연기에 비해서 뒤지지 않는 훌륭한 연기였다. 극중에서 은수 역의 성격 그 자체가 밋밋하고 사랑의 감정에 지극히 매달리는 진진한 성격이 아닌 것이었다. 첫 사랑을 버리고 떠나간 할아버지처럼, 한 곳에 내려앉다 사라져버리는 소리들처럼. 그러면 이영애는 그런 성격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것이 된다.
영화의 종결부에 이르면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상우는 허우적대던 옛사랑에 벗어나 제 길을 힘겹게 그리고 당당히 간다. 다시 쉽게 다가서려는 옛사랑의 연인에게 손을 흔들며 자신의 세계로 돌아온다. 영화 마지막 장면이 내가 사는 고장 포항시 대보면 구만리 바닷가 둔덕의 보리밭 풍경과 비슷해 몹시 인상적이었다. 보리누름철 바닷바람에 일렁이는 황금빛 보리물결 장면을 통해 감독은 말하고 있다. "봄날은 간다"라고. 한 시절 우리의 애절한 사랑이 가고 있다고.
첨언하고 싶은 것은 영상의 아름다움과 그 적확함이다. 영화 도입부에서 보여준, 수 많은 바람이 살러와 일렁이는 대밭의 소리들과 종결부의 파도치는 듯한 황금빛 보리물결, 순식간에 지나갔지만 겨울 산사의 풍경(風磬)의 울음 우는 장면, 연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까지 담고 있는 듯한 푸르스름한 새벽바다 빛깔 이 모두 빼어난 영상 미학이었다. 그리고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빼어난 영상미가 장면 장면의 내용에 아주 들어맞게 제작되었다는 것이다. 자주 정신을 잃는 부모 때문에 가슴 저려하는 아버지의 모습과 사랑의 아픔에 힘겨워 하는 아들이 소주를 마시는 부엌의 식탁을 담아내고 있던 그 앵글이 보여준 영상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두 가지를 얻었다. 하나는 처음 영화를 보고나서 흘러간 옛 노래 <봄날은 간다>를 내 십팔번으로 갖게 된 것이고, 두 번째 영화를 보고 나서는 아래의 시 하나를 건져 올렸다. 많이 어설프기는 하지만.
봄날은 간다
-영화 풍으로
소리를 따다가 고운 사람
만났네 사랑을 얻었네
겨울 산사의 풍경 소리도
다 내 것이었네
사랑은 잠시 내게 머물다
가버린다, 소리들처럼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매달려도 보지만 소용이 없어
바람에 떠밀려 소리는
오고 다시 가는 것
봄날은 간다 그렇게
봄날이 간다
첫댓글 다시금 영화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