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 초대대통령, 이승만 3 부작|자유시간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초대대통령, 이승만?’ ·3 부작 |
| 초대대통령, 이승만 1 부 · 개화와 독립 |
| 초대대통령, 이승만 · 2 부 건국과 분단 |
| 초대대통령, 이승만 · 3 부 6.25 와 4.19 |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이승만편> 방송에 대한 KBS 입장 / 시청자 관심
KBS는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은 이승만과 박정희, 김대중, 정주영, 이병철 등 근현대사의 주요인물 조명을 기획한 프로그램이라고 설명하고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의 첫 번째 조명 대상을 이승만으로 결정한 것은 구국 계몽가이자 언론사 주필, 고종폐위 운동, 독재자를 혐오했지만 독재자의 길을 걸었던 점, 반일에 앞장섰지만 친일관료를 중용하는 등 그의 삶이 우리 근현대사의 축소판으로 조명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역사의 전환점에 서있었던 인물을 조명해보는 <대한만국을 움직인 사람들> ‘이승만 편’에 대해 시청자들의 관심이 고조 되고 있다. KBS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제작진은 9월 28일 10시부터 11시까지 한시간동안 제1 텔레비전을 통해 이승만 편 ‘제1부 개화와 독립’을 방송했다.
주요내용은 구한말의 유생였던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입학한 뒤 개화청년으로 주목을 받다가 고종폐위사건에 연루돼 한성감옥에 투옥된 과정과 밀사의 임무를 받고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독립보전을 청원한 과정이 소개됐다. 아울러 국제정치학 박사가 된 이승만이 33년간의 긴 망명생활을 시작하면서 하와이에서 독립을 둘러싼 방법을 놓고 한인사회에 분열을 야기했던 일과 상해 임시정부에서 위임통치 청원과 대통령 참칭논란 등으로 결국 대통령 탄핵을 받고 마침내 워싱턴 자택에서 해방을 맞이한 과정이 소개됐다.
제작진은 제 1부 방송을 통해 이승만이 루스벨트를 만날 때 전달한 나전칠기 선물을 처음으로 공개한 것을 비롯해 제2차 세계대전시 미국의 정보기관인 OSS 참여 사실 등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현지 취재를 통해 확인했다.
어제 이승만 편 제1부의 시청률과 점유율은 각각 5.5%와 9%를 기록했으며 (TNmS 기준), 시청자들도 이승만의 독립운동에 대해 역사적으로 소중한 자료 라는 평가와 부정 일변도에서 양면적인 조명의 필요성과 공과(功過)를 공평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내용의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KBS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제작진은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기여한 근현대사 주요 인물들의 발자취를 집중 조명해 그들의 삶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는게 프로그램 기획의도라고 밝히고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의 이승만 편 ‘제2부 건국과 분단’은 9월 29일 10시부터, ‘제3부 6.25와 4.19’는 9월 30일에 각각 방송된다. |
[시 론] · 번지수 틀린 ‘이승만 낙인’ · |
번지수 틀린 ‘이승만 낙인’
KBS가 3회에 걸쳐 방영한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이승만 편’ 시리즈는 국내외 전문가를 광범하게 인터뷰하고 풍부한 영상자료를 활용한 프로그램이었다. 지난달 30일자 마지막 회에서 시청자들에게 가장 생생하게 다가왔을 장면은 4·19 학생혁명이었을 것이다. 이승만의 정치 일생이 막을 내리는 역사적 현장을 경험한 사람도 많았기 때문이다. 1960년 그날 필자도 광화문으로 갔다가 중앙청 담장에 올라앉아 혁명의 현장을 지켜보았던 대학생 가운데 하나였다. 그로부터 반세기, 20대 청년이 70대 노년이 되는 동안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지고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도 많이 바뀌었다. 이승만은 역사에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 인물인가. 결론 먼저 말하면 그를 4·19학생혁명의 원인에 연관 지어 ‘독재자’라는 한마디로 비판하고 독립건국, 호국에 헌신했던 일생을 평가절하하거나 매도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한말 신문의 맹아기(萌芽期)에 기자로 활동하면서 정치 개혁과 개화운동의 선봉에 섰던 선각자(先覺者)였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었고, 공산주의 침략을 막아낸 거인(巨人)이었다. 그가 살았던 90년 일생은 개화, 독립, 국가수호를 위한 투쟁으로 집약된다. 그가 남긴 발자취가 워낙 크다 보니 공(功)과 허물이 교차해 논쟁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공(功)은 덮어버리고 과(過)를 확대해 독재자로 규정하는 태도는 옳지 않다. 이 땅에 민주주의가 정착하는 과정의 진통을 이해하지 못한 편협한 역사인식이라 할 수 있다. 같은 기간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어떠했으며 오늘의 남북한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김일성은 북한을 경직된 병영국가와 독재체제로 만들어 남한의 적화를 획책하고 있었다. 선동과 선전을 침략의 무기로 활용하는 호전적인 적대 세력에 대응해야 했던 이승만을 국력이 크게 신장된 오늘날의 잣대로 비판할 수는 없다.
필자도 이승만 정권의 언론탄압을 비판하는 글을 많이 썼다. 대구매일 테러 사건(1955)과 경향신문 폐간 사건(1959)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체계적인 정책을 수립해 언론을 통제했다기보다는 ‘반공’이라는 당시에 가장 시급하면서도 편리한 정책을 언론에 포괄적으로 적용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언론통제의 법적 · 제도적 장치는 제3 공화국 이후의 역대 정권이 상황에 따라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가장 최근에는 노무현 정부가 강행해 헌법 불합치 판정을 받은 언론 관련 법 제정과 이른바 지원정책 같은 기구가 그것이었다.
이승만 집권 후반기였던 1950년대 중반 이후에는 여당지(與黨紙)를 압도하는 야당지(野黨紙)가 있었다. 권력을 비판하는 언론과 강력한 야당이 존재하는 정치상황이었다. 학생혁명의 원동력은 언론과 야당이었다. 1950년대 중반 이후의 신문은 투표 부정을 폭로하고 부정선거를 고발해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치열하게 투쟁했다. 돌이켜 보면 이승만 집권 시기는 민주주의가 완벽하게 정착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독재국가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KBS의 3회분 시리즈는 고심 끝에 방영이 결정된 프로그램이었다. 상해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자 제헌국회의 초대 의장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었던 인물을 뒤늦게, 그것도 어렵사리 특집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는 것은 만시지탄은 있지만 나라의 기간방송 KBS의 올바른 선택이었다.
- 중앙일보 [시론] 정진석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2011.10.05 |
남산에 다시 선 건국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박사 동상 1956년 남산에 세워졌다가 1960년 4·19 혁명 당시 철거된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이 51년 만에 남산에 다시 세워졌다.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 제막식이 2011년 8월 25일 서울 장충동 한국자유총연맹 광장에서 열렸다. 높이 3m, 폭 1.5m 크기인 이 동상은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을 만든 홍익대 김영원 교수가 제작했으며, 자유총연맹 예산과 회원 성금으로 마련됐다. 왼쪽부터 박진 한나라당 의원, 박세환 재향군인회장, 이인수 유족대표, 이홍구 전 총리, 박희태 국회의장, 박창달 자유총연맹 총재, 최호중·안응모 전 총재, 이동호 전 내무부 장관. 이날 자유총연맹 정문 앞 인도에서는 사월혁명회·한국전쟁유족회 등 단체들이 “역사를 되돌리려 한다” 며 동상 제막식 반대 집회를 열었다. - 2011-08-26 |
이승만을 장단점을 모두 다룬 다큐이지만 左派들은 '美化 했다고' 왜곡 · 선동했다 |
1. 이승만박사의 독립항쟁 사실 자체가 지금 방송되는 것을 싫어한 좌익의 방송 방해!
역시 좌익은 진실을 두려워 한다. 그들의 거짓말은 진실 앞에선 항상 무력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좌익은 진실이 밝혀지는 것을 싫어한다. 이번에 좌익들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다큐프로그램 방송을 그토록 싫어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9월28일(수)~9월30일(금) 밤 10시에 3회 연속으로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 이라는 다큐프로를 KBS1에서 방영한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박사에 대한 다큐프로이다. 이 프로는 원래 지난 8월에 방송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좌익단체에서 '독재자 이승만 美化반대' 라는 슬로건을 걸고 KBS에 대해서 압력을 행사하였다. 결국 8월 방송은 하지 못했다.
28일 1회째 방송은 구한말 청년이승만시절부터 일제시대와 해방순간까지의 이승만 박사의 일생을 조명했다. 내용은 인간 이승만에 대해서 더하거나 빼는 것 없이 있는 그대로를 말했다. 잘한 점과 잘못한 점 모두 그 내용을 다큐형식으로 방송했다. 그런데도 좌익은 이 방송이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미화라고 왜곡했다. 그동안 좌익들은 이승만대통령은 친일파라고 떠들고 매도해왔다. 그런데 이번 방송에선 이승만 박사의 독립투쟁의 역사가 그대로 방송되었다. 좌익에겐 이승만박사의 독립투쟁사실이 국민들에게 노출되는 것 자체가 싫었을 것이다.
2. 결단력의 청년 이승만
구한말 청년 이승만은 고종폐위운동으로 투옥되었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反체제 인사였다. 이 사실 자체를 대부분의 학생들은 모른다. 우리나라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것은 과거제이며 이런 과거제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청년 이승만은 생각했다.
1894년 과거제가 폐지되자 청년 이승만은 그것은 영어와 서양문물을 배우는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십수 년동안 논어 대학 맹자 등 漢學에 매진하였던 청년이승만은 서양 新학문을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이것은 청년 이승만의 수많은 결단력의 시발점이었다.
상해임시정부의 수립과 그과정에서 애국지사들간의 알력과 이합집산에 대해서도 가감없이 방송했다. 나의 관심을 끈 것은 당시 애국지사들간의 알력이었다. 목적은 대한독립이지만 그 추진과정에서의 노선차이로 서로 반목하는 모습이다. 오늘날의 우파 애국단체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대일무장투쟁노선의 박용만, 인재양성론의 안창호, 외교노선의 이승만의 노선차이는 당시 독립운동단체들간의 암투로 발전되었다. 특히 해외 독립운동의 거점인 하와이에서의 박용만과 이승만의 헤게모니 장악과정은 지금까지 그 어떤 다큐에서도 다루지 않았던 내용이다.
3. 독립운동가들의 갈등
1913년 이승만은 구국활동을 하다가 함께 투옥된 적이 있는 박용만이 정착한 하와이로 건너갔다. 거기서 이승만은 한인기독학원과 한인기독교회를 운영하면서 <태평양>이라는 잡지를 발간했다. 잡지를 통해서 한국이 독립하려면 서양열강, 특히 미국의 지지를 얻어야 하는 외교노선을 주창하였다. 그 때문에 무장투쟁노선을 주장하던 박용만과 심한 갈등을 빚은 것이다. 대립은 이승만의 동지회와 안창호의 국민회 사이에서도 일어났으며, 두 사람의 갈등은 1925년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에서 이승만이 먼저 지내는 사태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박용만의 대일무장투쟁은 당시 일본의 군사력을 감알할때 현실불가능한 것이었다. 이런 점이 이승만박사와의 갈등요인이었다. 물론 러일전쟁부터 1차세계대전을 전후한 기간까지 미국과 일본은 동맹관계였다. 따라서 이승만박사의 미국 정부에 대한 독립외교도 한계점은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박사에겐 한가지 능력이 있었다. 바로 국제적 감각이었다. 이승만 박사는 우리가 미국으로부터 지지를 얻는 순간은 미국과 일본이 적대적 관계에 놓이는 시점임을 알았다. 그것이 바로 2차 대전의 태평양 전쟁이다.
4. JAPAN INSIDE OUT
이승만박사의 예지력이 증명된 책이 있다.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는 일본이 진주만 기습을 하기 전에 발간된 책이다. 이 책에서 이승만 박사는 일본군국주의의 정책은 필히 미국과 전쟁으로 귀결될 것임을 예측하였다. 이 책이 발간될 당시엔 미국내 반전주의자들에 의해 무시되기도 했지만 일본과의 전쟁은 이승만 박사의 명성을 높이는 결정적 계기도 되었다.
4. 일제 독립투쟁에 거의 모든 분야에 관계했던 이승만
만민공동회,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지 매일신문,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美 OSS와 광복군의 한반도 진공작전. 모두 일제 강점기 독립활동의 일부다. 이런 독립운동의 공통분모가 있다. 바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다. 이승만박사는 미OSS부국장인 굿펠로우대령과 협력하여 일본군국주의에 맞섰다.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학교에선 학생들에게 가르치지 않는다. 그것을 이번 KBS에선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 이승만'을 통해 방송하였다.
미 OSS요원으로서 대한민국 건국과 발전에 이바지 한 대표적 인물이다.
여기까지가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의 첫번째 방송이다.
- 고성혁(회원) / http://www.chogabj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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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대통령 · ‘우남 이승만’ (1876~1965) |
| 1948년 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 | |
|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선택해 나라의 기초를 닦았다. 이 두 가지는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으로 가장 인정받아야 할 부분이다. [중앙포토] 이승만 전대통령의 조촐한 생일. 사진(아래) | |
- 한국일보 논설위원 이준희 칼럼 / 8월 11일
광복절이면 늘 대북제안이나 사면이 관심인데 올해는 다른 이슈가 먼저 불붙었다. 이승만 초대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문제다. KBS 다큐멘터리 프로그램 논란이 계기가 됐다. 공영방송이 '대한민국을 움직인 사람들'의 첫 순서로 그를 선택한 데 대해선 시비할 게 없다. 더욱이 이 전 대통령이 "너무 저평가돼 있다. 객관적으로 판단해 재평가해야 한다"는 요지의 여론조사 결과도 나온 터다.
문제는 공과(功過)를 평가하는 시각일진대, 당장 진보좌파진영에서 격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지난 수십 년 그들의 현대사 재구축과정에서 거의 성공적으로 묻어버린 그를 새삼 공공평가의 장으로 다시 끄집어낸다는 것부터 마땅치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는 건국대통령이자 독재자
한 케이블방송도 재평가 토론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그런데 제목이 '건국대통령인가, 독재자인가'다. 상업적 의도는 이해하나, 이런 식으로 선택을 강요하는 건 가장 질 나쁜 방식이다.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총체적 선악 개념으로 단순화함으로써 열린 논의는 불가능해지고, 토론은 물러설 수 없는 승부가 된다. 어느 쪽이 이기든 진실의 왜곡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건국대통령이나 독재자 중 하나가 아니라, 건국대통령이자 독재자다. 늘 좌우의 경직된 시각을 질타하지만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보수진영 일반의 시각이 더 유연하다. 건국과정과 한국전쟁까지의 역할은 높이 평가하되, 집권 후반기 내치(內治)까지 옹호하려 들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실제로 노태우 전 대통령 회고록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은 1954년 가을부터 이미 심각한 정신적 이상징후를 보였다. 일부는 그가 4ㆍ19혁명 때 학생들 희생소식에 주저없이 하야를 결정했다는 점 등을 들어 주변 정상배들에 의해 눈이 가려졌다는 정상론을 펴지만 당치않다. 사실이 그렇더라도 그 또한 마땅히 그의 책임이다. 친일파 청산실패를 두고 신생국 인력풀의 한계를 들거나, 북한도 김일성 동생 김영주와 이승엽을 비롯해 정권 군부에 숱한 친일파를 기용했다는 점을 들어 문제를 희석시키려는 태도 역시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반면 진보진영에선 우리가 여전히 분단상태라는 점, 또 앞서 임시정부가 존재했다는 점 등을 들어 아예 건국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승만은 오직 탐욕과 권력욕으로 민중의 통일의지를 꺾은 분단의 원흉일 뿐이다. 잇따라 발굴되는 국제문서들에서 당시 소련이 먼저 분할정부 수립을 계획했고, 이에 따라 김일성일파가 일사천리로 북한지역을 정리했으며, 남북협상 당시 김구도 북한정권수립을 막을 수 없음을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 등에는 눈을 감는다.
독립운동기에도 이승만은 민족진영에 해악만 끼친 분열주의자였으나 다만 미국이 활용한 인물일 뿐이라는 주장도 편다. 그러나 그는 해방정국에서 김구, 여운형을 포함한 민족, 사회주의진영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민중의 지지를 받은 인물이었다. 이는 당시 군정청 문서나 언론 등의 기록에서, 또 선대들의 증언에서 명백히 확인된다.
진보진영 일반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는 일제강점기서부터 타계 때까지 전 생애를 걸쳐 뭐하나 긍정 평가할 것이 없는 악의 화신이다. 심지어 최근 독도 문제와 관련, 평화선을 그어 독도 실효적 지배의 계기를 마련한 그를 두고도 이승만 매판정권 때문에 독도문제가 생겼다는 식의 글을 보고 경악한 적도 있다.
그 없이 국가정체성 설명 안돼
이승만은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을 세우고, 전쟁에서 미국과 세계를 움직여 나라를 지켜낸 지도자다. 반면 국내정치에선 유아독존식의 아집과 무능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심각하게 왜곡시킨 독재자다. 그러므로 공만큼 그의 과는 크고 무겁지만 최소한 우리의 건국대통령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걸 인정치 않고는 현대 세계사의 기적이라는 우리 대한민국의 뿌리와 정체성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다시 광복절에 즈음해 그의 재평가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 한국일보 이준희 논설위원 2011-08-11 |
| 대한민국 건국의 아버지들 · 우남과 백범 | |
우남과 백범 “나라고 왜 통일정부를 원하지 않겠나. 그러나 북한의 김일성이는 진짜 김일성이가 아니고 소련의 괴뢰인데 평양에 가서 그를 상대로 무슨 얘기를 하겠다는 것인가. 약을 잘못 썼다간 상반신조차 마비된다.”
- 1948년 3월 중순 · 이승만이 남북협상에 대해 묻는 측근 인사들에게 한 말.
“어떤 사람들은 남북협상을 공염불같다고 비웃지만, 자고로 위대한 혁명가, 학자, 발명가 들이 얼마나 많은 공염불로부터 마침내 성공했던가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 1949년 1월 17일 · 한독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의 김구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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