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해남 땅끝마을
한반도의 마지막 땅이 보여주는 비경일대와 달마산의 위용을 느껴보자
한반도의 맨 끝 점. 북위 34도 17분 38초, 동경 126도 6분 1초.
한반도를 휘돌아 사랑과 정열이 마침내 한자리에 모여 정점(頂点)을 이루는 곳.
이곳은 바로 대륙문화(大陸文化)가 유입된 길목이다. 그 좋은 예가 불교(佛敎)의 남방유입설(南方流入說)인데, 이는 지금까지 중국을 경유해 고구려, 백제로 전파됐다는 통설과는 정반대의 것이어서 매우 흥미롭다.
육지 끄트머리라는 상징성과 함께 재미난 이야기가 분분한 땅끝마을은 '갈두리(葛頭里)' 혹은 '칡머리'로 불리웠는데, 이곳에 칡이 많아 그렇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사자봉 형세가 칡의 형상으로 칡머리라 이름지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갈두는 예전부터 제주도로 통하는 중요한 뱃길이었는데 제주도에서 군마(軍馬)를 싣고와 육지로 보내는 통로였다고 한다. 이같은 과거를 보내며 땅끝이 관광지로 발돋움 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 86년. 땅끝에서 바라보는 우리 국토와 다도해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높이 10m의 탑을 세우고, 노령산맥의 줄기가 내 뻗은 마지막 봉우리인 해발 156.2m의 사자봉 정상에 있는 봉화대를 복원하면서 부터다.
13번 도로를 따라 가다가 해남을 벗어나기 전, 땅끝마을 이정표나 미황사 이정표를 따라 813번 지방도로를 따라간다. 광주에서 땅끝마을까지 하루 16회, 목포에서 6회 직행버스가 있다. 해남읍내에서는 군내 버스가 수시로 운행된다. 민박은 많이 있으나 주말에는 수요가 몰리는 탓에 예약이 필수다.
2.해남 송지면 중리마을
드라마 허준 촬영지(허준 유배지)를 찾아
땅끝마을 가까이 있는 송지면 중리는 허준 촬영장으로 갑자기 인기 여행지로 떠오른 곳이다. 길가에 허준 유배지로 촬영되었음을 알리는 커다란 입간판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는 이 곳은 촬영 세트장이 철거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어 관광자원으로 재활용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 겨울에도 푸르름을 잃지 않는 온통 새파란 마늘밭이 펼쳐져 있는 송지면 중리. 중리 버스 정류장 바로 앞에 마을 진입로가 나와 있다. 차 한 대는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길이지만, 양쪽에서 차가 마주칠 경우엔 방법이 없으니 차를 길가에 세워 놓고 들어가는 것이 좋다. 바닷가를 타고 오른 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세트장이 눈에 들어온다. 허준이 유배 가서도 참된 의술을 펼친 바로 그 현장이다. 세트장이 4채 세워져 있는데 만조 시에는 세트장 바로 서너 걸음 앞까지 물이 올라와 찰랑거릴 정도이다. 세트장 입구에서는 마을 할머니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굴을 까면서 좌판을 벌여 놓고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유배지가 아니라 별장이 될 수도 있을 정도로 세트장에서 바라보는 남해 바다는 색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3.완도 보길도-고산 윤선도의 유배지에서 그의 사상을 배우자
보길도는 해남반도 남단으로부터 남으로 12km즘 되는 거리에 있고 보길도의 최고봉인 격자봉(435m)을 중심으로 하여 북동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계류주변을 윤선도가 부용동이라 불렀고 병자호란 이후 이 일대에 정사를 세우고 지당을 축조하는 등 도피적 별서생활을 한 유적이다.
고산 윤선도(1587~1671)는 성균관 유생으로 권신 이이첨 일당의 횡포를 상소했다가 이듬해 경원에 유배당했다 1628년 별시문과 초시에 장원, 왕자사부가 되어 봉림대군(효종)을 보도했다 그 후 공조, 형조, 호조정랑 등을 거쳐 가복사첨정, 한성부서윤을 역임했 으며 그 뒤 강석기의 모함으로 성산현감으로 좌천되었고 그 이듬 해는 그 자리마저 삭직 되었다. 또 병자호란 때에 왕을 첨종하지 않아 호의가 성립된 뒤 영덕에 또 유배되었다. 고산은 수차에 걸친 유배로 인해 은둔생활을 결심하고 이곳 보길도에 들어와 별서 정원을 경영하고 호화스러운 생활 속에서 일생을 마쳤다.
고산은 이곳에서 약12년의 세월을 보냈는데 해남의 금쇄동에서 오우가, 산중신곡 등 많은 가사를 남겨 국문학사상 일대 금자탑을 세웠으며 보길도 부용동에서는 저 유명한 어부사시사를 남기는 등 자연경관을 노래한 많은 시문이 이곳에서 이루어 졌다 고산연보에 의하면 이곳에 온 때는 1637년 2월로 그의 나이 51살 때 일이다.
원시림을 개척 길을 만들고 격자봉 아래에 촉실을 하여 낙서제라 이름했다 .또 건너편 산허리에 있는 비벽층태 위에 소옥을 짓고 동천석실이라 했으며 동구에서 좀 떨어진 곳에 계천 이흐르는데 이곳은 물이 깊고 광담이 있어 담가에 정자를 세우고 세안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그 주위에 동하각, 칠암헌, 호광루 등을 세웠고 기타 자연물에 대해서는 소은병, 혁희대, 랑음 계, 독등대, 오운대, 연선대, 상춘대라하여 각기 그 형태에 어울리도록 명명하여 자연을 벗삼았다 말년에 마지막 노경을 자연과 산수를 노래하다 85세(1671)로 낙서제에서 일생을 마쳤다. 이 보길도 유적은 규모면에서 경외 제일이며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자연 순응적인 산수정원이라 할 것이다. 땅끝마을에서 보길도 가는 배가 하루 6회 있다.
6,700원. 기상상태에 따라 유동적이므로 미리 확인을 해야만 한다. 해광운수 061) 533-4269
4.경남 남해 죽방렴-바다에 나무를 심어 고기를 잡는 전통어업
전국에서 사천과 남해 일대에만 남아 있는 죽방렴(竹防簾)은 말 그대로 대나무 독살이다.
물에 잘 썩지 않는 참나무 말뚝을 V자 형태로 바다에 심어 놓고 물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고기가 몰리도록 유도하여 끝에 몰린 고기들을 건져내는 방식이다. 그 기원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문헌상에는 1500년, 그러니까 500년 전에서부터 죽방 어업을 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이 곳 남해 지족해협은 전국에서 진도 울돌목 다음으로 물살의 흐름이 빠르고 수심도 깊어 고기가 많이 몰려 천혜의 죽방렴 여건을 갖추고 있다고 한다.
남해에만 20여 곳이 넘는 죽방렴이 설치되어 있고 주종은 멸치이지만 여러 잡어들도 걸려든다고 한다. 죽방에 걸려든 멸치는 손상도 되지 않고 맛도 좋아 `죽방멸치`라고 불리울 정도로 인기를 끈다고 한다. 죽방을 구경하기는 참 쉽다. 3번 국도가 지나가는 창선교 다리위에서는 아주 인접하여 설치되어 있는 죽방렴을 자세하게 들여다 볼 수가 있고 멀리 점점이 많은 죽방렴들도 쉽게 조망할 수가 있다. 남해의 전통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는 지족마을의 죽방렴이나 물건리의 방조어부림을 볼 것이라면 사천-창선도 코스를 택함이 훨씬 가깝기도 할뿐더러 운치도 있다. 그러나 이 도선 코스는 휴일이면 1시간 가까이 기다려야 하는 불편함이 따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