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주의가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2012년 09월 04일.
1. 나치즘과 하이데거
히틀러는 독일국민들의 선거를 통한 전폭적인 지지로 총통에 오른 사람이다. 그러나 총통이 된 히틀러는 대중 의지를 조작하고 독일국민들을 광기로 몰아갔다. 대의민주주의 제도하에 히틀러에게 권력을 부여한 독일국민들은 그를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광기에 휩싸인 당시 독일국민들은 자신들을 마치 “작은 히틀러”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다고 한다. 즉 총통의 결정이 곧 자신의 결정인 것처럼 믿었다는 것이다. ‘자발적 복종’이야말로 나치즘을 이해하는 특징중 하나이다. ‘자발적 복종’은 사람들이 자신이 판단과 책임의 주체임을 망각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상황에 철학적 명분을 제공한 사람이 있다. 바로 20세기 최고의 존재론자 하이데거.
하이데거는 저서 <동일성과 차이>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존재는 ‘밝히면서 건너옴’으로 스스로를 내 보인다. 존재자로서 존재자 자체는 ‘밝혀져 있음 속에서 다가와 그 안에서 스스로를 간직하는 도래’라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다시말해 ‘존재는 존재자를 밝히고,존재자는 존재에 의해 밝혀진다’는 것이다. 형광등의 불빛을 존재에, 방 안에 있는 사물들을 존재자에 대입해 보면, 불빛이 마치 방 안을 밝히면서 오는 것 같고 사물들은 불빛에 의해 밝아진 방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존하면서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에 존재에 히틀러를 존재자에 독일국민을 대입하면 된다.
“히틀러는 세상을 밝히면서 건너오고,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가 환히 밝힌 공간 속에서 독일 국민들로 자신을 간직한다.”
하이데거에게 진리는 ‘존재가 스스로를 드러내서 존재자들을 밝히는 사태’를 의미한다. 나치즘의 정치사회체제는 하이데거에게는 철학적 진리의 구현이라 할 수 있었다.
2. 무엇이 문제인가?
전체주의문제에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철학자로 아도르노와 한나 아렌트가 있다. 이들은 독일에서 활동한 유대인으로서 독일 탈출이 조금만 늦었어도 아유수비츠에서 삶을 마감할 수 있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들어 보자
1) 아도르노
그는 아우슈비츠를 낳은 것은 광기나 비정상이 아니라 서양철학이 그토록 자랑해 마지
않는 ‘이성’과 ‘합리성’이라고 주장한다. 플라톤이후 서양철학은 순수한 동일성 혹은 본질
을 추구해 왔다. 그러한 결과로 다양한 개체들을 분류하고 정리하여 무언가로 규정하는
는 개념들이 생산되었다.
개념들은 본능적으로 개체들이 갖는 복잡성과 차이를 제거하고 단순함과 동일성을 찾는
데 주력하고 개체들을 하나의 개념으로 붙잡아 둔다. 개념을 나타내는 영어의 'concept'
이나 독일의 ‘begriff'는 무언가를 ’붙잡는다‘는 의미를 가진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동일성을 추구하는 이성의 욕망에서 전체주의의 기원을 발견한다.
즉, 동일성에 대한 욕망은 게르만 민족의 순수성을 지향하게 되고 이러한 순수성을 더럽
히는 차이로서 유태인과 집시들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다.
하나의 개념에 포획된 개체들은 그 안에서 교환가능한 것으로 사유된다. 즉 일반성과 특
수성의 회로에서 개념의 자기동일성이 관철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령사람 진호,익현,화순,선만. 이렇게 네 사람이 있다. 동일성의 논리에 의하
면 이들은 보령사람1,2,3,4로 사유될 뿐이다. 그리고 만약 big brother가 있어 보령사람
하나 데려오라고 하면 그 중 하나를 골라 데려가면 되는 것이다. 그가 진호가 되든, 익현
이 되든 상관이 없다.
아도르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 개체들을 교환가능한 것으로 보는 이성의 논리를 해체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비개념적인 것’,‘개별적인 것’,‘특수한 것’들을 철학적으로 구제해
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헤겔의 ‘개념을 통한 종합’을 거부하고 ‘종합되지 않는 모순의
원칙’을 관철하고 ‘교환불가능한 단독성의 유지’를 강조했다.
2) 한나 아렌트
그녀는 1963년에 출간한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유대인 학살 과정의 총책임
자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기록하고 있다. 아이히만은 악의 화신으로 상징되나 그의 현실
모습은 평범하고 성실한 이웃집 빵집 아저씨처럼 생겼다고 한다. 그는 재판에서 자신은
상부의 명령에 충실히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한다.
아렌트는 그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할 수 있을까? 그의 죄의 근본은 무엇
일까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그의 범죄는 철저한 무사유에 있다. 그것도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음’과 연관
되어 있다. 자신의 행위로 인해 수용소의 유대인이 겪었을 불안과 공포를 생각하지 못
한 무능력이 죄의 근본이다.‘
아렌트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던져 준다. 그것은 “사유란 단순한
생각함이 아니라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능력이 아니라 의무라는 것이다. 시민의 의무.
3. 그것으로 끝인가?
전체주의를 막기 위한 아도르노와 아렌트의 노력을 우리는 배울 필요가 있다. 그러나 주체의 시선을 ‘일반성’에서 ‘단독성’으로 돌리거나, ‘사유의 본질에 충실하라’는 태도의 변화로 전체주의를 막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렇게 보는 근거는 우리 현실에 있다.
시리아 내전에서 정부군이 재점령한 도시에서 사람들을 집단학살한 사진을 보고, 일본정부는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공식입장을 재고하기로 했다는 뉴스를 보고, 유대인 학살의 당사자였던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하는 행위를 보면 우리는 알 수 있다.
책에서도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화되는 현실에서 두 철학자의 외침은 왠지 무기력하고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는 듯 하다고 말하고 있다.
저자는 전체주의를 막는 방법은 주체의 시선이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 뿐 아니라 전체주의적 자극을 조장하는 사회구조와 체계를 새롭게 변형시키는 작업도 동시에 수반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대안으로 시몬 베유가 쓴 <자유와 사회적 억압의 원인들에 대한 성찰>에 쓰여진 문구를 인용한다.
“가장 인간적인 문명은 육체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문명이다”
지금의 사회체제는 정신노동과 지식을 상위에 두고 육체노동과 몸적 체험을 하위에 두고 있다. 임금도 그렇고 사회적 대접도 그러하다. 베유는 이 구조를 붕괴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육체노동이 중시되는 인간적 문명에서는 국민 한 사람 한사람을 작은 수단으로 간주하는 국가를 비롯한 유사국가체계들의 횡포는 사라질 것이라는 이야기다.
4. 시민,사유,축제
아도르노와 아렌트의 문제의식을 화두로 삼는 시민의 삶
대의민주주의제도의 맹점을 극복하는 직접민주주의제도의 실현으로
상호무관심과 속내감추기의 도시의 삶에서 마을공동체의 삶으로
육체 노동을 중시 하는 삶으로의 전환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축제의 향연을-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신나게 노는 축제
첫댓글 요즘 심취해 있는 아도르노와 한나아렌드에 대해 자세한 설명 고맙습니다 마을 공동체의 삶 ? 문화콘텐츠개발사업은 마을 공동체의 삶의 질을 이끄는 사업이긴 합니다만 현 정치체제에서는 유명무실해진 사업입니다 어떻게 하면 마을 공동체의 삶을 살수있을까요 ? 아 ! 책익는 마을일수도 있겠다 철학을 보면서 느낀건 자각하라 하지만 실현이 어렵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