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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회창립75 주년 기념 특집>민중과 정의가 승리하는 새 시대, 새 역사를!
1930년 11월 18일 화요일 스승 59세, 제자 30세. 단 두 사람의 결의가 세계의 하늘에 창가(創價)의 태양으로 빛을 발한다. “불법이 일본국에 들어온 지 칠백여 년에 아직 이와 같이 법화경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은 자는 없느니라”(어서 1051쪽)는 연조 니치렌 대성인의 말씀을 증명이라도 하듯 700년이 지나 창가학회가 출현한다. 700년의 세월을 70여 년으로 응결한 창가학회. 마키구치, 도다, 이케다 회장으로 이어지는 창가의 사제는 온갖 어려움을 이겨 내고 세계의 큰 무대에서 승리를 거듭해 지금에 이르렀다! 이케다 회장은 노래했다. “‘창립일!’ 이날은 우리 구원의 원점으로 돌아가는 혁혁한 광휘(光輝)로 가득 찬 날이다. 언제나 이날부터 우리는 힘차게 희망에 불타 솟아나는 사명과 신념을 발산하면서 가슴을 펴고 일어선다. 우리는 영원히 빛나는 정의의 불꽃을 불태우며 기꺼이 환희에 차 출발한다"라고. - 창립 70주년 기념시 ‘창가의 욱일, 영원한 사제의 영광’중 이제 무한한 희망의 파도를 일으키며 활력과 사명으로 가득 찬 제자의 사자후로, 생명의 날개를 창가의 노래를 삼세영원히 넓혀갈 때다! 권력에 굴하지 않고 생애 정법 정의를 관철한 니치렌(日蓮) 대성인 불법은 영원한 ‘부처’와 ‘마(魔)’의 투쟁이다. 학회의 발전도 광선유포의 전진도 권력의 마성과 반역의 무리들과 장절히 투쟁하여 이루어낸 역사다. 그렇다면 왜 학회는 끊임없이 사악의 무리에게 공격을 받는가. 그 해답을 니치렌 대성인의 생애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탄생과 입종선언 니치렌 대성인은 1222년 2월 16일, 아와(현재의 지바현) 지방의 가난한 어부의 집에서 태어났다. 12살 때 천태종의 절인 세이쵸사(淸澄寺)에 들어가 수학, 16세 때 출가하여 이후 각지의 종파를 찾아 다니며 부처의 모든 경전을 탐독, 불교사상을 배웠다. 당시 13세기의 가마쿠라에는 천변지요가 거듭되었다. 지진, 홍수, 가뭄, 기근, 역병에 권력자의 횡포로 민중은 그 모든 악조건 속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희생을 강요당했다. 민중은 굶주림에 지쳐 쓰러졌다. 엄청난 시체가 거리를 가득 메웠다. 그러나 당시 불교의 사명은 권력자를 지키는 것이었다. 승려들은 민중에게 “죽으면 반드시 극락정토에 갈 수 있다.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괴로워하는 민중은 거들떠 보지도 않은 채, 종교는 권력자의 환심을 사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석존은 민중의 행복을 위해 불교를 설했는데 왜 지금의 불교는 그 반대의 상황인지를 니치렌 대성인은 석존이 설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즉 〈법화경〉에서 찾았다. 사후의 극락정토보다 현실을 행복한 세계로 변혁할 수 있는 민중구제의 길을 〈법화경〉에서 찾은 것이다. 그 후 대성인은 고향인 아와의 세이초사로 돌아와 1253년 4월 28일에 석존의 극설은 〈법화경〉이며 말법의 일체중생을 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정법은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라며 입종선언을 하셨다. 〈입정안국론〉 집필과 대난(大難)과 투쟁 1253년 8월경 대성인은 가마쿠라로 들어가 나고에의 마쓰바가야쓰(松葉谷)에 초암을 지으시고, 민중구제의 제일보를 시작하신다. 그런데 계속 역병(疫病)이 유행하고, 큰 화재와 홍수, 대기근(大飢饉) 등이 일어나 민중이 도탄의 괴로움에 허덕이자 이는 사종(邪宗)의 방법(謗法) 때문이라는 것을 경문을 인용하여 지적하시고, 정법인 〈법화경〉만이 민중을 구하고 악세를 바로잡아 나라를 안온케 한다는 〈입정안국론(立正安國論)〉을 집필하신다. 대성인은 1260년 7월 16일,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효조도키요리에게 〈입정안국론〉을 제출한다. 그리고 이 간효를 채용하지 않으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타국침핍난, 자계반역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 경고했다. 그러나 도키요리는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박해했다. 대성인의 생애는 대난(大難)에 이은 대난의 연속이셨는데 먼저 〈입정안국론〉을 제출하신 직후인 1260년 8월 27일 밤, 당시 권력자의 후원을 받은 염불자들이 마쓰바가야쓰의 초암에 계시는 대성인을 습격했다. 이것이 마쓰바가야쓰 법난(法難)이다. 이때는 무사히 난을 모면하였으나 다음 1261년 5월 12일, 이즈의 이토 지방으로 유죄되었다. 세 번째 대난은 이즈유죄에서 사면된 다음 해인 1264년 11월 11일에 일어난 고마쓰바라 법난이다. 고마쓰바라에서 대성인에게 앙심을 품고 있던 지두인 도죠 카게노부의 군세(軍勢)에게 습격당하시어 제자 2명이 전사하고 대성인도 이마에 상처를 입었다. 그런데 국가와 민중을 위한 대성인의 진심 어린 간언을 박해한 막부에게 실제로 타국침핍난의 예언이 현실로 나타났다. 1268년 1월, 몽고에서 국서(國書)가 가마쿠라에 도착했는데 일본이 몽고의 속국이 되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이것을 무시하면 몽고가 언제 공격해올지 모를 상황이 된 것이다. 다쓰노구치 법난과 발적현본 이런 상황 속에서 대성인은 두 가지의 난을 막기 위해 사종의 사의를 파절하고 정법인 〈법화경〉의 정의를 알려야 했다. 그래서 모든 종파에 법론대결을 요청했는데, 이때 진언율종의 승려인 고쿠라쿠사 료칸과 벌인 기우(祈雨) 대결은 대성인이 말법의 본불로서 그 본지를 나타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 한발(旱魃)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료칸은 막부의 명령에 따라 기우 법요(法要)를 행하고 있었다. 대성인은 이때, 료칸에게 도전했다. 그 결과 1주일이 지나도 2주일이 지나도 비는커녕 대폭풍이 불어 료칸의 대패배(大敗北)로 끝났다. 이후 대성인을 원망한 료칸은 비열하게 막부의 유력자와 그 부인을 움직여 대성인을 처형하도록 공작했다. 그 법난(法難)이 다쓰노구치 법난이다. 당시 군사 결정권이 있던 헤이노사에몬노조는 1271년 9월 12일, 대성인을 마치 역적을 다루듯이 체포하여 심야에 가마쿠라 교외(郊外)의 다쓰노구치에서 몰래 처형하려 했다. 그런데 막 처형하려는 순간에 “달처럼 비치는 공같은 물체”(어서 914쪽)가 나타나서망나니는 눈이 아찔하여 쓰러졌고, 병사들은 겁에 질려 도망갔다. 대성인은 이 다쓰노구치 법난을 통해 〈법화경〉에서 설한, 말법에 〈법화경〉을 홍통하는 상행보살(上行菩薩)의 재탄(再誕)이라는 적(迹: 그림자)의 모습을 버리시고 구원원초(久遠元初)의 자수용보신여래(自受用報身如來)라는 말법의 본불님으로서 그 본지(本地)를 나타내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발적현본(發迹顯本)이다. 처형할 수 없었던 막부는 이번에는 대성인을 사도로 유죄(流罪)에 처한다. 이 다쓰노구치에서 사도에 이르는 법난이 네 번째의 대난에 해당한다. 사도는 혹독한 기후 조건의 유배지였지만 〈개목초(開目抄)〉 등 중요한 어서를 저술하신다. 그리고 〈개목초〉를 저술하신 1272년 2월에는 가마쿠라의 교토에서 내란이 일어나 〈입정안국론〉에서 예언하신 자계반역난이 현실로 나타났다. 1274년 2월, 사면되어 가마쿠라로 돌아온 후에도 헤이노사에몬노죠에게 사법(邪法)에 대한 보시(布施)를 멈추고 정법(正法)을 받아 들이지 않으면 타국침핍은 피할 수 없다고 강하게 간언했다. 그 예언대로 1274년 10월에 몽고의 대군(大軍)이 내습(來襲)했지만 그때도 막부는 대성인의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대성인은 “세 번 나라를 간효(諫曉)해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산림(山林)을 벗삼는다고”(어서 323쪽)하는 고사(故事)에 따라 가이 지방의 미노부산에 들어가신다. 대어본존 도현과 입멸 대성인이 미노부에 입산하신 후인 1279년 10월, 쓰루가의 아쓰하라 지방에서는 대성인의 제자인 닛코(日興) 상인의 절복홍교(折伏`弘敎)로 많은 농민신도가 탄생했다. 놀란 류센사의 원주대(院主代) 교치 일당들은 간계(奸計)를 꾸며서 탄압하고 퇴전, 개종(改宗)을 강요했다. 그러나 조금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관철한 농민들은 마침내 헤이노사에몬노조의 사택에서 고문당하고 진시로, 야고로, 야로쿠로의 세 사람이 처형당했다. 이것이 바로 아쓰하라 법난이다. 입신한 지 얼마 안 되는 농민들의 이 불석신명(不惜身命)의 모습에 대성인은 드디어 때를 느끼시고 1279년 10월 12일, 일체중생이 자신의 불성을 끄집어 낼 수 있는 대상으로서 만다라인 대어본존(大御本尊)을 건립하신다. 즉 부처가 이 세상에 출현한 목적인 출세(出世)의 본회(本懷)를 완수하신 것이다. 1282년 10월 13일, 제자인 육노승(六老僧) 중 신행제일(信行第一)인 닛코 상인에게 일체의 법(法)을 부촉하신 대성인은 이케가미 무네나가 저택에서 존귀한 생애를 마치신다. 이와 같이 대성인은 입정안국과 민중구제를 위해 단 한 번도 권력에 굴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묘법의 정의를 만천하에 알렸다. 우리 역시 어본존을 믿는 한, 스승이 계시는 한 사악이 난무하는 지금, 민중이 승리하는 정법 정의가 승리하는 새로운 시대를 반드시 열 것이다. 입종선언 - 말법 만년 민중구제의 대선언 “법화경이 일체경 중에서 으뜸이며 말법을 구제하는 법은 법화경이다. 이 묘법 이외에 말법의 사람들을 생사의 괴로움에서 해방하고, 욕망과 투쟁의 말법 시대를 변혁할 수 있는 법은 없다”라고 결론내리시며 입종선언과 함께 사개(四箇)의 격언(格言)을 사자후하신다. 그리고 그때 이름을 ‘니치렌(日蓮)’으로 개명하셨다. 사개의 격언의 내용은 ‘진언망국(眞言亡國)’ ‘염불무간(念佛無間)’ ‘선천마(禪天魔)’ ‘율국적(律國賊)’으로 진언종을 믿으면 나라가 망하고, 염불은 무간지옥에 떨어지고, 선승(禪僧)은 천마(天魔) 그리고 율승(律僧)은 국적(國賊)이라는 뜻이다. 사개의 격언의 본질은 당시 각종의 독선성(獨善性)과 그 독선성을 종교적 권위로 감추는 기만성을 간파하고, 엄격히 지적하신 대성인의 ‘지혜’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니치렌 대성인의 입종선언은 말법만년 진미래제까지 이어지는 민중구제의 대선언이셨다. 그러므로 미래를 향해 전 인류를 행복하게 하려는 서원이야말로 ‘입종의 마음’인 것이다. 대어본존 도현과 만다라의 의미 대성인은 우주 근원의 법인 동시에 존극의 불계의 생명인 남묘호렌게쿄와 자신의 생명이 일체라는 것을 깨닫고 그 생명을 문자의 만다라로 도현해 주셨다. 말법의 범부인 우리도 우리의 생명속에 있는 ‘흉중의 본존’을 열어 나타내어 대성인과 똑같이 성불할 수 있도록 수행의 명경(明鏡)으로 대어본존을 도현하신 것이다. 결국 우리가 아침 저녁으로 배알하는 어본존 만다라는 대우주의 생명과 일체인 우리의 십계(十界)의 생명을 그대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어본존의 상모에 있는 모든 부처와 보살, 제천선신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만 살펴보면, 중앙의 ‘남묘호렌게쿄’는 근원의 진리를 나타낸다. 그 좌우에 석가불과 다보여래가 있다. 다보여래는 과거불(過去佛)이며 영원의 진리를 나타낸다. 석존은 현재불(現在佛)이며 법을 현실로 깨닫는 지혜를 나타낸다. 그리고 상행보살(上行菩薩), 무변행보살(無邊行菩薩), 정행보살(淨行菩薩), 안립행보살(安立行菩薩)의 사보살은 묘호렌게쿄와 하나가 되어 무한한 생명력을 발휘하면서 나타내는 ‘최고의 행동’ ‘무한의 행동’ ‘청정한 행동’ ‘확고한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문수보살은 ‘지혜’의 상징이고, 미륵보살은 ‘자비’의 상징이다. 보현보살은 법화경과 법화경을 수지한 사람을 수호할 것을 맹세하고 있다. ‘사리불·목련’은 각각 지혜제일과 신통제일로 성문계(聲聞界)를 대표한다. ‘제육천의 마왕’은 욕계(欲界)의 정상에 살며 사바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존재다. ‘용왕’은 어리석은 축생계(畜生界)를 대표하고, ‘아수라’는 아첨하고 비뚤어진 생명 혹은 남보다 열등한 것을 참지 못하는 수라계(修羅界)의 생명을 상징하고, ‘악역의 달다(達多)’란 제바달다를 말하며 원래 악인의 대표적 인물이었지만 법화경에서 천왕여래라는 성불의 기별을 받는다. 그외 모든 보살과 부처는 각각 그에 해당하는 인간의 생명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렇듯 어본존 상모의 모든 부처와 보살은 결국 만인의 생명속의 현상, 작용을 문자로 나타낸 것이지 믿는 본존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는 않다. 즉 중앙의 남묘호렌게쿄를 중심으로 그 모든 생명의 현상들이 부처의 생명으로 용현할 수 있게 하는 제천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민중 속에 희망을 심다 - 신념과 정의의 생애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여기에서는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을 올바르게 실천하고 있는 유일의 교단인 창가학회의 역사를 통해 3대 회장의 광선유포 정신을 배운다. 광선유포야말로 니치렌 대성인의 대원(大願)이며 근본 정신이다. 그리고 그 대성인의 정신을 계승하고 광선유포의 사명을 짊어지고 출현한 교단이 창가학회다. 창가학회의 실천으로 오늘날 세계 190나라·지역(10월 현재)으로 대성인의 불법이 넓혀졌다. 그러므로 창가학회야말로 니치렌 대성인의 어유명인 세계 광선유포를 실현하고 있는 불의불칙의 교단이다. 만인이 평등하게 성불(成佛)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법화경의 근본 교의(敎義)이고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진수다. 그 철학은 모든 사람들이 불성(佛性)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한 생명존엄의 철학, 진실한 의미의 인간주의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창가학회는 법화경 그리고 니치렌 대성인이 밝히신 인간주의의 사상을 현대에 실천하고 세계 평화 실현과 인류 문화의 향상을 목표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창가학회의 역사를 3대 회장의 사적(事跡)을 중심으로 개설(槪說)한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회장 초대회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선생님은 1871년 6월 6일, 현재의 니가타 현 가시와자키 시 아라하마에서 태어나셨다. 소년기에 단신으로 훗카이도로 건너와 일하면서 독학으로 학문에 힘써 18세에 훗카이도 진조 사범학교(현재 훗카이도 교육대학)에 입학, 사범학교 졸업 후 부속소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사범학교 재학 시절부터 지리학에 관심이 있던 마키구치 선생님은 지리학서의 집필에 착수하여 1901년 그 출판을 목표로 상경했다. 그리고 1903년 최초의 저서인 《인생지리학》을 발간했다. 그 후 초등교육 현장으로 돌아가 도쿄 각지의 소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교육 실천을 거듭하고 사색을 깊이하는 속에 인생의 근본이 되는 진실한 종교를 찾고 있었다. 1928년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을 만나 대성인 불법을 올바르게 계승한 닛코 상인의 유파를 따른 일련정종에 입신했다. 57세 때였다. 그리고 마키구치 선생님과 사제의 연대를 맺고 있던 도다 조세이 선생님도 이 해, 마키구치 선생님을 따라 니치렌 대성인 불법에 귀의했다. 창가교육학회의 창립 당시 마키구치 선생님은 도쿄의 시로카네진조소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었다. 교장으로서 초등교육의 현장에서 오랫동안 교육학에 대한 사색을 거듭했다. 그리고 1930년 11월 18일, 그 성과를 《창가교육학체계》 제1권으로 발간했다. 그 책의 판권장에는 저자인 마키구치 선생님, 발행겸 인쇄자인 도다 선생님의 이름과 함께 발행처로 창가학회의 전신이 된 ‘창가교육학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이 책이 발행된 11월 18일을 창가학회 창립기념일로 하고 있다. ‘창가(創價)’란 ‘가치창조’라는 의미다. 교육의 목적, 그리고 인생의 목적은 행복 추구에 있고 그 내실은 가치창조에 있다는 마키구치 선생님의 사상이 담겨 있는 말. 또 《창가교육학체계》 제2권에서는 마키구치 선생님의 ‘이(利)·선(善)·미(美)’의 가치체계를 밝히신 ‘가치론’이 수록되어 있다. 마키구치 선생님, 도다 선생님의 사제에서 시작된 창가교육학회는 당초 창가교육학설에 공조하는 교육자의 단체로 시작되었지만 곧 교육자 이외의 사람들도 참여하게 되어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실천하는 재가의 종교단체가 되었다. 창가교육학회는 일련정종의 재가신도 단체였지만 종래의 강(講: 승려의 지도 아래 말사에 소속하는 신도단체)과 다른 방법을 취해 왔다. 학회의 운영도 회원의 신심 지도도 승려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학회 독자적으로 실시하고 있었다. 학회는 당초부터 종래의 종문의 테두리를 뛰어넘은 독자적인 재가단체였던 것이다. 또 그 실천도 종교를 사원이나 장례 등의 의식(儀式)에 한하는 것이 아니라 신행(信行)의 심화를 통해 각자 현실의 인생에서 행복의 실천 그리고 사회의 평화와 번영의 실현을 목표로 실천하였다. 이는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 본래의 실천 방법에 기초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지방 절복과 좌담회도 활발히 열리며 창가교육학회는 순조롭게 발전했다. 당시 전국의 회원은 약 3,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군국주의와 투쟁 그리고 순교 그러나 상황은 ‘국가신도’를 정신적 지주로 해서 군국주의로 치달으며 사상통제를 강화하는 속에 학회의 좌담회도 사상범 적발을 임무로 하는 특고(특별고등경찰)의 감시하에서 열리게 되었다. 1943년 6월, 학회는 권력의 박해를 두려워한 일련정종의 종문에게서 “신찰을 받아라”고 통고받았다. 이미 종문은 군부정부에 영합, 전쟁 협력에 앞장서고 있었다. 이런 종문의 태도는 대성인과 닛코 상인의 가르침에 반하는 방법(謗法: 정법을 비방하는 것) 용인의 행위였다. 오히려 그러나 학회는 니치렌 대성인이 밝히신 방법 엄계의 가르침을 관철하여 신찰을 거부했다. 1943년 7월 6일, 마키구치 선생님은 지방 절복을 위해 방문하고 있던 이즈 시모다에서 체포되었다. 같은 날 도쿄에서 도다 선생님(당시 이시장)도 체포되어 최종적으로 간부 체포자는 21명에 이르렀다. 불경죄와 치안유지법위반이라는 혐의가 이유였다. 혹독한 취조 속에 마지막까지 신심을 관철한 사람은 마키구치 선생님과 도다 선생님뿐이었다. 마키구치 선생님은 취조를 맡은 검사와 판사에게도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교의를 설했다. 그리고 1944년 11월 18일, 노쇠와 영양실조로 도쿄 구치소에서 서거하셨다. 만 73세. 권력의 탄압에 굴하지 않고 최후까지 불법 정의를 관철하신 고귀한 순교였다. 마키구치 선생님의 생애는 바로 어서 말씀 그대로 불석신명의 실천을 관철하고 니치렌 대성인의 민중구제와 묘법홍통의 정신을 현대에 되살린 존귀한 선구의 일생이었다. 마키구치 쓰네사부로-인도와 정의의 생애 마키구치기념 인권강연회의 이케다 회장 강연 중 교육을 통한 사회변혁을 강하게 지향해 온 마키구치 선생님은 이 불법과 만나면서 이상(理想)을 실현하기 위한 확실한 답을 찾은 것 같습니다. 그때는 57세. 인생을 총마무리하는 괄목할 만한 전개가 시작됩니다. 2년 후, 제자인 도다 선생님과 함께 <창가교육학 체계> 제1권을 출판. 이 책의 발간일인 1930년 11월 18일을 창가학회의 창립의 날로 하고 있습니다. ‘창가(創價)’란 ‘가치창조’라는 의의입니다. 그 ‘가치’의 중심은 무엇인가. 마키구치 선생님의 사상은 명쾌했습니다. 그것은 ‘생명’입니다. 듀이 등 실용주의의 견지를 토대로 마키구치 선생님은 “가치라고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가치란 생명이다. 그밖의 가치는 어떤 생명과 교섭하는 데 한해서만 성립한다”라고 통찰했습니다. 인간의 생명 또 생존에 플러스가 되는 것인가, 아닌가. 이 일점을 근본 기준으로 했습니다. ‘생명’의 존엄을 지키는 ‘평화’라는 ‘대선(大善)’을 향해 도전을 계속하고 어떠한 곤란을 당해도 가치창조를 멈출 수 없다 - 그러한 ‘인격’ 육성에 ‘창가교육’의 요점이 있습니다. (중략) (세계대전의 폭풍우 속에서) 일본 종교계의 대부분이 전쟁 수행의 정신적 지주인 국가신도(神道)에 익찬(翼贊: 받들어 도움)하는 속에서, 사상·신교의 자유 유린에 분연히 반대하고 평화실현을 향한 종교적 신념을 단호히 굽히지 않았습니다. (중략) 마키구치 선생님의 준엄함은 다른 민족의 문화나 종교에 대한 관용과 깊이 통해 있었던 것입니다. (중략) 군부권력의 신찰을 예배하라는 엄명에 종문의 승려까지 전부 굴종했지만, 마키구치 선생님은 최후까지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일보도 물러선 적이 없었습니다. (중략) 어느 곳에서나 또 어느 누구와 말해도 마키구치는 마음을 열고 평등한 입장에서 대화를 하는 활달한 ‘인간교육자’였습니다. 취조하는 검사나 간수들에게도 차근차근 불법의 법리 등을 들려주었습니다. “세간적인 훼예포폄 등을 꺼려 나쁜 일은 하지 않지만 선한 일도 하지 않는다”라는 삶의 방식은 결국 불법에 위배한다 - 현존하는 심문(尋問) 조서에는 이러한 마키구치 선생님의 견해도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996년 6월 4일, 미국 사이먼 위젠탈 센터) 젊은 제자와 사제불이의 연대를 남긴다 위대한 사제의 길을 걸은 도다 조세이 20세기, 인류는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을 경험했다. 이후에도 각지에서 분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전쟁의 세기’, ‘분쟁의 세기’를 맞이하기 앞서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선생님은 ‘군사적’ ‘경제적 경쟁’에서 ‘인도적 경쟁의 시대’라는 방향을 제시했다. 또 제자 도다 조세이 선생님은 ‘지구민족주의’를 내걸며 모든 핵무기 폐기를 외쳤다. 그리고 두 스승의 유훈을 가슴에 품고 21세기를 진정한 ‘인간의 세기’로 만들기 위해 이케다 SGI회장은 전진해 왔다. 3대 사제로 이어지는 평화에 대한 의의와 고뇌 그리고 민중구제의 마음. 이것은 선사에게서 바통을 차대로 이었던 도다 조세이 선생님의 제자에 대한 훈도. 스승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한 제자 이케다 SGI회장의 사제불이의 투쟁이 21세기 ‘창가의 정신’을 새롭게 시대 정신으로 바꾸었다. “이 지구 상에서 ‘비참’이라는 두 글자를 없애고 싶다”라고 열렬히 결의하고 민중의 행복을 위해 생애를 바쳤던 도다 조세이 선생님. 그 불법유포의 혼을 불태운 인생을 살펴본다. 도다 조세이 2대회장 제2대 회장 도다 조세이 선생님은 1900년 2월 11일, 현재의 이시가와 현 가가 시 시오야 마치에서 태어나셨다. 1902년 훗카이도 아쓰다 군 아쓰타무라(당시)로 이주했다. 진조소학교 고등과를 졸업 후 일하면서 독학으로 소학교준교원자격을 취득, 1918년 6월, 유바리의 소학교준교사로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후 얼마 뒤 인생의 스승을 찾고 있던 도다 선생님은 도쿄에서 마키구치 선생님을 만났다. 그리고 사제의 연을 맺고 1920년 봄, 마키구치 선생님이 교장으로 근무하는 소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도다 선생님은 후에 교직을 사직하고 마키구치 선생님의 교육이념을 자유롭게 실천하기 위해서 사숙(私塾) 시습학관을 개설했다. 1928년에 도다 선생님은 마키구치 선생님을 따라서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실천을 단행했다. 그리고 마키구치 선생님의 《창가교육학체계》를 출판하고 스승과 함께 창가교육학회를 창립했다. 옥중 오달 군부정부가 종교단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가운데 1943년 7월 6일, 체포되셨지만 마키구치 선생님과 함께 끝까지 신심을 관철했다. 도다 선생님은 옥중에서 창제에 힘씀과 동시에 〈법화경〉을 읽고 사색했다. 그 속에서 ‘부처란 생명이다’라고 깨달으셨다. 또한 창제와 사색을 거듭하고 있었을 때, 도다 선생님은 자신이 바로 ‘지용의 보살’로서 〈법화경〉에서 설한 허공회의 의식에 참가하는 체험을 하고 “내가 지용의 보살이다”라고 확신했다. 1944년 11월의 일이다. 여기에서 도다 선생님은 니치렌 대성인 불법에 대한 흔들림 없는 강한 확신과 더불어 광선유포의 지도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자각한다. 또 도다 선생님의 이 옥중 오달이 전쟁 후의 창가학회 발전의 원점이 되었다. 도다 선생님은 1945년 7월 3일, 2년 옥중 생활을 마치고 출옥했다. 그리고 오직 홀로 일어서서 괴멸 상태였던 학회 재건에 바로 착수했다. 1946년 초두부터 법화경 강의를 시작하면서 학회의 명칭도 교육 개혁뿐 아니라 광선유포라는 전 민중의 행복과 세계 평화를 목표로 하는 학회의 목적에 들어맞는 ‘창가학회’로 고치고 좌담회와 지방 절복도 재개했다. 머지않아 학회 세력은 전쟁 전의 상태까지 회복되고 1949년 7월에는 새로운 기관지 〈대백련화〉가 탄생했다. 그 창간호에 도다 선생님은 ‘생명론’을 집필했다. 75만 세대 절복을 선언 1949년 후반부터 전쟁 후의 경제정책 영향으로 도다 선생님의 사업이 고경에 처하고 1950년 가을, 선생님은 학회의 이사장을 사임했다. 궁지에 처한 도다 선생님을 지킨 사람이 제3대 회장이 되는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이다. 그리고 1951년에는 도다 선생님을 회장에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1951년 5월 3일에 도다 선생님은 제2대 회장에 취임. 75만 세대 절복 달성을 선언했다. 그때부터 눈부신 기세로 절복·홍교가 진행되었다. 회장 취임 직전인 4월 20일에는 기관지 〈세이쿄신문〉이 발간되어 도다 선생님은 그 창간호부터 소설 《인간혁명》을 집필했다. ‘인간혁명’이란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실천으로 각자가 자신의 생명 경애를 변혁하는 것을 의미한다. 도다 선생님은 ‘생명론’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혁명의 이념을 내걸고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현대에 소생시켰다. 또 도다 선생님은 회장 취임 후 바로 부인부, 남자부, 여자부 등을 잇달아 결성하고 광포확대의 포진(布陣)을 갖추어 갔다. 다음으로 도다 선생님은 어서전집의 발간에 몰두했다. 타종파에서 나온 이제까지 어서는 불완전했기 때문이다. 도다 선생님은 종문의 석학(碩學) 니치코 상인에게 편찬을 의뢰하고 1952년 4월 입종 700년의 마디에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을 발간했다. 이것으로 어서 근본의 정신이 학회 전체로 확립되어 갔다. 1952년 8월, 창가학회는 종교법인 인증을 받았다. 그리고 다음 해에는 사원 건립·기진을 시작하는 등 종문의 외호에 힘썼다. ‘원수폭금지선언’을 발표 학회는 니치렌 대성인의 ‘입정안국’ 정신에 입각해 부패한 정치를 정화하고 민중의 손으로 정치를 회복하기 위해 1955년 4월 통일 지방선거에 처음으로 독자적으로 후보를 추천했다. 1956년 7월, 참의원의원 선거에서 3명의 의원이 탄생했다. 이때부터 창가학회는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가진 단체로 주목받게 되었다. 그리고 도다 선생님은 1957년 9월, 창가학회 평화운동의 기조가 되는 ‘원수폭금지선언’을 발표했다. 이 선언에는 핵무기를 인류의 생존권을 빼앗는 ‘마(魔)’의 산물로 규정하고 핵무기의 사용을 절대악으로서 단죄하고 있다. 1957년 12월, 생애 원업이었던 75만 세대를 달성. 1958년 3월에는 학회가 대석사에 건립기진한 대강당이 완성되었다. 3월 16일에는 이케다 선생님을 비롯한 청년부원 6000명이 광선유포의 일체를 책임지는 의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1958년 4월 2일, 도다 선생님은 일체의 원업을 성취하고 서거했다. 만 58세였다. 도다 선생님은 옥중 오달을 원점으로 학회를 재건하고 광선유포의 흔들림 없는 기반을 구축한 것이다. 은사의 옥중투쟁 수필 신·인간혁명 (127) 1943년 7월 6일(화요일). 위대한 제자 도다 선생님은 위대한 스승 마키구치 선생님과 함께 음험한 권력과 싸우고 신교(信敎)의 자유를 지켰기에 체포되었다. 선생님은, 수많은 사람들을 절복하고 신찰을 폐기해 ‘치안유지법 위반’과 ‘불경죄(不敬罪)’로 문초당했다. 선생님은 감옥 안에 있어도 신문하는 검사나 교도관에게 당당히 불법을 이야기하고 절복하셨다. 도다 선생님은 옥중에서 〈법화경〉을 반복하여 읽고 그 진수를 지각(知覺)하고자 진지한 창제를 거듭하셨다. 〈법화경〉에 대한 두 번, 세 번의 탐구, 나아가 네 번, 다섯 번 이렇게 철저히 거듭한 끝에 선생님의 ‘옥중 오달(悟達)’로 이어졌다. 〈법화경〉의 개경(開經)인 《무량의경》에 나오는 “그 몸은 유(有)도 아니고 또한 무(無)도 아니고, 인(因)도 아니고 연(緣)도 아니고…”라는 난해한 글. 34차례나 ‘아니고(非)’를 반복하여 표현하고자 하신 ‘그 몸’ 즉 ‘부처의 몸’이란 무엇인가. 부정형을 몇 번이나 거듭하면서 여전히 엄하게 존재하는 실재(實在)란 도대체 무엇인가. 도다 선생님은 사색 끝에 활연히 “부처란 생명이니라”고 각지하셨다. 1944년 이른 봄의 일이다. 그것은 불법을 현대에 소생시킨 순간이었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은 ‘부처는 다른 세계에 실재’한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니치렌 대성인은 어서 속에서 “그대 자신이 부처다” 또 “일체중생이 묘법의 당체다”라고 반복해서 가르치셨다. ‘생명’이라는 이 한 마디 말을 열쇠로 하여 민중이 법화경의 진수를 이해하고 그리고 또 민중이 크게 넓혀 갔다. 난해한, 두터운 벽이 있는 불법의 문이 서민에게 활짝 열리는 순간이었다. 〈세이쿄 신문〉의 구상 수필 신·인간혁명 (20) “신문을 만들자. 기관지를 만들자. 미래는 언론의 시대다.” 도다 선생님은 나에게 강조하여 말씀하셨다. 은사의 사업이 폭풍우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던 1950년 섣달. 도쿄 신바시역 근처의 어느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다. 〈세이쿄신문〉이 창간된 것은 그 후 2개월 뒤인 1951년 4월 20일이다. “이 신문을 전 일본, 전 세계의 사람들이 읽게 하고 싶구나.” 이렇게 이야기하셨던 은사는 창간 5주년(1956년)을 맞이한 새해부터 아시아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세이쿄신문〉의 증정을 시작하셨다. 인도의 네루 수상, 필리핀의 막사이사이 대통령, 중국의 마오쩌뚱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 등 열 분이었다. 편지에는 “본지를 통해 불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를 좀 더 심화하고, 동양 문명을 위해 더한층 진력하실 것을 기원드리는 바입니다”라고 쓰셨다. 선생님은 〈세이쿄신문〉을 통해 동양의 우호와 평화를 위한 돌파구를 열고자 했다. 우리도 이 〈세이쿄신문〉을 통해 어떠한 박해 속에서도 정의의 길을, 진실의 길을 호소하며 창가의 새로운 인간주의의 파동을 세계로 넓혀 왔다. 정말로 어두운 세기말의 세상. 무책임한 언론의 횡포. 미로와 같은 철학 부재의 사회. 그 속에서‘진실한 언론지’인 〈세이쿄신문〉에는 희망의 태양이 되어 21세기를 비출 사명이 있다. 어서 발간 수필 신·인간혁명 (21) 대성인 직결의 창가학회는 어디까지나 어서가 근본이다. 은사 도다 선생님은 2대회장에 취임하시자 즉시 《니치렌 대성인 어서전집》의 발간을 결단. 이듬해 4월 28일로 다가온 입종 700년의 기념사업으로 발표하셨다. 1951년 6월의 일이다. 완성하기까지 기간은 불과 10개월이었다. 선생님은 전쟁 중의 탄압으로 간부가 퇴전한 것은 교학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언제나 엄하게 말씀하셨다. 광선유포를 추진하려면 한사람 한사람이 어서를 심간에 새겨 흔들림 없는 신심을 구축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선생님의 결론이었다. 마침내 입종 700년 4월 28일, 어서는 학회의 손으로 완성. 불가능을 가능케 한 대장거(大壯擧)였다. 초판의 발행 부수는 6천 부였다. 어서의 연찬은 절복의 크나큰 확대를 낳고, 그것은 또 어서를 찾는 몇 만의 소리가 되었다. 이듬해인 1953년 11월, 도다 선생님은 어서의 재판(再版)을 결정하셨다. 도다 선생님은 어서전집의 ‘머리말’에 이렇게 쓰셨다. “이 귀중한 대경전이 전 동양으로 또 전 세계로 유포되어 갈 것을 일편단심 기념해 마지않는 바다.” 나는 이 몸을 내던져 선생님의 그러한 염원을 모두 실현해 왔다. 어서에 “통틀어 니치렌의 제자라고 말하며 법화경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니치렌과 같이 할지어다”(어서 989쪽)라고 있다. 어서를 근본으로 해서 대성인에게 직결하고, “니치렌과 같이” 광선유포를 추진해 온 유일한 불의불칙의 단체가 창가학회다. 그리고 여기에 무량의 공덕과 일생성불을 향한 자랑스런 직도(直道)가 있다. 원수폭금지선언 수필 신·인간혁명 (233) 요코하마는 말할 나위도 없이 제2대 회장 도다 조세이 선생님이 돌아가시기 1년 전(1957년)인 9월 8일에 저 인류사적인 ‘원수폭금지선언’을 하신 창가 평화의 원류가 된 땅이다. 태풍이 지나간 높은 하늘과 상쾌한 바람이 부는 속에 도다 회장은 5만의 동지 앞에 ‘제1의 유언’으로서 원수폭금지를 선언하시고 이 사상을 세계에 넓히도록 청년에게 의탁하셨다. 그 선언의 핵심은 원수폭을 사용하려는 발상의 배후에 숨어 있는 ‘발톱’ 즉 인류 속에 깃든 ‘마성의 생명’에 날카롭게 메스를 가한 점에 있다. “우리 세계 민중은 생존의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권리를 위협하는 것은 이는 마의 존재이며 악마이고 괴물입니다. 그것을 이 인간 사회, 가령 한 나라가 원자폭탄을 사용해서 이겼다 하더라도 그것을 사용한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원자폭탄 사용자를 사형에 처하라!” 본래 선생님은 생명의 존엄을 제일의 의의로 삼는 불법자로서 사형제도는 절대 반대였다. 그런데 일부러 “사형에 처하라”고 외치셨다. 그것은 원수폭을 보유하고 사용하려 하는 인간의 기심에 깃든 마성 그 자체를 봉쇄하는 쐐기를 박기 위함이었다. 원수폭을 ‘절대악’으로서 단죄한 사상은 말하자면 ‘방비지악(防非止惡)’의 제방으로서 인류의 흉중에 깊이 세우려 하셨다. ‘생(生)’을 지키기 위해서 그 대극의 ‘사(死)’라는 말로 악마의 마성의 움직임을 부수려는 생명 엄호라는 절대 정의를 실현하는 신념의 행동이었다. 당시 도다 선생님의 선구적인 ‘선언’은 일반적으로는 조금도 회고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 불멸의 빛은 지금 큰 빛이 되어 새로운 세기의 세계를 찬연히 비추기 시작했다. ‘3·16’의 대정신 수필 신·인간혁명 (255) ‘3·16’은 청년의 머리 위에 ‘왕자의 보관(寶冠)’을 씌우고 ‘왕자의 검(劍)’을 맡기신 대관식(戴冠式)이었다. 이 깊은 의의를 우리 제자들은 결코 잊으면 안 된다. 투쟁에 이겨야 비로소 영광된 후계의 관(冠)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기 위해 중요한 것은 첫째, 생애에 걸쳐 불칙(佛勅)을 받드는 우리 학회와 함께 끝까지 살아가는 것이다. 생애 자신의 사명을 관철하여 신념의 대도(大道)를 당당하게 끝까지 달린 사람에게는 아무런 후회도 없다. 둘째, 광선유포의 모든 책임을 떠맡고 일어서는 것이다. ‘학회 속에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 속에 학회가 있다’는 주체자로서 자각이 중요하다. 청춘 시절부터 나도 그렇게 해 왔다. 설령 역직이 최일선에 있는 간부일지라도 학회의 일은 전부 나의 과제라고 받아들여 어떻게 하면 가장 광선유포가 전진할 것인지를 고뇌하고 생각하며 기원했다. 또 도다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또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고 광선유포의 대장군인 선생님의 견지에 서서 만사에 대처했다. 그것이 광선유포를 향해 나아갈 용기 있는 왕자의 길이다. ▶ 창가교육학체계 마키구치 초대회장이 학교 교육을 통해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세운 독창적인 교육 학설. 전12권을 구상했지만 제5권 이후 마키구치 회장이 투옥되어 옥사하시면서 완성하지 못했다. 이 책은 주입식 교육이나 획일주의, 지식 편중을 배격하는 등 기존의 교육 방법을 근본적으로 고치고, 인간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가치창조(價値創造)의 지도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 시습학관 도다 회장이 마키구치 회장의 독창적인 교육이론을 실현하는 장소로, 1923년에 현재의 시나가와 구 가미오자키 삼정목에 설립한 사숙. 도다는 여기서 교육계의 여러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마키구치 회장의 교육지도법을 실천하여 국민학생들에게 인생의 체험을 토대로 그 의미와 목적을 스스로 파악하도록 학습지도를 했다. ▶ 치안유지법 일본에서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국가 체제의 변혁,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하는 자를 처벌하는 법률. 1925년에 제정해 1928년과 1941년에 개정. 당초는 공산주의·무정부주의 단속이 주목적이었지만 점차 확대 해석하여 언론, 출판, 사상, 학문의 자유를 억압하고 사상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1945년 10월 폐지. ▶ 불경죄 황실·신궁·왕릉에 대해 불경의 행위를 함으로써 성립되는 죄. 이것에 대한 위해죄와 더불어 ‘황실에 대한 죄’로서 형법에 규정되어 있었으나 일본국 헌법공포에 의해 1947년에 삭제. 군부정부는 창가교육학회의 당시의 활동이 “국체를 부정하여 신궁, 황실의 존엄을 모독한다”고 하여 치안유지법 위반·불경죄의 명목으로 탄압했다. ▶ 입정안국(立正安國) ‘정(正)을 세워 나라를 안온하게 한다’고 읽는다. 한사람 한사람 인간의 마음속에 정법(正法)을 확립시켜 감으로써 국가, 사회의 번영과 세계 평화를 구축하는 것. 상세한 것은 《신·인간혁명》 제4권 ‘입정안국’의 장을 참조. ▶ 원수폭금지선언 도다 조세이 2대회장이 서거하기 한 해 전인 1957년 9월 8일, 요코하마의 미쓰자와 경기장에서 발표한 원수폭금지에 관한 선언. 세계 민중은 생존의 권리를 갖고 있으며 핵무기를 사용하는 자는 그것을 위협하는 마물(사탄)이라고 단언했다. 그리고 그 사상을 전 세계에 넓힐 것을 청년들에게 ‘제1의 유어’으로서 의탁했다. 세계 광포의 기반을 구축하다 - 세계를 향한 SGI의 여명 이케다 다이사쿠 스승의 구상을 전부 실현해 내는 제자의 행동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 이케다 SGI회장. 세계로 평화의 대화 여정을 시작하고 SGI를 발족, 소설 《인간혁명》과 《신·인간혁명》의 집필, 〈세이쿄신문〉의 창간, 소카학원의 창립, 민주음악협회와 도다국제평화연구소 설치 등, 민중을 위해 생애 끝까지 분투한 니치렌 대성인, 마치구치 회장, 도다 회장의 진심을 이어 온 철저한 보은의 도전이었다. 이제 세계 190나라에서 보다 본격적인 평화와 민중의 시대를 여는 희망의 빛이 더욱 넓혀지고 있다. 소년 이케다 다이사쿠 3대회장(현 명예회장) 이케다 다이사쿠 선생님은 1928년 1월 2일, 현재 도쿄도 오타 구 오모리기타에서 태어났다. 13세 때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 전황이 악화하는 속에 군수공장에서 일했는데 이때부터 결핵에 걸려 생사의 문제로 고뇌하는 청춘 시절이었다. 공습 피해를 받았던 것이나 큰형이 전사하는 등의 체험에서 전쟁의 비참함을 통감. 전쟁이 아시아 민중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는 큰형의 말과 큰형을 잃은 어머니의 슬픔을 통해 전쟁의 악을 실감한다. 전쟁 후는 문학과 철학서를 통해 확실한 인생관을 모색하고 있었다. 도다 회장과 청년 이케다의 만남 그리고 1947년 8월 14일. 처음 창가학회의 좌담회에 참석하고 여기에서 생애 스승이 되는 도다 선생님과 만난다. 도다 선생님의 인격에 감명을 받고 1947년 8월 24일, 창가학회에 입신했다. 19세 때였다. 그 후 다이세이학원(도쿄 후지대학 단기대학부의 전신) 야간부에서 공부하며 도다 선생님의 〈법화경〉 강의 수강생이 되어 불법 연찬을 심화했다. 1949년 1월, 도다 선생님이 경영하는 출판사에 입사하고 그 해 가을부터 소년잡지 편집에 종사했지만, 도다 선생님의 사업이 고경에 처하고 잡지는 폐간되었다. 그러나 도다 선생님의 슬하에서 신용조합의 일에 종사하고 공사 함께 전력으로 지원했다. 청년 리더로서 광포를 추진 1951년 5월, 도다 선생님이 회장에 취임하고 이케다 선생님은 1952년 1월에 가마타 지부의 지부간사가 되어 2월에는 지부에 201세대의 홍교를 달성. 당시 홍교의 벽을 부수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학회 전체의 홍교에 가속도가 붙었다. 1953년 1월에는 남자 제1부대장으로 4월에는 겸임으로 분쿄 지부장 대리로 취임. 더욱이 1954년 3월에는 청년부 실장으로 취임하며 학회 전체의 활동을 기획·추진하는 중책을 맡았다. 1956년, 이케다 선생님은 간사이에서 절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5월에는 오사카 지부가 1만 1111세대의 홍교를 달성했다. 또 그 해 7월 참의원의원 선거에서는 이케다 선생님이 지원활동의 책임자로서 오사카 지방구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달성했다. 당시 일어나고 있던 학회에 대한 부당한 탄압에도 이케다 선생님은 학회원을 지키기 위해서 과감히 싸웠다. 홋카이도의 유바리 탄광이 신교의 자유를 짓밟고 학회원을 탄압하는 움직임에 도 1957년 6월, 바로 현지로 달려가 탄광에 단호히 항의하는 자세를 명확히 밝히고 사건 해결에 분투했다.(유바리 탄광 사건) 그 직후인 7월 3일, 이케다 선생님은 오사카 부경에 부당하게 체포되었다.(오사카 사건) 이것은 같은 해 4월에 열린 참원 오사카 지방구의 보궐선거에서 선거위반자가 나온 것에 관련해서 전혀 결백한 이케다 선생님을 사건의 주모자로 꾸며 사실무근의 죄를 씌웠다. 이 혐의는 1962년 1월, 무죄가 확정되었다. 1958년 도다 선생님 서거 후, 학회 광포추진의 실질적인 중심자가 되어 이케다 선생님은 1960년 5월 3일에 3대회장에 취임한다. 세계 광선유포를 향해 1960년 10월 2일에는 북남미로 출발. 세계 광포의 제일보를 내딛었다. 1961년 1월에는 홍콩, 인도 등 아시아를 처음 방문. 같은 해 10월에도 유럽을 방문하는 등, 세계 광포의 포석을 다져 나갔다. 니치렌 대성인이 밝히신 ‘불법서환’ ‘일염부제 광선유포’가 처음으로 실현되었다. 국내에서는 각지 구석구석까지 돌며 격려하는 한편 1962년부터 시작한 학생부 대표의 〈어의구전〉 강의와 1964년 고등부를 비롯 미래부 각부의 결성 등 차대의 리더 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불법을 기조로 한 평화·문화·교육 운동을 크게 전개. 이케다 선생님의 제안으로 교육부(현 교육본부), 학술부, 예술부가 결성되고, 동양학술연구소(현 동양철학연구소)와 민주음악협회(약칭 민음)가 탄생하고 또 후지미술관·도쿄 후지미술관이 설립되는 등 다채로운 교육·문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1964년에는 공명당이 결성되었고 1970년에는 학회 세대가 750만 세대로 발전했다. 그것과 전후해서 이케다 선생님은 창가학회의 역사와 정신을 올바르게 후세에 남기기 위해 1965년부터 〈세이쿄신문〉에 소설 《인간혁명》(전12권)의 연재를 개시. “한 사람의 인간의 위대한 인간혁명은 이윽고 한 나라의 숙명전환도 이루고 나아가 전 인류의 숙명전환도 가능하게 한다”라는 주제로사람들의 행복과 인류의 평화 건설에 도전한 역대 회장의 투쟁을 그리고 있다. 그 집필 활동은 현재 소설 《신·인간혁명》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마키구치 선생님, 도다 선생님의 교육이념 실현에 몰두하여 도쿄 고다이라 시에 소카중학·고교(1968년 개교), 도쿄 하치오지 시에 소카대학교(1971년 개학), 오사카·가타노 시에 소카여자중학·고교(1973년 개교. 현재는 간사이 소카중학·고교)를 창립하는 등 유치원, 소학교에서 단대·대학교, 대학원까지 ‘창가교육’의 학교를 만들었다. 1968년 9월 8일에는 ‘중일 국교 정상화 제언’을 발표. 1972년, 이케다 선생님은 영국의 세계적인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 박사와 대담. 이때부터 세계의 식자와 대화를 통한 ‘평화·문화·교육의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직 동서냉전, 중소대립의 벽이 두터웠던 1974년부터 다음 해에 걸쳐 중국, 소련(당시), 미국을 잇달아 방문하여 각국 수뇌와 회견, 평화와 우호의 길을 열었다. 그리고 1975년 1월 26일에는 세계 51나라·지역의 대표가 괌에 모여서 창가학회 인터내셔널(SGI)이 발족되고 이케다 선생님이 SGI회장에 취임했다. 국내에서는 1979년 4월, 이케다 선생님이 창가학회 회장에서 물러나 명예회장으로 취임했다. 인간주의의 이념이 개화 1983년부터 1월 26일의 ‘SGI의 날’을 기념하여 이케다 선생님은 매년 ‘평화제언’을 발표. 그 제언은 세계에서 주목받고 있다. 일본 및 해외에서 추진해 온 각종 전시 등 문화·평화 운동도 넓혀져 정착하고 세계에서 높은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케다 선생님과 해외의 식자가 나눈 대담도 넓혀져 지금까지 30수점에 이르는 대담집이 발간되었다. 세계의 대학이나 학술기관에서 강연도 30회 이상이 되었다. 1995년에는 SGI의 인간주의 이념을 명확히 한 ‘SGI헌장’이 제정되고, 1996년에는 도다 기념국제평화연구소가 발족했다. 또한 2001년에는 미국 소카대학 오렌지군 캠퍼스가 개학했다. 현재 이와 같이 불법을 기조로 한 평화·문화·교육 운동이 세계적으로 넓혀지고 있다. 이러한 SGI의 운동에 대해 세계에서는 마키구치 선생님, 도다 선생님, 이케다 선생님의 이름이 붙은 공원이나 거리 등이 각지에서 탄생하고 이케다 선생님에게 20을 넘는 국가훈장, 400을 넘는 명예시민, 180을 넘는 명예박사·명예교수 등의 칭호가 수여되는 등 상찬과 현창이 이어지고 있다. 그 사이 1991년에는 일련정종 종문이 창가학회를 ‘파문’한다는 횡포하기 짝이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나 학회는 종조 대성인에 위배한 종문의 대방법을 끝까지 추궁하여 종문사건에 대승리하고 일본만으로 한하지 않고 세계 각국에서 더욱더 홍교를 진행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 190나라·지역에서 학회원이 즐겁게 니치렌 대성인 불법을 실천하고 있다. 각국의 SGI는 불법의 인간주의 정신을 기조로 성실히 사회 공헌에 힘쓰며 각종 전시 등 지역 사회에 뿌리를 둔 활동을 통해 커다란 신뢰와 상찬을 받고 있다. 창가학회의 실천으로 니치렌 대성인의 불법은 바야흐로 인류 전체를 비추는 희망의 빛이 된 것이다. 청년 이케다의 가마타 투쟁 《신·인간혁명》 3권 ‘평화의 빛’ 중에서 신이치는 그 첫 출진의 회합에서 동지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2월은 니치렌 대성인께서 탄생하신 달이며, 또 2월 11일은 도다 선생님께서 탄생하신 날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신심을 만나게 된 것도 대성인님이 출현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도다 선생님이 광선유포를 위해 혼자 일어서신 덕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각자 공덕을 받아 행복해졌습니다. 그 보은감사의 마음으로 이 2월을 끝까지 싸워 멋진 승리의 결과로 도다 선생님께 보답하고 선생님께서 탄생하신 달을 축하하지 않으시렵니까?” (중략) 야마모토 신이치는 도다 조세이의 2대회장 취임일인 1951년 5월 3일, 도다가 선언한 75만 세대의 달성이라는 36대지표(大指標)를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것은 또한 신이치 자신의 인생 목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학회의 절복상태는 도다의 그 구상을 실현하기에는 정말 완만했다. 규모가 큰 지부에서도 절복은 한 달에 100세대가 한계였다. “이대로는 도다 선생님의 선언이 허망해져 버린다.” (중략) 신이치는 도다의 결의를 허망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절대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마음 깊이 결의하고 있었다. 도다를 대신하여 제자인 자신의 책임으로 75만 세대를 성취해 보이겠다고 결의하자 투지가 솟고 힘이 넘쳤다. 그날 모인 가마타 지부의 동지는 도다 조세이를 생각하는 야마모토 신이치의 지도에서 진정한 제자의 마음을 알았다. (중략) 가마타의 벗은 찬바람에 가슴을 펴고 용약환희하며 활동을 개시했다. 그 결과 가마타 지부는 한 달 동안 201세대라는 미증유의 절복을 달성한 것이다. “하면 된다!” 누구나 대환희 속에서 그것을 실감했다. 가마타 지부의 장거(壯擧)는 촉발의 파동이 되어 전국으로 넓혀졌고 이것이 75만 세대 달성의 돌파구가 되었다. 이 가마타의 신이치의 투쟁이 절복의 비약을 이루게 된 `’전통의 2월’의 연원(淵源)이 되었던 것이다. 정법 정의를 증명하다 ‘오사카 사건’ 《인간혁명》 11권 ‘오사카’ 중에서 무더운 한여름의 저녁 무렵에 차는 오사카성 안에 있는 오사카부 경찰본부로 향했다. 부경에 도착하자 즉시 신이치는 공직선거법위반 용의자로 취조를 받고, 오후 7시가 지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체포되었다. 오후 7시쯤이라고 하면 12년 전인 이날, 도다 조세이가 출옥한 시각과 기이하게 같은 시각이었다. 야마모토 신이치에게는 두 가지 혐의가 있었다. 하나는 후보자 이름을 쓴 담배와 후보자의 명함을 붙인 100엔짜리 지폐를 뿌린 매수 사건이고 또 하나는 호별 방문이다. 경찰 당국은 신이치가 참의원 보궐선거의 최고 책임자였기 때문에 이 매수와 호별 방문이라는 위법행의가 신이치의 지시 아래서 이루어진 것이 틀림없다는 혐의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야마모토 신이치로서 이만큼 어처구니 없는 일은 없다. 담배 사건, 100엔짜리 지폐 사건을 지휘한 주모자인 오무라 마사토라는 도쿄의 지구장을 알고 있긴 했지만 이번 선거의 파견원도 아니었다. 또 신이치는 호별 방문으로 체포되어 그의 지령이라는 것을 시인했다고 하는 교토의 회원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 어딘가에 함정이 있다는 것이 틀림없다. 아니 그렇지 않으면 당국이 가공할 만한 예측과 편견으로 조사를 행하여 거기에 오해와 곡해가 겹쳐 이와 같은 사태가 된 것일까. 그러나 진실은 머지않아 일체의 원죄(억울한 죄)를 밝히게 될 것이라고 신이치는 분개했지만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 ‘머지않아’가 현실로 되기까지 4년 반이라는 세월을 필요로 한 것이었다. - 1962년 1월 25일, 재판은 이 사건의 최종 판결을 내리고 마침내 일체의 진실이 명백하게 밝혀져 야마모토 신이치는 무죄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도다 회장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 4년 반의 고뇌에 가득 찬 재판 투쟁은 약진하는 창가학회의 앞길을 몇 번이나 암운에 휩싸이게 했다. 광선유포의 역사가 수난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근거다. 그러나 학회는 그 수난을 위대한 엔진으로 하여 항상 새로운 비약을 이루고 항상 전진해 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공명당 결성의 의미 《신 인간혁명》 11권 ‘효광’ 중에서 이 저널리스트가 가장 관심이 있는 것은 공명당과 학회의 관계였다. 질문한 그 이면에는 학회가 세계 각국에서 정치적인 지배를 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있는 것 같았다. 저널리스트가 신이치에게 물었다. “그러면 종교단체인 창가학회가 왜 정계에 진출했는지 듣고 싶습니다.” 신이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종교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걸까요?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기 위해서, 세계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서, 더 좋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래 종교가 달성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중략) 창가학회는 이 불법의 철리(哲理)를 인간의 행위인 문화와 교육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 살려, 사람들의 행복과 평화에 기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사상을 근본으로 우리는 정계에도 멤버를 내보내고, 정당을 만들었습니다.” 저널리스트는 다그치듯이 빠르게 물었다. “그렇다면 창가학회는 니치렌 불법과 정치의 일체화, 다시 말해 정교일치(政敎一致)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정치에는 확고한 정치 철학과 정치 이념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부평초 같이 상황에 휩쓸리기만 하는 정치가 되고 맙니다. 그리 되면 민중은 동요하게 되고, 결국 모두 불행해지고 맙니다. 우리는 불법에서 설하는 자비와 생명존엄의 철리를 이념으로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정치실현을 목표로 공명당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를 직접 정치 세계에 도입하려는 것과 다릅니다. 공명당은 국민을 위해 기여할 것을 목표로 한 정당이라, 공명당과 창가학회는 운영면에서도 명확히 선을 긋고 있습니다. 물론 공명당도 창가학회도 평화와 사람들의 행복을 실현한다는 근본 목적은 같습니다. 그러나 정치와 종교는 그 역할이 다릅니다. 종교는 인간의 정신이라는 대지를 경작하는 것입니다. 그 광대한 대지 위에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초목이 정치를 포함하여 넓은 의미의 문화입니다. 우리는 정신이라는 토양을 일구어 정당이라는 종자를 심었습니다. 앞으로 계속 응원하겠지만. 그것이 어떻게 자라서 어떤 꽃을 피우고, 어떤 열매를 맺을지는 초목 자체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평화의 여정, 그 시작 2005년 1·26 기념 제언 중 “당시 일본에서는 소련 사람들에 대한 적대 의식이 격렬해 “왜 종교인이 종교를 부정하는 나라에 가는가”라는 비판도 수없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세계의 약 30%을 차지하던 사회주의국가의 존재를 무시한 채 세계 평화를 전망할 수 없기에 그 상태를 하루속히 타개해야 한다는 것이 불법자(佛法者)로서 제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처음 중국을 방문했을 때, 소련 공습에 대비해 지하에 방공호를 만드는 베이징 사람들의 모습을 직접 본 저는, 3개월 후에 만나 뵌 코시긴 총리에게 “중국은 소련의 태도를 염려하고 있습니다. 소련은 중국을 공격할 의향이 있습니까”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습니다. “소련은 중국을 공격할 의향도, 고립시킬 의향도 없습니다”라는 총리의 답변을 들은 저는 또다시 중국에 가서 그 메시지를 전함과 동시에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를 뵙고 중일 양국이 우호를 깊이 다져 함께 세계를 위해 행동하는 그 중요성에 대해 대화했습니다.” (중략) “그 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대화야말로 평화의 왕도’라는 신념대로 전진했습니다. 저도 분단으로 치닫는 세계를 위해 우정과 신뢰로 맺는 ‘인간외교’와 문화·교육 분야의 폭넓은 ‘민중교류’ 추진에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국가나 이데올로기를 초월해 세계 지도자와 대화를 거듭해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힌두교, 유교를 비롯한 모든 사상적·문화적·종교적 배경을 지닌 석학들과 대화하는 가운데, 21세기 인류에게 요청되는 대화를 성립하는 기반은 역시 ‘결합은 선(善), 분단은 악(惡)’을 신념으로 삼는 ‘인간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이외에 길은 없다는 것이 제 변함없는 결론입니다.” (2005년 세기의 하늘에 인간주의의 깃발 중) 21세기 민중의 행복과 평화를 리드할 SGI 운동 ⑴ 이케다 SGI회장 스피치 중에서 (2000년 4월 25일) ‘21세기 종교’의 조건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종교는 21세기에 어느 곳을 지향해야 하는가. 이것은 세계가 안고 있는 과제다. 국제종교사회학회의 회장을 지낸 세계적인 대학자, 벨기에의 도브라레 박사 는 앞으로 종교에 필요한 조건을 여섯 가지에 걸쳐 명쾌하게 드시고 있다. ‘21세기 종교’에 상당하는지, 힘이 있는지를 엄격하게 검토한 결과, 박사는 SGI는 여섯 가지 조건을 모두 만족하고 있다고 논하셨다. 1. 인간을 결합 - 첫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동체에 기반을 두고 그것을 재활성화하여 인간끼리 결합을 성취할 수 있는 종교’인지 아닌지이다. 박사는 사람과 사람이 서로 격려하고 결합하는 SGI의 좌담회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공동체’라고 평가하셨다. 2. 약동하는 힘을 부여한다 - 둘째 조건은 ‘살아가는 활력을 주고 약동하는 힘을 낳는 것’인지 아닌지이다. 박사는 나날의 근행과 학회 활동이 ‘위대한 활력의 원천’이라고 보고 계신다. 확실히 SGI는 모두 다 정말로 활기차다. 반대로 닛켄종은 활력이 전혀 없는 ‘장례식 불교(염불 등을 외며 장례를 치르고 돈을 받는 불교)’로 타락하고 말았다. 3. 사회에 공헌 - 그리고 셋째 조건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개인에게만 그치지 않고 사회가 응하도록 적극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 점도 박사는 “창가학회의 폭넓은 사회 활동 특히 교육, 문화, 평화 운동은 독특한 사회적 가치를 낳는 훌륭한 것이다”라며 극찬하시고 있다. 특히 박사는, SGI가 종문과 결별한 후부터 한층 더 눈부신 사회 공헌을 하고 있다며 주목하고 계신다. 박사는 그 예로, 간사이 대지진 때 펼친 구조 활동, 브라질을 비롯하여 세계에서 창가교육을 추진하는 일 등을 들고 계신다. <그 밖에도 박사는 SGI가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으로 유엔 지원, 아마존의 환경 보호, 도다 기념국제평화연구소와 보스턴 21세기 센터 설립 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또 사회 활동 가운데 하나인 일본 내의 정치활동에 대한 것도 말씀하셨다. “(정교분리〈政敎分離〉의) ‘분리’는 ‘관계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종교단체가 그 신조를 바탕으로 ‘사회는 지금 이대로 괜찮은가’라고 문제를 제기하여 정치에 영향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민주주의 사회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신조, 가치관을 정치에 반영할 수 있는 사회를 말합니다. 산업계나 노동단체 등은 자신들의 의견, 요망을 정치에 반영하는 일이 허용되고 종교단체만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는 논점입니다”라고.> 4. 개인보다 사회 - 넷째 조건이란 ‘개인주의를 규제하고 사회적 책임감을 강조하는 것’인지 아닌지이다. 이 점에서도 SGI는 훌륭하게 그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박사는 고찰하셨다. 이와 정반대로 닛켄종은 자신의 일밖에 생각하지 않고 사회적 책임감 등은 전혀 없다. 5. 관용 정신 - 다섯째 조건은 ‘관용을 베푸는 종교’인지 아닌지이다. 이 점에서, 종문이 관용적이지 못한 까닭에 이전의 SGI가 고통을 당해 온 것도 박사는 깊이 이해하시고 학회가 그 권위의 쇠사슬을 끊은 데 대해 기뻐하셨다. 본산(本山)에 등산한 학회원 수는 7천만 명. 공양도 막대하다. 끝까지 온 힘을 다한 학회원을 아무 정당한 이유도 없이 잘라버린 종문은 이 얼마나 극악무도한가. 아무튼 SGI는 어디까지나 그 나라의 문화와 상식을 존중한다. ‘좋은 시민’ ‘좋은 국민’으로 모든 사람들과 협력하면서 성실하게 신뢰와 우정을 확대한다. 또 절복을 ‘배타적’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깊이 파고 들어가 보면 상대방과 자신의 차이를 뛰어넘어 상대방 말에 귀를 기울여 비록 상대가 반대하고 욕을 퍼부어도 폭력을 쓰지 않고 어디까지나 성실한 대화로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 최고로 자비로운 행위이고 이보다 더한 관용은 없다. 관용은 타협과 다르다. 진실을 끝까지 말하는 신념 없이 참된 ‘관용 정신’은 있을 수 없다. 6. 세계 공동체를 향해 - 박사가 마지막 여섯째 조건으로 들고 있는 것은 ‘자신들의 사회 발전만 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 규모의 세계 공동체를 목표로 하는’ 종교인지 아닌지이다. 박사는 이 점에서도 “학회는 평화 운동의 선구적인 실적을 보이고 있고 상당히 평가할 만하다”라고 말씀하셨다. 이상, 박사의 분석에 따르면 지금 SGI는 ‘21세기 종교’의 모든 조건에 걸맞은 ‘이상적인 종교’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2) 종교학자 윌슨 박사가 말하는 사회에 살아 있는 종교운동으로서 창가학회 특징 10 ① 일반 시민에 의한 재가단체다. ② 일상생활에 뿌리를 둔 실천적인 운동이다. ③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폭넓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④ 적극적인 인생을 가르치는 현실 긍정 종교다. ⑤ 현실생활에서 가치창조에 역점을 두고 있다. ⑥ 승려가 중심인 기성불교의 제약에서 해방되어 있다. ⑦ 지역의 조직이 사람들과 상부상조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⑧ 사회에 적극적으로 열려 문화적인 가치창조를 하고 있다. ⑨ 행동주의 단체다. ⑩ (과거 지향적으로) 죄를 후회하는 종교가 아니라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다. 하나하나 과녁을 적중한 지적입니다. 21세기 세계 종교로 니치렌 대성인 불법의 진가를 본격적으로 발휘할 시대가 되었습니다. (미국SGI 보스턴회관에서 강연) (3) 역사학자 토인비 박사와 이케다 회장의 《21세기를 여는 대화》 중에서 지금 구하고 있는 ‘세계 종교’란 어떠한 것인가 “미래의 종교는 그러나 반드시 전혀 새로운 종교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래된 종교의 하나가 새롭게 변형된 것일 경우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단, 그런 오래된 종교의 하나가 인류의 새로운 요구에 응하는 형태로 부흥했다고 해도 그것은 아마 이미 거의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발본적(拔本的)으로 변형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현대에서 인간 생활의 여러 조건이 이미 발본적으로 바뀌어 왔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문명을 낳고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미래의 종교라는 것은 인류의 생존을 지금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는 제악(諸惡)과 대결하여 이것들을 극복할 힘을 인류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안 되겠지요”라고. (4) ‘세계 종교의 조건과 과제’에 대해 미나미야마(南山) 대학의 얀 반 브라프트 교수 1994년 3월 22일, 동양철학연구소 주최의 학술대회 특별강연 “SGI는 불교에 뿌리를 두지만, 보다 보편적인 세계 종교를 지향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럼 미래의 세계 종교의 본연의 자세란 어떤 것입니까. 내가 생각하는 첫번째 모습이란 재가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교육의 보급에 따라 현재, 누구나 종교적 전문가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믿는 대상과 자신의 사이에 매개자를 둘 필요가 없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 종교의 조건을 들면 ‘인간 사회에 봉사하는 종교’ ‘남녀 평등’ ‘민중의 현세이익적(現世利益的)인 기대에 대응할 수 있는 종교’ ‘사회적 힘을 지닌 종교이며 세계 평화에 공헌할 수 있는 일대 세력이 될 수 있는 것’ ‘인간주의로 관철된 종교’ 등이라고 생각합니다. “SGI가 이러한 세계 종교로서 그 조건과 과제에 응하여 또 해답을 이끌어 내면서 금후 더한층 발전을 계속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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