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상식일 경우, 수상자의 수상 소감이 문제다. 수상자가 소감을 담담하게 말하면 좋은데, 대게는 저고리 안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 꺼내어, 미리 써둔 것을 읽는다. 말하지 않고 읽는다. 말하는 것과 읽는 것은 다르다. 왜 읽겠는가? 자신의 발언이 공식화하는 것을 의식하거나, 자신의 수상소감이 어디엔가 게재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그런 수상 소감은 수상식장에서 아무 울림도 지어내지 못한다. 무슨 까닭인가? 관념어로 꽉 짜인, 줄줄이 복문장(複文章)이다. 듣기에 너무 어려운 그 소감은 ‘읽는 말’ 이다. ‘눈의 말’ 이다. 글말이다. 수상식장의 하객들이 기다리는 것은 ‘듣는 말’ 이다. 입말인 것이다. 그러니까 수상자는 듣는 말, 귀의 말, 입의 말을 기다리는 청중에게 읽는 말, 눈의 말, 글의 말을 들려주고는 총총히 연단을 떠나버리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중요한 기본기가 무엇인가? 그 중 하나가 바로 ‘발화(發話)의 상황’ 에 대한 정교한 ‘대응 감각’ 이다. 내가 여기 예시한 수상자는 자기 생각을 언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발화의 상황에 제대로 ‘대응’ 하지 못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예에 속한다.
인터넷에 오르는 글들이 우리말을 파괴한다고 걱정들이 태산이다. 그런 측면이 없지 않다. 그러나 나는 긍정적인 측면을 주목한다. 많은 사람들이 엄숙주의의 굴레를 벗고 청산유수로 글을 토해낸다. 화가가 쓴 글, 가수가 쓴 글이 인문학자가 쓴 글보다 부드러우면서도 정교한 경우를 자주 본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가? 나는 문어가 구어화하고 있는 것을 주목한다. ‘이메일’ 을, 많은 사람들은 쓴다는 기분으로 쓰지 않고 말한다는 기분으로 쓴다. 그래서 쓴다는 강박관념, 곧 생각의 흘게가 풀리면서 말이 술술 나오는 것 같다. 우리말은, 우리 문학은 그 쪽으로 가파른 기울기를 보일 것 같다. 김화영 교수가 한 일간지에 쓴, <시가 있는 아침>의 짧은 글들을 기억하시는지. 이 근엄한 문학평론가가 쓴, 내가 소설에다 실험하고 싶어하는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기억하시는지.
“야, 요거 참 삼삼한 시네. 그런데 왜 삼삼하냐고 누가 물으면 뺨 맞은 듯 깜빡, 몰라져버리네.”
“여기까지는 어떻게 시인의 흉내를 내겠는데……야, 단수 한번 높구나.”
“그러니까 무슨 분위기 좋은 찻집 같은 데 남녀가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단 말이지……농담 따먹기만 하고 있단 말이지……그만 앞에 놓인 찻잔을 엎질렀단 말이지……그런데 정작 쏟아진 것은 이쪽 마음이다 이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