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심경(直指心經)해설 27 서천의 조사(西天祖師)
제14조 용수 존자(龍樹尊者) <무생의 도리를 알다>
第十四祖 龍樹가 於毗羅尊者에 得法하시고 後至南印度하시니 彼國之人은 多信福業이라 聞尊者爲說妙法하고 互相謂曰人有福業이 世間第一이어늘 徒言佛性하니 誰能見之오 尊者曰汝欲見佛性이면 先須除我慢이니라 彼人曰佛性이 大小아 尊者曰非大非小며 非廣非狹이며 無福無報며 不死不生이니라 彼聞勝理하고 悉迴初心하니라 尊者가 復於座上에 現自在身하사대 如滿月輪일새니 彼衆이 唯聞法音하고 不見師相이라 彼衆中에 有一長者子하니 名迦那提波라 謂衆曰此是尊者가 現佛性體相하사 以示我等이니라 何以知之오 盖以無相三昧는 形如滿月이오 佛性之義는 廓然虛明이니라 言訖에 輪相卽隱하고 復居本座하사 而說偈言하사대 身現月輪相은 以表諸佛體요 說法無其形은 用辨非聲色이니라 彼衆이 聞偈하고 頓悟無生하고 咸願出家하야 以求解脫이어늘 尊者가 卽爲剃髮授具하사 皆歸三寶하시고 告迦那提波曰如來妙法을 今當付汝하노니 聽吾偈하라 曰 爲明隱現法하야 方說解脫理라 於法心不證하면 無瞋亦無喜니라 付法已하시고 入月輪三昧하사 凝然禪寂하시니라
제14조 용수 존자가 가비마라 존자에게 법을 얻은 뒤에 남인도에 이르니 그 나라의 사람들은 복업(福業)을 많이 믿고 있었다. 그러다가 용수 존자의 미묘한 이치를 설하는 것을 듣고는 모두들 말하기를,
“사람에게 복업이 있는 것이 세상에서는 제일인데
한갓 불성(佛性)을 말하니 누가 능히 그것을 보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용수 존자가 말하기를,
“그대들이 불성을 보고자 한다면 먼저 반드시 아만(我慢)을 제거해야 한다.”
그들이 말하기를,
“불성이 큰 것인가. 작은 것인가?”
존자가 말하기를,
“불성은 큰 것도 아니며 작은 것도 아니며
넓은 것도 아니며 좁은 것도 아니며
복도 아니며 과보도 아니며
죽는 것도 아니며 태어나는 것도 아니다.” 라고 하였다.
그들이 수승한 이치를 듣고는 모두 처음의 마음을 돌이키게 되었다.
용수 존자가 다시 앉은 자리에서 자유자재한 몸을 나타내는데 마치 둥근 보름달과 같았다. 그들은 오직 법을 설하는 소리만 듣고 용수 존자의 모습은 보지 못하였는데 그 대중들 가운데서 한 장자의 아들이 있었다. 이름은 가나제바였다.
그가 대중들에게 이르기를,
“여기 이 존자가 불성의 체를 나타내어서 우리들에게 보인 것이다. 무엇으로써 아는가 하면 대개 형상이 없는 삼매란 그 형상이 둥근 달과 같고 불성의 뜻은 툭 터져서 비고 밝으니라.” 라고 하였다.
말을 마치니 둥근 모습은 곧 사라지고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앉아서
게송을 설해 말씀하였다.
“몸이 달의 둥근 모습을 나타내는 것은
모든 부처님의 본체를 표현한 것이요,
설법을 하되 그 형상이 없는 것은
소리도 색깔도 아님을 밝힌 것이니라.”
그 대중들이 게송을 듣고는 생사가 없는 이치를 몰록 깨닫고 모두 출가하여 해탈을 구하기를 원하므로 존자가 곧 머리를 깎고 구족계를 주어 삼보에 귀의하게 하였다.
그리고 가나제바에게 말하기를,
“여래의 미묘한 법을 지금 마땅히 그대에게 부촉하노니 나의 게송을 들어라.
“숨고 나타나는 이치를 밝히고자하여
비로소 해탈의 이치를 설하노라.
법에 대하여 마음이 증명하지 아니하면
성냄도 없고 기쁨도 없느니라.”
법을 부촉하여 주고 나서 월륜삼매에 들어가 고요히 선정에 들었다.
해설 ; 용수(龍樹150?-250?)보살은 남인도 출생으로서 북인도로 가서 당시 인도의 모든 사상을 공부하였다. 다시 초기 대승불교사상을 연구하고 그 기초를 확립하여 8종(八宗)의 조사(祖師)로 불리는 위대한 성자다.
일체의 것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공의 입장에서 보는 중도적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후세에 중관파(中觀派)라고도 불렸던 분이다. 주요 저서로는<중론(中論)과 회쟁론(廻諍論), 광파론(廣破論),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 공칠십론(空七十論), 대지도론(大智度論)(100권), 십이문론(十二門論)> 등이 있다.
용수 존자가 교화를 펴려고 남인도에 갔을 때 그 곳 사람들은 생사를 해탈하는 불생불멸의 깊은 이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복업(福業)에 대한 것만 믿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보통 사람들의 관심사는 오직 복업에 대한 것뿐이다.
불교의 진리가 아무리 참되고 바르고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것에는 관심이 없고 다만 눈앞의 이익과 손해에만 뜻이 있고 복이 되고 죄가 되는 일에만 마음이 있다면 생사를 해탈하는 불생불멸의 높은 진리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다.
그래서 현금 한국불교의 현상을 살펴보더라도 한편에서는 언필칭 불생불멸의 생사해탈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세속적으로 복이 되고 이익이 되는 길을 찾아 북새통을 이루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서부터 세속의 길과 열반의 길이 나눠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용수 존자는 이 두 가지의 길에서 불교가 불교로서의 가치관에 입각한 위대한 길을 가르치는 모습을 보였다. 만약 세속의 가치관대로 복업의 이치만을 설한다면 그것은 이미 불교가 아니다. 불교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의미를 잃게 된다.
법문을 듣는 대중들이 불성의 이치를 이해를 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생사해탈의 길인 불성의 이치를 설법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에 <직지심경>을 편찬하신 백운화상은 이 사실을 기록하여 우리들에게 들려준 것이다. 불교를 운위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대목에서 진정한 불교관을 확립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불교로써 사람들에게 전법하고 교화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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