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완의 '서장'통한 선공부] <25> 서장 (書狀)
왕내한에 대한 답서 (1)
한 생각 내려놓는 체험 ‘공부 가속도’
"다만 어떤 스님이 조주 스님에게 묻되 '강아지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다(無).'라고 한 화두를 살피시되, 쓸데 없이 사량하는 마음을 붙잡아 무자(無字) 위에 돌려 놓고 시험 삼아 한 번 사량해 보십시오. 문득 사량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이 한 생각을 부술 수 있다면 여기가 곧 삼세(三世)를 깨닫는 곳입니다. 깨달았을 때에는 적당히 배치할 수도 없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도 없고 끌어들여 입증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은 그 곳은 배치함도 허용치 않으며 헤아림도 허용치 않으며 입증함도 허용치 않기 때문입니다.
가령 끌어들여 입증할 수 있고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고 적당히 배치할 수 있다면 이것은 깨달은 것과는 상관 없는 일입니다. 다만 놓아서 탕탕히 흐르게 할 뿐, 선과 악을 모두 사량하지 말며 뜻에도 집착하지 말며 생각을 잊음에도 집착하지 마십시오. 뜻에 집착하면 생각 따라 이리저리 흘러다닐 것이고, 생각 잊음에 집착하면 깜깜하고 멍청한 것에 빠지게 됩니다."
선 공부에서 가장 큰 고비는 한 생각 내려놓는 체험이다. 이 체험을 십우도(十牛圖)에서 보면 '소를 보다'[見牛] 혹은 '소를 얻다'[得牛]에 해당할 것인데, 이제까지 안개속에서 더듬어 찾다가 문득 소를 발견하여 그 고삐를 손에 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체험은 공부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공부에 대한 갈증에만 의지하여 이리 저리 헤매며 찾아 왔던 암중모색(暗中摸索)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자, 동시에 이제 공부에 힘이 붙고 재미를 느끼며 더욱 깊고 세밀하게 나아가는 본격 공부의 시작이 된다.
그러므로 한 생각 내려놓는 체험이야말로 마음 공부에서는 결정적 관문이다. 이 관문만 통과하면 마음 공부는 길도 없이 헤매다가 길을 찾은 셈인 것이다. 그러나 이 관문은 결코 쉽게 뚫리지 않는다. 수많은 공부인들이 이 관문에서 좌절하여 길찾기를 아예 포기하거나 아니면 쉽게 찾아지는 잘못된 길에 만족하여 옆길로 빠져 버리고 만다.
이 관문이 그렇게 어려운 이유는 이것이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눈[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보통 사람이 가진 눈은 늘 '눈 앞에' 나타나는 '모양 있는' 것을 보도록 길들여져 왔다. 그러나 마음을 보려면 '눈 앞에' 나타나는 '모양 있는' 것이 아닌, '모양 없는 눈 그 자체'를 보는 눈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범부가 무엇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의식 속에서 생각으로 헤아려 이름과 관념[名相]으로 알아차리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이름과 관념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익숙해 있는 이름과 관념이 마음을 파악하는 데에는 가장 큰 장애물이다. 이름과 관념에 물들고 길들어져 있는 범부는 이름과 관념을 버리고 자기 존재를 파악하라는 요구 앞에서 그만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몰라 헤매고 좌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것은 정말 가련한 일이다. 눈은 스스로를 '앞에 나타나는 모양'으로 보지는 못하지만, '앞에 나타나는 모양'을 봄으로써 스스로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즉 눈은 쓰임[作用]을 통해서 그 존재를 드러낸다. 화두를 살핀다[看話]는 것은 바로 눈(=마음)의 쓰임을 말한다. 우리는 화두를 살핌으로써 마음의 존재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쓰지 않을 때에는 어떤가? 눈을 감고 있다고 해서 눈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마음을 쓰지 않아서 의식이 없다고 해서 마음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寤寐一如]
따라서 마음을 찾는 공부인이 명심해야 할 것은, 마음은 그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을 뿐, 이름과 관념으로 파악하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의식이 있을 때에는 순수한 작용으로 그 존재를 드러내고, 의식이 없으면 그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바로 마음이다. 부디 이름과 관념으로 파악하려 들지 말라. 바로 지금 이렇게 활발히 살아 움직임에서 마음과 하나되어 존재하라.
김태완/ 부산대 강사.철학
[출처 : 부다피아]
☞'서장통한 선공부' 목차 바로가기☜
첫댓글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