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공항 테러범
오클랜드발 한국항공 비행기 안. 민재가 국내 신문을 보다 그만 잠이 들었다.
옆에 앉아 민재 어깨에 기댄 채 먼저 잠이 든 우야꼬가 깨어났다. 화들짝 놀랐다. 민재 어깨에서 머리를 뗐다.
우야꼬가 민재 앞에 펼쳐진 한국 신문에 시선을 집중했다.
‘우~아! 내 예상이 맞아떨어졌네. 이 일로 민재가 대통령상을 받고도 남지. 어디 해외동포 문학상에 그치겠어?’
이번에는 민재 머리가 우야꼬 왼쪽 어깨로 기울어졌다. 잘도 자네. 우야꼬가 민재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우야꼬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으며 생각했다.
‘민재라 했지. 사돈 남 말한다더니. 딱 이런 때를 두고 하는 말 아닌가? 민재, 이 친구도 생각보다 참 순진해.
능력도 있으면서도 어딘지 귀여운 악동 기질이 있어. 친구하면 잘 통하겠는데. 나이도 같고.‘
그때, 민재가 하품을 하며 눈을 떴다. 우야꼬가 깜짝 놀라며 모른 체 그냥 눈을 감았다.
‘어라? 내가 언제 우야꼬 어깨에 머리를 기댔지? 아까는 분명히 우야꼬가 내 어깨에 기댄 채 잠이 들었는데?’
우야꼬가 입에 손을 대며 눈을 떴다. 자신의 어깨위로 머리를 기댄 민재를 의식한 듯 속삭였다.
“웬 왕자님이 공주님 침실에 함께 있나? 했네. 꿈이 아니었어. 현실이네.”
“우야꼬 상. 미안해요. 내가 그만 머리를 그 쪽에 기대고 잠깐 졸았어요.”
“민재씨. 괜찮아요. 아니지. 우리 서로 동갑인데. 존대 말 할 게 있어? 지금부터 말 놓지.”
“우야꼬 상. 그래도 괜찮아?”
“그럼. 민재 씨나 우야꼬 상에서 끝 자를 떼자고. 서로 통하는 마당에.”
민재가 주춤했다. 서로 통하는 마당에?
“응. 투명. 소통. 신속. 복지를 여기에도 적용시키자고. 격식은 서로를 경계하고 소통이 안 될 때 필요한 거니까.”
“좋아. 콜! 우야꼬 생각보다 화끈하네.”
오래된 친구처럼 우야꼬가 민재 왼쪽 팔을 잡았다. 민재가 싱긋 웃었다.
“우야꼬. 친구하자더니. 애인하자는 건가. 진도가 참 빠르네.”
“민재. 우리 지금 시속 몇 키로로 나는지 알아? 국제선 여객기는 평균 시속 800키로야.
일반 차량 평균 운행 속도인 시속 50키로에 비하면 16배나 빨라. 그래도 진도가 빠른 거야?“
“뭐야? 우야꼬는 어떻게 그런 궤변을 이런 데 적용시킬 발상을 하지?”
“나. 우야꼬는 비즈니스 영업 개념으로 이야기 한 거야. 틀렸어?”
민재가 싱긋 웃었다. 우야꼬가 재밌다. 이야기 거리가 참 많겠다. 우야꼬가 말했다.
“민재. 일본 히로시마에 가 본 적 있어?”
“응. 두 번. 히로시마 근처 미야지마가 인상적이었어. 사슴 노니는 평화의 섬이. 온천도. 터널도. 대나무도.”
“오라. 우리 민재. 히로시마 속속들이 잘도 아네. 문학청년답게.”
“일본 근교는 어딘지 모르게 뉴질랜드와 비슷한 정서던데. 난 도쿄는 안 가봤어. 별 생각 없어.
위정자들의 정치 오염 지역 같아서. 권모술수가 난무해서.“
“그건 서울도 마찬가지지. 나도 한국 근교 사찰 지역 같은 곳이 좋던데. 이번 에 한국 방문하면 서울 말고 어딜 갈 거야?”
“서울서 시상식 행사 끝나면 내 고향, 강원도 갔다 오려고. 원주 박경리 문학관도 가보고. 옹심이 국수도 먹고.
더 시간나면 치악산에 한 번 올라가 보려고.“
우야꼬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한국항공은 두 차례나 더 기내식을 대령했다.
무박 2일의 비행기 속 데이트라. 인천에 비행기가 도착할 때는 서로 이름 뒤에 너 라는 말도 서슴없이 붙였다.
“민재야. 너 덕분에 이번 여행 참 재밌었어. 어디서 또 만나겠지. 무역에 필요한 것 있으면 연락해.”
“우야꼬. 그래. 네 말이 맞아. 나도 즐거웠거든. 사업을 궤도에 올려서 비행기 순항처럼 되면.
네 고향. 히로시마. 미야지마에 한 번 가 보고 싶어. 거기서 한 달 쯤 머물며 노벨문학상 소설 작품 탈고하려고.“
“아멘. 그때. 내가 옆에서 시중들어 줄게. 너무 늦으면 안 돼. 나나 너나 다리 성하고 튼튼할 때.”
“당연하지. 가슴이 뛸 때. 밥 맛 좋을 때. 일 끝나면 잠에 푹 떨어질 때. 우야꼬 너한테 이번에 많이 배웠어.”
“초능력 발휘? 그거 아무 때나 쓰면 안 돼. 꼭 필요한 때만 사용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먼저 스캔하고.
마지막으로 상대 눈에 집중하는 거야. 그럼 다 읽혀져. 욕심 섞인 사적 감정이 들어가면 안 보여.“
“알았어. 우야꼬.”
“민재야. 우리 한번 안아보자.”
우야꼬가 캐리어를 끄는 민재 손을 치우고, 자신의 캐리어도 세워둔 채. 민재를 꼭 안았다.
185cm나 되는 큰 키. 민재 턱 아래에 우야꼬의 머리카락이 닿았다. 민재도 우야꼬를 꽉 껴안아 주었다.
‘헤어질 것을 전제로 한 사랑이야 말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다.’
플로베르가 했던 말인가. 정확치는 않지만, 민재 뇌리에 저장되어 있던 말이 툭 튀어나왔다.
서로 갈 길로 헤어졌다. 인천 국제공항 입국장이 요란스러웠다. 참 많이도 변했다.
민재가 입국장을 빠져나와서 한참 서 있었다. 반갑게 맞아줄 사람이 없는 걸 알면서도.
두루두루 둘러봤다. 바쁠 것도 없는 시간. 손도 씻을 겸 화장실로 들어섰다.
그때였다. 웬 이상한 냄새? 오클랜드 택시 손님 가운데 주말 밤중에 가끔 풍기는 냄새였다.
오른 쪽 손에 흰 장갑을 낀 사내가 맨 끝 화장실 칸에서 나왔다. 머리에는 까만 야구 모자를 쓴 채.
입에는 검은 마스크를 썼고. 왼쪽 손에 튼튼해 보이는 골판지 박스를 들고 있었다. 까만 썬글라스까지 쓴 터라.
얼굴 표정은 읽을 수가 없었다. 박스 안에서 뭔가 톡톡 튀기는 소리가 났다. 무슨 소리지?
사내가 두리번거렸다. 시간은 저녁 무렵이었다. 민재가 재빨리 머리 끝 부터 발끝까지 스캔했다.
사내 얼굴에 집중했다. 검은 썬그라스와 마스크속을 투시했다. 순간, 민재가 기겁할 뻔 했다. 사내가 교활한 미소를 지었다.
환각제를 먹은 듯 입술이 떨렸다. 마약하는 이들이 하는 짓을 그대로 하는 성 싶었다.
무언가 거사를 저지르려는 태도였다. 사내가 민재를 살짝 의식한 듯 했다. 민재가 얼른 세면대 수도꼭지를 틀었다.
“쏴!”
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사내가 안심한 듯 한번 두리번거리다 화장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뚜벅 뚜벅!”
민재가 조심스레 사내를 따라 나섰다. 마침 우야꼬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민재가 얼른 캐리어를 우야꼬 손에 넘겼다. 집게손가락을 들어 입에 세로로 댔다.
화들짝 놀란 우야꼬가 고개를 끄덕이며 민재 캐리어를 낚아챘다. 사내가 출국장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연신 좌우로 머리를 움직이며 뭔가를 방어하려는 태도였다.
“투두둑!”
골판지 박스에서 튀는 소리가 높아져갔다. 사내가 그 박스를 손님들이 기다리는 대기 장소 의자 뒤에 살짝 밀었다.
이어서 품에서 병 하나를 꺼냈다. 그대로 따서 박스에 뿌리려 했다. 순간, 민재가 사내의 손을 발차기로 날렸다.
“으악!”
사내가 악을 쓰면 고꾸라졌다. 사내 손에 들린 시너(thinner) 병이 깨졌다. 사방으로 퍼진 시너에서 독한 특유의 기름 냄새가 퍼졌다.
이어서 민재가 골판지 박스를 곧바로 찢었다. 잘 안 찢어졌다. 안에서는 톡톡 거리는 소리가 더 높아져 갔다.
옆에서 기다리는 손님 스틱을 가져다 골판지 박스를 콱콱 찔러 구멍을 냈다. 마침 사내가 일어나 칼로 민재 등을 향해 가격했다.
민재 등이 약간 스쳤다. 민재가 순간, 빠른 뒷발차기 신공을 펼쳤다.
뒷발차기에 사내가 완전히 나가 떨어졌다. 민재가 떨어진 사내 칼을 집어 들었다.
그 칼로 골판지 박스를 북북 찢었다. 세상에. 안에 든 심지 끝에 불이 번져 오고 있었다. 이제 5cm 면 뇌관에 붙을 찰나였다.
민재가 발로 심지 끝을 눌러 확 비볐다. 불씨를 완전히 해체시켰다.
“삐웅 삐웅!”
비상 경고음이 출국장에 울려 퍼졌다. 순시 중이던 공항 순찰대가 들이 닥쳤다. 도망가려던 사내를 체포했다.
폭발물 처리 팀도 곧바로 도착했다. 민재는 그대로 앰뷸런스에 실려 나갔다. 우야꼬도 보호자로 따라갔다.
저녁 뉴스 TV화면에 공항 테러 현장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출국장 CCTV로 사건 진행 상황이 생생하게 나왔다.
“인천 국제공항 입국장에서 대형 테러 폭발 사고가 발생할 뻔 했습니다. 폭발 몇 초전에 사건을 막았습니다.
테러 폭발 사고를 신속히 대처해 막은 이가 있습니다. 뉴질랜드 교포 강민재씨입니다.
강민재씨는 뉴질랜드에서 해외동포 문학상 수상을 받으러 고국에 귀국 중이었습니다.
수상한 범인의 행동을 뒤쫓아 오다가 결정적 순간에 범인과 폭발물 박스를 덮친 겁니다.
강민재씨는 범인이 휘두른 칼로 등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불행 중 다행히 생명이 위독한 상태는 아닙니다.
강민재씨는 지난해 뉴질랜드 수상으로부터 의인상, 용감한 시민상을 받은 청년입니다.
3일 전. 뉴질랜드 헤럴드 타임스에 한국인 개고기 편파 보도에 항의하고, 전면 사과 기사를 내게 한 장본인입니다.
범인은 필리핀 불법 노동자 차킨 터리입니다. 3년 전 한국에 들어와 불법 체류한 자입니다.
지하철 공사 터널 뚫는 보조 일을 하다, 오른 손가락을 잃기도 한 자입니다. 회사에서 해고되고 한국에 원한 감정이 많은 자입니다.
터널 뚫을 때, 폭파 작업에 썼던 폭발물과 장비들을 몰래 챙겨뒀다가 이번 사건을 일으킨 겁니다.
불법 체류자라, 본국 필리핀에도 못 가게 되자. 국제선 입국장을 전전하다 결국 사건을 감행한 겁니다.
불법 체류자와 산업 재해 피해자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때입니다.“
민재가 입원한 응급실 병동에 많은 취재 기자들이 몰려왔다. 해외동포 재단 문학상 시상 관계자도 달려왔다.
등에 찔린 상처로 양복이 피로 물든 상태였다. 상처가 깊지 않아 응급치료만 받고, 민재가 퇴원을 원했다.
병원 측에서 치료 협조 서류를 한 장 써줬다. 어디서라도 치료받을 수 있는 의사 병원장 사인 서류였다.
해외동포 문학상 시상 관계자가 미리 예약한 르네상스 호텔로 안내했다. 우야꼬도 걱정이 돼 따라갔다.
시상식은 내일 오전 9시. 해외동포 문학상 시상과 해외동포 한국 공로자를 위한 행사가 예정돼 있었다.
“민재야. 내일 이 옷 입고 어떻게 시상식에 나가겠어. 몸이 괜찮으면 나가서 양복하나 사야지.”
“우야꼬. 고마워. 네가 이럴 때 있어줘서 한결 위안이 돼.”
“나가자. 민재야. 요 근처 백화점 있던데. 문 닫기 전에 가보자.”
우야꼬가 앞서고 민재가 뒤 따랐다. 서울의 밤 공기가 남달랐다. 저녁인데도 휘황찬란했다.
백화점 문 닫기 30분전. 서둘렀다. 남성용 의류 매장에 들렀다. 우야꼬가 골라준 양복을 입어보았다.
“우리 민재. 완전히 멋진 젠틀맨이네. 어때?”
“좋아. 우야꼬 눈썰미가 보통이 아닌데.”
“그래. 이걸로 하자.”
여 종업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두 분은 찰떡궁합 애인인가 봐요. 아내 되실 분은 천상 여성처럼 곱고. 남편 되실 분은 신뢰 있는 능력자 같아요.”
“호호.”
“하하.”
우야꼬가 카드로 결제했다. 민재가 여 종업원에게 지폐 한 장을 건넸다.
“정말 감사합니다. 두 분. 행복하세요. 똑 닮은 아들 딸 낳아서요.”
여 종업원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우야꼬가 민재 옆구리를 쿡 찔렀다.
“민재야. 아까 오다 보니. 포장마차 집 있더라. 우리 한 잔 할까?”
“그래. 어제 오늘 내일 우리 날이다. 가자. 마시자. 우야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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